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기간트 vs 최상급 마수
#1
화아아아아아아앗
“......!”
아무런 전조도 없이 모습을 드러낸 안티가로 인해, 보르곤의 어깨 위에 서 있던 흑마법사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기간트의 그림자만 보여도 꼭꼭 숨은 채, 절대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는 녀석이다. 그런데 코앞에서 그 절대적인 공포와 마주쳤으니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었다.
“테리마.”
나는 마수와 흑마법사가 반응할 틈을 주지 않고 기간트에 탑승했다.
화이트스펀에 잠긴 채 마력을 퍼뜨리자, 곧 엄청난 고양감과 함께 시야가 확장되기 시작했다.
두근두근...
나는 약간의 흥분을 애써 억누르지 않은 채 고개를 내려 안티가의 전신을 훑었다.
“확실히... 제법 바뀌긴 했군.”
지난 이펜타르크제 기간트들과의 전투 이후, 변형 한계가 43%까지 늘어난 안티가의 모습은 이전과 조금 달라진 상태였는데. 압축 장갑의 두께가 조금 더 얇아졌고(1.7m -> 1.66m) 다리의 길이가 길어지고 굵기 역시 미세하게 증가해 신장이 6.75미터(5cm 증가)로 늘어나 있었다.
이는 자칭타칭 뛰어난 엔지니어였던 안드레이 볼코프에게 2000골드를 던져주고 얻어낸 조언으로. 그는 안티가를 내 신체 비율과 최대한 흡사한 수준(압축장갑 두께 1.7m -> 1.35m)으로 변형시킬 경우, 신장을 6.9~7m까지 키우는 게 가장 효율적일 것이라고 했다.
물론 이는 비정상적으로 긴 안티가의 팔 길이를 그대로 유지할 경우에 한한 이야기였고, 이 독특한 기간트의 원거리 공격 능력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던 나는 그의 조언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리하여 43%의 변형을 거친 지금의 안티가.
이 녀석은 더이상 원형을 들킬 걱정을 할 필요가 없는, 나름 날렵한 외형의 기간트가 되어있었다.
파아아앗
휘익
휘익
나는 롱소드를 소환해 허공에 두어 번 휘둘러 본 뒤.
처억
마계에서 소환된 마수와 그 주인인 흑마법사를 가리키며 말했다.
[어디, 그 대단하다는 실력을 보여봐라.]
안티가의 가장 강력한 공격 수단은 누가 뭐라 해도 활을 이용한 원거리 공격이었지만, 눈앞의 마수는 굳이 거리를 벌려가며 활까지 사용해야 할 수준은 아니었다.
내가 기간트와 일체화를 끝낸 순간, 녀석으로부터 전해지던 찌릿찌릿한 기운은 이미 씻은 듯 자취를 감춰버린 상태였으니까.
여전히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표정의 흑마법사는 손가락으로 이쪽을 가리키며 더듬더듬 말을 내뱉었다.
“마, 말도 안 돼. 기, 기간트! 기간트를 가지고 있었다면 내가 몰랐을 리가 없다!”
기간트의 존재를 감지할 수 있는 아티펙트라도 있었던 걸까?
떡하니 기간트를 마주친 상황에서도, 녀석의 눈에 서린 불신의 기색은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았지만.
6써클의 경지에 이른 마법사의 냉철한 사고가 그의 정신을 일깨우는 데 성공한 듯했다.
“이익... 무슨 수를 썼건 상관없다. 애초에 보르곤은 기간트를 상대하기 위해 공을 들인 마수. 그깟 하급 기간트로 어찌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흑마법사가 날아올랐고, 마수의 거대한 다리가 움직였다.
쿠우우우우우웅!
엘든홀에 서식하는 생명체들의 단잠을 모조리 깨우고도 남을 거대한 발구름소리.
녀석이 오른발을 내리찍자 주변의 대지가 터져나가며 거대한 먼지구름이 일어났고.
그 먼지구름 사이로, 네 개의 팔에 들린 무기를 활짝 펼친 보르곤의 신형이.
마치 엿가락 늘어지듯 순식간에 모습을 키워가기 시작했다.
카아아아아아앙
보르곤의 위쪽 오른손에 들린 거대한 검과 안티가의 롱소드가 부딪치며.
마계의 마수와 금빛 머리띠를 두른 기간트의 전투가 막을 올렸다.
#2
후우우우우웅
파앗
흉부를 양단할 기세로 휘둘러진 할버드를 피하기 위해 재빨리 상체를 숙였고.
상체를 숙인 김에 몸 전체를 땅에 닿을 듯 눕히며 발을 휘둘렀다.
휘이이이이익
타아앗
보르곤은 거대한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민첩한 움직임을 보이며 공중에 몸을 띄운 뒤.
