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투기 버리고 기간트 탑니다-53화 (53/169)

53화 왕실 의뢰(5)

#1

츠각!

쿵쿵쿵쿵쿵...

허벅지를 크게 베인 바엘로그가 비틀거리며 뒷걸음질을 쳤다.

루페른 왕국의 팬텀기사단과 같은 역할을 하는 바이런 왕국의 비밀기사단 ‘그리드(그림자라는 뜻의 고대 하이델 제국어)’.

그곳 소속 11인의 오너 중 한 명인 제롬 맥그레이는 기사단 후배인 제이크 심슨과 부하 20명을 거느리고 왕실의 밀명을 수행하는 중이었다.

샌포드의 첩자로부터 입수된 정보에 의하면, 기간트와 오너의 동화율을 보정해 줄 수 있는 획기적인 마법진이 개발되었고.

이를 주도한 기간트 엔지니어가 개발자료를 가지고 루페른 왕국으로 망명을 시도.

이를 알아차린 샌포드 특무부대의 추격을 받던 와중 바이런 왕국의 국경을 넘었으며.

현재 아시스 숲의 어딘가에 은신해 있는 것으로 보이니, 마법사를 찾고 그가 지닌 자료를 확보하라는 지령이었다.

그리고 두 가지 모두 여의치 않을 경우, 그 둘을 세상에서 완전히 지워버리라는 추가 주문까지.

기간트 생산국가의 반열에 오르기를 열망하는 바이런 국왕의 의지가 반영된 임무였기에, 그 중요도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리고 ‘동화율 보정’이라면 사이가 좋지 않은 루페른 왕국 기간트들의 특장점이 아니던가.

설령 기간트 생산까지 이어지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 기술을 팔아서 챙길 수천만 골드의 이익과 루페른 왕국이 입을 손해를 감안하면... 이는 절대로 실패해선 안 될 임무였다.

그렇기에 기술의 원주인인 샌포드는 물론, 자국의 이익을 지키려는 루페른 역시 무언가 수작을 부릴 거라는 건 뻔히 예상했던 일이었고.

예측했던 대로 아시스 숲에서 샌포드 왕국의 특무부대와 조우, 현재는 승리하기 직전의 상황까지 도달해 있었다.

적기 중 하나가 상위 기체인 ‘바엘로그’였던지라 내심 긴장할 수밖에 없었지만, 다행스럽게도 적 오너의 실력은 자신에 비해 한참이나 떨어지는 수준이었다.

테페리를 무력화시키는 데 성공한 이후, 격렬하게 저항하던 바엘로그 역시 처참하게 망가진 상황.

마무리를 위해 검을 들어 올리던 순간이었다.

쿠웅쿵쿵쿵쿵쿵쿵쿵쿵...

“뭐야?”

“기간트?”

“기, 기간트다!”

“미친... 저건 엘프 왕국의 근위기간트잖아!”

“지금은 아니야. 10년 전에 바뀌었다고.”

“이 자식아,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육중한 발소리와 함께, 샌포드의 특무부대와의 전투를 승리로 장식한 부하들 사이에서 동요가 일었고.

“엘프 왕국? 근위기간트라고?”

검을 늘어뜨린 뒤 고개를 돌린 그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신장 8미터를 훌쩍 넘기는 엘프 왕국 하르세리안의 이전 세대 근위기간트였다.

“정말이군. 아리엘이야...”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

아리엘이라면 출력 2300rp의 고성능 기간트.

그리고 보통 저 정도 수준의 기체를 운용하는 건, 각 나라의 근위기사급 오너들이었다.

제롬 맥그레이는 본능적으로 일이 크게 틀어졌음을 느꼈다.

그리고 그 순간, 기간트를 앞서 달리던 기사(로 볼 수밖에 없을 정도로 빨랐다)가 엄청난 속도로 마법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콰르르르르르르르르릉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파츠츠츠츠츠츠츠츠츠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수십 개의 마법에 샌포드와의 전투에서 살아남았던 11인의 부하들이 순식간에 전멸해버렸고.

