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왕실 의뢰(2)
#1
나는 눈앞에 있는 전혀 다른 낯짝의 두 왕실 관료를 번갈아 바라보며 표정을 굳혔다.
두 사람의 표정에서 긴장한 기색을 읽어낼 수 있었지만, 그와 함께 쉽게 물러설 수 없다는 의지 역시 눈치챌 수 있었다.
혹시나 했지만 브라이드 백작과 제이미 그레고리로부터 들었던 그대로였다.
‘어지간하면 폴암, 운이 좋다면 제블린이 한계.’
이것이 두 사람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왕국의 기간트 관리부 직권으로 허가를 내 줄 수 있는 최대 기종은 1400rp의 코페시였다.
그 상위 기종인 글라우디스(1800rp)와 브로드(2000rp) 역시 판매 가능 기종이긴 했지만. 이 두 기간트는 관리부의 우두머리가 아닌, 왕실의 허가가 있어야만 판매가 가능하다고 했다.
그리고 기간트 관리부가 ‘구매권’의 행사자들에게 판매할 수 있는 기간트는 기종마다 그 수량이 정해져 있었고.
그것은 즉.
누군가가 상위 기종을 구매한다는 것은, 누군가는 그것을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설령 돈과 구매 의향이 충분하다 할지라도 말이다.
‘왕실 관료들, 특히 기간트에 관련된 이들은 다들 각자의 줄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윗선은 본인, 혹은 자신의 뒤에 선 이들이 행사하는 구매권이 상위 기종을 구매하는 데 사용되기를 원하죠. 그에 대한 로비나, 자신의 세력에 속한 이를 기간트 관리부 내부로 들여보내기 위한 암투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입니다.’
제이미 그레고리의 말이었다.
‘그래도 모닝스타(700rp)나 폴암을 거론하지 않는 걸 보면, 내 뒷조사는 끝낸 모양이군.’
남작과 준남작인 왕실 관료들이, 표면상일지언정 저자세로 나오는 이유는... 내가 다이아몬드급 용병, 그것도 6써클 마법사이자 최상급 엑스퍼트로 추측되는 ‘마검사’라는 정보를 이미 접했기 때문일 터였다.
6써클 마법사나 최상급 엑스퍼트는 작위를 얻고자 한다면 당장이라도 ‘자작’의 자리에 오를 수 있는 위치였으니까.
하물며 그 둘 모두에 해당하는 데다, 기간트 운용에도 엄청난 재능(브라이드 영지에서 증명한 바 있다)을 지녔다 알려진 나는 어떻겠는가?
경우에 따라서는 백작의 작위를 하사받는다 한들, 하등 이상할 게 없었다.
그것이 데이비드 밀스의 입에서 ‘모닝스타’나 ‘폴암’이 아닌, ‘제블린’의 이름이 언급된 이유일 것이다.
나는 데이비드 밀스에게 머물던 시선을 개릿 토너에게로 옮기며 입을 열었다.
“그게 전부라면, 네가 이 자리에 있을 이유가 없겠지. 그렇지 않나?”
그러자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의 개릿 토너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왕실은 물론, 각 부처의 고위 관료분들도 스노우님을 주목하고 계십니다. 스노우님에게는 1급 이상의 기밀을 요하지 않는 모든 임무를 의뢰해도 좋다는 허락이 떨어졌습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로군.”
“제가 알기로는 상위 기종의 기간트에 구매권을 행사하기 위해, 왕실 의뢰를 자청하셨다고 하던데...”
“맞다.”
“그렇다면 원하시는 기종이 있으신지요.”
“코페시도 가능한가?”
“안타깝지만 코페시의 경우엔, 저희 부서의 방침상 국가가 인정하는 공적 없이는 구매가 불가능합니다.”
“공적이 얼마나 필요하지?”
“왕국 공적치 20000을 쌓으셔야 합니다.”
“20000? 감이 오지 않는군.”
“왕국 역사상 그 수치를 가장 빨리 달성한 최상위 엑스퍼트가 1년 2개월 정도...”
뭐, 애초에 코페시는 기대도 하지 않았다.
브라이드 백작이나 제이미 그레고리 역시,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따로 언급하지 않은 것일 터.
나는 애초에 목표로 하고 있었던 기간트의 이름을 언급했다.
“크로스보우.”
“크로스보우라면 아직 2대가 남아 있긴 합니다. 그런데...”
나는 상체를 바로 세우며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입을 열었다.
