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은신처
#1
흑마법사 최후의 자폭 공격과 강화된 얼음벽이 충돌한 전장의 중심.
그로부터 대략 반경 30미터 이내는 풀뿌리 하나 남지 않은 황무지로 변해 버렸고.
황무지를 벗어난 이후로도, 상당한 넓이의 대지가 폭발의 여파로 인해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상태였다.
보르곤의 사체 역시 마계로 역소환이 된 것인지, 아니면 충돌의 여파로 인해 소멸해 버린 것인지 자그마한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는데.
이는 중요한 증거가 사라진 셈이라 아쉬운 마음이 들 수밖에 없었다.
‘흑마법사가 죽는 순간 사라져 버린 것 같긴 한데...’
A+급 최상위권 몬스터와 비슷한 수준의 마수였던 만큼, 마정석이라도 품고 있었다면 꽤 짭짤한 수입(A급 상위권 오우거의 마정석이 대략 3000골드)을 올릴 수 있었을 테지만.
이미 사라져 버린 이상 미련을 가지는 건 어리석은 일이었다.
‘그러고 보니... 흑마법사고 마수고 죄다 흔적조차 없이 소멸해 버렸군.’
특히나 흑마법사 놈이 자폭해 버리는 바람에 의뢰의 성공을 증명할 방도가 마땅치 않았다.
이렇게 되면 어떻게 해서든 흑마법사의 은신처를 찾아내야만 했다.
‘귀찮게 됐어.’
흑마법사의 말대로 자작 영애가 이미 사망한 상태라면, 의뢰 성공을 증명할 가장 좋은 방법은 그녀의 시신을 찾아내는 것이겠으나.
그도 아니라면 은신처에 남아 있는 흑마법사의 유산이라도 확보해야만 했다.
“안티가 입고.”
파아아아아아앗
옅은 빛을 발산한 안티가가 격납고로 돌아갔고.
타앗
나는 가벼운 부유감을 느낀 뒤 천천히 대지 위로 내려섰다.
기간트에 탑승하기 위해서는 탑승 주문을 외워야만 했지만, 소환을 해제할 때는 주문을 외울 필요 없이 격납고로 돌려보내면 되었다.
안티가를 격납고로 돌려보낸 이유는 간단했다.
굳이 기간트를 타고 돌아다니며, 깨끗이 지워진 흔적을 다시금 남길 이유가 없었으니까.
“젠장, 역시 귀찮아...”
안티가를 소환 해제한 나는.
맨몸으로 엘든홀의 정상 부근을 샅샅이 파헤치기 시작했다.
#2
흑마법사와 마수 보르곤을 처리하는 데는 채 30분이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흑마법사의 은신처를 찾아내기까지는...
무려 5시간이 넘게 걸렸고.
환영 마법이 걸린 은신처의 입구를 발견했을 때는, 이미 날이 환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꼼꼼하게도 숨겨놨네.’
탐지 스킬을 사용하며 정상 부근을 돌아다닌 결과, 총 12마리의 키메라를 추가로 발견할 수 있었다.
하지만 키메라를 모두 잡고 놈들이 서성이던 주변을 이 잡듯이 뒤졌으나 흑마법사의 은신처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역시 좀 과격하지만... 이 방법이 정답이었어.’
대략 3시간에 걸친 탐사가 실패로 돌아갔고.
내가 선택한 최후의 방법은 키메라들을 발견한 곳 주변을 모조리 초토화시키는 것이었다.
다행히도 내게는 어지간한 스킬쯤은 몇 시간이고 난사할 수 있는 거대한 마력 통이 존재했기에.
나는 정상 인근의 거의 모든 대지를 파내고, 부수고, 헤집었다.
그러기를 두 시간여.
콰아아아아아아앙
파칭
마치 유리가 깨지는 듯한 소리가 들리며 환영 마법으로 가려져 있던 은신처의 입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계속되는 스킬 공격으로 인해, 환영 마법의 매개체 중 일부가 부서져 버렸을 가능성이 높았다.
은신처의 입구는 지하로 연결되어 있었고.
짙은 어둠에 잠식된 그곳에서는 서늘한 냉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는 내가 부릴 수 있는 네 가지 정령 중 하나를 소환했다.
“윌 오 위스프.”
[윌 오 위스프 소환(C) : 빛의 하급정령 윌 오 위스프를 소환한다. 정령이 일정량 이상의 피해를 받거나 소환사의 마력이 다 할 경우 정령계로 강제 송환된다. 피해를 받아 강제 송환되었을 경우 일정 시간 동안 소환이 불가능하다.
