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왕실 의뢰(4)
#1
팬텀기사단.
왕도 레니비아에서도, ‘왕국의 비밀스러운 임무’를 전담하는 이 기사단의 존재에 대해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수백 년 전, 오직 루페른의 국왕과 차기 국왕인 왕세자의 안위를 지키기 위한 목적으로 키워진 ‘그림자 기사’가 팬텀기사단의 시초였으나.
시간이 흘러 최초 2인에 불과했던 인원은 현 국왕의 치세에 이르러서는 8인으로 늘어난 상태였고.
그 역할 역시 왕과 왕세자의 호위가 아닌, 왕실(혹은 고위 귀족)의 비밀스러운 임무를 처리하기 위한 도구로 변질되었다.
팬텀기사단에 들어가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은 근위기사단과 같았는데. 상급 엑스퍼트의 경지에 오름과 동시에, 현 루페른 왕국의 주력기인 코페시와 기준치 이상의 동화율을 유지할 수 있어야만 했다.
테스트를 통과한 이들은 예비 근위 기사의 자격을 얻게 되지만.
결원이 생기지 않는 이상 근위기사로 승격하는 일은 불가능했고.
루페른 왕국의 특성(타국과의 전쟁이 일어날 확률이 매우 낮다)상, 은퇴 이외에는 결원이 생기는 경우가 극히 드물었다.
비록 근위기사는 아니라지만, 강력한 전력인 예비 근위기사들을 마냥 놀릴 수는 없었기에. 이들의 전력을 활용하고자 창설된 기사단이 바로 왕도 주변의 방어를 맡고있는 ‘진격기사단’이었다.
결원이 거의 발생하지 않는 근위기사단에 비해, 대부분 국외를 무대로 한 고난이도 임무를 수행하는 팬텀기사단은 결원이 발생하는 빈도가 비교적 잦을 수밖에 없었고.
이런 팬텀기사단에 속하게 되는 이들은, 진격기사단원 중 평민 출신이거나 한미한 귀족가 자제 혹은 귀족가의 서자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로빈슨 슈왈츠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루페른 왕국의 서부 끄트머리에 위치한 에드먼드 남작가의 둘째 아들이었는데, 그의 어머니는 자작가에서 일하던 하녀 출신이었다.
에드먼드 남작의 하룻밤 불장난으로 태어난 아이에 불과했지만. 남작이나 남작 부인 그리고 그의 배다른 형제들은 로빈슨 슈왈츠를 한가족처럼 대해주었고, 그의 어머니 역시 나쁘지 않은 대접을 받으며 무난한 삶을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애초에 왕국 변방의 작은 영지에 불과한 남작가였기에, 서자인 그에게 해줄 수 있는 지원은 한정적일 수밖에 없었고. 그에 비해 그가 가진 재능은 너무나도 대단했다.
결국 16세가 되던 해 독립을 선언한 뒤 에드먼드 영지를 떠난 로빈슨 슈왈츠.
그는 우연한 계기로 한 후작가 소속 기사(상급 엑스퍼트)의 눈에 들게 되었는데. 그의 도움으로 북부 위어 공작령에 위치한 아카데미에 입학할 수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 기사의 주인은 북부 공작령의 지배자인 위어 공작의 오른팔 팔머스 후작이었다.
아카데미에 입학한 로빈슨 슈왈츠는 전국 각지에서 모인 인재들 사이에서 두각을 드러내며, 위어 공작의 관심을 끄는 데 성공했다.
그의 엄청난 재능을 확인한 위어 공작은 아낌없이 지원을 퍼부었고.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몇 년이 지난 후에는, 근위기사단 입단 시험에서 당당히 1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하게 된다.
위어 공작은 로빈슨 슈왈츠에게 팬텀기사단에 입단할 것을 권유했고, 그는 망설임 없이 이를 수락했다.
그에 대한 대가로 로빈슨 슈왈츠의 아버지인 에드먼드 남작은 무려 130년 만에 가문을 ‘자작가’로 승격시키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에드먼드 영지에 머물던 시절, 하녀의 배에서 나온 자신을 잘 대해준 은혜에 보답한 것이다.
왕국의 최고 실세 중 하나인 위어 공작의 입김이 작용한 탓인지.
그는 진격기사단에 합류하고 채 3년이 지나기도 전에, 8인의 팬텀기사 중 하나가 될 수 있었다.
그의 나이 27세에 벌어진 일이었고.
공식적으로 로빈슨 에드먼드는 진격기사단의 임무 수행 중 전사한 것으로 처리되었다.
이후 ‘슈왈츠’라는 성과 함께 새로운 신분과 남작의 작위를 하사받은 그는, 왕국의 일반 기사단(오너가 아닌 기사들이 소속) 중 하나인 ‘질풍기사단’ 부단장이라는 ‘명함’을 가지게 되었다.
