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기간트 크로스보우(1)
#1
숲속에 은신한 채, 홀로 일주일을 버틴 6써클 마법사이자 기간트 엔지니어인 스펜서 브라운의 꼴은 말이 아니었다.
원래 계획해 두었던 루트가 아닌. 쫓기는 와중 다급하게 경로를 틀어 들어오게 된 아시스 숲이었기에, 준비가 미흡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가 샌포드와 바이런 왕국의 추적자들에게 일주일이나 들키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망명할 순간을 대비해 은신과 정찰에 관련된 마법들을 상당한 수준까지 수련한 덕분이었고.
그에 더해. 대륙 제일의 정보 길드인 ‘아헨달의 그림자’에 일평생 모은 전 재산(약 15만 골드)을 넘긴 뒤, 그들의 지속적인 도움을 받아왔기 때문이었다.
“망명은 언제부터 준비한 거지?”
“처음 마음을 먹은 건 5년 전, 거래 대상을 루테른 왕국으로 결정한 건 1년 전이지.”
“6써클에 오른 기간트 엔지니어라면, 대우를 박하게 하지는 않았을 텐데?”
“왜 샌포드를 배신했냐고 묻고 싶은 건가?”
“딱히 배신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능력 있는 인간이, 더 나은 대우를 찾아 떠나는 건 당연한 일이지.”
“......”
기간트 같은, 지구에서도 오파츠라 불릴만한 것들이 돌아다니는 곳이었지만. 이곳 사람들의 생활이나 의식 수준은 지구의 중세 시대를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이 세계의 사람들이 보기에 스펜서 브라운의 행동은 일방적인 배신행위로 보일지도 모르겠으나, 현대의 지구에서 살다 온 내 입장은 전혀 달랐다.
더군다나 던전 시대의 개막 이후로.
능력 있는 이들이 소속 단체나 국가를 갈아타는 건, 이야깃거리도 되지 않는 매우 흔해 빠진 일일 뿐이었다.
스펜서 브라운은 잠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입가에 씁쓸한 미소를 띠며 말을 이었다.
“재미있는 친구로군. 그건 동대륙인의 사고방식인가?”
“그냥 나란 존재의 본질 같은 거라고 해두지.”
“크크크크...”
잔뜩 낀 구름이 달도 별도 가려버린 밤.
마법사의 웃음소리가 이름 모를 산의 허리 부근을 맴돌다 사라졌다.
샌포드와 바이런 왕국의 추적대를 피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선두에서 길을 안내하고 있는 스티브는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유능한 인재였고, 내게는 탐색과 정찰에 특화된 스킬이 몇 가지나 존재했으며, 스펜서 브라운 또한 굉장한 수준의 은신과 정찰 마법을 익히고 있었다.
“보통 엔지니어들은 기간트 제작과 관련된 마법 이외에는 그닥 관심을 보이지 않는 걸로 아는데, 넌 좀 다른 것 같군.”
타닥... 타닥...
고작 3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얼굴이지만, 실상은 52살이나 먹은 마법사가 모닥불에 마른 가지를 던져 넣었다.
현재 우리가 자리 잡은 곳을 중심으로. 반경 10여 미터 이내는 외부와 완전히 격리된 공간이었기에, 불을 피우는 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이는 온전히 스펜서 브라운이 마법으로 이루어낸 이적이었다.
“잡히면 죽을 테니까. 살려면 뭐든 해야만 했지.”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더이상 그의 사정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애초에 관심조차 없었던 그가 지닌 ‘동화율 마법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것이라면 몰라도, ‘동화율’에 관한 거라면 내겐 하등 쓸모가 없었으니까.
대신 나는 루페른으로 돌아가는 여정 중, 안티가와 얼마 지나지 않아 소유하게 될 크로스보우에 관해 이야기했고.
그 대부분은 ‘변형(S)’ 스킬에 의해 진화한 압축 장갑과 그에 따른 기간트들의 신체 비율 변화에 관한 것이었다.
