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투기 버리고 기간트 탑니다-59화 (59/169)

59화 카보넬 상단(1)

#1

전투가 끝난 강가에는 적막만이 가득했다.

10톤이 넘는 고철 덩어리들이 대지 위를 나뒹굴고, 그 수십 배에 달하는 강물이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그대로 얼어붙어 내려꽂히는 등의 난리가 벌어진 직후였으니.

몬스터건 짐승이건, 숨 쉬는 것조차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긴 했다.

‘딱히 의도한 건 아닌데, 계속해서 인간을 죽이게 되는군.’

솔직하게 말하자면, 인간을 죽이는 것에 대한 부담 따위는 진즉에 내다 버린 지 오래였다.

제우스와 함께 던전 브레이크가 터진 지역을 휩쓸고 다니기 시작한 이후로, 나는 무수히 많은 암살 위협에 시달려야만 했었다.

그중 가장 심했던 놈들은 몬스터가 세상을 정화하기 위해 신이 보낸 사자라고 주장하는 광신도 놈들이었는데.

그 ‘교’에 가담한 미친놈들이 전 세계적으로 물경 오백만 명이 넘었었다.

그들 이외에도, 나를 끌어들이려다 실패한 세계적인 범죄조직이나 몇몇 국가의 독재자들 역시 때때로 암살자를 보내오곤 했었다.

물론 확실한 증거가 발각될 경우, 나는 수많은 반대를 뿌리치고 녀석들의 머리 위에 제우스를 띄우는걸 주저하지 않았고.

내 쌍둥이 동생들의 납치를 시도한 ‘교’의 본거지에 폭격을 퍼부었을 적에는, 목숨을 잃은 광신도만 수백의 헌터 포함 4천여 명에 이른 적도 있었다.

당시 엄청난 비난 여론이 들끓었었지만, 던전 브레이크로부터 자유로운 국가는 없었고. 각국 정부의 노력으로 비난 여론은 금세 잦아들 수밖에 없었다.

그런 과격한 대처와 더불어, 나와 함께 유이한 ‘반쪽짜리 S급 헌터’라 불리는 ‘수호기사’ 크리스티나 에반스의 각성 이후로는 나에 대한 암살 시도는 자취를 감추었다.

그녀의 특성은 ‘단 한 사람’을 지키는 일에 있어서만큼은 무적에 가까운 힘을 발휘하는 것이었는데.

계약자(나)와의 ‘수호 조건’이 충족된 상태의 그녀를 상대할 수 있는 S급 헌터는 전 세계를 뒤져봐도 고작 셋 정도에 불과했고, 그들은 하나하나가 세계최강이라 불리기에 모자라지 않은 인물들이었다.

한마디로 ‘수호기사로서’ 그녀의 무력은 절대적.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반쪽짜리’라 불리었던 이유는... 그 힘이 ‘동족’에게만 발휘된다는 특성 때문이었다.

‘뭐, 그 특성이 몬스터에게도 적용되었더라면... 세계최강의 자리는 크리스틴의 것이었겠지.’

나는 잠시 떠올렸던, 지구에 있을 누군가의 모습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남아있는 전투의 흔적이라곤 어느새 진창으로 변한 대지와 처참한 상태의 시신 세 구(스킬에 적중당한 정보 요원 셋은 시체조차 온전히 남기지 못했다)뿐이었다.

잠시나마 고향을 떠올린 탓일까?

여기저기 널부러져 있는 시신들이 눈에 거슬렸다.

“쩝, 이 녀석들이야 명령을 따른 것뿐일 테니...”

처음에는 땅속에 묻어주기라도 할 생각이었다.

마법을 이용하면 내겐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대로 두면 공작측 인원들이 시신을 수거해 가족들의 품으로 돌려보낼 터였다.

“록월.”

드르르르르르륵

나는 ‘염동력(C)’ 스킬을 이용해 세 오너의 시신을 한곳에 모은 다음, 석벽을 일으켜 사방을 막았고.

쿠우웅...

다섯 번째로 생성한 석벽을 잘라 지붕으로 삼았다.

몬스터와 짐승들로부터 시신의 훼손을 막아줄 임시 무덤이 완성된 것이다.

‘......’

나는 완성된 돌무덤을 일별한 뒤.

주저 없이 발걸음을 돌려 목적지를 향한 여정을 재개했다.

#2

배후가 북부 공작가라는 걸 알게 된 이상.

이동 속도를 조절할 이유가 없어졌다.

위어 공작을 단죄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최상급 엑스퍼트이자, 무려 루페른 왕국에도 단 5대 밖에 없는 초고성능 기간트 ‘배틀엑스(2500rp)’의 오너인 스타크 위어 공작을 응징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공작을 암살하는 것이라면,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을 테지만...”

그 이후 맞닥뜨릴 공작가의 전력을 한꺼번에 상대하는 건 크로스보우를 획득한 나로서도 쉽지 않은 일.

위어 공작가 보유한 기간트는 가장 등급이 낮은 기체가 현 루페른 왕국의 주력기인 코페시(1400rp)일 정도로 질이 높았고.

