소설리스트

전투기 버리고 기간트 탑니다-43화 (43/169)

43화 흑마법사

#1

스스스스스스스스스스...

나는 한밤중의 산속을 달리고 있었다.

‘바람의 인도(B)’와 ‘매 토템(C)’ 스킬의 버프로 민첩함을 한계까지 올린 터라 몸은 한없이 가벼웠고.

그 덕에 제법 빠른 속도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흘러나오는 소음은 극히 미세했다.

이미 인간을 위해 만들어진 길에서는 벗어난 지 오래.

베헤르디아 대수림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꽤 거대한 나무들이 빼곡하게 우거진 이곳은 ‘엘든홀’이라는 이름의 산으로.

북부의 ‘로나테’를 제외하면 루페른 왕국에서 가장 높은 산이었다.

잔뜩 낀 구름 탓에 달빛 한점 내비치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

나는 ‘야간시(C)’ 스킬을 이용해 앞을 가로막는 장애물을 피해가며 목표를 찾아 무작정 달리고 있었다.

목표는 ‘엘든홀의 광인’이라는 이명을 지닌 흑마법사였다.

용병 길드에서 전해준 정보에 따르면 20여 년 전 이미 5서클에 이른 마법사로, 현재는 6서클의 경지에 올라있을 확률이 매우 높다고 했다.

의뢰인은 카일 헤이스턴 자작.

그는 영지가 왕국 중서부 곡창지대에 위치한 덕에 수 대에 걸쳐 엄청난 부를 축적한 귀족이었는데.

왕국 동부의 외갓집을 방문했던 그의 딸 이비나 헤이스턴이 엘든홀을 넘어 집으로 돌아가던 중 흑마법사의 습격을 받았다.

그로 인해 호위 책임자이던 상급 엑스퍼트를 비롯한 9명의 기사 중, 단 한 명을 제외한 전원이 목숨을 잃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수년 동안 별다른 활동을 벌이지 않아, 엘든홀의 광인에 대한 경계심이 옅어져 있었고.

엘든홀의 수려한 경관을 구경하고 싶다는 이비나 헤이스턴의 고집을 꺾지 못한 탓에 일어난 비극이었다.

동료들이 목숨으로 만들어준 기회를 틈타, 도주에 성공한 기사는 카일 헤이스턴 자작에게 이 사실을 알린 뒤 악화된 부상으로 숨을 거두었고.

분노한 자작은 용병 길드는 물론 왕국 전역의 자유 기사와 현상금 사냥꾼들을 향해 대대적으로 공표했다.

‘내 딸을 구해오는 자에게 10만 골드. 흑마법사의 목을 가져오는 자에게 5만 골드를 주겠다.’

자작의 딸이 살아있을 가능성은 매우 낮았지만, 만약 딸을 구하고 흑마법사까지 죽일 수 있다면 그 보상은 무려 15만 골드였는데. 이는 기간트 ‘제블린’을 정가(수출가, 12만 골드)에 사고도 남을 정도의 막대한 금액이었다.

하지만 막상 이 의뢰를 위해 엘든홀로 향하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엘든홀의 광인? 그 정신 나간 흑마법사를 제거하려는 이가 없었을 것 같아?

하지만 기간트 오너까지 동원된 토벌대도 잡을 수 없었던 놈이야. 그 빌어먹을 흑마법 때문에 되려 토벌대 쪽만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고. 이 팔 보이나?

7년 전 토벌대에 참가했다가... 놈이 부리는 마수에게 뜯어 먹힌 거라고.’

‘약삭빠른 놈이야. 자기보다 강한 상대에게는 절대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지.

홀로 움직이는 흑마법사를, 그 넓은 엘든홀에서 무슨 수로 잡을 수 있겠나?’

‘엘든홀의 광인이라면 환상 마법과 소환술의 대가다. 만약 6서클에 올랐다면... 근위기사나 궁정마법사라도 내려오지 않는 이상 쉽지 않을 거야.’

