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기간트 크로스보우(2)
#1
왕립병기창의 기간트 보관소에서 크로스보우와 계약을 맺은 직후.
나는 지킬 생각이 전혀 없는 사항으로 도배된 서류에 추가로 사인을 휘갈겨 주고는, 그길로 왕궁을 벗어나 어젯밤 머물렀었던 여관으로 발길을 옮겼다.
왕도 레니비아는 무려 외성 밖 5km 부근까지 소환 방해 마법진의 영향권이었음으로, 기간트 탑승은 당연히 불가능했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일반적인 오너에 한한 일이었고.
내 경우엔 처음 레니비아에 입성할 당시 이미...
[격납고 내 기체의 출격을 방해하는 특수한 파장을 감지했습니다.]
[파장의 레벨을 분석합니다.]
[분석을 완료했습니다.]
[기술 레벨 A+등급으로 확인되었습니다.]
[레벨 차이로 인해 격납고 내 기체의 출격에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파일럿(S)’ 특성으로 인해, 왕도의 소환 방해 마법진이 무용지물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는 격납고에 보관한 기체가 아닌, 테네시(소환 아티팩트)를 매개체로 계약한 기체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레벨 차이로 인해 계약된 기체의 소환에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베른 요새 마법병단장 제이미 그레고리의 말에 따르면.
왕도의 소환 방해 마법진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해서는, 기간트에 파훼 마법진이 설치되어 있어야만 했는데.
이에 해당되는 기체는 근위대의 기간트인 ‘할베르트(2200rp)’ 20기, 근위기사단장과 ‘국왕의 그림자’라 불리는 수호기사의 ‘배틀엑스(2500rp)’ 2기, 마지막으로 국왕 전용기인 ‘바스타드(3000rp)’까지 총 23기에 불과하다고 한다.
이 파훼 마법진을 만들기 위해 추가되는 비용만, 최소 기간트 폴암 한 대 분의 가격(수출가 10만 골드)을 넘어서는 엄청난 금액이었고.
이에 더해, 마법진의 완성을 위해서는 소환 방해 마법진에 적용된 ‘마법 코드’들을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만 했다.
당연하게도, 이 ‘마법 코드’들은 중요도 최상의 국가 기밀로 관리되고 있다고 한다.
이쪽 세계로 넘어온 이후 느끼게 된 사실이지만.
“개사기 특성이었어. ‘S급 파일럿’은...”
사실 지구에 있을 적만 해도, 파일럿 특성은 애증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같은 S급 스킬에 비해 활용도가 극히 떨어졌고(던전 내에서 무용지물이니), 설상가상 전투에 유용한 스텟의 증가 역시 거의 없다시피 했으니까.
“집중력, 판단력, 시야, 손기술, 인내심... 시야 정도를 제외하면, 죄다 전투에서 쉽게 체감할 수 있는 종류의 스텟들은 아니었지.”
물론 마력을 제외한 헌터의 스텟은 수치화되지 않음으로, 정확하게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었지만.
육체 계열 S급 특성을 각성한 헌터들이 대체로 수백 배나 강력한 힘을 지니게 된다는 걸 감안하면.
S급 헌터가 되고도 고작 C~B(버프 스킬을 적용할 경우)급 육체 계열 헌터 수준의 신체 능력을 지니는 게 고작이었으니, 상대적인 박탈감이 들지 않는 게 이상한 일이었다.
‘제우스’라는 파트너를 만난 이후 특성의 활용도가 수십 배 이상 껑충 뛰기는 했지만, 그때부터는 ‘양학 전문 S급’이라는 멸칭이 꼬리표처럼 따라붙었었다.
물론 방송에 출연해 그따위 말(양학 전문 S급)을 지껄인 육체 계열 S급 헌터의 조국에서 터진, ‘S급 던전 브레이크’의 출격을 거부해버린 이후로는...
대놓고 그따위 말을 입에 담을 수 있는 놈은 없었다.