“이상한 쪽에 관심이 많군. 대체 왜 그런 게 궁금한 건가? 뛰어난 마검사라더니... 폴리모프 마법을 익힌 오너라도 될 셈인가?”
“폴리모프? 그게 뭐지?”
“...변신 마법이지, 뭐긴 뭐야?”
“그걸 익히면 기간트의 모양을 마음대로 바꿀 수 있다고?”
“글쎄, 그런 일이 가능했던 인간이 없었으니 답을 알 수는 없지만... 한 가지만은 분명하다.”
“그게 뭐지?”
“폴리모프를 사용할 수 있을 정도의 마법사라면, 굳이 기간트 같은 걸 탈 이유가 없다는 거지. 폴리모프는 8써클 마법이니까.”
“......”
현재 서대륙에는 8써클 마법사가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다.
‘응?’
그럼 ‘변형(S)’ 스킬을 진화시키면...
‘제한적이지만... 8써클 마법을 얻게 되는 셈인가?’
#2
“...우선 의뢰의 성공을 축하드립니다, 스노우님.”
예전 의뢰를 전달받았던 왕궁의 접견실.
나는 이전에 보았던 두 관료와 얼굴을 마주하고 있었다.
냉막한 표정의 외무부 관료 개릿 토너가 먼저 입을 열었다.
“뭐,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셨군요. 많은 일이 있었다고 듣긴 했습니다만...”
“스티브와 티나는?”
“아, 오랫동안 그들을 담당해온 행정관이 있습니다. 지금 그와 함께 있을 겁니다.”
“다른 문제는 없겠지?”
“네? 다른 문제라면?”
“크로스보우.”
“아, 다행히 윗선의 결정이 빨랐습니다. 기간트 오너가 사망할 정도로 힘든 임무였음에도 불구하고, 의뢰를 성공적으로 완수한 점을 높게 평가하는 것 같더군요.”
“기간트는 언제 인도받을 수 있나?”
여태껏 개릿 토너와의 대화를 듣고만 있던 데이비드 밀스가 앞으로 나섰다.
“10만 골드를 지급하시면, 오늘이라도 크로스보우의 주인이 되실 수 있습니다.”
지난번 만남에서는 시종일관 웃음을 잃지 않았던 기간트 관리부 2급 서기관 데이비드 밀스.
하지만 오늘은 그때완 확연히 달랐는데.
입가의 미소는 그대로였지만, 그의 눈에는 웃음기라곤 단 1%도 담겨 있지 않았다.
‘어느 쪽이 이번 일에 더 깊숙이 관여했는지는, 따로 알아볼 필요조차 없겠군.’
괘씸하긴 했지만 뭔가 조치를 취할 생각은 없었다.
2급 서기관이면 꽤 높은 직급인 듯했으나. 근위기사급 오너와 그의 기간트가 관련된 음모에서, 그가 맡을 수 있는 역할은 ‘전달자’ 이상은 아니었을 테니까.
데이비드 밀스가 서류 하나를 내밀며 말했다.
“읽어보시고 서명하시면 됩니다.”
나는 서류를 찬찬히 읽어내렸다.
그 안에 담긴 내용은 많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내 눈길을 잡아끄는 항목은 단 하나...
“상속인?”
“스노우님이 사망하실 경우, 기간트를 물려받을 인물을 지정하셔야 합니다.”
“사망... 아니 그보다, 기간트를 물려준다고?”
“물론 상속인이 왕국의 인정을 받은 오너가 아닌 이상, 기간트를 물려받는 건 불가능합니다. 대신 보관료를 차감한, 기간트의 가격에 상응하는 골드를 상속받게 될 겁니다.”
“음...”
나름 합리적인 제도이긴 했지만, 서류에 명시된 ‘보관료’라는 게 실로 어마어마했다.
기간트가 귀환 포인트에 입고된 이후.