말도 안 되는 마법 시전 속도를 선보인 마법사는, 갑자기 미쳐버리기라도 한 것인지 자신의 아트론과 바이샨을 향해 또다시 마법을 난사하기 시작했다.

마법사가 구사한 마법은 대부분 3,4써클 수준이었기에, 기간트에게는 흠집조차 내기 힘든 수준이었지만.

그의 성질을 긁어놓기에는 모자람이 없었다.

[이곳을 마무리 지어라. 저쪽은 내가 맡을 테니. 그리고... 최대한 빨리 합류해.]

마법사 따위야 신경 쓸 필요가 없었지만, 그 뒤에 버티고 선 아리엘을 홀로 상대할 자신이 없었다.

[네.]

짧게 대답한 바이샨의 오너 제이크 심슨이 한쪽 무릎을 꿇고 있는 바엘로그를 향해 다가가는 모습을 확인한 제롬 맥그레이.

그가 오른손에 쥔 검을 치켜들며 마력을 끌어올렸다.

1340rp, 1359rp, 1387rp... 1407rp.

순식간에 최대출력에 가까워진 마력엔진.

자세를 낮춘 제롬 맥그레이가 하체로 몰린 마나를 체외로 분출하며 지면을 박찼다.

콰아아아아앙

폭발적인 스피드로 상대와의 거리를 좁히는 아트론.

겁을 먹은 상대 마법사는 뒤돌아 아리엘 쪽으로 도주하더니, 홀연히 날아올라 엄청난 속도로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6써클?”

실로 높은 수준의 비행마법이었다.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던 제롬 맥그레이는 호흡을 다잡으며 정신을 집중했고, 코앞까지 다가온 아리엘을 향해 검을 뻗었다.

카아아아아아아앙

바이런 왕국 북부의 아시스 숲.

그곳에서 2300rp의 아리엘과 1400rp의 아트론이 격돌했다.

#2

카아아아아아아앙

터어어어어엉

말도 안 되는 짓을 벌인 스노우로 인해 놀란 것도 잠시.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아트론을 발견한 로빈스 슈왈츠는 입가에 비릿한 웃음을 머금었다.

“큭, 고작 아트론으로 나와 겨뤄보겠다고?”

하지만 20여 합이 흐른 현재, 그는 당혹스러운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분명 대결 양상은 자신이 우위를 점한 상태였다.

하지만 상대는 그가 확인한 것만 20여 분 가까이 전투를 치렀고, 아트론보다 한 단계 위의 기체인 바엘로그를 상대했기에 적지 않게 지친 상태일 터였다.

“대체 뭐냐... 이 미친 검술은.”

상대의 기간트와 자신의 아리엘 사이에는 무려 900rp라는 극복하기 힘든 격차가 존재했다.

하지만 적 오너는 엄청난 검술과 미친 기간트 운용실력으로 이를 극복해내는 중이었다.

“최상급, 최상급 엑스퍼트가 확실하군. 미친 바이런... 최상급 엑스퍼트에게 고작 아트론 따위를 준다고?”

게다가 기간트 운용 실력 역시 결코 자신의 아래가 아님이 확실했다.

로빈슨 슈왈츠는 아직 로빈슨 에드먼드였던 시절. 왕국 3대 아카데미 중 한 곳에서 ‘기간트 운영’ 클래스의 수석을 단 한 번도 놓친 바 없었던 인재였음에도 불구하고.

“하, 동급 기간트였으면 몇 합 버텨보지도 못했겠군.”

하지만 상대에게는 불행하게도, 이미 지쳐버린 몸과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한 마력, 결정적으로 기간트의 성능 차이로 인해 전투의 승패는 로빈슨 슈왈츠의 아리엘 쪽으로 서서히 기울고 있었다.