루페른 용병 길드의 본부가 위치한 왕실 직할령 하이데른시.

그곳의 베테랑 용병들은 하나 같이 흑마법사 토벌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는데.

6서클 흑마법사 자체가 두려운 탓도 있었지만, 도주에 특화된 그자의 성향과 마법으로 인해 제대로 된 토벌이 이루어지지 못할 것으로 생각하는 듯했다.

현재 나는 ‘펠리체 용병 지부 지부장의 추천’으로 ‘다이아몬드패’를 받기 위한 시험을 치르는 중이었다.

아무래도 왕도의 관리와 기간트 협상에 임하기 전. 최상급 엑스퍼트와 6써클마법사, 기간트 오너에게만 허락된다는 다이아몬드 등급 용병이 되는 것이 여러모로 유리하리라는 제프 롭슨의 조언을 받아들인 것이다.

시험은 총 두 가지였는데.

첫 번째는 최상급 엑스퍼트와의 대련으로 내 힘을 증명하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용병 본부로 들어온 특급 의뢰 다섯 개를 해결하는 것이었다.

나를 시험하기 위해 나온 최상급 엑스퍼트는 브라이드 백작보다 한 수 아래의 실력을 지니고 있었기에 그리 어렵지 않게 제압할 수 있었고.

이후 내 기준에는 그리 어렵지 않은 의뢰 3개를 성공적으로 마친 상황이었다.

그리고 터진 자작가 영애 납치 사건.

이는 4번째 의뢰를 완수함과 동시에, 기간트를 구매할 수 있는 거금을 한 방에 벌어들일 수 있는 기회였다.

‘크로스보우의 가격은 25만 골드... 하지만 왕실이 지정한 의뢰를 수행한다면, 브라이드 백작가의 구매가인 13만 골드까지는 깎을 수 있을 거라고 했지.’

이것이...

내가 한밤중의 깊은 산속을 달리고 있는 이유였다.

#2

흑마법사의 위치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수십 년째 이곳을 떠나지 않았다면 그럴듯한 근거지가 있을 터였고, 그곳은 산의 정상 부근일 확률이 높았다.

아무래도 산 전체를 감시하기 쉬울뿐더러, 적들이 근거지에 접근할 때까지 시간을 벌기도 용이할 테니까.

끄에에에에에에엑

‘탐지(C)’ 스킬에 제법 커다란 반응이 잡혀 은밀하게 접근해 보니.

그곳에는 말의 하체에 사람의 몸통, 늑대의 머리를 가진 괴상한 생명체가 무언가를 사냥한 뒤 승리의 포효를 내지르고 있었다.

원래부터 그런 생김새의 몬스터가 아니라는 건 쉽사리 짐작할 수 있었는데.

몸통과 하체, 몸통과 머리를 연결한 접합 부위가 지독할 정도로 인위적이었기 때문이다.

마치 누군가 알아주기를 바라기라도 한 것처럼.

나는 품속에 있는 ‘안티고네의 심장’에 서서히 마력을 불어넣으며 완전히 모습을 드러냈고.

“끄륵...”

발끝부터 머리끝까지의 길이만 3미터, 몸길이는 6미터에 가까운 거대한 몬스터는 내 기척을 알아차린 듯 늑대를 닮은 머리를 서서히 내 쪽으로 돌렸다.

녀석의 눈에서는 시뻘건 안광이 줄기줄기 뿜어져 나오고 있었고, 길쭉한 주둥이 사이로 보이는 이빨은 마치 대거를 빼곡하게 늘어놓은 것 마냥 살벌한 모습이었다.

“흑마법사의 키메라인가? 이것저것 잘도 이어붙여 놨군.”

나는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을 흑마법사의 시선을 의식하고 있었고. 조심성이 엄청나다는 녀석을 끌어내기 위해, 철저하게 5써클 마법사를 연기할 속셈이었다. 그리고 흑마법사의 작품으로 보이는 저 키메라는 이 연극의 훌륭한 조연이 되어주리라.

