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이만 죽어라
#1
보르곤의 전신에서 엄청난 냉기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을 때는, 어지간한 나라도 제법 놀랄 수밖에 없었다.
반경 50여 미터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얼어붙게 만드는 압도적인 냉기.
과연, 마계에서 최상위권에 속하는 마수라더니... 괴력과 병장기 다루는 재주가 전부는 아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보르곤이라는 마수와 그 주인인 흑마법사는 운이 없었다.
‘하고 많은 능력 중, 하필이면 냉기라니...’
‘탑승물’이 존재해야만 힘을 발휘하는 ‘파일럿(S)’ 특성을 제외한다면.
내가 가진 최강의 패는 ‘서리바람(B)’ 특성의 고유스킬들이었고.
특히나 나는 ‘서리’와 ‘바람’ 중 ‘서리’ 쪽에 치우친 스킬들을 개방한 헌터였다.
내가 가진 ‘서리바람(B)’ 특성의 고유스킬은 ‘바람의 인도(B)’를 제외하고는 죄다 ‘서리’ 계열의 스킬들이었으니까.
게다가 특성의 영향으로 내 냉기 저항력은 수치화하는 게 무의미할 정도로 높았고.
오히려 추운 지역에서는 일정량의 행동력 버프를 받을 수 있었다.
즉, 흑마법사가 준비한 비장의 수는 오히려 내 전투력을 증가시켜 줄 뿐이라는 뜻이었다.
나는 곧바로 ‘서리바람(B)’의 고유스킬들을 전개했다.
몇 차례의 실험으로 알게 된 사실인데.
기간트와의 동화율이 100%를 초과하면(수치상 100 이상은 표시되지 않는다), 내가 사용하는 스킬들은 모두 기간트의 크기와 마력엔진으로 증폭된 마력의 영향을 받게 된다.
한마디로 스킬의 효과가 몇 배로 폭증한다는 뜻.
반경 30여 미터가 한계인 프렉탈 필드의 얼음 대지가 100미터를 훌쩍 넘기는 위치까지 뻗어나갔고.
본래의 위력보다 훨씬 더 강화된 얼음 갑옷이 안티가의 전신을 뒤덮었으며.
손톱 반만 한 크기의 알갱이가 쏟아지는 얼음 비 대신, 어린아이 주먹만 한 크기의 우박이 사방천지를 휩쓸었다.
그리고 얼어붙은 대지 위에 쌓인 거대한 얼음 결정들 사이에서 불쑥불쑥 모습을 드러내는 신장 7.5미터의 새하얀 서번트 10기.
“이, 이건 대체... 크으으윽!”
심령으로 연결된 탓인지, 보르곤이 내뿜는 냉기에도 아무렇지 않은 듯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아래를 내려다보던 흑마법사.
하지만 내(안티가)가 만들어낸 얼음 지대의 냉기에는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는지, 황급히 마법으로 몸을 보호하며 전장의 중심에서 조금 더 먼 곳으로 몸을 피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흑마법사는 전장에서 일정 거리 이상 멀어질 수 없음이 분명해 보였는데.
아마도 너무 멀어지게 되면 보르곤이라는 마수에 대한 지배력이 약해지거나, 소환을 유지할 수 없는 듯했다.
‘그게 아니라면 이쯤에서 몸을 빼려 했겠지.’
어쨌든, 당장에 도망칠 수 없다는 걸 알게 된 이상 흑마법사는 더는 내 관심 사가 아니었다.
지금 이순간.
내 관심사는 오로지 기간트 오너로서 내가 가진 ‘힘’을 시험해 보는 것이었기에.
“쳐라.”
본래는 ‘눈사람 소환(B)’ 스킬의 모든 힘을 집중해야만 겨우 한 마리 정도 소환이 가능했을 거대한 서번트 10여 기가 일제히 보르곤을 향해 달려들었다.
눈으로 이루어진 만큼, 서번트들은 애초에 그리 강한 파괴력을 지닌 존재가 아니었다.
하지만 극저온 지대인데다 온갖 버프를 두른 녀석들의 힘은 평소의 몇 배에 달했고.
마치 한 몸인 듯 유기적으로 움직이며 머리 하나는 더 큰 거대한 마수를 귀찮게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한 가지 변수가 있었다.
콰아아아아아앙
퍼어어어어엉
콰아아아아아아앙
퍼어어어어어엉
얼음의 대지 위에 발을 딛고 선 보르곤 역시, 이전에 비해 몇 배는 강력한 전투력을 과시하기 시작했다는 것.
‘하, 저놈도 버프를 받아버린 건가?’
네 개의 팔을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휘두르며 서번트들을 터트려 버리고 있는 보르곤.
어찌나 파괴되는 속도가 빨랐는지, 서번트를 새로 만들어내는 속도가 파괴되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할 정도였다.
길들이는 게 가능하기만 하다면, ‘서리바람(B)’ 스킬과 굉장한 시너지를 일으킬 수 있는 녀석이었기에 욕심이 슬금슬금 고개를 들었을 지경.
‘이거... 흑마법이라도 익혀야 하나?’
그 정도로 처음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보르곤이었다.