1년 정도만 기한이 지나더라도, 대거나 모닝스타 같은 하급 기간트는 상속금이 땡전 한 푼 남지 않을 수준.
하지만 나는 그런 걸 고려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슥슥슥...
나는 ‘상속인’란에 망설임 없이 ‘프랭키 쿠만’이란 이름을 적어넣은 뒤.
쿨하게 사인까지 마친 후 몸을 일으켰다.
“잔금은, 어디로 입금하면 되지?”
#3
데이비드 밀스와 5명의 기사를 대동한 채 도착한 곳은 왕립 병기창의 기간트 보관소였다.
10미터가 가뿐히 넘어가는 거대한 문 앞에 서 있던 경비병들이 개폐 장치를 가동시켰고.
우우우우우우우웅
육중한 모터소리와 함께 거대한 문이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파아아아아아아아앗
[폴암(B-) : 출력 6.8m, 8.5톤(중갑형). 800rp. 오르비스 대륙 남서부에 위치한 기사왕국 ‘루페른’ 산하의 왕립병기창에서 제작된 기간트다. C+급 마력엔진을......]
[B등급 기체를 발견했습니다. 분석 완료까지 3분 7초. 기체에서 시선이 떨어질 시 분석이 초기화됩니다.]
[크로스보우(B+) : 7.2m, 8.8톤(벨런스형). 출력 1100rp. 오르비스 대륙 남서부에 위치한 기사왕국 ‘루페른’ 산하의 왕립병기창에서 제작된 기간트다. B급 마력엔진을......]
[A-등급 기체를 발견했습니다. 분석 완료까지 7분 13초. 기체에서 시선이 떨어질 시 분석이 초기화됩니다.]
[브로드(A) : 7.8m, 8.2톤(벨런스형). 출력 2000rp. 오르비스 대륙 남서부에 위치한 기사왕국 ‘루페른’ 산하의 왕립병기창에서 제작된 기간트......]
.
.
.
[A+등급 기체를 발견했습니다. 분석 완료까지 10분 26초. 기체에서 시선이 떨어질 시 분석이 초기화됩니다.]
나는 당당하게 서 있는 수십 기의 기간트로부터.
일제히 상태창이 터져 나오는 황홀한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다.
데이비드 밀스가 보관소 안으로 발을 들이며 입을 열었다.
“저쪽에 스노우님의 크로스보우...”
“잠깐.”
나는 데이비드 밀스의 말을 끊었다.
최근에는 항상 급박한 상황에서 새로운 기체와 맞닥뜨리는 바람에, 경험치 파밍의 기회를 그냥 흘려보내야만 했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잠시만 기간트들을 둘러봐도 되겠나?”
내 물음에, 데이비드 밀스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하지만 거절할 이유를 찾아내지는 못한 듯, 조건부 허락이 떨어졌다.
“너무 오래는 안 됩니다. 이곳은 보안이...”
“10분 정도면 된다.”
“그 정도라면... 알겠습니다.”
어차피 어중간한 등급의 기간트를 분석하는 정도로는, 이제는 경험치가 오르는 느낌을 체감할 수조차 없었다.
그런 이유로, 내 관심은 수십 기의 기간트 중 단 한기에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저건 아마도...’
나는 보관소 안을 둘러보는 척하며 10여 분간 그 기간트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고.
파아아아아아앗
마침내 기간트의 프로필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할베르트(A+) : 8.5m, 11.5톤(중갑형). 출력 2200rp. 오르비스 대륙 남서부에 위치한 기사왕국 ‘루페른’ 산하의 왕립병기창에서 제작된 기간트다. A급 마력엔진을 탑재하여 동급 기간트 대비 출력이 떨어지지만, A+급 합금으로 이루어진 기체의 견고함은 매우 뛰어난 편. 루페른제 기간트의 특색인 ‘동화율 보정’이 적용되어 등급이 한 단계 상승했다. 현 루페른 왕국의 근위기간트.]