물론 그의 진짜 신분은 왕국에 단 8인만 존재하는 팬텀기사단의 일원이자, 무려 2300rp라는 엄청난 출력을 자랑하는 기간트의 오너였다.
로빈슨 슈왈츠는 팬텀기사 중 위어 공작의 영향력이 미치는 유일한 인물이었기에, 그의 총애가 대단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아무리 위세가 대단한 위어 공작이라 한들. 루페른 왕실이 지닌 힘에 비할 수는 없었기에, 근위기사나 마찬가지인 그를 대놓고 사사로운 일에 사용할 수는 없었지만.
왕실에서 내린 임무에 자신의 의중을 심는 일 정도는 얼마든지 가능했다.
로빈슨 슈왈츠에게 내려진 이번 임무 역시 그런 종류의 것이었다.
왕실에서 내려온 명령서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1. 바이런 왕국 북부 아시스 숲에 숨어 있는 샌포드 출신 기간트 엔지니어 네이선 위즈니스(6써클)의 신병 확보
2. 네이선 위즈니스가 지닌 ‘동화율 보정 마법진’에 대한 자료 확보.
3. 두 가지 모두 불가능할 경우, 네이선 위즈니스 제거와 자료 소각에 전력을 다할 것.
4. 지원 ? 다이아몬드급 용병 1(경력 1년 이하, 마검사), 플레티넘급 용병 2(경력 13년, 12년, 왕실 의뢰 수행 경험 다수)
반면, 공작으로부터 떨어진 명령은 간단하기 그지없었다.
[임무 수행 중 스노우를 죽여라.]
그야말로 직관적인 명령.
사실 이는 스노우가 홀로 시몬스 공작령을 다녀온 정황이 포착된 데다.
조사 결과 알아낸 그의 공작령 방문 이유가... ‘아카데미 입구의 기간트 구경’이라는 말도 안 되는 것이었기에, 위어 공작의 의심을 단단히 사버린 탓이었다.
그리고 현재.
스노우의 입에서 자신의 본명이 튀어나오자, 로빈슨 슈왈츠는 확신할 수 있었다.
‘이놈, 시몬스 공작쪽 첩자가 맞았어!’
그 정도 세력이 뒤에 있는 게 아니고서야, 자신의 정체를 알아내는 건 불가능했을 테니까.
그는 엄청난 속도로 스노우와의 거리를 벌리며.
손목에 차고 있는 테네시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2
린턴 로테르에서, 이제는 로빈슨 슈왈츠가 된 오너 녀석의 얼굴에는 짧은 순간 다채로운 표정이 스쳐갔다.
놀라움과 의구심, 경악, 납득...?
마지막에는 어떠한 결론에 도달하기라도 한 것인지, 냉정한 표정을 회복하며 나를 향해 죽일듯한 눈빛을 쏘아 보내기도 했다.
그리고는...
타다다다다다다다다......
갑자기 엄청난 속도로 뒤쪽을 향해 달려가더니.
파아아아아앗
옅은 빛무리를 가르며 거대한 기간트를 소환했고.
“테리마!”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탑승 주문을 외쳐 기간트에 탑승했다.
50여 미터 앞에 등장한 거대한 기간트의 눈에 푸른빛 안광이 피어올랐고.
그와 동시에 엄청난 존재감과 위압감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오...”
보르곤 따위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압도적인 ‘강자의 아우라’.
‘이 정도면 어지간한 S급 육체 계열 헌터는 상대도 안 되겠는데?’
그때 나와 로빈슨 슈왈츠로부터 서서히 거리를 벌리던 스티브가, 걸음을 멈춘 채 홀린 듯 중얼거렸다.
“아리엘...”
아리엘?
저 기간트의 이름이 아리엘인가?
‘모르는 게 없는 녀석이로군. 하긴, 저 정도로 멋진 기간트라면 유명하지 않은 게 이상한 일이지.’
전체적으로 초록 일색인 외부 장갑에 얼굴의 일부와 어깨, 허벅지, 그리고 발목만이 하얗게 도색 된 멋들어진 기간트였는데.
특이하게도 안면부의 형태가 아름다운 여성의 얼굴로 되어있었다.
신장은 여태 보았던 기간트 중 가장 거대했던 브라이드 백작의 전용기 ‘브로드’보다도 0.5미터 정도는 커보였고, 벨런스형인 듯 몸통의 두께는 그리 두꺼워 보이지 않았다.
‘분석할 수만 있다면 정확한 스펙을 알 수 있을 테지만...’
아쉽게도 그럴 시간은 없었다.
기간트의 안광에서 피어오르는 푸른빛이 시리게 느껴질 정도로 짙어졌고.
이내...
콰아아아아앙
나를 향해 맹렬하게 쇄도해 들어왔기 때문이다.
나는 멍하게 기간트를 바라보고 있는 스티브와 그의 팔을 잡은 채 벌벌 떨고 있는 티나를 일별한 뒤.