지금 보여주는 모습이라면, 베른 요새 사령관의 코페시와도 자웅을 겨뤄 볼만할 것 같았다.
하지만 1써클 일반 마법조차 책을 펼치는 순간 포기해 버린 내가, 그보다 훨씬 더 입문이 까다롭다는 흑마법을 익힐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나는 머릿속에서 쓸데없는 상념을 지워버리고는.
정신을 집중해 서번트들에게 한가지 명령을 내렸다.
츠르르르르르륵......
파괴되지 않은 4기의 서번트가 보르곤에게서 거리를 벌렸고.
스륵.. 스륵.. 스륵...
이내 순차적으로 16기의 서번트가 추가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총 20개의 서번트가 서로의 몸을 옭아매더니.
쿠르르르르르르르르...
순식간에 신장 30여 미터의 거대한 서번트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2
멀리 떨어진 흑마법사의 경악한 표정이 한눈에 들어온다.
저걸 만들어낸 나조차 조금 놀랐을 지경이니, 그 마음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더럽게 크긴 하네...”
언젠가 기간트와 비슷한 등급의 전투기를 만들어낼 수 있다 하더라도, 그 전투력은 비교조차 할 수 없으리라는 생각을 가지게 된 이유가 바로 이런 점 때문이다.
전투기는 내가 극한까지 효율을 뽑아낼 수 있는 ‘탑승물’에 불과하다면.
기간트는 능력을 수십, 수백 배로 뻥튀기시킨 ‘나란 인간’ 그 자체나 다름없었으니까.
비교가 가능할 리 없었다.
머릿속으로 거대화된 서번트에게 공격 명령을 내리자, 소리 없이 포효한 녀석이 보르곤을 향해 달려든다.
쿠우웅쿠웅쿠웅쿵쿵쿵...
그야말로 지축을 울리는 소리와 함께 서번트의 주먹이 내리꽂혔고.
이제는 숫제 시퍼렇게 변한 냉기를 내뿜고 있는 보르곤이 할버드와 대검을 교차하며 그 주먹을 막았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앙
놀랍게도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은 보르곤이 재빨리 자리를 이탈하며 할버드를 휘둘렀고.
서걱
거대한 서번트의 허벅지가 절반가량 잘려 나갔다.
하지만 상처 입은 부위는 순식간에 빈공간을 메운 얼음 결정들로 재생되었고.
고통을 모르는 서번트는 쉴 새 없이 공격을 이어갔다.
거대 서번트에 비하면 1/3 정도에 지나지 않는 신장이었지만, 실상 전투를 압도하는 쪽은 보르곤이었다.
녀석은 엄청난 속도로 이동하며 서번트의 전신에 상처를 입혔고.
서번트는 계속해서 상처를 재생시켰지만, 그 탓에 조금씩 크기가 줄어들고 있었다.
대략 5분간의 사투 끝에, 서번트의 크기는 20미터 아래로 줄어들었고.
보르곤의 입에서 뿜어져 나오던 시퍼런 입김도 서서히 색이 옅어져 갔다.
이 정도면 사실상 승부는 갈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서번트는 내가 가진 수많은 ‘수단’ 중 하나일 뿐이었다면, 저 보르곤이라는 마수는 흑마법사가 가진 ‘전부’인 듯 했으니까.
보통 저렇게 거대한 소환물을 유지하려면 엄청난 마나가 필요했기에 장시간 사용하는 것은 무리였을 테지만.
기간트의 마력엔진으로 인해 뻥튀기된 내 마력은 고작 20% 정도가 소모되었을 뿐이었다.
흑마법사 역시 상황이 불리하다는 걸 눈치챘는지, 잘난 얼굴을 한껏 일그러뜨린 채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려대고 있었다.
“슬슬 도망치려 들겠군.”
저 마수가 아무리 중요하다고 한들, 본인의 목숨만큼은 아닐 테니.
“뭐, 오너들의 경우를 생각해보면 그것도 아닌가?”
나는 슬슬 이 상황을 마무리하기로 했다.
고작 서번트를 상대로 고전하는 수준의 마수로는, 안티가의 힘을 온전히 끌어 내기엔 턱없이 부족했으니까.
“파이어 스피어, 샐러맨더.”
스킬을 시전하자 길이 8미터짜리 거대한 불의 창이 허공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연이어 불길로 뒤덮인 도마뱀이 나타났는데, 그 크기가 안티가의 상체와 맞먹을 정도였다.
캬아아아악
불의 정령인 녀석은 자신을 소환한 지역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눈을 가늘게 좁히며 연신 불을 토해냈다.
본래라면 내 몸통 크기에 불과한 귀여운 정령이었지만, 그 크기가 몇 배로 커지자 위압감이 상당했다.
나는 샐러맨더에게 불의 창과 합일 할 것을 명령했고.
투정 부리듯 불붙은 꼬리로 안티가의 다리를 툭툭 친 녀석은 한 차례 더 불길을 토해낸 뒤 불의 창 내부로 스며들었다.
불의 창에서 넘실거리던 불길이 몇 배는 더 거칠게 꿈틀거렸고.
