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왕실 의뢰(6)
#1
쉐에에에에에...
로빈슨 슈왈츠는 무언가가 자신의 등을 노리고 날아든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하지만 감각이 포착한 위험 신호를 뇌에서 받아들여 처리한 후, 다시 신체의 각 부위를 향해 전달하려 할 때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이미 그 무언가와 아리엘의 외부장갑은 맞닿아 있는 상태였다.
“크윽...”
실로 어마어마한 굉음과 함께 기간트의 몸이 휘청거렸다.
[상체 외부장갑 파손율 : 4.2%]
하지만 엄청난 시각, 청각적인 효과에 비해 실제 피해는 그리 크지 않았다.
아리엘은 엘프 왕국 결사대(비밀상단)의 루페른 내 활동을 상당 부분 묵인해주는 대가로 받은, 왕국에 단 한 대뿐인 엘프제 기간트였다.
당연하게도 특유의 정령력 증폭마법진이 빠져 있는 기체였지만, 그를 제외한 성능 역시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엘프제 기간트의 특성상 장갑의 방어력이 뛰어나다고 할 수는 없었으나, 한때 엘프 왕국 하르세리안의 근위기간트로 활약한 바 있었던 아리엘이었다.
어디까지나 동급 기간트에 비해 떨어진다는 뜻일 뿐, 한두 등급 아래의 기체에 비해서는 외부장갑의 방어력이 몇 곱절은 뛰어날 수밖에 없었다.
“뿌득, 대체 어떤 새끼가...”
로빈슨 슈왈츠는 이를 갈며 균형을 바로잡은 뒤, 자신을 공격한 기간트의 모습을 확인하기 위해 황급히 몸을 돌렸다.
한방에 아리엘의 외부장갑 4%를 파손시킬 정도의 파괴력이라면, 기간트 이외에는 생각할 수조차 없었다.
그리고 그 빌어먹을 기간트를 확인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타다다다다다다다다다...
어느새 숲의 거대한 나무들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낸 기간트 한 대가 맹렬한 기세로 자신을 향해 돌진해 오고 있었으니까.
“뭐야 저건?”
맹세컨대, 로빈슨 슈왈츠는 저런 생김새의 기간트가 있다는 소리는 꿈에서라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아리엘의 어깨 정도에나 간신히 미칠듯한 신장의 자그마한 기간트였다.
‘모닝스타? 아니, 폴암이나 제블린급 정도는 되겠군.’
생전 처음 보는 몬스터의 얼굴을 정교하게 조각해 놓은 안면부는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를 마주한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였고.
팔이 비정상적으로 길었으며, 다리는 조금 짧은 편이었다.
게다가 서대륙의 기간트 중, 날렵하기로는 비할 데가 없다는 엘프제 기간트. 그중에서도 인체의 비율과 가장 유사하다는 아리엘보다도 조금 더 날렵한 체형을 하고 있었다.
타앗
엄청난 속도로 가까워진 미지의 기간트가 공중으로 뛰어오름과 동시에.
양손에 쥔 막대기를 머리 뒤쪽으로 한껏 끌어당기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무언가 매우 이질적인 느낌이 그의 전신을 휩쓸고 지나갔다.
“그러고 보니 발소리가...”
로빈슨 슈왈츠는 이질감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아무리 작은 기간트라고 한들, 저토록 무시무시한 기세로 달려드는데 발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는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뛰어오르는 순간에 발생한 소음 역시 마찬가지.
‘그리고 저건, 기간트라기보단 차라리 엑스퍼트의 움직임에 가까운...’
상념은 더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크윽...”
20여 미터를 뛰어오른 기간트가 내리친 막대기에는 엄청난 힘이 실려있었고.
체급 차이 탓에 조금은 방심했었던 로빈슨 슈왈츠는 방패를 통해 전달되는 충격에 하마터면 비명을 토해낼 뻔했다.
“뭐야? 대체 뭐냐고? 오늘따라 어디서 이런 말도 안 되는 놈들만...”
콰아아아아아앙
카아앙
콰아아아앙
.
.
.
터어어어어엉
마치 전쟁 교단의 뭉크를 연상케 하는 유려한 봉술 탓에, 도무지 반격의 실마리를 찾을 수 없었던 로빈슨 슈왈츠는 최대한 자세를 웅크리며 검과 방패를 이용해 상대의 공격을 방어하는 데 급급했다.
다행인 점은, 역시나 체급의 차이 때문인지 공격의 위력이 그리 강하게 느껴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물론, 어디까지나 속도에 비해 그렇다는 뜻이었다.
은은한 붉은빛이 서린 봉에 3,4번의 타격을 허용하다 보니.
[상체 외부장갑 파손율 : 7.3%]
어느새 상체 외부장갑의 내구도가 3%가량 추가로 깎여나간 상태였다.