발밑에 있는 나를 향해 아래쪽 오른손이 들고 있던 단창을 집어 던졌다.
쉬이이이이이이익
콰아아아아앙
나는 왼손에 소환한 방패를 들어 올려 단창을 있는 힘껏 쳐냈고.
곧바로 이어진 할버드의 연격을 롱소드로 맞받아쳤다.
카아아아아앙
이후 십여 합을 간신히 막아냈지만, 체급에서부터 현저하게 밀리는 데다 속도 역시 상대가 조금 더 빨랐기에 좀처럼 승기를 잡을 수 없었다.
‘이런 무지막지한 몬스터를 소환할 수 있다니... 대단하군.’
보르곤은 이곳 오르비스 대륙에 떨어진 이후 목격한 이족 보행 몬스터(기간트포함) 중 가장 거대한 덩치를 자랑했다.
‘게다가 팔이 네 개라 상대하기 까다로워.’
거대한 덩치에 걸맞는 엄청나게 긴 리치를 지니고 있었던 데다, 각 팔이 각기 다른 무기를 휘두르고 있음에도 그 솜씨가 꽤나 능숙하게 느껴졌다.
확실히 그간 겪어본 테리 헤링스의 폴암이나 아론 베리어스의 제블린보다는 훨씬 더 강했다.
상급 엑스퍼트가 탑승한 크로스보우로도 1대1은 힘들 것 같았고.
베른 요새 사령관인 콜튼 프리먼의 코페시라면...
‘잡을 수 있을 것 같군.’
그 정도만 해도 A+급 몬스터 중 최상위권에 필적하는 수준이다.
그건 즉, 베헤르디아 대수림의 중심에 존재한다는 재앙급 몬스터들(S급 이상)을 제외하고는 적수가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과연... 흑마법사들이 경원시 되는 이유를 알 것 같아.’
일반적인 6써클 마법사라면, 홀로 이 정도 수준의 힘을 발휘하는 건 절대로 불가능했다.
그리고 내가 들은 바로는...
[너... 대체 얼마나 많은 제물을 바친 거냐?]
카가가가강
콰아아아아앙
나는 롱소드로 옆구리를 파고드는 할버드를 쳐낸 뒤.
방패의 테두리를 대폭 잘라낸 다음 아주 약간의 변형율을 투자해 마감 처리를 한 방패를 이용해, 보르곤의 왼쪽 아래팔이 휘두르는 모닝 스타의 공격을 막아냈고.
그 반동을 이용해 훌쩍 몸을 날려 거리를 벌렸다.
동화율은 전투의 시작과 동시에 100%를 찍은 상태였고.
마력 엔진은 790~810rp 사이를 오가며 한계까지 힘을 내고 있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거대한 나무의 가지 위.
그곳에서 전황을 지켜보던 흑마법사가 여전히 일그러진 얼굴을 한 채 입을 열었다.
“네놈... 대체 정체가 뭐지? 아무리 봐도 그건 기준 출력에도 못 미치는 하급기간트 같은데, 어떻게 보르곤을 상대로 이렇게까지 버틸 수 있는 거냐? 게다가 그 움직임은......”
나는 그의 말을 끊으며 또다시 질문을 던졌다.
[말해라. 대체 얼마나 많은 제물을 바쳤길래 저따위 걸 소환할 수 있었던 거냐?]
마법사가 일그러졌던 인상을 펴며 입매를 비틀었다.
“크큭, 어차피 죽을 놈이 궁금한 것도 많구나. 뭐, 알려주지 못할 것도 없지.
나는 지난 5년 간......”
흑마법사의 말을 요약하자면 이러했다.
녀석은 마수의 소환 의식을 위해 무려 2000명이 넘는 인간을 희생시켰는데.
주의를 끌지 않기 위해 엘든홀에서 멀리 떨어진 영지들을 순회하며, 일정 시기마다 소수의 인간만을 납치해오는 등의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2000이라... 많이도 죽였군.]
비록 원래 내가 살던 세계도 아닌데다, 얼굴조차 알지 못하는 존재들이었지만. 2000이 넘는 인간을 죽였다는 데에는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들 수밖에 없었다.
“많다고? 크크크... 전쟁으로 인해 죽는 인간이 1년에 몇 명이나 될 것 같나?
이 대륙에서만 수십만이라네. 하지만 그 누구도 전쟁을 일으킨 권력자들을 살인마라고 비난하진 않지. 나 역시 지금은......”
나는 녀석의 개 같은 자기합리화를 가만히 들어줄 생각이 없었다.
[네 놈의 생각 따윈 관심 없다. 어차피 ‘2000명을 학살한 x같은 흑마법사’가, 네 이름 옆에 기록될 수식어의 전부일 테니까.]