나는 그것을 보르곤을 향해 발사한 뒤.
“잡아라.”
서번트에게 상대하고 있던 마수를 속박할 것을 명령했다.
파아아아아아앗
거대한 서번트가 순식간에 다섯 마리의 작은 개체(7~8미터)로 분열되며 일제히 보르곤을 향해 달려들었고.
네 마리는 보르곤의 무기에 당해 파괴당하고 말았지만.
한 마리만은 무사히 보르곤의 허리를 붙잡는 데 성공했다.
퍼어어어어억
물론 마지막 한 마리마저 보르곤의 대검에 의해 파괴되는 운명을 피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미 불의 창은 녀석의 지척에 도달한 상태였다.
“안돼에에에에에에!”
창에 실린 무시무시한 마력을 눈치챘는지 비명을 질러대는 흑마법사.
보르곤 역시 황급히 네 개의 팔을 뻗어 머리와 몸통을 가렸지만.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냉기와 극상성인 불의 기운이 잔뜩 응축된 공격이었기에.
왼쪽 상체 일부와 두 팔이 완전히 소멸해 버리고 말았다.
크아아아아아아아악
보르곤이 고통스런 비명을 지르며 중심을 잡기 위해 안간힘을 썼으나.
“여기까지다.”
이미 녀석의 코앞까지 접근해 있던 나는 가볍게 롱소드를 휘둘렀다.
서걱
“끄아아아아아아아악!”
이내 처절한 흑마법사의 비명이 엘든홀의 정상에 울려 퍼졌고.
한발 늦게 보르곤의 목에 한줄기 실선이 생겨나더니.
스르르륵
쿠웅
몸에서 떨어져 나온 머리가 얼어붙은 대지 위로 떨어져 내렸다.
#3
흑마법사의 눈과 귀, 입, 코에서는 쉴 새 없이 선혈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마, 말도 안돼... 기간트로 그런 엄청난 마법을 사용하는 오너가 있다는 말은... 쿨럭!”
녀석은 미쳐 말을 끝맺지 못한 채 핏덩어리를 한 움큼 토해냈다.
아마도 소환한 마수가 죽어버린 반작용이 상당한 듯했는데, 그 와중에도 자신에게 닥친 현실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한 표정이 역력했다.
[네놈이 믿건 말건 상관없다. 선택해라. 산 채로 끌려갈 테냐, 아니면 시체가 되어 갈 테냐? 아, 그전에... 자작 딸의 행방부터 밝혀라.]
나는 흑마법사가 마법을 사용하려는 기미가 보이면 가차 없이 죽여버리기 위해, 안티가의 머리 위에 거대한 바람의 칼날과 얼음 창을 소환해 놓은 상태였다.
그것을 바라보던 흑마법사가 헛웃음을 짓더니 입을 열었다.
“큭, 그 마법은... 대체 어떤 미친 학파가 너 같은 놈을 키워냈는지 궁금하군. 커헉... 헉헉...”
당장이라도 숨이 멎을 듯 헐떡거리던 흑마법사는 두 마리 뱀이 조각되어있는 검은색 스테프를 들어 올리며 말을 이었다.
“크윽... 자작의 딸은 죽었다. 그러니 산 채로 잡혀간다 한들, 자작이 날 살려 둘리 없지. 목숨을 구걸할 이유가 없다! 알 세타라제 아크냑 바알......”
결연한 표정의 흑마법사가 주문을 외우기 시작하자 그를 중심으로 거대한 마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흑마법사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멍청한 놈은 아니로군. 그럼... 이만 죽어라.]
나는 흑마법사를 향해 바람의 칼날과 얼음 창을 날렸고.
그 순간 흑마법사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시커먼 기운이 악마의 얼굴을 형상화하며 입을 쩌억 벌렸다.
“......드락시안 델 아크산!”
퍼어어어어어어엉
주문이 끝남과 동시에 흑마법사의 몸이 폭발해 버렸고.
그의 잔해가 악마 얼굴의 형상에게 남김없이 흡수되었다.
그리고 이내, 악마의 쩍 벌어진 입에서는.
검붉은 지옥의 불길이 터져 나왔다.
콰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
순식간에 소멸해 버리는 바람의 칼날과 얼음 창.
심상치 않음을 느낀 나는 곧바로 여러 겹의 얼음벽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는 온갖 스킬을 퍼부어 방어력을 높인 뒤.
순식간에 생성해낸 서번트들까지 흡수시켜 얼음벽을 극한까지 강화했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천지가 뒤집히는 듯한 굉음과 충격파가 엘든홀의 정상을 뒤흔들었고.
다섯 개의 얼음벽을 박살 낸 검붉은 불길은 여섯 번째 얼음벽을 뚫어내지 못한 채 천천히 사그라들었으며.
강화된 얼음벽과 마법사의 자폭 공격이 충돌한 여파로, 반경 100여 미터는 완전히 쑥대밭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 덕분에...
“뭐, 굳이 흔적을 지운다고 힘을 뺄 필요는 없을 것 같군.”
안티가와 마수가 전투를 벌인 흔적 역시.
모조리 사라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