기간트의 정체는 예상대로 현 루페른 왕국의 근위기간트인 ‘할베르트’였다.
여태껏 목격한 기간트 중 가장 두터운 상체(외부 장갑)를 지닌 기간트였는데, 방어력 하나는 정말로 끝내줄 것처럼 보이긴 했다.
‘뭐, 내 취향은 아니지만.’
볼 일을 마친 난, 미련 없이 뒤돌아서며 데이비드 밀스에게 말했다.
“이제 됐다. 거래를 마무리 짓도록 하지.”
“...네, 이쪽으로.”
그는 할베르트와 조금 떨어진 곳으로 나를 안내했고.
그곳에는 전체적으로 하얀색 바디에 상체와 하체에 파란색과 붉은색이 일부 도색된.
7.2미터의 신장을 지닌 투박한 생김새의 기간트가 자리하고 있었다.
“이것이 스노우님의 소유가 될 기간트입니다. 왕국에서 1589번째로 생산된 크로스보우로군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기간트 앞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지켜보는 눈들이 존재했기에, 내 방식대로 동기화를 진행할 수는 없었다.
나는 기간트의 하체에 손바닥을 가져다 대며 데이비드 밀스가 알려준 계약 주문을 외쳤다.
“아트록시아.”
파아아아아아앗
크로스보우의 몸에서 옅은 빛이 뿜어져 나왔고.
잠시 뒤.
내 오른쪽 손목에는 흰 바탕에 붉은색과 푸른색 문양이 수놓아진.
팔찌 하나가 자리하고 있었다.
#4
“로빈슨의 죽음에 그자가 관련되었다는 증거는?”
“죄송합니다, 각하. 의심스러운 정황은 있으나... 확실한 증거는 찾지 못했습니다.”
“바이런과 샌포드 쪽에서는, 뭔가 알아낸 게 없나?”
“샌포드의 특무부대 소속 오너 둘의 사망 사실은 확인할 수 있었지만, 아시다시피 바이런 쪽은 워낙 보안이 철저한 지라...”
북부 공작령의 지배자이자 현 왕비의 아버지인 스타크 위어 공작.
작위를 이어받은 지 23년이 지난 그는 이미 60세를 훌쩍 넘긴 노인이었지만.
엑스퍼트의 벽조차 뚫어내지 못한 남부의 시몬스 공작과는 달리.
위어 공작 자신이 최상급 엑스퍼트의 경지에 올라있었기에, 그의 외모는 고작 40대 초반에 불과했다.
위어 공작의 집무실에서 그를 독대하는 자는 왕국 기간트 관리부의 총책임자인 마르켈 젠트리 후작이었고.
그는 왕궁 내에서 위어 공작의 눈과 귀의 역할을 하는 인물이었다.
마르켈 젠트리 후작이 위어 공작 휘하에 합류한 것은 벌써 12년 전이었고.
그런 그에게, 공작의 심리 상태를 파악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스노우라는 자, 운이 없군...’
가장 날카로운 칼 중 하나가 꺾여버린 공작의 분노는 대단했고.
그가 어떤 결정을 내릴 지는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이윽고 위어 공작의 입이 열렸다.
“이미 크로스보우를 인도받았다고 했나?”
“네. 최대한 협조하라고 명령을 내려놓긴 했습니다만, 하루 만에 모든 일을 끝내버릴 줄은 몰랐습니다. 내일 당장이라도 레니비아를 떠날 것 같다고 하더군요.”
“잘됐군.”
“네? 그럼...”
“그런 수상한 놈에게 왕국의 기간트를 넘겨줄 수는 없지. 처리하게. 그리고... 상속인으로 지정했다는 놈의 뒤를 캐봐.”
“알겠습니다, 각하.”
여전히 잃어버린 안티카를 찾아 헤매고 있는 프랭키 쿠만에게.
또 다른 암운이 드리우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