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카보넬 상단(3)
#1
스킬에 의한 버프로 민첩 스텟을 2배 이상 뻥튀기한 크로스보우는 마치 새처럼 가볍게 하늘 위로 솟구쳐 올랐다.
이후 상승에서 하강으로 운동에너지의 방향이 전환되는 순간.
중력 스킬과 강철피부, 경화 스킬 등이 적용된 채 내리꽂히기 시작하는 기간트의 몸뚱어리는.
그 자체로 거대한 포탄과 다를 바 없었다.
콰지직
스킬로 인해 증가한 무게에, 낙하 에너지까지 더해진 기간트의 몸통 공격에 직격당한 해적선은 침몰할 수밖에 없었고.
곧바로 두 동강 난 배의 잔해를 밟고 뛰어오른 크로스보우는.
타아앗
또다시 새로운 배의 갑판 위로 내리꽂혔다.
콰지직
무척이나 단순한 공격 방법임에도, 해적들은 한동안 아무런 대응을 하지 못했다.
콰지직
콰직
콰지지직
그렇게 연달아 다섯 개의 전투선이 똑같은 방법으로 박살 났고.
드디어 해적선들의 반응에 변화가 생겼다.
파아아아앗
파아아아앗
파아아아앗......
적 전열의 최후방에는 다른 전투선들에 비해 3배 이상 커 보이는 거대한 배가 자리하고 있었는데, 누가 말해주지 않더라도 해적들의 기함(旗艦)임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옅은 빛과 함께 그 거대한 함선의 갑판에 3기의 기간트가 모습을 드러냈고, 기함보다는 작지만 다른 전투선보다는 훨씬 더 큰 5척의 해적선에서도 각기 1기의 기간트가 소환되었다.
탓
나는 여섯 번째 제물(마법에 의해 박살 난 배를 포함하면 아홉 번째)이 될 예정이었던 배의 마스트 위에 내려선 채 아래를 바라보았다.
“여덟 기? 생각보다 많은데? 그나저나... 죄다 처음 보는 기간트들이로군.”
나름 기간트를 엄격하게 통제하는 루페른 왕국이 동맹국의 적이자 해적 소굴인 바올린에 기간트를 판매할 리는 없으니, 루페른제 기간트가 없으리란 건 예상했던 바였지만.
그간 보아온 이펜타르크나 드워프, 엘프제 기간트 역시 모습을 찾아볼 수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하긴, 3기 정도를 제외하면 전부 폴암과 사이즈가 비슷하거나 작은 녀석들이니까.”
내가 목격한 타국의 기간트 중, 이펜타르크 제국의 ‘제페토’를 제외하면 기준 출력(1000rp) 이하의 기체는 없었다.
폴암보다도 작은 사이즈를 지닌 고출력 기간트가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그런 건 엄청난 실력을 지닌 오너의 ‘유별난 취향’으로 인해 만들어지는 유니크 기체로, 전 대륙에 채 5기조차 없는 전설적인 존재라고 했다.
“해적 따위가 그런 기간트를 가지고 있을 리 없겠지.”
그때, 가장 거대한(크로스보우와 비슷한 신장) 3기를 제외한 나머지 기간트들의 손에 무언가가 소환되었고.
철컥
5기의 기간트는 약속이라도 한 듯, 재빨리 소환된 무기를 자신의 손목에 달린 잠금장치에 연결했다.
특성의 영향으로 독수리를 능가하는 시력을 지니게 된 내 눈에는 그것들이 무엇인지 선명하게 보였다.
“그물?”
이것들이... 날 상대로 낚시라도 해볼 셈인가?
#2
촤아아아아아악
나는 기간트 포탄이 되어 배를 박살 내는 일을 멈춘 뒤.
해적들이 기간트와 한바탕 어울려 주기로 마음먹었다.
대기간트 전투가 ‘파일럿(S)’ 특성의 고유스킬들을 성장시키는 가장 빠른 수단이라는 걸 알게 된 이상, 이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대략 3분가량 해적들의 기간트들을 상대해본 결과.
왕국의 일개 공작령 규모에 불과한 해적들이 비다드, 마라몬트와 함께 대륙 서부 해양의 패권을 다투는 일이 가능했던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내가 홀로 돌출되어있는 해적선 위의 기간트에게 다가가려 하자, 가까이 접근해 있던 다른 해적선의 기간트가 자신의 손목에 연결된 그물을 흩뿌렸다.