“언젠가 지구로 돌아가게 된다면. 파울로 벨라디, 그 자식의 머리통을 깨버릴 수 있을 텐데... 쩝.”
물론 기간트를 소유한 채로 돌아갈 수 있다면 말이다.
기간트를 가지고 갈 수 없다면?
말해 뭐해?
그냥 쭉, 이곳에서 사는 거지.
#2
끼이이익
내가 방을 잡은 곳은 왕도 레니비아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고급여관이었고.
1층에는 무려 50여 개의 테이블이 놓인 식당 겸 펍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테이블 중 한 곳에서, 함께 왕실 의뢰를 해결하고 귀환한 플레티넘급 용병 스티브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스노우님. 일은... 잘 마무리하신 모양이군요.”
스티브는 숙였던 고개를 들며 내 손목 언저리로 시선을 돌렸고.
그곳에 존재하는 팔찌를 확인한 뒤, 옅은 미소를 띠며 축하의 말을 건네왔다.
사실 루페른 왕국에서 주로 사용하는 팔찌형 테네시는 그 투박한 모양(기간트 고유의 색이 들어간 것을 제외하면 아무런 장식도 없는 5cm길이의 원통)으로 인해, 오히려 기간트 소환 아티팩트임을 알아보는 게 어렵지 않았다.
물론 팔찌의 소유자가 기간트 오너가 될 만한 인물이란 사실을 안다는 가정하에.
나는 자리에 앉으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크로스보우와 계약했다.”
“크로스보우라니... 정말 부럽습니다.”
실제로도 그의 표정에서는 부러움과 미약한 질투심이 묻어 나오고 있었다.
오직 기간트 오너만을 꿈꾸며, 벌써 수년째 왕실 의뢰만을 수행 중인 상황이라고 들었으니 이해 못 할 바도 아니었다.
내가 스티브에게 이곳을 찾아오라고 한 이유는 간단했다.
비록 기간트 오너는 아니었지만, 그는 내가 이곳 오르비스 대륙에서 만난 이들 중 가장 유능한 인물이라 할 만했고.
거기에 더해, 무려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용병 생활을 이어온 베테랑이기도 했다.
나는 그의 머리와 경험을 빌려, 다음 행선지를 결정하는 데 도움을 받을 생각이었다.
스티브는 나라는 존재에게 의혹과 두려움, 호기심 등의 복합적인 감정을 품고 있는 상태였는데.
그중 두려움이라는 감정 때문에라도, 함부로 입을 놀릴 가능성은 매우 낮았다.
‘뭐, 함부로 놀려도 상관없나?’
나는 직원을 불러 음식과 술을 시켰고.
잠시 후...
철그렁
음식과 술이 하나둘씩 빈자리를 채우기 시작한 테이블 위에 주머니 하나를 올려놓았다.
“......?”
스티브는 의문 섞인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3000골드다.”
“.......!”
“앞으로 한 시간, 내 질문에 제대로 답한다면 그건 네 것이 될 거다.”
내 맞은편에 앉아 주머니를 바라보던 스티브가 멍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니까 그 말씀은... 고작 제 한 시간을 3000골드에 사겠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제가 원하시는 대답을 내놓지 못할 수도 있을 텐데요?”
“상관없다. 날 속이지만 않는다면.”
“최상급 마검사인 기간트 오너를 속이다니... 제게 그런 배짱은 없습니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오갔던 말에 관해 누군가 물어본다면, 있는 그대로 말해도 좋다.”
“네? 진심이십니까? 그렇지 않아도......”
스티브는 왕궁에서 있었던 일을 짧게 이야기했다.
미안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등장한 발머 행정관(오랜 기간 스티브와 티나를 담당해온 관료)으로부터 아무런 말도 듣지 못한 채, 약속된 의뢰금의 두 배가 넘는 2500골드를 지급 받은 뒤.
그들은 곧바로 왕궁의 모처로 이동, 두 시간여의 조사를 받았다고 한다.