‘젠장, 이대로는 죽도 밥도 안돼.’
믿기지 않지만, 저 작은 기간트의 오너는 속도 면에서 2300rp의 아리엘을 탄 자신을 앞서고 있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순수한 ‘속도’의 문제는 아니었다.
‘절대적인 속도가 빠른 게 아니야. 움직임이 기이할 정도로 부드러운 거지. 그래서 빠르게 느껴질 뿐, 실질적인 속도는 이쪽이 위다.’
수재는 물론이거니와, 천재라는 소리 역시 지겹도록 들어왔던 로빈슨 슈왈츠였다.
그는 얻어맞는 와중에도 상대 기간트의 특징을 분석했고.
결국 답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도출해낸 답을, 스스로가 도무지 납득 할 수 없다는 게 문제였다.
그의 시야 왼편에는, 어지간한 고등급 기간트에는 대부분 장착되어있는 출력 감지 마법진으로부터 데이터가 전송되는 중이었다.
839rp, 835rp, 844rp... 841rp
“젠장, 저기 타고 있는 녀석이 기간트의 신이라도 된단 말이냐?”
한마디로 말해...
적 오너는 고작 출력 800~900rp(물론 이는 오해다. 안티가는 출력 800rp의 기간트)짜리 기간트로는, 절대로 불가능한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사람이 아닌 기간트이기에, 오너의 움직임을 재현하는 과정에서 발생할 수밖에 없는 ‘찰나의 지연 현상’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로빈슨 슈왈츠는 그런 짓이 가능한 오너가 존재한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도 없었기에 당혹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지만.
여전히 자신이 패하리라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다.
“속도라는 건...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질 수밖에 없어.”
더군다나 저건 처음 보는 (기간트로서는)기이한 움직임으로 인해 더욱 빠르게 느껴지는 것일 뿐이니, 눈에 익기만 하면 얼마든지 대응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열대를 맞아주더라도... 한 방만 먹일 수 있다면 내가 이긴다.”
로빈슨 슈왈츠는 그렇게 확신하며 더욱 방어를 굳혔다.
그리고 그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아리엘을 상대로 신나게 막대기를 휘둘러대고 있는 저 작은 기간트에 탑승한 오너가.
‘조종’에 관한 한, 인간의 한계를 아득히 벗어난 괴물이 아니었더라면.
분명 그랬을 것이다.
#2
거의 1분여를 일방적으로 두들기고 있었지만, 아리엘이 받는 타격은 그리 크지 않은 듯했다.
확실히 고등급 기간트는 달랐다.
최초의 공격으로 인해 파손된 등 부위에 제법 큰 상처가 남아있긴 했지만, 안티가의 봉에 의해 얻어맞은 곳은 흠집이 나거나 조금 우그러진 정도가 전부였다.
‘단단해, 제대로 된 타격이 들어가지 않아.’
게다가 일방적으로 얻어맞고는 있었지만. 머리와 흉부는 철저하게 가린 채 몸을 웅크리고 있는 것이, 꼭 튀어 오르기 직전의 개구리를 보는 것 같았다.
‘기회를 노리는 건가?’
나쁘지 않은 판단이었다.
아리엘과 안티가 정도의 등급과 체급 차이라면. 제대로 된 일격을 허용할 경우, 그 순간 게임이 끝나버릴 수도 있었으니까.
게다가 어떤 종류의 싸움이든 섣불리 움직이는 놈은 대부분 하수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아이엘의 오너인 로빈슨 슈왈츠는 강자의 위치에 설 자격이 충분한 녀석이었다.
그리고...
콰아아아아아앙
드디어 로빈슨 슈왈츠의 기다림이 끝을 고했다.
잔뜩 웅크린 자세로 안티가의 공격에 대응하고 있던 아리엘이 순간 안광을 번뜩이더니.
봉을 튕겨낸 방패를 그대로 놓아버렸다.
터어어어엉
“윽...”
오른손으로 방패를 가격했던 나는 가슴이 열릴 수밖에 없었고.
그 순간, 오버클럭이라도 사용한 것인지 아리엘의 검에 서린 푸른빛이 마치 불꽃처럼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양손으로 검을 고쳐잡은 아리엘이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엄청난 검격을 뿌렸다.
파칭
파칭
파칭
파칭
터어어어어어어엉
[................]
아리엘의 오너인 로빈슨 슈왈츠의 비명이 기간트의 차폐 기능을 뚫고 들려오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마법? 대, 대체 정체가 뭐냐? 어디서 온 놈이야?]
실제로 잠시 뒤.
아리엘의 목 부분에 장착된 통신 마법진에서, 당황스러운 기색이 역력한 로빈슨 슈왈츠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도 그럴 것이, 아리엘의 검을 막은 것은 5겹으로 중첩된 6미터 크기의 투명한 실드였고.