“의뢰를 맡겠다.”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던 개릿 토너가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특급 의뢰나 1급 의뢰를 수행하셔야 합니다. 특급 의뢰는 한 개, 1급 의뢰는 두 개를 완료하셔야 합니다.”
“어떤 차이가 있지?”
그때, 이제까지 나와 개릿 토너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데이비드 밀스가 나섰다.
“1급 의뢰 두 개를 완수하시면, 크로스보우에 구매권을 행사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가격은 25만 골드를 온전히 지불하셔야 하죠.”
“그럼 특급 의뢰는...”
데이비드 밀스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짙어졌다.
“브라이드 백작가에게 판매한 금액인 13만 골드에 구매권을 행사하게 해드릴 뿐만 아니라, 3만 골드의 추가 보상이 더해질 겁니다.”
한 마디로 크로스보우를 10만 골드에 팔아주겠다는 뜻이었다.
“보상이 1급 의뢰의 다섯 배로군.”
“의뢰의 난이도는 그 이상일 수도 있습니다. 의뢰 수행 중 사망할 경우, 국가에서는 어떠한 책임도......”
어차피 이 세계엔 책임지라고 따져 줄 사람도 없다.
그리고 난이도 2배?
이걸 고민할 이유가 있나?
“하겠다.”
나는 뭔가 찝찝한 표정의 두 사람을 앞에 두고.
계약서에 서명을 마쳤다.
#2
의뢰 내용을 듣기도 전, 계약서에 사인부터 갈겨버린 스노우가 뒤늦게 그 내용을 전달받은 뒤 방을 나가버린 직후.
“후우...”
“하아...”
그를 상대했던 두 관료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상관인 데이비드 밀스였다.
“의뢰 내용을 전달받고도 표정 변화가 없었어.”
“오만할 정도로 자신감이 넘치더군요.”
“사실 딱히 자신감을 내비친 건 아니었지만...”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는데도 그런 기색을 풍길 수 있다는 게... 대단한 거죠.”
스윽스윽...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서류들을 정리한 개릿 토너가 미간을 찡그리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이거... 정말 괜찮은 겁니까? 그는 엄청난 실력의 마검사란 말입니다. 자칫 일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무표정하던 얼굴에 감정이 담기기 시작한 개릿 토너와는 달리.
여전히 웃는 낯을 한 데이비드 밀스는 여상스런 말투로 답했다.
“잘못될 일 따위 없어. 그리고 어차피... 우리가 어찌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이건 후작 각하의 윗선에서 내려온 오더라고.”
“네? 그럼...”
기간트 관리부의 최고 책임자는 마르켈 젠트리 후작이었고.
그 윗선이라 함은...
왕국의 두 공작 중 하나인.
북부 공작령의 주인 스타크 위어 공작이었다.
#3
“다이아몬드급 용병이라고?”
“그렇다는군.”
“거기다 마검사?”
“6써클에 최상위 엑스퍼트라는 소문이 있어.”
“미쳤네...”
플레티넘급 용병 콤비인 스티브와 티나.
그들은 왕실 의뢰를 수행하기 위해 약속 장소에서 팀원들의 합류를 기다리고 있었다.
상급 엑스퍼트인 두 사람은 함께 다닌 지 10년이 넘은 동료이자 연인이었고, 기간트 오너의 꿈을 이루기 위해 4년 전부터 왕실 의뢰만을 전문으로 수행하고 있었다.
엄청난 뒷배나 ‘구매권’이 없는 이상. 귀족가 서자와 평민 출신 용병인 그들이 정당하게 기간트를 소유할 수 있는 방법은, 국가 공적치를 쌓는 것 이외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적어도 루페른 왕국에서는.
루페른 왕국의 기간트는 대륙에서 가성비가 좋기로 유명했고.
왕실 의뢰는 공적치 이외에도, 의뢰 대금 역시 상당히 후하다는 장점이 있었다.
“쳇, 폴암이나 모닝스타는 바라지도 않는다고. 빨리 대거라도 하나 살 수 있으면 좋겠다.”
“이제 얼마 안 남았어. 이번 의뢰로 쌓을 수 있는 공적치가 엄청나니... 이후엔 1급 의뢰를 다섯 번 정도만 수행하면 공적치를 모두 채울 수 있을 거야.”
“그런데... 이번 건은 너무 위험하지 않을까?”
