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투기 버리고 기간트 탑니다-64화 (64/169)

64화 저울질(2)

#1

상급 엑스퍼트들과 기간트를 상대로 테스트를 치른 이후, 나를 영입하고자 하는 마라몬트 사령부의 노력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서부 국경 최전선 요새인 ‘바르틴’에서 가장 좋은 방(똑같은 방이 3개나 존재하긴 하지만)을 내주는 것은 물론, 낮이고 밤이고(?) 시중을 들어줄 전속 하녀와 원한다면 동대륙 요리에 능한 전속 요리사까지 붙여주겠다나?

그중에서도 압권은...

“계약서야. 거기에 네가 원하는 조건들을 적으면 된다. 아, 그렇다고 ‘기본급 월 100만 골드’ 같은 무시무시한 걸 적어넣진 마. 우리 제무관은 샌님이라 심장이 약한 편이거든. 하하하하하......”

딴에는 농담처럼 포장하려 한 것이겠지만.

리오넬 백작의 얼굴에는 정말로 말도 안 되는 조건을 요구해 이 계약이 파토나는 건 아닌지... 걱정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 양반, 정치가가 아닌 천상 군인이로군.’

정치에 이골이 나 높은 자리를 차지한 인물이라면, 자신의 감정을 저토록 훤히 드러내 보일 리 없었다.

‘그나저나,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계약서라...’

이른바 ‘백지 계약서’.

그것은 순간이나마 기존의 계획을 전면 재검토 하게 만들었을 만큼 엄청난 마력을 지닌 물건이었다.

하지만 어차피 잡아 놓은 물고기 아니던가.

챔질에 너무 뜸을 들여 물고기가 바늘에서 빠져버리는 불상사만 일어나지 않도록 하면 된다.

나는 완전한 긍정도, 또한 부정도 아닌 모호한 대답을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물론 잘 챙긴 계약서를 품속에 넣으며.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너무 무리한 요구를 할 생각은 없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거 참 고마운 말이로군. 그럼 시간은... 하루 정도면 되겠나?”

“충분하다.”

“긍정적인 답변을 기대하고 있겠다.”

“좋을 대로 해라.”

“......”

그날 밤.

나는 은신 스킬로 몸을 감춘 채.

하늘 위로 날아올라 마라몬트 왕국 서부 국경 최전방 요새인 ‘바르틴’의 성벽을 넘어.

사막 왕국 카이샨으로 향했다.

#2

카이샨의 군대 역시 ‘알마탄’이라는 요새에 주둔 중이었다.

그들의 복색은 마라몬트를 비롯한 여타 서대륙 국가들과는 많이 달랐는데.

천이나 면으로 된 의복보다는 무언가의 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고 다니는 이들이 훨씬 더 많았고.

그중에는 상의를 완전히 탈의해, 온몸 가득한 문신을 당당히 드러내놓고 다니는 놈들도 적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확실히... 많진 않지만 황인종이 섞여 있군.’

성벽 위 비어있는 첨탑 중 하나에 잠입해 한동안 요새 내부를 살핀 결과, 돌아다니는 병사 중 다섯에 하나 정도가 황인종이었다.

물론 허리까지 내려올 정도로 길게 땋은 머리카락이나 드러난 피부마다 새겨져 있는 문신, 움푹 들어간 눈두덩이 등으로 인해.

현대의 아시아인보다는, 옛 아메리칸 대륙의 인디언 쪽에 더 가까운 외모로 보였다.

물론 체격과 그 단련 수준으로만 보자면, 하나하나가 헤비급 격투기 챔피언을 방불케 할 정도였기에. 그들과 비교하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어 보이긴 했지만.

‘어떤 식으로 접근하는 게 좋을까?’

내가 종합한 정보에 따르면, 카이샨 왕국과 계약을 맺은 오너들의 경우 이미 대륙적인 명성과 인맥을 보유하고 있는 인물들이었다.

반면에 난 루페른 왕국 내에서나 이름이 조금 알려진 정도에 불과했다.

마라몬트 때와 같이 곧바로 사령부를 찾아갔다가는, 카이샨의 군대에게 다짜고짜 공격이나 받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뭐, 그것도 그리 나쁠 것 같지는 않지만.’

시간이 넉넉했다면 여러 가지 방법을 고민해 볼 수도 있었겠지만.

늦어도 내일 저녁 무렵까지는 마라몬트로 돌아가야 했다.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카이샨 쪽을 선택하지 않았을 때의 이야기였다.

‘그냥 부딪쳐 보지 뭐. 일이 잘 안 풀리면... 그땐 드워프제 기간트들이나 실컷 구경하다 가는 거고.’