엄청난 위력으로 4개의 실드를 뚫어낸 기간트의 검은, 마지막으로 남은 5번째 실드에 가로막혀 허공에 둥둥 떠 있는 상태였다.
이로서 최대한 마법을 사용하지 않고 제압하려던 계획은 고작 2분 만에 끝나버리고 말았지만.
그런 걸 따질만한 수준의 공격이 아니었다.
‘그걸 봉으로 막으려 했다간, 팔이 박살 났을 거야.’
마력으로 인해 강화된 알브레하트의 지팡이는 상급 엑스퍼트가 탑승한 출력 2300rp짜리 기간트의 공격을 견뎌낼 수 있었을 테지만.
800rp에 불과한 연약한(?) 안티가의 신체는 그렇지 못했다.
‘확실히... 고성능 기간트에 탄 수준급 오너는 무시할 수 없는 존재로군.’
파일럿 재능이 A급의 극(90점)에 달하는 데다, 현재 점수 역시 80을 넘어서는 로빈슨 슈왈츠의 실력은 과연 훌륭했다.
쿠웅쿠웅쿵쿵쿵쿵...
하지만 황급히 뒤로 물러선 이후, 이렇다 할 움직임 대신 이쪽을 멍하게 쳐다보고 있는 걸로 봐선... 정신적인 충격이 상당한 듯했다.
10여 초의 시간이 흐른 뒤, 다시 한번 로빈슨 슈왈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샌포드인가? 하긴, 샌포드라면 새로운 기간트를 만들어낸다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겠지. 마법 병기는 보이진 않는데... 실드 마법을 장착해서 그런 거였나?]
샌포드 왕국?
봉술과 마법을 동시에 사용했음에도 안티가의 오너와 나를 동일시 하지는 못하는 듯했다.
그러고 보니, 샌포드제 기간트의 특징이 마법진과 마력 증폭 기술, 스크롤을 조합해 만들어낸 ‘소형 마법 병기’라고 했던가?
덕분에 샌포드 왕국의 왕립 병기창에서 제작된 기간트는 동급 대비 강력한 전투력을 자랑했는데.
하지만...
‘병기에 부여 가능한 마법이 한정적인데다, 한 번 사용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이 너무 비싸 가성비가 최악이라지?’
오죽하면 샌포드 왕국마저 자국 기간트 전력의 절반가량을 타국에서 수입한 기간트들로 채워 넣었겠는가.
‘그래도 궁금하긴 하군.’
나는 머릿속을 떠도는 상념들을 지워낸 뒤.
말없이 마력을 끌어올렸다.
이곳은 적성 국가인 바이런 왕국이었고.
시간을 끌어서 좋을 게 없었다.
마음을 다잡은 것인지, 아니면 계속해서 최대출력을 유지하고 있는 것인지.
아리엘의 거센 공격이 계속되고 있었다.
방패를 던져버린 아리엘은 현란한 움직임과 검술을 구사하기 시작했고, 3배에 달하는 출력 차이로 인해 그 공격을 온전히 받아내는 데에는 무리가 있었다.
하지만 내게는 ‘스킬’이라는 ‘게임 체인저’가 존재했다.
“디그.”
좌에서 우로 검을 휘두르기 위해 내딛으려던 아리엘의 오른발 아래 땅이 한순간 증발하듯 사라져버렸다.
[크윽, 빌어먹을!]
발을 헛딛은 아리엘은 균형을 잃고 잠시 비틀거렸지만, 초인적인 균형감각으로 중심을 바로잡는 데 성공하며 공세를 이어가려 했다.
“그리스, 중력 조절.”
하지만 마찰 계수가 0에 수렴한 지면으로 인해 또다시 중심을 잃었고.
거의 동시에 시전한 중력 조절 스킬에 의해, 한순간 무게가 30% 가까이 증가하는 바람에 기어이 지면에 나뒹굴고 말았다.
[아아아아악! 빌어먹을 새끼야! 이따위 저열한...]
로빈슨 슈왈츠의 욕지걸이를 일일이 들어줄 이유는 없었다.
나는 황급히 몸을 일으키려는 아리엘을 향해 스킬을 퍼부었다.
“아이스 스피어, 록 스피어, 파이어 볼, 블레스트...... 메가 라이트닝.”
콰아아아아아아아앙
콰아아아아아아앙
퍼어어어어엉
콰아아아아아아앙아아앙
.
.
.
파츠츠츠츠츠츠츠츠츠츠...
십여 개의 스킬에 적중당한 아리엘.
엘프 왕국에서 제작된 저 아름다운 기간트는...
쿠당탕탕
다시 한번 볼품없이 지면을 나뒹굴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