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애도
#1
파아아아아앗
파아아아아앗
파아아아아앗...
옅은 빛이 연속으로 번뜩였고, 빛이 사라진 자리에는 키가 인간 성인의 절반 정도에 불과한 난쟁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플링 no. 3389 소환(D) : 신장 70~100cm의 요정족 하플링을 소환한다. 걸을 때 소리를 내지 않으며 높은 지능을 지니고 있다. 힘이 약하고 마력을 사용할 수 없어 전투에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다. 죽은 하플링은 9일이 지나면
되살아난다(재소환 가능). 소모 마력 : 300]
전투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지만, 인간에 버금가는 지능을 지니고 있어 잔심부름을 시키기 위해 가끔 소환하곤 했던 녀석들이다.
내가 익힌 몇 안 되는 D등급 스킬 중 하나로, 나는 총 17마리의 하플링을 소환할 수 있었다.
한 번 소환하면 정령과 마찬가지로 소환사의 마력이 다하기 전까지(초당 마력 0.3 소모, 정령은 초당 1) 물질계에 머물 수 있었지만.
사망할 경우, 정령에 비해 재소환까지(정령은 3일) 훨씬 더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만 한다.
재밌는 점은 이 녀석들 하나하나가 짙은 개성을 지닌데다, 개체 사이의 위계까지 매우 엄격하다는 사실이었다.
17마리를 모두 소환하자, 그중 멋들어진 담배파이프를 입에 물고 빨간 모자를 쓴 늙수그레한 하플링이 앞으로 나섰고.
꾸벅
녀석이 허리를 숙이자, 나머지 하플링들 또한 허리를 반으로 접으며 정중하게 인사를 건네왔다.
‘............................’
한 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이 녀석들이 말을 하지 못한다는 사실인데.
내가 내리는 지시는 철썩같이 알아듣는 데다.
텔레파시라도 통하는 것인지, 하플링들 사이의 의사소통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기에 그리 큰 단점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나는 담배를 뻑뻑 피워대며 내 지시를 기다리고 있는 no. 79(가장 작은 숫자)에게 명령했다.
“저것들로 관 아홉 개를 만들어라.”
나는 하플링들을 소환하기 전, 서번트들을 소환해 흑마법사의 은신처에 있던 가구들을 모조리 공동으로 꺼내놓았다.
그와 같이 단순하고 힘이 많이 드는 작업은 서번트들을 이용하는 편이 훨씬 더 효율적이었기 때문이다.
대신 지능이 높고 손재주가 좋은 하플링들의 경우, 어지간한 가구 정도는 순식간에 만들어 낼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는데.
‘............................’
no.79의 지휘 아래, 앞주머니에서 각종 공구들을 꺼내든 하플링들이 한곳에 모여있는 가구들을 향해 우르르 몰려갔고.
탕탕탕탕
와지끈
뚝딱뚝딱...
일사불란하게 관을 만드는 작업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잠시 하플링들의 모습을 지켜본 나는.
한 가지 일을 마무리 하기 위해 여섯 번째 방으로 이동했다.
#2
문을 열기 전, 나는 다시 한번 실피드를 소환해 악취가 스며드는 것을 방지했다.
끼이이익
방 안의 모습은 여전히 어지간한 공포영화는 명함도 내밀기 힘들 만큼 그로테스크했다.
“아이스 포그.”
스킬을 시전하자 극저온의 안개가 피어오르며 서서히 세력을 불려나가기 시작했다.
“눈사람 소환.”
‘서리바람(B)’ 특성의 고유스킬인 ‘눈사람 소환(B)’은 눈이나 얼음뿐만 아니라, 냉기를 지닌 물질이라면 무엇이든 매개체로 사용할 수 있었는데.
매개체의 질에 따라 소환되는 서번트의 능력이 좌우되었다.
스르륵. 스르륵. 스르륵...
냉기를 품은 안개가 서서히 결집하며, 허공에서 아홉 기의 서번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안개에서 소환된 녀석들인지라 속이 비칠 정도로 형체가 흐릿했고.
지닌 능력 역시 눈이나 얼음 결정에서 태어난 서번트들과는 비교하는 것이 민망할 정도로 미약했다.
하지만 그런 녀석들조차 일반적인 성인 남성의 2,3배에 달하는 힘을 발휘할 수 있었기에, 전투 상황이 아니라면 꽤 쓸만한 구석이 많았다.
나는 서번트들에게 이비나 헤이스턴을 비롯한 자작가 인원들의 시신을 공동으로 옮길 것을 명령했다.
키가 2미터에 달하는 서번트들이 소리 없이 움직여 아홉 구의 시신을 안아 들고는 차례대로 문을 나섰다.
이제 남은 것은 기둥에 매달려 있는 100여 구의 시체.
비교적 온전한 상태의 시체도 있었으나. 흑마법사와의 대화로 미루어 볼 때, 이들은 이곳 엘든홀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 납치된 자들이었다.
즉, 시체들을 이곳에서 빼낸다 한들.
지구의 중세 시대에 가까운 이 세상에서, 이들의 신원을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뜻이다.