티나의 걱정스런 물음에, 스티브 역시 안색을 굳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특급 의뢰야. 한 번도 해본 적은 없지만, 1급 의뢰에 비해 몇 배는 위험하겠지.”
“이걸 꼭 해야겠어? 그냥 1급 의뢰를 몇 번 더 하는 쪽이...”
“괜찮아, 티나. 발머 행정관님도 해볼 만한 일이라고 하셨어. 그분이 무리한 의뢰를 권하실 리가 없잖아. 게다가 다이아몬드급 용병 마검사와 기간트 오너가 함께하는 일이라고. 어딘가의 고위 귀족 가문이라도 털지 않는 이상... 절대로 위험할 일은 없어.”
“하지만...”
“날 믿어. 괜찮을 거야.”
33살의 스티브는 상급 엑스퍼트 중에서도 상위권에 속하는 실력자였다.
어린 시절부터 그의 재능을 질투한 배다른 형(후계자)에 의해 지독한 괴롭힘을 당했었고, 그 괴롭힘이 정도를 넘어 목숨을 위협할 지경이 되자 가문을 도망쳐 나왔던 과거를 지니고 있었다.
가문에서 도망친 스티브는 그날로 자신의 성을 버렸고.
언제가 최상급 엑스퍼트이자 기간트 오너가 되어, 자신의 어린 시절을 지옥으로 만든 형을 응징하겠다는 야망을 키워왔다.
그런 스티브에게 기간트 오너에 성큼 가까워질 수 있는 왕실의 특급 의뢰는... 도저히 포기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잘 못 될 일은 없다는 말을 속으로 되뇌이며, 자신의 동료이자 연인을 달래고 있던 스티브.
“......?”
그는 누군가의 기척을 느끼고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고.
조금 늦었지만, 티나 역시 시선을 그와 같은 곳으로 향했다.
이곳은 루페른 왕국과 바이런 왕국의 국경 사이에 놓인 마링스산의 중턱에 위치한 안가 중 한 곳이었다.
여러 차례 왕실의 의뢰를 수행한 스티브와 티나는 이미 몇 차례 방문했던 경험이 있었지만.
다른 두 사람은 이곳이 처음이었다.
명색이 ‘안가’라 불리는 만큼. 설명을 들었다 한들, 이곳을 찾아오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약속시간에 조금 늦는 것쯤은 얼마든지 이해(하지 않는다고 해서 어찌할 방법은 없을 테지만)할 수 있었는데.
“저게 뭐지?”
“몬스터... 같은데.”
붉은색과 푸른색이 제멋대로 뒤섞인 데다, 사이사이 영롱한 황금빛 줄무늬까지 들어가 있는 화려한 망토를 둘러매고.
얼굴의 대부분을 가릴 만큼 후드를 푹 눌러 쓴 채.
엄청나게 거대하고 사나워 보이는 몬스터의 등에 올라타고는.
느릿느릿 안가를 향해 다가오는 인간 같은 건...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범위를 아득하게 초월한 광경이었다.
저도 모르게 스티브의 팔을 잡아챈 티나가 입을 열었다.
“설마...”
스티브 역시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어느 쪽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번 일을 함께할 동료인 것 같다.”
“아니, 대체 왜 저런 꼴을 하고...”
이번 의뢰의 시작은 은밀하게 타국의 국경을 넘는 것이었다.
그런데 저런 정신이 나가버릴 정도로 화려한 망토라니.
“저건 ‘자말’이잖아 대체 저걸 어떻게 길들인 거야? 설마... 저딴 걸 타고 국경을 넘을 생각은 아니겠지?”
자말은 거대한 덩치, 사나운 인상과는 다르게 그리 난폭한 몬스터는 아니라고 잘못 알고 있는 이들이 많았는데. 사실은 천성이 게으른 탓에 움직이기를 귀찮아해 그런 오해를 받는 것뿐이었다.
화가 난 자말은 철갑곰을 반으로 찢어발긴 뒤 자근자근 밟아 육포로 만들어 놓을 수 있는. 매우 흉포한 몬스터였다.
쿠웅... 쿠웅... 쿵...
안가 입구의 5미터 앞까지 접근하고 나서야, 거대한 몬스터는 그 무거운 발걸음을 멈추었다.
타앗
몬스터에서 내린 인간이 후드를 벗으며 말했다.
“왕실 의뢰, 맞나?”
다이아몬드패를 가진 용병이자, 엄청난 실력의 마검사가 동양인이라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던 두 사람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것 이외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