기간트의 마력 효율 때문인지, 오너의 역량 때문인지 꺼질 듯 희미한 빛을 발하는 거대한 그물.
카아아아앙
하지만 대체 무슨 재질로 만들어진 건지... 제대로 마력을 품지 못한 것이 분명한데도, 마력을 듬뿍 머금은 크로스보우의 칼질에 완전히 잘려 나가지 않았다.
촤아아아아앗
타아아앗
나는 반대편에서 덮쳐오는 또 다른 그물을 피하기 위해 내려섰던 해적선의 선미를 박차며 뛰어올랐다.
콰직
그 충격에 해적선의 선미가 박살났지만, 당연히 그정도로 배가 가라앉지는 않았다.
“그나저나 저것들... 배 위에서 잘도 움직이네.”
이동하는 배 위에서 무겁고 거대한 기간트의 몸을 움직인다는 것 자체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이는 어떻게든 훈련으로 극복 가능한 일이라 치부한다면.
‘왜 배들이 부서지지 않는 거지?’
왕국을 대표하는 거상이 애지중지하는 무역선조차, 대부분 나무를 재료로 만들어지는 세계다. 고작 해적 따위가 배를 통짜 쇠로 만들었을 리는 없을 테고...
나는 이리저리 해적선들을 건너뛰며 기간트들의 그물 공격을 피해냈고.
그 사이에 적 기간트들의 움직임을 관찰했다.
그러자 오래 지나지 않아 한 가지 특이점을 발견할 수 있었는데.
적 기간트들이 기동하는 해적선의 갑판 일부가 재질을 알 수 없는 금속으로 덮여 있고.
기간트들은 가능한 한 그 금속만을 밟으며 움직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저 덩치들의 무게를 버티는 걸로 봐선... 뭔가 마법적인 처리를 했거나, 갑판 밑에 하중을 버틸 수 있는 무언가를 채워 넣은 건가?’
하지만 아무리 그런 장치들을 해놓았다 한들, 저 정도 수준의 움직임과 유기적인 연계는 보통의 훈련으로 가능한 게 아니었고.
이는 기간트들의 성능에 비해, 오너들의 재능이나 실력이 매우 특출나다는 사실을 시사하고 있었다.
‘오너들의 훈련병 프로필이 궁금하군.’
물론 그들의 프로필을 확인해볼 기회는 없을 터였다.
저들 모두는 이곳, 대륙 서부의 바다 한가운데에서 인생의 마지막을 맞이하게 될 테니까.
크로스보우와 비슷한 신장에 훨씬 더 날렵한 몸매를 지닌 3기의 기간트는 여전히 기함의 갑판 위에서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저것들의 역할은 그물을 다루는 기간트들과는 다른 듯했고, 아무래도 그것은...
‘수중에서 자유로운 움직임이 가능하다는, 그 기체일 확률이 높겠군.’
아마도 그물에 휘말린 기간트가 바다로 추락하고 나면, 저 녀석들이 뛰어들어 마무리하는 것이 해적들이 사용하는 전술인 듯했다.
확실히 효율적인 방법임은 분명했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아무리 고성능 기간트라 한들, 훈련이 되어 있지 않은 이상 배 위에서 제대로 된 움직임을 보여줄 수 있을 리 만무했고.
바다로 떨어진 이후라면 말할 필요조차 없었다.
그러니까... 어디까지나 일반적인 오너의 경우라면 그랬을 것이다.
나는 다시 한번 ‘바람의 인도’와 ‘매토템’ 스킬을 발동시켜 민첩 스텟을 뻥튀기했고.
연이어 중력 조절 스킬로 기간트의 무게를 줄인 다음.
‘고양이 발걸음’ 스킬까지 사용해 기동으로 인한 반동을 최소화시켰다.
그리고는...
타앗
타아앗
타앗
빠르게 해적선들의 갑판들 사이를 넘나들기 시작했다.
적 기간트들과는 달리, 아무 곳이나 밟으며 기동하고 있음에도 배의 파손은 미미한 정도에 그쳤다.
나는 조금 전 크로스보우의 움직임을 방해하기 위해 그물을 던졌던 기간트를 향해 달려들었다.