“무덤이라도 제대로 만들어주는 편이 낫겠지.”
흑마법사가 머물던 이곳은 이대로 폐쇄해버리거나 남에게 넘겨주기는 아까울만큼 잘 만든 은신처였다.
나는 루페른 왕국 내 거점으로 이곳을 이용하기로 마음먹은 상태였고.
마침 ‘엘든홀’의 위치는 왕국의 정중앙에 가까웠기에 지리적으로도 흠잡을 데가 없었다.
그런 만큼 100여 구에 가까운 시체를 남겨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남은 마력이...”
흑마법사와의 전투와 탐색에 소모된 마력이 상당했으나, 아직까지 12769(총량 27399)의 마력이 남아있었다.
“이 정도면 마력이 모자라지는 않겠지. 록월. 록월. 록월. 록월......”
나는 가장 먼저 시체들의 주위에 석벽을 둘렀다.
쿠르르르르릉
콰드드드드득
쿠르르르르릉
콰드드드드득...
50cm 두께의 석벽이 빼곡하게 솟아오르며 천장에 닿았고.
벽과 벽 사이의 틈을 없애기 위해 일정부분이 겹치도록 소환했던 터라, 격렬한 파쇄음이 쉴 새 없이 터져 나왔다.
총 11개의 석벽을 일으키자, 내가 서 있는 한 블록을 제외하고는 시체들의 모습이 완전히 가려졌다.
나는 모든 석벽과 천장, 바닥에 ‘견고함(C)’, ‘마력 코팅(C)’, ‘인첸트(C) -불 저항력’ 스킬을 시전했고.
여기까지 작업을 끝낸 뒤 남은 마력은 고작 2144였다.
“파이어볼.”
나는 불덩어리 5개를 생성해 시체들 사이로 던져넣었다.
화르륵
화르르르르륵
화르르르르르륵...
그리 많지는 않았지만 은신처에서 발견한 기름을 바닥에 뿌려둔 터라 불길은 금세 시체들 사이로 옮겨붙었다.
나는 점점 세를 불려가는 불길을 바라보며 잠시 고개를 숙였다.
“다음엔... 좀 더 좋은 세상에서 태어나기를.”
이것이 내가 저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애도였다.
“샐러맨더.”
나는 샐러맨더와 실피드에게 명령해, 불의 위력을 더욱 키움과 동시에 불기운이 밖으로 새어 나오지 못하도록 막았다.
정령들이 가세하자 석벽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순식간에 한 줌의 재로 변했고.
그 모습을 확인한 나는 비어있던 부분을 석벽으로 막았다.
쿠르르르르릉
콰드드드드득
여섯 번째 방을 나온 나는 문을 부숴버린 뒤.
그 자리에 마지막 석벽을 세워, 시체들의 무덤이 된 방의 존재를 완전히 지워버렸다.
......................
마력 부족으로 인해 하플링들을 모두 역소환 해버린 상태였기에 공동 안에는 짙은 적막만이 맴돌고 있었다.
하지만 역소환되기 전, 난쟁이 요정들은 이미 그들에게 주어진 임무를 완벽하게 수행해 놓은 듯했다.
공동 중앙의 석상 아래에는 완성된 아홉 개의 관이 가지런히 늘어서 있었고.
그 안에는...
아홉 구의 시신이 고요히 잠들어있었으니까.
#3
의뢰는 완료되었다.
그리고 이를 증명할 자작 영애(와 여덟 기사)의 시신까지 확보한 이상, 귀환을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나는 마력이 회복되길 기다리며 흑마법사의 은신처이자 이제는 내 소유가 된 공동에서 하루를 보냈다.
이튿날 아침.
서번트들을 소환해 아홉 개의 관을 지상으로 옮긴 뒤, 엘든홀의 정상 부근을 뒤져 관을 운송할 수단을 마련했다.
크허어어어어어엉
크르르르르르릌
크허어어어엉...
나는 관을 짊어질 수 있는 녀석이라면 종족을 불문하고 잡아들였고.
그렇게 해서 총 네 마리로 이루어진 몬스터 운송부대가 탄생하게 되었다.
최소 몸길이 3미터에 달하는 몬스터들의 등에 2개의 관을 단단히 묶었는데.
다른 녀석들보다 1.5배 이상 큰 덩치를 자랑하는 데다, ‘관찰(C)’ 스킬이 먹히지 않았던 곰을 닮은 몬스터의 등 위에는 특별히 관 3개를 올려주었다.
한 가지 의아한 점은... 최초의 만남에서 약간의 폭력이 동원되기는 했으나, 몬스터들이 이상할 정도로 내 말을 잘 따랐다는 사실이다.
“그러고 보니, 레비나 브롤리 영지로 가는 길에 잡아탔던 몬스터도 그랬었던 것 같은데...”
알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지만 행동을 멈추지는 않았다.
나는 떠나기 전 은신처의 입구를 무너뜨리고 그 위에 흙과 바위를 쌓아 완전히 가려버린 뒤.
몬스터들을 이끌고 엘든홀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4
“...고맙네. 보답은 섭섭지 않게 하도록 하지.”
“고인의 명복을 빌겠습니다.”