사실 굳이 불편함을 감수하면서까지 카이샨을 배제하지 않는 이유는, 이들이 엄청난 기간트 제작기술을 보유한 드워프 종족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이쪽에서 용병으로 활약하다 보면 드워프들과 친분을 쌓을 기회가 적지 않을 테니까.

‘그럼 기간트 한 대 정도는 팔아줄지도 모르지.’

생각을 정리한 나는 다시 한번 밤하늘을 날아올라.

요새에서 조금 떨어진 사막지대에 내려섰다.

그리고는 천천히 걸어 알마탄 요새로 접근했다.

번쩍

“정지! 정지! 거기 누구냐? 이름과 소속, 용건을 말해라!”

아직 전면전에 접어들지 않았기 때문인지.

제법 늦은 시각임에도 불구하고 요새의 성문은 활짝 열려있었다.

나는 창을 치켜든 채 휴대용 서치라이트(아티팩트)로 이쪽을 비추는 병사들을 향해 말했다.

“이름은 들을 자격이 있는 자에게 말하겠다. 소속은 없고, 용건은 용병 계약. 기간트 오너다.”

““허억!””

내 마지막 한 마디에.

점점 눈초리가 사나워지던 요새의 경비병들은 난리가 났다.

#3

안타깝게도 일은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았다.

기간트 오너라는 말에 기겁한 경비병 중 하나가 성인 남성의 팔뚝만 한 기계를 조작했고.

띠리리릭

“마, 맞습니다! 1000~1200rp. 기간트가 확실합니다.”

병사가 사용한 물건은 휴대용 마력 감지기쯤 되는 것 같았고, 크로스보우의 출력을 꽤 정확하게 알아맞히는 걸로 보아 성능이 예사롭지 않은 것 같았다.

나중에서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것은 드워프들의 기술로 만들어진 아티팩트였는데.

네스트 상태인 기간트의 출력을 측정할 수 있는 꽤 귀한 아티팩트였다.

거대한 요새의 성문 앞.

하나같이 장대한 체격의 카이샨 병사 10여 명이, 그들에 비해 한참이나 왜소한 사내 하나를 가로막은 채 땀을 삐질삐질 흘려대는 우스운 광경이 연출되었다.

‘하긴, 오너가 기간트를 소환해 난동이라도 부렸다간... 다른 건 몰라도 이 녀석들은 죄다 죽은 목숨일 테니까.’

이후 황급히 요새 내부로 연락이라도 한 것인지.

타다다다다다다다......

한눈에 보아도 범상치 않아 보이는 일단의 무리가 성문 밖으로 달려나왔다.

모두 다섯이었는데, 그중에서도 일행의 후방에 서 있는 30대 초반의 남자가 무척이나 인상 깊었다.

그는 요새 앞에 모여있는 다른 카이샨측 인물들과는 달리. 1cm가 될까 말까 한 짧은 머리를 하고 있었고, 갑옷 아래로 보이는 복장 역시 전형적인 서대륙인들의 그것이었다.

그런데 그가 유독 눈에 띄는 이유는 다른 이들과 다른 헤어스타일이나 복장으로 인한 것이 아니었다.

아니, 그런 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뭐가 저렇게 커?’

2미터 40? 50?

아무튼 최소한 내가 살아오면서 본 인간 중 가장 큰 키를 가진 것만은 확실했다.

게다가 온몸을 뒤덮고 있는 저 터질 듯한 근육들은 대체 뭐란 말인가?

‘얼굴만 못생겼으면 새끼 오우거로 착각했을지도...’

다행히 빙글빙글 장난스러운 미소를 입가에 매달고 있는 거한의 얼굴은 평범한 편이었다.

“용병 계약을 하고자 한다고?”

입을 연 것은 새롭게 나타난 인물 중 선두에선 중년인이었는데.

그는 양 갈래 콧수염을 멋지게 기른 부리부리한 눈매의 황인종 전사였다.

“그렇다.”

콧수염 사내는 ‘카라샨어’를 쓰던 경비병들과는 달리, 꽤 유창한 대륙 공용어(하이델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하, 내 살다 살다... 알마탄 요새의 정문에서 용병 계약 운운하는 인간을 만나게 될 줄은 몰랐군.”

“타국 용병들과 계약을 맺기 시작했다는 말을 들었다.”

“음, 그거야 뭐... 틀린 말은 아니지.”

콧수염 사내는 자신의 뒤편에 있는 거한을 흘깃 바라본 뒤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건 몰랐나 보군?”

“몰랐다? 뭘?”

“우리와 계약을 맺은 용병들은 위대한 카이샨 왕국을 위해 공을 세워, 이미 형제로 인정을 받은 이들뿐이라는 걸.”

“그런 말은 듣지 못했는데?”

“그야, 공식적으로 발표한 적은 없으니까.”

그때, 뒤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거한의 입이 열렸다.

