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투기 버리고 기간트 탑니다-63화 (63/169)

63화 저울질(1)

#1

비다드 왕국을 떠난 지 정확하게 9일째 되던 날.

우리는 마라몬트 왕국의 최북단 항구가 존재하는 로블 영지에 도착했다.

항구에서 간단한 검문이 있긴 했지만, 카보넬 상단의 보증과 다이아 등급 용병패로 인해 귀찮은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오히려 영지의 고위 귀족이 찾아와 영주와의 만남을 주선하는 등 호의를 보였지만, 바쁘다는 핑계로 그에 응하지는 않았다.

“정말 감사했습니다, 스노우님.”

“계약을 이행했을 뿐이다.”

“그렇다 한들, 은혜를 입은 건 은혜를 입은 것이지요. 스노우님이 계시지 않았다면 상상하고 싶지도 않은 끔찍한 일이 벌어졌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저 역시 이 자리에 서 있지 못했을지도 모르지요.”

로블 영지에 도착하기까지 항해 내내 살가운 태도를 보여주었던 상단의 후계자 로이얀 카보넬은 못내 아쉬운 표정을 지우지 못하며 마지막 인사를 건네왔다.

눈치로 봐서는 아마도 영입 제안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것 같았는데, 어지간한 제안으로는 나를 잡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듯했다.

만약 정말로 영입 제안을 해왔다면, 최소 월 30만 골드 수준의 역제안으로 기겁하게 만들어 줄 생각이었는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로이얀 카보넬은 영입에 관한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혹시라도 이펜타르크 제국에 오실 일이 있으시면 저희 상단 지부를 꼭 찾아주십시오. 상단의 최대 거래처가 이펜타르크 제국으로 바뀐 터라, 아마 몇 년은 제국에 머물 것 같거든요.”

“뭐, 기회가 된다면.”

“하하하하... 그럼, 다시 만나길 고대하고 있겠습니다.”

깊숙이 허리를 숙이며 마지막 인사를 마친 로이얀 카보넬이 상단 지부로 떠나갔고.

잠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난.

상단 지부에 묵어도 좋다는 로이얀 카보넬의 제안을 거절하고 소개받은, 로블 영지 최고의 여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2

지금으로부터 90여 년 전.

사막 왕국 카이샨은 기간트용 마력엔진을 이용한 시추 장비의 개발로 왕국의 고질적인 물 부족을 해결할 수 있었다.

애초부터 마라몬트 왕국에 비해 2배 이상 큰 영토를 가지고 있던 그들은, 지하수를 통해 물 부족을 해결한 지 고작 수십 년 만에 인구수가 3배 가까이 폭증했고.

이는 곧 급격한 국력의 성장을 의미했다.

그리고 강대해진 그들은 자신들의 힘을 외부로 발산하기 시작했는데.

하필 국경을 맞대고 있는 네 국가 중 무려 세 곳(이펜타르크 제국, 드워프 왕국, 샌포드 왕국)이 기간트 생산 시설을 갖춘 강대국이었기에.

그들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남은 한 곳.

마라몬트 왕국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성인 남자 = 전사’라는 공식이 성립할 정도로 호전적인 민족성을 지닌 사막 왕국의 수뇌부.

그들은 자신들이 가지지 못한 ‘바다’라는 자원의 보고이자 해상 운송로를 보유한 마라몬트 왕국의 영토에 군침을 흘렸고.

오랜 준비기간을 거쳐 전쟁을 일으킨다.

첫 전쟁 이후, 두 왕국은 50년간 무려 3번의 전면전을 치렀는데.

그중 두 번은 서로 간의 왕도가 함락될 위기에 처할 만큼 극단적인 양상으로 치달았었고.

이때 승기를 잡았었던 국가는 지나치리만큼 철저하게 상대를 약탈하고 핍박했다.

자연히 두 왕국은 철천지원수가 될 수밖에 없었고.

그 원한은 죄없이 선빵을 얻어맞은 마라몬트 왕국 쪽이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8개 부족의 연합체 성격이 강한 사막 왕국 카이샨은 대륙의 국가 중 문명 수준이 가장 원시적이었기에.