소모 마력 : 400]
파아아아아앗
꽤 강한 빛을 발산하는 주먹만 한 솜뭉치가 허공에 모습을 드러냈다.
빛의 정령인 주제에 어둠을 좋아하는 이 놈은 잠시 내 얼굴 주변을 빙글빙글맴돌더니.
명령을 내리기도 전에 지하로 뚫린 통로의 어둠 속으로 날아가 버렸다.
“여전히 제멋대로인 녀석이군.”
나는 길쭉한 빛의 꼬리를 남기며 앞장서는 윌 오 위스프의 뒤를 따라.
흑마법사의 은신처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3
놀랍게도 지상에서 시작된 통로는 꽤 가파른 경사가 한동안 이어지고 있었는 데, 도대체 무슨 수로 이렇게 깊은 곳까지 파낼 수 있었는지 궁금할 뿐이었다.
통로의 크기는 대략 높이 3미터, 너비 2미터 정도로 꽤 넓은 편이었고.
아무런 지지대 없이 쭉 이어진 통로의 벽은 요철이 거의 없이 매끈하게 다듬어져 있었다.
벽에는 일정 거리마다 횃대가 달려 있긴 했지만, 불이 붙어있는 것은 없었다.
아마도 이곳은 꽤 오랜 기간, 엄청난 정성을 기울여 만들었을 것으로 추측되었는데.
별다른 지지대도 없이 이런 긴 통로를 만들고 유지한다는 건, 어지간한 수준의 이능(異能)이 개입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마치 춤을 추듯 어둠 속을 노니는 윌 오 위스프를 따라 걷길 10여 분.
마침내 반대편에서 희미한 빛이 흘러나오기 시작했고.
나는 서서히 속도를 줄이는 정령을 소환 해제한 뒤, 통로의 끝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빛은 통로의 끝을 가로막고 있는 벽과 문의 틈새로 새어 나오고 있었다.
나는 베리어와 실드를 두르고 강철 피부 스킬까지 전개한 채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끼이이이익
예상과는 달리 별다른 함정이나 적은 없었다.
문의 뒤쪽에는 꽤 넓은 공간이 존재했고, 그 공간의 정중앙에는 거대한 조각(아마도 마신이나 마족으로 추측되는)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리고 원형을 이루고 있는 벽에는 내가 들어온 곳을 제외하고도 여섯 개의 문이 더 존재했다.
나는 망설임 없이 가장 가까운 문 앞으로 이동했고.
다시 한번 만반의 대비를 한 뒤 문을 열었다.
끼이익
문 안으로 펼쳐진 광경을 확인한 이후 떠오른 단어는 단 하나였다.
“서재?”
한쪽에 있는 책상과 의자를 제외하고는, 책이 빼곡하게 꽂혀 있는 거대한 책장 5개가 공간의 거의 전부를 차지하고 있었다.
스르륵
그중 몇 권의 책을 꺼내어 겉표지를 살펴보았다.
[엘런 싱클레어의 소환 마법론]
[서대륙에서 흑마법사로 살아남는 법 ?덴 베이커 저-]
[아르미어 후작 부인의 화려한 외출]
[7써클 흑마법사의 마족 소환 성공기]
[‘이펜타르크제국 황실 마법사 출신’ 노먼 그레이 백작의 화염 마법 총론]
가끔 이상한 게 끼어있기는 했지만... 대부분은 흑마법에 관련된 책들이었고, 백마법이나 정령마법에 관한 책들도 적지 않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곳 오르비스 대륙은 ‘책’이라는 것이 귀하게 취급되는 곳이었고, 그중에서도 마법과 관련된 것이라면 말할 필요조차 없었다.
“이건, 꽤 돈이 되겠는데?”
가지고 나가는 문제를 해결해야 하겠지만.
그거야 뭐, 어떻게든 방법을 생각해내면 될 일이었다.
“제이미 그레고리에게 받은 아공간 주머니의 용량이...”
반쯤 강탈하다시피 한 중급 아공간 주머니의 용량은 대충 가로, 세로, 높이가 80cm 정도인 상자와 비슷했는데.
작은 용량은 아니었지만, 책장의 책들을 모두 옮기려면 수십 번을 왕복해야만 할 듯했다.
나는 빼낸 책들을 적당히 던져두고는 다음 방으로 이동했다.
두 번째 방은 음식 재료나 식기들로 보아 주방 겸 식당인 듯했기에 곧바로 패스.