‘바람의 인도, 가속, 매토템......’
스피드와 관련된 모든 버프를 발동시키며, 샌포드와 바이런의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전장을 향해 내달렸다.
[머, 멈춰라!]
뒤쪽에서 당황한 로빈슨 슈왈츠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무시.
쿠웅쿵쿵쿵쿵쿵쿵쿵쿵...
다급하게 나를 쫓는 기간트의 육중한 발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지만... 이 역시 무시.
갑작스러운 기간트, 그것도 압도적인 스펙의 고성능 기간트가 등장하자 인간들은 물론 혈전을 벌이던 기간트들마저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일순간 멈춰버린 전장.
그리고 (다른 이들이 보기에는) 전장으로 난입하려는 듯, 엄청난 속도로 달려드는 한 인간과 거대한 기간트.
나는 망설임 없이 샌포드와 바이런의 전투를 지켜보며 세운 작전을 실행에 옮겼다.
“메가 라이트닝!”
콰르르르르르르릉
스킬에 의해 소환된 벼락이 샌포드측 인물들을 일방적으로 밀어붙이고 있던 바이런의 기사들을 덮쳤고.
“무, 무슨...”
“마법이다!”
“끄아아아아아악!”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파츠츠츠츠츠츠츠츠츠
콰아아아아아앙
.
.
.
퍼어어어어어어엉
벼락에 뒤이은 십여 개의 스킬에 의해 이미 지쳐 있던 그들은 순식간에 전멸해 버리고 말았다.
[......]
너무나 황당한 전개였는지, 로빈슨 슈왈츠의 아리엘은 나를 쫓던 발걸음을 멈춰버렸고.
나는 그 틈을 이용해, 타겟을 바이런의 기간트들로 바꾸었다.
타겟을 그들로 정한 이유는 양측의 기간트전에서 바이런의 기간트들이 우위를 점하고 있었기 때문인데.
바엘로그(1600rp)에게 엄청난 연격을 퍼부은 아트론(1400rp)이 순식간에 몸을 반전시키며, 바이샨(1200rp)을 상대로 우위를 점하고 있던 테페리(1000rp)를 공격해 치명상을 입히는 데 성공.
테페리는 전투 불능이 되었다.
그로 인해 바엘로그 홀로 바이런 왕국의 두 기간트를 상대해야만 하는 상황에 직면했고.
애초에 1대1에서도 서서히 밀리고 있었던 터라, 바엘로그 역시 금세 만신창이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이대로 끝이었다면 바이런의 완승이 되었을 테지만...
나와 아리엘의 난입으로 인해 상황이 바뀌어 버렸다.
“아이스 스피어! 파이어 볼! 록 스피어......”
나는 순식간에 20개가 넘는 스킬을 난사했고.
당연하게도 기간트에게는 손톱만큼의 피해도 입히지 못했지만...
내 의도는 완벽하게 먹혀들었다.
바엘로그를 바이샨에게 맡긴 아트론.
드워프들의 손에 의해 탄생한 그 멋진 기간트가... 검을 치켜들고는 우리(?)를 향해 죽일듯한 기세로 달려들었으니까.
나는 혼신의 힘을 다해 반대쪽, 그러니까 로빈슨 슈왈츠의 기간트 아리엘이 서 있는 방향을 향해 달려가며 큰소리로 외쳤다.
“뒤를 부탁한다, 로빈슨 슈왈츠!”
그리고는 두르고 있던 망토, ‘루흐의 날개’에 마력을 퍼부으며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도약, 레비테이션, 중력 조절, 가속, 실피드.”
점프력을 높여주는 도약 스킬에 이어.
루흐의 날개에 달린 옵션, ‘레비테이션’이 발동하자 내 몸은 하늘을 향해 끊임없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원래라면 레비테이션 마법의 효과는 공중으로 떠오르는 것이 전부.
그로 인해 허공에서의 이동 속도는 매우 느릴 수밖에 없었지만.
중력 조절 스킬에 의해 가벼워진 신체에, 가속 스킬과 실피드의 힘이 더해지자.
쉬이이이이이이이잉
어지간한 새에 비견될 만큼 빠른 속도의 비행이 가능해졌다.
[......]
로빈슨 슈왈츠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멍청하게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보는 것 이외엔 없었다.
물론 접근해 오는 아트론으로 인해, 나를 향한 관심은 그리 오래 이어지지 못했을 테지만.
나는 유유히 하늘을 날아 일정 거리 밖에 내려선 뒤,
빠르게 달려 다시금 전장으로 복귀해 상황을 살폈다.
그리고...
카아아아아아아아앙
콰아아아아아아앙
[빌어먹으으으을!]
바이런의 아트론과 바이샨을 상대로 2대1의 불꽃 튀는 격전을 벌이고 있는.
아리엘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