그만큼 더 흉포하고 잔인했다.

마라몬트 왕국인들은 ‘카이샨 방향으로는 오줌조차 누지 않는다.’라는 말을 습관처럼 입에 달고 다녔고.

카이샨에는 ‘마라몬트놈들의 가죽을 벗겨......’ 로 시작되는 수십 개의 격언이 존재할 정도였다.

그런 두 왕국 사이에...

또다시 거대한 전쟁의 불씨가 타오르기 시작했다.

#3

“......그럼 정말로 심각한 쪽은 동부 국경이 아니라 서부 국경이라는 뜻이로군.”

“그렇다니까.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더라고. ‘서부 국경’이 ‘서부 전선’으로 바뀔 날이.”

“용병들의 몸값이 크게 오르겠군. 슬슬 그쪽으로 움직여 볼까?”

“헛소리하지 말고 하던 호위질이나 계속해. 사막 애들이 얼마나 무서운지 몰라서 그래?”

“그렇게 몸을 사려서야, 어느 세월에 큰돈 한번 만져보겠어? 어차피 이 짓을 시작할 때부터, 목숨은 내놓은 거나 마찬가지였다고.”

“하, 그런 놈이 벨라크(몸 길이가 5미터에 이르는 4족 보행 상급 몬스터)를 만났다고 눈물 콧물 질질 짜내면서 도망쳤냐? 그것도 의뢰주보다 먼저?”

“그, 그건! 젠장, 그땐 너도 같이......”

로블 영지에서의 3일 차 저녁.

나는 일과를 끝낸 인간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한, 이 영지의 가장 큰 펍에 자리를 잡고 앉아 맥주를 홀짝이는 중이었다.

인터넷은커녕 신문이나 전화기조차 존재하지 않는 이곳에서, 외부의 소문이나 정보를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수단은 술자리에서 떠들어대는 상인이나 용병들의 ‘입’이었다.

나는 2일 차인 어제에 이어, 오늘도 이곳에 앉아 주변에서 들려오는 이야기들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물론 기본적인 정보는 로이얀 카보넬의 도움으로 대부분 알고있는 상황이었지만.

이 순간 들려오는 이야기 중에는 거대한 규모의 상단조차 아직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팔딱팔딱 살아 숨 쉬는 신선한 정보들도 존재했다.

이를 테면...

“가빈 올맥이 카이샨 왕국에 붙었다더군.”

“가빈 올맥이라면... 샌포드의 용병 오너?”

“맞아, 자벨린(샌포드제 출력 1700rp 기간트)의 주인이지.”

“이상하군. 사막 애들은 드워프 이외엔 용병 오너와 계약하지 않는 걸로 아는데...”

“무조건 받지 않는 건 아니었던 것 같아. 단지 아무나 받지 않았던 것뿐이지. 지금은 전면전이 코앞까지 다가온 상황이니... 이것저것 가리는 게 이상한 일 아니겠어? 아마 지금이라면, 어지간한 용병 오너는 다 받아 줄지도.”

“다른 건 몰라도 그쪽이 보수 하나는 후하니까.”

”게다가 이건 확실하지 않은 소문이긴 한데... 이펜타르크의 ‘하얀 늑대’도 카이샨에 붙었다는 이야기가 돌고 있어.“

“하얀 늑대? 크샨트 제국의 근위기간트를 때려잡았다는 그 미친 용병 오너?”

“맞아, 디오메아(이펜타르크제 출력 2000rp 순백의 기간트)의 오너이자 최상급 엑스퍼트인 그 괴물.”

“대체 얼마를 제시했길래 그런 실력자가 사막으로...”

“소문으로는... 최소 50만 골드를 보장받았다고 하더군.”

“오, 오십만?”

“뭐, 소문이 절반만 사실이더라도 엄청난......”

카이샨 왕국이 드워프 이외의 용병 오너를 받지 않는다는 사실은 이미 들어 알고 있었다.