“구노, 말은 똑바로 해야지. 공식적으로 발표한 적이 없는 게 아니라, 공식적으로 발표할 만한 일로 공을 세운 게 아니라서 그런 거잖아.”

“입조심 해라, 가빈!”

응? 가빈?

어디서 들어본 적 있는 이름인데.

“멍청한 구노. 또 내 입을 단속하려 하는군. 네 실력으론 어림도 없다는 걸 아직도 모르겠냐? 그때 당한 걸로는 부족했나 보지?”

“더이상 쓸데없는 소릴 지껄이면, 군법으로 다스리겠다!”

“아유우우우... 무섭다, 무서워. 알았으니까 소리 좀 지르지 말라고. 그보다... 난 저 녀석이 누군지 알 것 같은데?”

나와 구노의 시선이 동시에 가빈에게로 향했다.

“최근 남부 지방에서 이름값을 올리고 있다는 동대륙인 용병 마검사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지.”

그 말을 들은 구노의 미간에 깊은 골이 패였다.

“남부?”

“그래.”

“......”

“그리고 저 녀석, 내가 알기론 용병패를 루페른 왕국에서 받았어.”

촤아아아아아아앙

구노의 검집에서 날이 시퍼렇게 선 검이 뽑혀 나왔다.

“쳐라!”

#4

이렇게 다짜고짜?

카아아앙

카앙

카아아아앙

갑자기 미쳐 날뛰는 구노와 수하들의 공격을 일일이 검으로 쳐내며 황급히 거리를 벌렸다.

“록월, 록월, 록월, 록월!”

나는 연달아 거대한 석벽을 일으켜 카이샨 놈들의 진격을 방해한 뒤.

머리 위에 다수의 얼음 창을 띄웠다.

엄청난 마법 연사에 놀란 것인지, 어느새 움직임을 멈춘 구노와 그의 수하들.

나는 마지막으로 일으켜 세운 석벽 위에서 그들을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갑자기 뭐 하는 짓이지?”

그러자 구노가 검으로 나를 가리키며 차갑게 말했다.

“네 놈이야말로 무슨 속셈이냐? 루페른 용병 놈이 감히 단신으로 이곳까지 기어들어 오다니...”

“루페른에서 용병패를 받은 게 뭐가 문제란 거지?”

그러자 구노와 수하들은 물론, 빙글거리며 전투를 구경하던 가빈 역시 벙찐 표정을 지었다.

‘뭐지? 정말 뭔가 문제가 있는 건가?’

내 의문에 답을 준 것은 가빈이었다.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루페른은 마라몬트의 동맹국이잖아. 카이샨과의 전쟁이 벌어질 때마다 꼬박꼬박 원군을 파견한 놈들이라고. 그리고 그 병력의 절반 이상은 언제나 돈을 주고 고용한 루페른 길드 소속 용병들이었지. 사막에 와서 하도 죽어 나가는 바람에, 카이샨이라면 이를 가는 놈들이 루페른 출신 용병들인데... 그곳에서 다이아 등급 용병패를 받은 네가 이 사실을 몰랐다고 잡아뗄 셈이냐?”

그런 사연이 있었나?

‘대체 왜 아무도 그런 이야기를...’

하긴, 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당당하게 마라몬트의 항구에 내렸으니.

마라몬트 쪽에 붙으리라 생각하는 게 당연하겠지.

게다가 양쪽을 저울질하기 위해 카이샨 왕국의 요새를 직접 방문하는 인간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조차 할 수 없을 테니...

‘굳이 그런 이야기를 꺼낼 이유가 없었군. 쩝...’

살기를 풀풀 풍기는 구노가 다시 한번 목소리를 높였다.

“더러운 마라몬트의 동맹다운 비열한 술수를 부리려 했을 테지만... 어설펐다.”

아니, 저 가빈이라는 녀석만 아니었으면 어떻게 됐을지는 모르는 일 아닌가?

일단 저울의 한쪽이 부서져 버렸으니.

이제 선택지는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뭐, 그건 그거고.

‘이렇게 된 이상... 두 번째 목적이라도 달성하고 가야겠군.’

그리고 이런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인지.

파아아아아앗

파아아아아앗

파아아아아앗

구노를 필두로 한 세 오너가 일제히 기간트를 소환했다.

한 기는 샌포드에서 목격한 바 있었던 출력 1400rp의 검은색 기간트 아트론이었고.

나머지 두 기는 처음 보는 기체였는데.

둘 중 구노가 소환한 신장 7.5미터가량의 멋들어진 검붉은색 기간트가 내 시선을 잡아끌었다.

크로스보우에 탑승을 완료한 나는.

천천히 검을 들어 그 검붉은색 기간트를 가리켰다.

[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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