[......!]
촤아아아아아악
너무나 빠른 속도에 놀랐음인지, 적 기간트는 제대로 겨냥할 새도 없이 그물을 뿌렸고.
“투척, 인첸트, 에어 블레스트.”
나는 날아오는 그물을 향해 스킬이 인첸트 된 검을 집어던졌다.
소용돌이치듯 회전하며 날아간 검은 눈 깜짝할 새에 그물과 충돌했고.
뻐어어어어어어어엉
굉음과 함께 엄청난 에너지를 발산했다.
그러자 손목이 연결되어 있던 적 기간트가 검을 옭아맨 채로 엉망이 된 그물과 함께 허공으로 떠올라.
푸아아아아아악
바닷물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나는 즉시 해적선의 갑판을 박차며 물속으로 뛰어드는 동시에.
“소환 해제, 소환.”
그물에 엉켜있는 검을 소환 해제한 뒤, 곧바로 다시 소환.
중력 조절 스킬과 염동력 스킬을 이용해 적 기간트가 가라앉는 속도를 늦춘 다음.
물에 뛰어든 추진력과 크로스보우의 무게를 이용해 빠르게 적 기간트에게 다가가.
콰드드득
허우적거리는 기간트의 흉부에 붉은 기운이 선명한 검을 찔러넣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첨벙
첨벙
첨벙
적 기함에 있던 3기의 기간트가 물속으로 뛰어들더니.
나를 향해 빠른 속도로 접근해 오기 시작했다.
#3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었지만, 바올린 왕국의 수뇌부 중에는 소수의 인어족이 포함되어 있었다.
기본적인 신체 능력이나 마력에 대한 재능이 인간에 비해 월등했던 그들은 바올린 왕국이 성장하는 데 커다란 공헌을 해왔는데.
특히 백여 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발전해온 (바다에서의) 기간트 운용술은 절대적인 전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다른 왕국들과의 해양 패권 경쟁을 가능케 했던 가장 큰 요인이라 할 수 있었다.
이는 인어족 오너들의 종족 특성을 기간트를 통해 일부나마 발현할 수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로.
그 비결은 ‘수중 호흡’과 물고기에 버금가는 ‘물속에서의 움직임’에 있었다.
물론 기간트에 탑승 한 채로는 본래 능력의 3할가량만 발휘할 수 있었지만, 그 정도만으로도 물에 빠지는 순간 비싼 금속 덩어리로 전락해 버리는 다른 왕국의 기간트들을 압도하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게다가 더욱 치명적인 문제는 바닷속에서 이루어지는 함선에 대한 기간트의 공격이었다.
5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이를 방어할 수단이 딱히 없었던 비다드와 마라몬트 왕국의 상선과 군선들은 그저 바올린의 선단을 피해 다니기 급급했었기에.
그 시절 대륙 서부 바다의 패자는 바올린 왕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었다.
두 왕국이 엄청난 인력과 재화를 쏟아부어 개발해낸 실드 제어장치와 바다 속 기간트에게 타격을 줄 수 있는 공격 수단을 개발해 낸 이후, 해양 패권국의 위치에서 내려 올 수밖에 없었지만.
실드 제어장치라면 몰라도 무려 7써클 마법이 인첸트 된 스크롤과 엄청난 양의 마석을 필요로 하는 대기간트용 (수중)공격 무기의 경우엔... 그걸 사용하는 순간, 어지간한 규모의 상행은 적자를 볼 각오를 해야만 할 정도로 무지막지한 재화를 잡아먹는 괴물이었기에.
바올린의 해적들은 여전히 두 왕국과의 패권 경쟁을 지속할 수 있었다.
인어족 라딘은 현 바올린 왕국의 오너 중 ‘대기간트용 수중 마력포’의 위력을 실제로 겪어본 유일한 인물이었다.
장생종인 그의 나이는 올해로 79살이었고.
30여 년 전 오너로서 나선 네 번째 전투에서 비다드 해군의 마력포에 직격당해 기간트의 내부장갑까지 타격을 입은 뒤, 겨우 목숨만 건졌었던 경험이 있었다.