콰아아아아아아앙

아트론의 검격을 방어해낸 아리엘이 힘과 무게로 압박하며 방패째로 짓누르자, 아트론의 무릎이 서서히 내려앉기 시작했다.

“크윽...”

위기의 순간, 방패를 막고 있던 검의 힘을 순식간에 거둬들인 아트론이 몸을 옆으로 비틀며 대지 위를 굴렀고.

쿠당탕탕...

아리엘이 무게 중심을 잃고 휘청이는 순간.

출력 1399rp, 1415rp, 1429rp... 1442rp.

순간적으로 마력엔진을 오버클럭시킨 제롬 맥그레이가 하체의 반동만으로 아트론의 몸을 바로 세운 뒤.

아리엘의 옆구리를 향해 날카로운 검격을 날렸다.

하지만 만만치 않은 실력의 로빈슨 슈왈츠는 마치 곡예를 하듯 아리엘의 허리를 비틈과 동시에 뒤로 꺾으며 아트론의 검을 피해냈고.

회심의 공격이 빗나간 아트론은 빈틈을 노출할 수밖에 없었다.

콰아아아아아아앙

허리를 눕힌 상태에서 그 반동을 이용해 내뻗은 강력한 발차기.

“크헉!”

쿠우우우웅...

오히려 옆구리를 얻어맞은 아트론이 허공에 뜬 채로 10여 미터를 날아 지면에 처박혔고.

쓰러진 기간트 내부의 제롬 맥그레이는 혼미해지려는 정신을 간신히 붙잡았다.

“허억, 허억, 허억... 젠장, 마력이...”

지쳐버린 육체도 문제였지만, 오버클럭으로 인해 정말로 바닥까지 떨어져 버린 마력이 더 큰 문제였다.

“빌어먹을,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에 트리온으로 갈아타는 건데...”

불과 두 달 전, 44세의 나이로 최상급 엑스퍼트의 경지에 오른 제롬 맥그레이.

바이런 왕국에는 최상급 엑스퍼트가 이미 14명이나 존재했지만, 그들 중 누구도 제롬 맥그레이 이상의 기간트 운용 능력을 보유하고 있지 못했다.

때문에 그는 기간트 보유량이 넉넉하지 못한 바이런 왕국 내에서, 무려 두 번째로 높은 출력을 자랑하는 트리온(2200rp, 드워프제)을 하사받을 수 있었지만.

첫 번째 기간트인 보울린(900rp, 임페르노 제작소)과 계약을 해지하는 과정에서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던 터라 기간트 교체를 차일피일 미루던 차였다.

이는 오너들에게서 드물지 않게 일어나는 일이었는데. 간혹 기간트와의 계약 해지 과정에서 받은 충격으로 인해, 두 번 다시 기간트를 타지 못하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제롬 맥그레이는 그 정도로 심각한 수준은 아니었지만. 자신의 실력에 자신이 있었던 만큼, 기간트 교체를 서두를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었다.

물론 죽음이 성큼 다가온 이 순간.

자신의 결정을 후회할 수밖에 없었지만.

촤아아아아악!

쿠우우우웅

아트론을 구원하기 위해 달려온 바이샨의 몸뚱이가 세로로 갈라졌다.

고작 1200rp에 불과한 바이샨을 탄 데다, 실력 또한 제롬 맥그레이에게 한참 못 미치는 제이크 심슨은 아리엘의 공격을 단 1합 조차 받아내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연이어.

......

시야와 청각이 완전히 차단되었고.

이는 아트론의 머리가 잘려 나갔다는 것을 뜻했다.

“젠장, 이렇게 허무하게 죽을 줄 알았... 커어어어억!”

채 한 마디를 끝맺기도 전에 상체를 파고드는 차가운 금속의 기운을 느끼며.

바이런 왕국의 최상급 엑스퍼트이자 비밀기사단 ‘그리드’의 오너였던 제롬 맥그레이는 허무한 죽음을 맞이했다.