브라이드 백작의 전용기였던 ‘브로드(2000rp)’ 역시 무려 2기나 보유하고 있었으며, 그 오너들의 수준은 왕실 근위기사에 못지않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공작가를 상대하는 건... 아직은 불가능에 가깝지.”

하지만 내가 다시 루페른 왕국으로 돌아오는 그 날.

이번 일의 대가를 톡톡히 받아낼 작정이었다.

나는 격납고에서 바이크를 꺼내 시동을 걸었다.

최대한 빨리 국경지대에 도달한 뒤, 비다드 왕국으로 넘어갈 작정이었다.

공작가에서 내 행방을 찾으려 들 테지만.

그들이 국경지대까지 수색 범위를 넓혀갈 때쯤이면, 나는 이미 비다드 왕국에 발을 들인지 오래일 터였다.

스아아아아아아아...

미약한 엔진음과 함께 엄청난 속도로 달리기 시작하는 바이크.

나는 시원한 강바람을 만끽하며 왕국의 북부를 향해 출발했다.

#3

북부 공작령에서 국경지대까지는 빠른 말을 타고 달려도 최소 이틀 이상이 걸리는 거리였다.

하지만 도로 사정에 상관없이 일직선으로 내달린 데다, 바이크로 이동할 수 없는 곳은 ‘루흐의 날개’를 이용한 비행으로 건너뛰어 버리니... 고작 열한 시간의 주행을 끝으로 왕국의 국경지대에 도착할 수 있었다.

국경지대라고는 하지만, 삼엄한 경계가 이루어지는 바이런 왕국 방향과는 달리, 우호 국가인 비다드와의 국경지대는 이전까지 보아온 루페른 왕국 여느 영지의 풍경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다만 관문의 엄청난 크기와 그곳을 드나드는 수천의 인파는, 이곳이 평범한 영지의 검문소가 아님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 해주었다.

위어 공작가의 손길이 이곳까지 미치기에는 시간상 불가능에 가까웠기에, 나는 주저 없이 관문을 지키는 병사에게 용병패를 내밀었다.

흠칫

휘황찬란한 다이아몬드 등급 용병패를 확인한 병사가 몸을 잘게 떨었다.

“화, 확인되셨습니다.”

“음...”

나는 병사가 건네는 용병패를 받아든 다음, 앞선 사람들의 뒤를 따라 거대한 관문을 빠져나왔다.

노련한 용병 스티브의 말에 따르면... 루페른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다른 두 왕국, 바이런이나 베로나로 넘어가는 관문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이런저런 귀찮은 절차가 필요하지만.

루페른의 오랜 동맹국이자 평상시 용병들의 수요가 엄청난 비다드 왕국의 관문을 통과하는 데에는, 용병패를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라고 했었다.

“과연, 녀석의 말은 틀리는 법이 없군.”

혹시라도 언젠가 세력을 일구게 된다면, 반드시 스카웃 해오고 싶을 정도로 유능한 녀석이었다.

본인은 전혀 모르고 있었지만, 파일럿 재능마저 B+(최대치 79, 공작가 금독수리기사단 부단장 존 위크스와 동일)급으로 제법 준수한 편이었으니 여러모로 쓸모가 있을 게 분명했다.

“뭐, 이곳에 눌러살게 됐을 때나 생각해볼 일이지만...”

비다드 왕국은 마라몬트 왕국과 한뿌리에서 갈라져 나온 국가로, 대륙 서부의 해양강국이었다.

보통 내전으로 갈라선 나라들은 사이가 나쁜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비다드 왕국과 마라몬트 왕국은 조금 달랐는데.

마라몬트 왕국은 철천지원수인 사막 왕국 카이샨과의 오랜 전쟁으로 인해 등 뒤에 적을 만들 여유가 없었고.

비다드 왕국 역시 바다 건너편 ‘마라’ 섬에 자리를 잡은 해적왕국 ‘바올린’과 분쟁을 겪고 있었기에, 같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마라몬트 왕국과 대립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거리상의 이유로, 해적들로부터 훨씬 더 많은 피해를 입는 쪽은 비다드 왕국이었다. 하지만 해상무역이 국가 수입의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는 마라몬트 왕국 역시, 해적들의 습격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고.

두 나라는 해적왕국 ‘바올린’이 탄생한 이래로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대륙 서부 해양의 패권을 지켜내기 위한 동맹을 공고히 유지해오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스티브의 조언대로, 바닷길을 이용해 마라몬트의 북부 지역까지 이동하기로 했다.

비다드 왕국 남부에서 사막왕국 카이샨과의 분쟁이 벌어지고 있는 마라몬트 왕국 북부까지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빠른 루트이기도 했거니와...