키메라의 몸통은 건장한 성인 남성의 것이었고, 몸통에 달린 오른팔에는 2미터가 넘는 할버드가 들려 있었다.

붕붕붕붕... 츠팟

완전히 내 쪽으로 돌아선 녀석은 할버드를 능숙하게 좌우로 돌리며 나를 겨누더니.

일순간 땅을 박차며 엄청난 속도로 나를 향해 쇄도해 왔다.

“바인딩. 록 월.”

순식간에 자라난 넝쿨이 키메라의 네 다리를 속박했지만, 아주 조금 속도를 늦추는 데 그치며 일제히 터져나갔고. 이어서 솟구친 석벽 역시 녀석의 할버드에 속절없이 깨져버렸다.

하지만 석벽은 하나로 끝이 아니었고, 깨어지는 것과 거의 동시에 솟아오르는 석벽에 키메라의 속도는 현저하게 떨어져 버리고 말았다.

콰아앙

콰앙

콰아앙

.

.

.

콰아아앙

“끼에에에에에에에엑!”

연달아 10여 개의 석벽을 박살 낸 키메라는 약이 오른 듯 길게 포효한 뒤 다시 한번 땅을 박차며 달려들었지만.

나는 이미 가속 스킬을 이용해 처음보다 더욱 거리를 벌린 상태였고. 달려드는 녀석을 향해 온갖 스킬을 난사했다. 바람의 칼날과 암석 창날, 빛의 화살과 불의 창이 연신 녀석의 전신을 할퀴었고, 수십 개의 스킬에 적중당한 녀석은 발을 멈춘 채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흑마법사의 비전이라도 적용된 것인지, 키메라는 전신에 무수한 상처를 입었음에도 쓰러지지 않았다.

“꽤 단단하군.”

적어도 힘과 방어력만큼은 어지간한 B급 상위권 몬스터에 필적할 듯했지만, 5써클 전투마법사를 상대로 그리 오래 버틸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아이스 스피어. 워터 밤. 메가 라이트닝...”

콰아아아아앙

퍼어어어어엉

콰아아아아아앙

내가 사용할 수 있는 가장 강한 스킬들을 연달아 적중시키자, 더 이상 버티지 못한 키메라의 눈에서 광채가 사그라들었고.

털썩

이내 네 다리에 힘이 빠진 녀석이 대지에 몸을 뉘었다.

그리고 예상했던 대로...

“신기한 놈이로군... 5써클이 확실한데 사용하는 마법은 하나같이 저급한 수준이야. 그런데 시전 속도 하나는 기가 막히게 빠르단 말이지. 네놈, 대체 어느 학파 출신이냐?”

새끼를 때리니 부모가 등장했다.

#3

허공에 둥둥 떠 있는 마법사.

저것은 어떠한 눈속임도 아니다.

6써클 경지에 오른 마법사만 사용할 수 있다는 ‘비행마법’이었다.

나 역시 중력 스킬과 몸을 가볍게 만드는 여러 스킬의 조합으로 짧지 않은 시간 허공에 떠 있는 게 가능하긴 했지만, 그건 엄밀히 말해 아주 천천히 낙하하는 것일 뿐 진정한 의미의 ‘비행’은 아니었다.

스르르르륵

허공에서 마치 미끄러지듯 접근해온 흑마법사의 모습은...

‘젊다. 고작해야 20대 후반? 정말로 6써클이었군.’

40이 훌쩍 넘은 모습으로 엘든홀에 자리를 잡았다고 들었으니, 저 정도로 젊어 보인다는 건 6써클에 올랐다는 것 이외엔 다른 이유가 있을 수 없었다.

그는 안색이 몹시 창백하긴 했지만 꽤 잘생긴 금발의 미남이었고, 키도 180중반에 이를 정도로 훤칠했다.