세 번째 방 역시 로브만 수십 벌이 걸려있는 드레스룸이었던 관계로 그대로 문을 닫아버렸다.
네 번째 방은 흑마법사의 실험실로 추측되었지만, 한동안 사용하지 않았는지 내부는 비교적 깨끗했다.
몇몇 생물들이 거대한 유리관 속 알 수 없는 액체에 잠겨 있었으나, 탐지 스킬로 정체를 알아낼 수 있는 건 단 하나도 없었다.
딱히 건질만 한 것을 찾지 못한 나는 다섯 번째 방으로 이동했다.
“오...”
다섯 번째 방에는 골드와 각종 보석이 가득 담긴 상자 두 개와 투명한 유리로 제작된 진열장 하나가 있었는데.
그 진열장에는 범상치 않아 보이는 아홉 개의 물건이 진열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것들의 정체는...
“아티펙트?”
비록 아홉 개의 장신구 중 ‘탐지(C)’ 스킬로 이름과 용도를 알아낼 수 있었던 것은 고작 두 개에 불과했지만.
[네브라의 발톱(C) : 페레이아 늪지대에 서식하는 ‘아룡족’ 네브라의 발톱으로 만들어진 단검이다. 검날에서 영구적으로 마비독을 생성한다. 소지 시 민첩 스텟이 미약하게 상승한다.]
[대전사 아잔투의 머리띠(C) : 고대 사막 왕국의 대전사 아잔투가 애용했던 머리띠다. 위대한 영혼의 편린이 깃들었다. 착용 시 용기와 힘 스텟이 미약하게 상승한다. 신체 어느 부위에 착용하건 효과의 차이는 없다.]
“그럼... 나머지 일곱 개는 최소 C+ 등급 이상이라는 뜻이잖아?”
지구에도 아티펙트는 존재했었지만, ‘파일럿(S)’ 특성 각성자인 내게 딱히 도움이 될 만한 것은 없었기에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았었다.
하지만 내 스텟이 기간트의 능력으로 직결되는 지금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마탑에 감정을 의뢰한 다음, 쓸 만한 건 챙기고 나머지는 팔아버리면 되겠군.”
나는 아공간 주머니에 든 잡다한 것들을 모두 비운 다음.
상자에 든 골드와 보물 그리고 진열장 내부의 아티펙트들을 모조리 쓸어 담았다.
다행히 골드 주화 50여 개를 제외하고는 모두 아공간 주머니에 담을 수 있었고.
쩔그렁
남은 골드는 다시 상자 안에 던져두었다.
아공간 주머니에 들어간 골드만 수천에 달했고, 보석들의 가치는 그 몇 배에 달할 것이 분명했기에 굳이 챙길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것이다.
주머니를 두둑하게 채운 나는 조금 들뜬 기분을 느끼며 마지막 방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공동에 존재하는 마지막 문을 열어젖힌 순간.
끼이이익
“크윽...”
상기되었던 기분은 삽시간에 밑바닥까지 추락해 버리고 말았다.
이걸 뭐라고 표현해야 하지?
인간 도살장?
시체 전시장?
마지막 방에는 얼핏 봐도 백여 구에 달하는 시체들이 각각의 나무 기둥에 매달려 있었는데.
비교적 멀쩡해 보이는 시체도 있었지만, 완전히 썩어 문드러져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시체가 대부분이었고.
그곳에서 흘러나오는 악취로 인해 머리가 지끈거릴 지경이었다.
나는 입과 코를 막은 채 방안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입구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벽 아래.
아직 나무 기둥에 걸리지 않은 10여 구의 시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실피드.”
[실피드 소환(C) : 바람의 하급정령 실피드를 소환한다. 정령이 일정량 이상의 피해를 받거나 소환사의 마력이 다 할 경우 정령계로 강제 송환된다. 피해를 받아 강제 송환되었을 경우 일정 시간 동안 소환이 불가능하다. 소모 마력
: 400]
나는 네 번째 정령인 바람의 하급 정령 실피드를 소환해 몸 주위에 바람의 벽을 둘렀다.
휘이이이이이이이...
잠시 뒤 악취가 씻은 듯이 사라졌다.
나는 천천히 걸어가 벽 아래 누워있는 시체들의 얼굴을 확인했고.
품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그중 하나의 얼굴과 비교해 보았다.
“찾았군...”
온몸의 피가 모두 빠져나가 버린 듯 몹시 창백한 얼굴이었지만.
그녀는 분명, 의뢰주인 헤이스턴 자작의 딸...
이비나 헤이스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