‘보통 대륙 북부나 동부로 향하는 비다드 왕국의 배들은 마라몬트 왕국에 최소 한 번은 들리기 마련이죠. 기착지 중에는 북부 국경지대와 가까운 영지나 도시도 있을 겁니다. 긴 거리를 이동하는 만큼 선단의 규모는 아마 보통이 아닐 테죠. 그리고 배에 실려있는 화물의 가치가 높을수록, 실력 있는 용병에게 쓰는 돈이 아깝지 않은 법이니... 아마도 스노우님이라면, 엄청난 조건으로 계약하실 수 있을 겁니다.’

루페른 왕국에서는 불가능했지만, 오르비스 대륙에는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기간트를 구입할 수 있는 곳도 존재했다.

물론 그런 곳에서 살 수 있는 기간트는 동급 대비 매우 비싸거나 성능이 형편없는 경우가 많았지만, 내 경우엔...

“뭐, 가격은 딱히 고려 대상이 아니니까.”

정말로 멋진 기간트라면 바가지를 얼마나 뒤집어쓰건 상관없었다.

하지만 그러려면 정말로 많은 돈을 벌어야만 했고.

내가 두 왕국의 전쟁터를 첫 번째 목적지로 정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그 ‘돈’을 벌기 위함이었다.

나는 관문을 통과하는 이들 중, 꽤 여유 있는 분위기를 풍기는 청년에게 천천히 접근했다.

“뭐 하나만 묻지.”

“흐엇, 뭐, 뭡니까?”

깜짝 놀란 그가 내게로 고개를 돌리며 반사적으로 물었고.

동시에 호위인듯한 사내 셋이 무기 손잡이에 손을 올리며 민첩하게 그의 앞을 막아섰다.

일단 접근을 허용하는 것 자체가 민첩하다고 하기에는 좀 뭣하긴 하지만... 이는 내게서 마나도, 오러도, 심지어 미세한 살기조차도 느낄 수 없었을 터였기에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애초에 내가 이 자를 선택한 이유는 호위들의 수준(물론 겉보기에)이 제법 그럴듯해 보였던 데다, 그중 한 녀석의 옷소매에 가려져 있는 네스트를 알아차렸기 때문이었으니까.

호위들이 살벌한 기세를 풍기며 눈알을 부라렸고.

청년은 거대한 덩치들의 뒤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그리고는 이내 무언가를 발견한 듯, 눈을 휘둥그레 뜨며 재빨리 앞으로 나섰다.

“머, 멈춰! 티렐, 공격하지 마!”

“수상한 자입니다. 도련님.”

“도련님이라고 부르지 말... 아니, 이게 중요한 게 아니고...”

목소리를 높였던 청년이 티렐이라 불린 호위에게 다가가 손으로 귀를 가리며 속삭였다.

하지만 일반인에 비해 월등한 감각을 지닌 내 귀에는 그의 목소리가 작지만 선명하게 들려왔다.

“손목! 저자의 손목을 보라고!”

“...네? 손목이요? 헉! 오, 오너...”

이 시기의 오르비스 대륙 남부는 여름의 한가운데를 지나고 있었기에, 현재 내 복장은 평범한(이 세계 기준) 반팔 셔츠와 긴바지였고.

그로 인해 손목에 차고 있는 네스트가 그대로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기간트의 주인임을 (암살등의 이유로 인해)철저히 숨기려는 오너도 적지 않았지만, 용병 오너로서 이름값을 높이려는 내게는 해당되지 않는 사항이었다.

“내가 눈깔 부라리는 것도 사람 봐가면서 하라고 했냐, 안 했냐?”

“죄송합니다, 도려...”

“쓰읍!”

“행수(상행의 총책임자)님...”

“어째 넌 오너가 되고도 변하는 게 없냐? 마그넷님께 말씀드려서 더 혹독한 훈련을...”

“허억! 제, 제발 그것만은... 그렇지 않아도 석 달 만에 수련장을 벗어난 거란 말입니다.”

“그게 싫으면 항상 침착하게 행동......”

내 존재를 잊어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호위와 한참을 쑥덕거리던 청년.

그가 문뜩 정신을 차린 듯 흐트러진 복장을 점검하더니, 다시금 앞으로 나섰다.

“크흠, 죄송합니다. 조금 전에는 제가 놀라는 바람에 결례를 범했군요. 저는 카보넬 상단, 이펜타르크 제국 상행의 총책임자인 로이얀 카보넬이라고 합니다.”

나는 문뜩 스티브의 마지막 조언을 떠올렸다.

‘비다드에서 가장 큰 규모의 상단이라면 세 곳을 꼽을 수 있습니다. 미트리와 에머슨 그리고 카보넬이죠. 이중 미트리는 해양 운송을 하지 않으니 에머슨과 카보넬, 둘 중 한 곳의 배를 타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네? 아, 둘 중 한 곳만 고르라면... 아무래도 세간의 평이 좀 더 좋은 카보넬이 나을 겁니다.’

카보넬 상단의 위치를 묻기 위해 붙잡은 녀석이 그곳의 관계자일 확률은 얼마나 될까?

더군다나 성이 카보넬?

그러고 보면 이 곳에 떨어진 이후로...

운 하나는 꽤 좋은 것 같단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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