흑마법사는 너덜너덜해진 키메라의 시체에 잠시 시선을 준 뒤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끼던 놈이었는데. 다시 써먹긴 힘들겠어.”

“그리 잘 만든 녀석은 아닌 것 같던데?”

“큭, 배짱 하나는 마음에 드는군. 자네는 내가 두렵지 않나?”

“산속에 처박혀서 여자나 납치하는 놈을 두려워할 이유는 없지. 아, 그보다... 자작의 딸은 살아있나?”

흑마법사는 수염 한 올 나지 않은 턱을 쓰다듬으며 옅은 미소를 띠었다.

“입담이 제법인 녀석이로군. 정말 마음에 들어. 음,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여자 하나를 데려오긴 했지. 꽤 특이한 마력을 품고 있어서 말이야. 자작가의 영애인 줄은 몰랐군.”

나는 그와 시선을 맞추며 다시 한번 물었다.

“살아있나?”

“하하, 자네는 자작 영애의 생사 따위를 궁금해할 필요가 없다네.”

“...무슨 뜻이지?”

“이제 곧 내 손에 의해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나게 될 테니... 질문 같은 건 사치라는 뜻이야.”

흑마법사에게서는 조금의 위기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조심성이 많다고 해서 걱정했었는데, 그만큼 자신에 대한 프라이드 역시 높은 녀석임이 분명했다.

안티고네의 심장으로 인해, 그가 바라보는 나는 영락없는 5써클 마법사일 터.

그렇기에 무슨 수를 쓰든 자신의 상대는 될 수 없으리라 판단한 것 같았다.

“그럼 이만, 감히 내 영역에서 내가 창조한 피조물을 죽인 것에 대한 대가를 치르도록 하게. 가르가 엘 사나디아......”

흑마법사가 허공에 뜬 채로 주문을 외우자, 그의 다리 아래 공간에 거대한 마력이 응집되기 시작했고.

기다려줄 이유가 없었던 나는 그곳을 향해 연거푸 스킬을 시전했다.

하지만 막대한 마력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C등급 스킬들은 목표에 닿기도 전에 흔적도 없이 소멸해버렸고.

이내 흑마법사의 주문이 멈췄으며.

마력이 휘몰아치던 공간에는 직경이 10미터에 이르는 터널이 생성되었다.

그리고 그 터널 속에서 신장이 8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몬스터가 모습을 드러냈다.

양과 흡사한 머리에 달린 세 개의 거대한 뿔과 각자 다른 무기를 들고 있는 네 개의 팔.

거기에 근육질 두 다리로 사이로 보이는 칼날이 삐죽삐죽 돋아난 길쭉한 꼬리까지.

실로 엄청난 위압감을 풍기는 괴물이었다.

흑마법사가 말했다.

“보르곤이라네. 마계에 서식하는 마수 중에서도 꽤 강한 녀석이야. 내 일생일대의 역작이라 할 수 있지.”

확실히 강하다.

온몸이 찌릿찌릿해 숨을 쉬는 것조차 힘들 정도.

브라이드 백작령의 최강자였던 알버트 자작보다 몇 배는 강렬한 아우라였다.

그렇다는 것은 즉...

“좋군.”

(탑승한 상태인)안티가의 데뷔전으로 나쁘지 않은 상대라는 뜻이었다.

마수 보르곤의 어깨 위로 내려선 흑마법사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좋다고? 두려움 때문에 정신이 어떻게 돼버린 건가?”

이곳은 왕국에서 두 번째로 높은 산의 정상 부근이었고.

지금은 자정을 훌쩍 넘긴 시각이었다.

나는 홀로 의뢰를 맡았기에 일행이 있을 리 없었고.

굳이 이 늦은 시간에 미치광이 흑마법사를 잡겠다며 산에 오를 인간이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그리고 얼핏 봐도 어지간한 기간트 만큼이나 강해 보이는 상대.

나는 만족스런 미소를 머금으며 한 마디를 내뱉었다.

“안티가.”

[안티가(B-)가 출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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