물론 현재 계약을 맺고 있는 출력 1300rp의 ‘그리스(이펜타르크제)’라면 그 정도로 심각한 피해를 입지는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당시 막 오너가 된 라딘의 기간트는 고작 출력 800rp인 ‘렘스턴(임페르노제)’에 불과했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가끔 그날의 악몽을 꾸곤하는 라딘이었지만.
오늘부로 그를 찾아오는 악몽의 내용은 달라질 것이 확실했다.
물론...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말이다.
콰드드득
“빌어먹을! 말도 안 돼! 저기 타있는 놈이 인어족이라도 된다는 거야? 아니, 설령 인어족이라도 저런 움직임은 불가능하다고!”
적 기체는 너무나 유명한 루페른의 스테디셀러 기간트 크로스보우였다.
튼튼한 내구력과 동화율 보정 기능으로 인해, 대륙 여러 국가에 날개 돋힌 듯 팔려나간 기간트였지만.
해양 국가인 비다드나 마라몬트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기체였는데.
그 이유는 크로스보우가 중갑형의 전형과도 같은 기간트였기에. 다른 기간트들에 비해 배 위는 물론, 물속에서의 움직임 역시 더욱 굼뜰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체 어떻게 생겨 먹은 오너가 탑승하고 있는 것인지.
인어족인 자신들보다 몇 배는 빠르고 유려한 움직임을 선보이며 아군의 기간트를 박살 내는 것은 물론, 틈틈이 전투함의 밑창에 구멍을 내 배를 가라앉히는 여유까지 보여주고 있었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대체 저 마법은 뭐고, 정령은 또 뭐냐고!”
인어족인 만큼 물의 정령과 계약한 이들이 적지 않았고, 라딘 역시 중급 물의 정령을 소환할 수 있었지만...
“저건 운디네잖아? 그런데 저 크기는...”
1.5미터에 가까운 거대한 운디네가 크로스보우의 주위를 맴돌고 있었고, 그녀가 일으키는 소용돌이들로 인해 적 기간트에는 접근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상태였다.
그리고 그런 정령의 보호를 받으며 엄청난 마법을 연달아 날려대는 크로스보우.
이미 자신과 함께 뛰어들었던 두 동료는 상대의 마법과 검에 의해 물고기 밥이 되어버린 상황이었기에.
바올린의 오너 중 서열 3위인 라딘은 크로스보우에게 접근하기 위한 최후의 수단으로 오버클럭을 선택했다.
1169rp, 1188rp, 1214rp...... 1239rp
출력이 1230rp를 넘어서는 순간.
깜빡, 깜빡......
라딘의 전면 시야에 새빨간 빛이 점등하기 시작했다.
이는 한계 출력을 넘어선 기간트가 보내오는 경고였고.
그가 다른 선택을 내릴 수 있는 마지막 순간이기도 했다.
하지만 라딘은 결정을 되돌리지 않았다.
“어차피 저 괴물을 이길 방법은 없어.”
그는 이를 악물며 전력을 다해 기간트를 전진시켰다.
이 순간, 한계에 이른 오버클럭으로 인해 인어족의 특성이 80% 가깝게 발휘되었고.
그리스의 속도는 종전의 3배에 이를 정도로 빨라졌다.
“같이 죽자아아아아아아아!”
그리스의 손에 들린 거대한 작살이 선명한 하늘색 빛을 발산하기 시작했다.
크로스보우와 그리스 간의 거리는 이제 고작 10여 미터.
그리고 그 순간.
스르르르르르...
필사의 전진을 감행하던 라딘의 앞에 높이 10여 미터, 두께 5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물의 방패가 모습을 드러냈고.
출렁
기간트 그리스는 전진하던 에너지로 인해 물로 이루어진 방패에 깊숙이 파묻혀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이내...
스르르르르르르...
또 하나의 물의 방패가 생성되며 그리스의 뒤를 막아버렸다.
“이, 이게 뭐야? 몸이 움직이질... 으아아아아아아아!”
거대한 타원형 구에 갇혀 옴짝달싹 못 하게 되어버린 그리스.
그리고 이미 한계점을 지난 지 한참인 기간트의 마력엔진은...
쿠우우우우우우우웅
더이상 견디지 못한 채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고.
잠시 뒤 바닷속에는...
여러 겹의 실드와 정령의 보호를 받는 크로스보우 이외에는.
그 어떤 기간트의 흔적도 남아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