“그중 절반 이상은 스노우님에 대한 질문이더군요. 저는 있었던 사실을 그대로 말했지만, 그들은 전혀 만족하지 못하는 기색이었습니다.”
물론 그가 말하는 ‘있었던 사실’이란, 전투가 끝난 뒤 내가 알려준 말을 그대로 반복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테이블 위에 놓인 맥주를 반쯤 들이켜 갈증을 지운 뒤 말을 이었다.
“아마 네게도 한동안 감시가 붙어있을 테지. 오늘 나와 나눈 대화에 대해서도 궁금해할 인간들이 많을 테고.”
“그런데도... 비밀을 지킬 필요가 없단 말입니까?”
나는 피식 새어 나오는 웃음을 감출 수 없었다.
“큭, 우리 사이에 그럴만한 의리라도 있었던가?”
“그건 아닙니다만...”
“너는 내 질문에 성의껏 답해주기만 하면 된다. 어때? 제안을 받아들이겠나?”
왕실의 특급 의뢰를 수행하고 받은 돈이 2500골드(원래는 절반 수준)였으니, 3000골드라면 플레티넘급 용병인 스티브에게도 상당한 금액일 터.
터업
그는 테이블 위에 놓인 주머니를 손에 쥐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거부할 이유가 없죠. 무엇이든 물어보십시오.”
나는 이 세계에 불시착한 이후 겪고 들었던 것들을 바탕으로.
‘기간트 오너인 다이아몬드급 용병’이 활약하기 좋은 곳에 대한 몇 가지 예시를 들었고.
이에 대한 그의 의견을 물었다.
잠시 고민하던 스티브가 입을 열였다.
“아무래도 ‘목적’이 중요할 것 같군요.”
“목적?”
“네, 스노우님이 오너로서 전장을 돌아다니고자 하는 목적 말입니다.”
나는 생각할 것도 없이 답했다.
“가능한 많은 기간트를 겪어보고 싶다.”
“겪어보고 싶다는 건...”
“싸워보고 싶다는 뜻이지. 그리고 좀 더 궁극적인 목적이라면... 최대한 많은 기간트를 소유하는 거다.”
스티브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네? 하지만 오너가 계약할 수 있는 기간트는 한 대뿐입니다만...”
“그건 네가 신경 쓸 필요 없다.”
고개를 갸웃거린 스티브가 이내 차분한 표정을 회복하며 말했다.
“그렇다면 생각할 것도 없습니다.”
“호오...”
너무나 단호한 말에 절로 기대감이 상승했다.
“마라몬트 왕국과 사막 왕국 카이샨의 국경지대. 올해가 가기 전에 전면전으로 번질 것이 확실시되는 그곳이야 말로, 스노우님의 목적에 가장 부합하는 장소라 할 수 있습니다. 이미 수십 종류의 서대륙 기간트들은 물론, 드물게는 동대륙제 기간트가 활약하는 모습마저 볼 수 있는 곳이니까요.”
스티브의 선택은 나 역시 우선순위를 제법 높게 잡아두었던 곳이었다.
테리 헤링스나 제이미 그레고리 역시 언급한 바 있었던.
현 오르비스 대륙 제일의 분쟁지역인...
해상왕국 마라몬트와 사막왕국 카이샨의 국경지대.
스티브의 말이 계속되었다.
“게다가 정말 억세게 운이 좋다면... 아주 가끔 목격된다는, 귀환 포인트가 지정되지 않은 기간트를 발견할 수도 있을 겁니다. 물론 그런 기간트의 경우, 대부분 가장 힘이 강한 세력의 소유가 되곤 하지만요.”
이 말을 들은 이상, 더 이상의 고민은 무의미했다.
“좋군. 그럼 그곳까지 가는 루트는......”
나는 약속된 시간 동안 여러 가지 질문을 던졌고.
스티브는 성심성의껏 답을 내놓았다.