흑마법사의 얼굴이 다시 한번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3
콰아아아아앙
카아아아앙
콰아아아아아앙
보르곤의 공격을 검과 방패를 이용해 막아내는 기간트를 바라보며, 흑마법사찰스 베일리는 마른침을 삼켰다.
“흐으음... 뭐지? 왠지 보르곤의 공격에 점점 더 쉽게 대응하는 것처럼 보이 는데...”
그로서는 꿈에서조차 알 수 없었겠지만, 천재적인 격투 재능을 가진 스노우는 시간이 지날수록 보르곤의 공격 패턴에 적응해 가는 중이었다.
보르곤은 강력한 힘과 빠른 스피드를 지닌 마수였으나, 마족이 아닌 마수인 만큼 지능이 그리 높은 편은 아니었고.
그로 인해 한정된 공격 루트를 지니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사실 그보다 더욱 큰 문제는...
실제로 기간트의 움직임과 반응속도가 점점 더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는데.
이는 아무런 버프 없이 상대의 실력을 가늠해 보던 스노우가 하나둘 스킬을 사용하기 시작한 탓이었다.
‘매 토템, 강철 피부, 샤프니스.’
세 가지 스킬이 적용된 기간트는 눈에 띄게 반응 속도가 증가했고, 조금 더 단단해졌으며, 칼날에 서린 예기가 한층 더 날카로워졌다.
이전까지의 안티가가 6.75미터의 신장과 7.2톤의 무게를 지닌 중급 엑스퍼트였다면.
세 가지 버프를 받은 지금의 안티가는 똑같은 스펙을 지닌 상급 엑스퍼트라 할 수 있었다.
이것은 상급 엑스퍼트가 ‘탑승한’ 기간트와는 차원이 달랐다.
동화율 100%를 아득하게 넘긴 기간트는 상급 엑스퍼트 ‘그 자체’라 할 수 있었기에.
카아아아앙
카아아아아앙
서걱
거대한 칼과 할버드의 공격을 섬광 같은 횡베기와 종베기로 쳐낸 안티가의 롱소드가 세 번째로 휘둘러졌고.
할버드를 들고 있던 보르곤의 왼쪽 상단팔이 1/3쯤 잘려나갔다.
“크아아아아아아악!”
“끄윽... 보르곤!”
거대한 마수가 피가 뿜어져 나오는 팔을 감싸며 뒤로 물러섰고.
동시에 흑마법사의 입에서도 옅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일반적인 흑마법으로 창조해낸 키메라가 아닌.
수천 명의 영혼을 제물로 바쳐 심령이 연결되어 버린 마수의 부상이었기에, 흑마법사 역시 고통을 느낀 것이다.
“알 세타마나 바알......”
치이이이이이익
흑마법사가 주문을 외우자, 보르곤의 상처에서 새하얀 수증기가 뿜어져 나오며 순식간에 아물기 시작했다.
하지만 팔이 치유가 되는 순간에도 기간트는 미동조차 없이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여유로움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찰스 베일리가 연거푸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알 세타베네 라크샤 바알......”
그의 주문이 길어질수록 보르곤의 전신이 투명한 무언가로 뒤덮여갔고.
양의 그것처럼 툭 튀어나온 입에서는 지독하게 시린 냉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사아아아아아아아악...
보르곤의 몸과 입에서 뿜어져 나온 엄청난 냉기로 인해.
얼마 지나지 않아 일대의 온도는 극저온으로 떨어졌고.
주변 모든 것은 얼어붙었다.
“......델 바라얀. 헉, 헉헉...”
마침내 주문이 완성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팔짱까지 낀 채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 기간트.
찰스 베일리는 머리끝까지 치솟은 분노를 감추지 못하며 외쳤다.
“건방진! 그 자만이 네놈을 죽음으로 이끌 것이다!”
보르곤은 마계에서도 기온이 가장 낮은 지역에 서식하는 몬스터였고.
당연히 기온이 낮은 지역일수록 더 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흑마법사 찰스 베일리.
그는 남은 마력의 대부분을 사용해 보르곤이 날뛸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는 최상급 마수의 주인으로서 사용할 수 있는 ‘최후의 비술’이었다.
‘이제 저런 하급 기간트 따위는...’
그는 보르곤의 승리를 의심하지 않았다.
츠르르르르르르르르륵...
기간트를 중심으로 반경 150여 미터를 뒤덮은 얼음의 대지가 생성되고.
투둑.. 투두둑... 투두두두둑...
기간트와 마수의 모습을 완전히 가려버릴 정도의 얼음 비가 쏟아져 내리기 시작한 이후.
스르륵... 스르륵... 스르륵...
기간트보다 더욱 거대한 덩치를 자랑하는 정체불명의 존재들이, 불쑥불쑥 몸을 일으키기 전까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