카이샨은 국토의 서쪽이 대륙 최대 규모의 산맥 중 하나인 ‘발베스’로 막혀 있어 바다로 나가는 길이 완벽하게 봉쇄되어 있었는데.

그로 인한 손해가 막심하기는 했지만, 반대로 이 발베스 산맥에서 나오는 각종 광물과 희귀 자원으로 인해 엄청난 부를 이룩할 수 있었고.

이로 인해, 모종의 이유로 1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발베스 산맥으로 진입할 길이 막혀 있는 드워프 왕국과 활발한 교류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드워프들은 카이샨으로부터 광물과 희귀 자원을 공급받았고, 그 대가로 자신들이 생산한 기간트를 수출해 주었다.

그리하여 현재, 카이샨 왕국 기간트 전력의 70%는 드워프제 기간트로 채워진 상태였다.

양국의 동맹은 수십 년의 세월이 흐르며 공고해진 상태였고.

엄청난 전사를 보유한 탓에 타국의 용병 오너를 고용하는 일이 거의 없는 카이샨 왕국에서도, 드워프 오너를 발견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전쟁이 임박하긴 한 모양이로군... 카이샨 왕국이 타국의 오너들에게 손을 내밀고 있다는 걸 보면.’

이는 내게 있어 매우 좋은 소식이었는데.

이는 내가 아직 마라몬트와 카이샨, 둘 중 어느 쪽 용병으로 참전할지 결정을 내리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뭐, 그래도 이왕 왔으니...”

마라몬트의 조건부터 확인해 보는 게 순서겠지.

#4

“마검사 오너라... 대단하군. 루페른의 다이아 등급 용병패와 카보넬 상단의 보증이라면, 신원에 대한 부분은 문제가 되지 않지. 다만, 제대로 된 대우를 원한다면 우리 군에서 진행하는 테스트에 응해 줘야만 해. 아, 물론 응하지 않아도 계약을 할 수는 있지. 하지만 그렇게 되면 기본적인 계약서를 받게 될 거야. 물론 그마저도 절대 부족한 수준은 아닐 테지만.”

최상급 엑스퍼트나 6써클 마법사로 오해를 받는 덕에 좋은 점은...

“테스트를 받지.”

어지간한 인물에게는 말을 높일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더군다나 내 현재 신분은 엄청난 실력의 마검사이자 오너인 용병.

적당히 오만한 모습을 보인다 한들, 이상하게 생각하기는커녕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를 매우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그것은 이곳에 주둔 중인 군대의 2인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좋아, 화끈해서 좋군. 테스트 종류는 두 가지야. 본신의 무력을 측정하는 것과 기간트 운영 실력을 보는 것. 둘 중 하나만 선택해도 돼. 물론 두 가지 모두 좋은 모습을 보여준다면... 상상하는 것 이상의 대우를 받게 될 테지만.”

나는 찰나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둘 다.”

내 답을 들은 마라몬트 왕국 서부 국경지대 주둔군 부사령관 리오넬 백작이 호쾌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하하하하하! 화끈해서 좋군. 그럼 시간 끌 것 없이, 자리를 옮기도록 하지.”

정확하게 따지자면, 리오넬 백작의 직함은 ‘마라몬트 왕국 북부 국경지대 주둔군 부사령관’이 맞았다.

왜냐하면 이곳은 마라몬트 왕국의 서부 국경이 아닌 북부 국경지대였으니까.

하지만 철천지원수 카이샨과 국경을 맞댄 왕국 북부의 두 곳 중 서쪽에 있다는 이유로 서부 국경이라 불리고 있었는데.

무역국인 마라몬트의 경우, 카이샨과의 국경을 제외하면 모든 방면의 통행이 극히 자유로운 편이었기에(워낙 강력한 주적이 존재하는 탓에, 그 외 국가들과의 관계를 원만하게 가져가려 노력한 결과).

‘국경’은 오직 ‘북부’라는 인식이 수십 년간 굳어져 버렸고.

지금에 이르러 ‘왕국의 국경’이라 함은, 아실란 산맥에 의해 갈라져 있는 (북부의)서쪽과 동쪽을 가리키는 말이 되어버렸다고 한다.