#3

“양쪽 다... 제법인데?”

특히 아트론의 움직임이 인상 깊었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엄청난 출력 차이를 극복해낼 수 있었던 건 아트론의 오너가 지닌 지고한 검술과 높은 수준의 파일럿 재능 덕분이었으리라.

확실한 건, 적어도 A급 재능(81/90)을 지닌 로빈슨 슈왈츠의 아래는 아니라는 사실.

“그럼 A+급? 뭐, 이미 죽어버린 이상 확인할 방법은 없지만.”

정상적인 컨디션이었더라도 힘들었을 상황, 샌포드의 기간트들을 상대하느라 지쳐버린 아트론의 오너가 감당하기에는 아리엘과 로빈슨 슈왈츠는 너무나 강력한 상대였다.

“그럼 이제 내 차례인가?”

아트론과 반으로 잘린 바이샨은 이미 사라져 버린 상황.

전장에 남은 것은 치열한 대결을 벌였던 네 오너와 부하들의 시체뿐이었다.

나는 ‘천리안(C)’ 스킬로 아리엘의 동태를 살피며, 아공간 주머니에서 알브레하트의 지팡이를 꺼내 지면에 꽂았다.

그리고 지팡이에 손을 가져다 댄 채 마력을 불어넣었다.

츠츠츠츠츠츠츠츠츠츠츠츠...

순식간에 7미터가량의 거대한 봉으로 변한 알브레하트의 지팡이.

나는 그것을 그대로 둔 채 안티가를 소환했다.

“안티가 출고.”

[안티가(B-)가 출격합니다.]

“테리마.”

콕피트 안착하자마자 화이트스펀에 마력을 불어넣었고.

마력엔진의 미세한 진동음이 들려오며 안티가가 잠에서 깨어났다.

쑤욱

붕붕붕붕붕붕붕...

지면에 박혀있는 봉을 뽑아 몇 차례 휘둘러본 후, 마력을 주입하자 봉이 늘어났다 줄어들기를 반복했다.

“이게 되네.”

안티가에 탑승한 상태로도 알브레하트 지팡이의 옵션을 사용하는 게 가능했다.

그렇다면... 나는 ‘루흐의 날개’에 마력을 불어넣으며 ‘레비테이션’ 스킬을 사용했지만.

....................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아무래도 기간트가 직접 착용해야만 스킬이 적용될 듯싶었는데.

안타깝게도 루흐의 날개에는 알브레하트의 지팡이처럼 크기가 늘어나는 옵션 같은 건 없었다.

“날아다니는 기간트라니... 생각만 해도 살 떨리는데. 아쉬워...”

비행기간트에 대한 생각은 잠시 접어둔 채.

푸욱

다시 봉을 지면에 꽂아둔 나는, 무기 슬롯에서 거대한 활을 소환했고.

시위를 당기자 요사로운 붉은빛을 발하는 마력 화살이 생성되었다.

“매토템, 곰토템, 강화, 조준, 블레스터......”

그리고는 이미 적용중인 천리안 스킬을 비롯해 원거리 공격에 유용한 버프들을 모조리 때려 박은 뒤.

태에에에에에엥

시위를 놓았다.

그리고 엄청난 속도로 날아간 마력 화살은...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목표물에 적중했다.

순식간에 덮쳐온 공격에 미처 반응하지 못한 아리엘의 몸에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고, 상체 외부장갑의 일부가 박살났다.

그 모습을 확인한 나는 지면에 박혀있던 알브레하트의 지팡이를 회수하며 안티가의 마력엔진을 오버클럭시켰다.

789rp, 817rp, 829rp... 842rp.

일반적인 오너라면 꿈도 못 꿀 출력까지 치솟은 안티가의 마력엔진.

나는 터져나갈 듯한 엔진소리를 귓가로 흘려보내며...

“뒤가 구린 놈은 몽둥이가 약이지.”

콰아아아아아아앙...

지면을 박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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