“......마라몬트와 카이샨의 국경지대로 가는 건 바이런 왕국을 통과하는 쪽이 훨씬 더 빠르긴 한데. 이번 일도 그렇고, 아무래도 바이런 쪽은 껄끄러울 수밖에 없죠. 그러니 비다드 왕국을 통해 마라몬트로 들어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비다드 왕국은 루페른과 사이가 나쁘지 않은데다, 해적의 존재로 인해 용병을 우대하는 경향이 있죠. 아마 다이아몬드 용병패를 보여주면 지나치는 영지마다 융숭한 대접을 받으실 수 있을 겁니다.”
“귀찮은 건 질색이다.”
“네... 그리고 비다드에서 마라몬트로 들어가는 길은 육로와 해로로 나뉘는......”
나는 국경지대까지의 이동 루트 이외에도, 두 왕국 간 분쟁의 흐름과 앞으로의 판세에 대한 조언을 귀담아 들었고.
약속대로 한 시간이 지난 뒤 스티브와 헤어졌다.
#3
다음 날.
왕도 레니비아를 떠나 루페른 왕국의 북부에 위치한, 비다드 왕국과의 국경지역을 향해 홀로 여정을 시작했다.
홀로 길을 찾아가기 위해, 왕도에 존재하는 마탑 중 한 곳에서 ‘길잡이 아티팩트’를 구매했는데.
나침반과 흡사하게 생긴 손바닥만 한 크기의 이 아티팩트는, 저장되어있는 목적지의 방향을 붉은색 화살표가 가리키는 간단한 장치였고.
가격 자체는 그리 비싼 편이 아니었으나(어디까지나 아티팩트치고는), 일정 기간마다 갈아 끼워줘야 하는 마석으로 인해 유지비가 상당한 물건이었다.
홀로 여정을 시작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내 예상대로라면, 왕도 레니비아를 벗어난 이후로부터 비다드 왕국과의 국경지대에 도착하기 전까지... 화끈한 이벤트가 기다리고 있을 확률이 매우 높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북부 공작령의 외곽을 타고 흐르는 웰론강.
왕국에서 가장 긴 강 중 하나인 그곳의 강기슭에서, 잘 단련된 기도와 육체를 지닌 세 기사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왼쪽 가슴엔 골드드래곤 문양.
오른쪽 어깨엔 금독수리 문양.
이쯤 되면 정체를 숨길 생각 자체가 없다는 뜻이었다.
위어 공작가를 상징하는 ‘골드드래곤’과 공작가 오너들로 이루어진 기사단을 상징하는 ‘금독수리’.
‘하, 얼굴을 가리는 성의 정도는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대놓고 뻔뻔하게 나오니... 화도 나지 않는군.’
이건 이미 날 죽은 목숨으로 취급한다는 뜻이었다.
‘어쨌든... 이로써 배후는 확실해졌다.’
왕국의 두 공작 중 하나인 스타크 위어 공작.
그가 바로 아리엘의 오너 로빈슨 슈왈츠 이용해 나를 제거하려 했던 인물이었다.
파아아아아앗
파아아아아앗
파아아아아앗
6써클 마법사이자 최상급 엑스퍼트로 알려진 이쪽의 실력을 경계한 것인지.
세 오너는 가타부타 말도 없이 기간트를 소환했다.
1400rp의 코페시 2기와 1800rp의 글라우디스 1기.
“뭐, 저만하면...”
크로스보우의 데뷔전 상대로 나쁘지 았았다.
나는 오른쪽 손목에 자리한 네스트에 마력을 불어넣었고.
파아아아아앗
옅은 빛과 함께 신장 7,2미터, 무게 9.3톤의 강철 거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테네시.””
적 오너들과 나는 동시에 기간트 탑승 주문을 외웠다.
그리고 잠시 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루페른 왕국의 젖줄이라 불리는 웰론강의 강변에서.
역사에는 기록되지 않을...
3:1의 기간트 전투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