나는 리오넬 백작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빠를수록 좋다.”

#4

콰아아아아아앙

콰아아아아아아앙

콰아아아아아앙

쿠당탕탕...

7.5미터의 신장을 지닌 검은색 기간트가 볼품없이 대지 위를 나뒹굴었다.

세 명의 부하와 함께, 스노우라는 용병 오너의 테스트를 지켜보던 리오넬 백작의 입이 떡 하니 벌어졌다.

“...기간트 운용 실력까지 뛰어나다고?”

조금 전 먼저 치러졌었던 본신의 실력 테스트.

당시 스노우는 자신의 뒤에 서 있는 상급 엑스퍼트 셋을... 채 1분도 걸리지 않아 모조리 저항 불가의 상태로 만들어버리는 엄청난 실력을 선보였었다.

멀쩡하던 땅이 푹푹 꺼지고, 석벽과 넝쿨이 순식간에 자라나 엑스퍼트들의 움직임을 제한한 뒤.

온갖 속성의 마법 폭격을 퍼부어 혼을 쏙 빼버린 다음.

엄청난 속도로 접근해 세 사람을 두들겨 패기 시작했던 스노우.

상급 엑스퍼트를 아득히 넘어서는 움직임과 엄청난 마법 연사 속도로 인해. 그가 최상급 엑스퍼트이자 6써클 마법사임을 알아차린 리오넬 백작이 황급히 대결을 중지시키지 않았더라면... 자신의 부하들은 그저 멍이 조금 드는 수준의 부상으로 끝나지는 않았을 터였다.

이 시점에 이미, 백작의 마음은 스노우라는 인간을 반드시 잡아야 한다는 쪽으로 기울어진 상태였다.

그리고 이어진 기간트 대결.

스노우의 상대는 마라몬트 왕국의 10년 차 오너인 데런 오코너였는데.

노련한 상급 엑스퍼트인 그는 출력 1400rp의 이펜타르크제 기간트, ‘스페노’의 계약자였다.

‘이번에는 쉽지 않을 거다.’

이것이 테스트를 시작하기 전.

리오넬 백작이 가졌던 생각이었다.

그런데...

콰아아아아아앙

콰아아아아아아앙

콰아아아아아앙

엄청난 크기의 얼음 창 3개가 스페노의 전신을 두들겨 나뒹굴게 만들더니.

타아앗

출력 1100rp의 중갑형 기간트 크로스보우라고는 두무지 믿기지 않는 날렵한 움직임과 스피드로 쓰러진 스페노의 뒤를 점한 다음.

서걱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기간트 스페노의 머리를 댕강 잘라버렸다.

“허....”

“미친...”

“믿기지가 않는군...”

백작의 부하들 역시, 그 말도 안 되는 움직임에 탄성을 토해낼 뿐이었다.

잘린 목을 붙이기 위해 만만치 않은 수리비가 들어갈 테지만.

그런 건 리오넬 백작의 안중에 있지도 않았다.

그는 자신의 뒤에 서 있는 부하 중 하나를 불렀다.

“페드로.”

“네? 아 넵, 부사령관님!”

그는 여전히 정면만을 주시한 채 말을 이었다.

“당장 로이드를 불러와.”

로이드 펠터링 자작은 왕실에서 파견한 재무관으로, 주둔군의 보급과 재정을 책임지는 이였다.

그리고 테스트를 거친 용병 오너와의 최종 계약 역시, 그의 손을 거쳐야만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네!”

상관의 명을 이행하기 위해 달려가려던 그의 발걸음을 리오넬 백작의 나지막한 음성이 막아 세웠다.

“아, 그리고 일단... 계약서에는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은 것으로 준비하라고 해.”

““헉!””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한 세 사람은 눈을 휘둥그레 뜰 수밖에 없었다.

그건 현 서부 국경지대 소속 용병 오너 중 그 누구도 받아 본 바 없었던.

어떤 조건이든 받아들이겠다는...

‘백지 계약서’를 내밀겠다는 뜻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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