딸과 기사들의 시신을 확인한 헤이스턴 자작이 내 손을 잡으며 감사의 인사를 건네왔다.
어지간히 나이를 먹은 자가 아니라면, 자작 정도의 귀족에게 존대를 한 적은 없었으나.
딸을 잃은 아버지 앞에서까지 연기를 할 마음은 없었다.
자작은 자신의 말을 지켰다.
비록 딸을 살려서 데려오지는 못했지만, 그는 딸과 기사들의 시신을 찾아온 공을 인정해 무려 3만 골드의 보상을 추가로 지급했다.
흑마법사를 해치웠다는 명확한 증거는 없었으나, 이 역시 딸의 시신을 찾아온 것만으로도 인정받아 마땅하다며 5만 골드를 흔쾌히 내놓았다.
8만 골드, 지구의 시세로 따지면 500억에 가까운 돈을 단 한 번의 의뢰로 벌어들인 나는 일약 용병 길드의 스타로 떠올랐다.
“저자로군...”
“어허! 저자라니... 자네 입조심 하게.”
“뭐야? 딱 봐도 내 막내동생 뻘...”
“멍청아! 저분은 6써클 마법사이자 최소 상급 엑스퍼트의 경지에 오른 마검사라고. 못해도 너보다 10살은 더 먹었을 거다.”
“아... 그럼 가서 말이라도 걸어볼까? 안면이라도 익혀두면 좋을 것 같은데.”
“관둬, 성격이 꽤 까칠하다는 소문이 있다고. 귀찮다고 개구리나 소금쟁이로 만들어 버릴지도 몰라.”
“헉!”
하지만 루페른 왕국에 단 11명에 불과한 다이아몬드 등급 용병이자, 엄청난 실력을 지닌 마검사로 알려진 덕에. 귀찮게 들러붙으려는 놈들은 없었다.
이제 이곳 하이데른시에 존재하는 마탑 지부 중 한 곳을 찾아가 아티팩트를 감정받은 뒤, 내게 필요 없는 것을 처분하기만 하면.
이곳에서 볼 일은 끝이었다.
나는 하이데른시에 존재하는 3개의 마탑 중 아티팩트 감정이 가장 뛰어나다는 ‘라바돈 학파’의 마탑을 방문했다.
그리고 감정이 필요한 일곱 개의 아티팩트를 내밀었고.
마탑의 마법사는 감정가로 무려 2900골드를 요구했다.
“1500골드?”
이것들이 누굴 호구로...
“고객님께서 요청하신 아티펙트 중 2개는 A등급, 5개는 B등급으로 판명되었습니다. A등급 아트팩트의 감정가는 500골드, B등급은 100골드입니다.”
“흐음...”
그렇다면야 뭐...
‘A등급 아티팩트’가 두 개나 된다는 말에 치밀어 오르려던 분노가 스르륵 가라앉았다.
나는 흔쾌히 1500골드를 지급했고.
감정 결과...
흑마법과 관련된 아티팩트는 대부분 흑마법사 본인이 소지하고 있었던 것인지. 일곱 개의 아티펙트 중 흑마법과 관련된 건 고작 두 개가 전부였고, 다행스럽게도 둘 모두 B급 아티팩트였다.
나머지 5개 중 3개의 B급 아티팩트는 일반인들도 사용할 수 있는 범용적인 아티팩트였는데, 가벼운 질병을 치료하거나 기운을 왕성하게 해주는 용도의 물건이라 내게는 별 쓸모가 없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A급 아티팩트들은 달랐는데.
[루흐의 날개(A) : 전설상의 거대한 새 ‘루흐’의 깃털로 만들어진 망토. 마력을 부여하면 마력의 양에 비례해 방어력이 증가한다. 착용 시 최대 5분간 공중으로 떠오를 수 있는 ‘레비테이션’ 스킬을 사용할 수 있다. 소모 마력 : 초당 20, 재사용 대기시간 : 480분]
[알브레하트의 지팡이(A) : 고대 락샨 제국의 대마법사 알브레하트에 의해 제작되었다. 일평생 ‘거인화’와 ‘소인화’에 관해 연구했던 알브레하트가 죽기 직전까지 함께했던 지팡이. 일반적인 마법지팡이와는 달리 마법 보조 능력은 없다. 마력을 부여할 경우 길이와 굵기를 자유자재로 조절할 수 있으며, 내구력이 증가한다. 뛰어난 자가 수복 능력을 지니고 있다.]
“대박이군...”
흑마법사에게는 하등 쓸모가 없었을 테지만.
내게는 엄청나게 유용한 아티펙드를 두 개나 얻었다.
나는 A급 두 개를 제외한 아티펙트 5개를 총 12000골드에 판매한 뒤 마탑을 나왔다.
이로써 내 재산은 무려 14만 골드를 넘어섰고.
이는 드디어, 출력 1100rp의 크로스보우(브라이드 백작가 기준 13만 골드)를 구매할 준비가 끝났다는 뜻이었다.
그러니 이젠...
“때가 되었군.”
왕도 레니비아를 향한.
여정을 준비해야 할 시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