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투기 버리고 기간트 탑니다-66화 (66/169)

66화 계약

#1

마라몬트 북부(서부) 최전방 바르틴 요새의 사령관실.

사령관실의 내부는 벽에 걸린 두 자루의 검과 관리가 잘 되어 있는 기사의 전신 갑옷을 제외하면.

방의 주인이 업무를 보기 위한 책상과 의자, 그리고 10인 정도가 한 번에 앉을 수 있는 중앙의 회의 테이블과 소파가 전부인 무미건조한 공간이었다.

현재 이곳에는 바르틴 요새의 수뇌부인 사령관 윌리엄 다이슨 후작과 부사령관 노만 리오넬 백작, 그리고 요새 유일의 6써클 마법사인 안톤 피어슨 마법병단장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들은 심각한 얼굴로 테이블 위에 놓인 수정구 안에서 재생되고 있는 영상을 시청하고 있었는데.

영상에서는 지금 막 수십 미터 높이의 석산 위에 우뚝 선 기간트가 정면의 거대한 요새를 향해 불길에 휩싸인 검을 집어던진 참이었다.

[............]

엄청난 폭발이 일어났지만 수정구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수정구는 무지막지하게 비싼 영상저장장치다.

오직 크샨트 제국에 뿌리를 둔 ‘라이블리 마탑’ 단 한 곳에서만 제작이 가능한 탓에 부르는 게 값이었는데.

단 하나의 영상만 저장할 수 있는 일회용이었던데다, 소리를 담는 것도 불가능했다.

영상이 아닌 소리만 저장할 수 있는 장치는 훨씬 저렴하게 판매되고 있긴 했지만, 영상과 소리를 동시에 저장할 수 있는 장치가 개발되었다는 소식은 아직까지 들려오지 않고 있었다.

수정구 속 화면을 가득 메운 불길과 연기가 사그라들자 나타난 황당한 장면에 세 사람의 입이 쩍하고 벌어졌다.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리고 입을 연 것은 사령관인 윌리엄 다이슨 후작이었다.

“저게 내가 아는 알마탄 요새의 성벽이 맞나?”

마법병단장이자 참모장인 안톤 피어슨이 말했다.

“우리 세 사람의 눈에 한꺼번에 이상이 생긴 게 아니라면... 알마탄 요새가 맞습니다.”

“알마탄 요새의 성벽이 고작 1100rp짜리 기간트의 공격 한 방에 무너졌다고?”

안톤 피어슨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보셨다시피... 일반적인 공격이 아니었습니다만...”

“만약 자네라면 마법으로 저런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겠나?”

“글쎄요. 성벽에 설치되어 있는 3세대 마력포를 사정거리 안으로 옮기고, 가장 강력한 마법에 대부분의 마력을 퍼붓는다면...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확실하지 않다는 뜻이로군.”

윌리엄 다이슨 후작은 수염 자국이 거뭇거뭇한 턱을 한 차례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 스노우라는 용병은 기간트에 탄 채로 그런 엄청난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는 뜻이고.”

후작이 마력을 불어넣자 수정구 속에서는 똑같은 영상이 반복되었고, 그 시작은 출력 1800rp의 드워프제 기간트 베너젤과의 1대1 대결 장면이었다.

사실 엄밀히 말하면 1대1은 아니었다.

카이샨 측에는 두 기의 기간트가 더 존재했으나. 접근하려는 기색이 보일 때마다 날아드는 강력한 마법 견제로 인해, 일정 거리 이내로는 단 한 걸음도 내딛지 못하고 있었을 뿐.

약 5분간 베너젤의 공격을 일일이 쳐내는 장면만 반복하던 크로스보우가 갑작스레 손끝으로 검을 쳐내는 신기를 선보인 뒤 곧바로 반격, 베너젤의 등에 검을 꽂아 넣기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2,3초에 불과했다.

그 이후의 장면을 감상하던 노만 리오넬 백작이 탄성을 발했다.

“저것! 저것이야말로 진정 사기적인 기술입니다. 손에서 놓아버린 무기를 원거리에서 회수할 수 있다니! 기간트 전투에 혁명을 가져올 기술이에요! 만약 저걸 아군 오너들도 해낼......”

그가 손가락으로 수정구를 가리키며 흥분을 감추지 못하자, 그의 유일한 상관인 윌리엄 다이슨 후작이 그를 진정시켰다.

“진정하게. 저런 기능이 발명되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어. 저건 아마도 마검사인 그만이 할 수 있는 기예일 걸세.”

“그거야...”

2000rp급 기간트의 주인이기도 한 노만 리오넬 백작이 흥분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전장에서 기간트의 상대는 기간트다.

그리고 기간트는 단단한 금속으로 이루어진 전쟁병기다.

이 때문에 적의 몸통을 꿰뚫은 검이 빠지지 않아 위험한 상황에 빠졌었던 경험은, 전쟁을 겪은 오너라면 누구나 한 번쯤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일반적인 기간트의 경우, 무기 슬롯과 연결된 손에 무기를 잡아야만 소환과 역소환이 가능했다.

그러니 상대 기간트를 관통한 검을 미련 없이 놓아버리고, 또 다른 적과의 거리를 좁힌 뒤 그 검을 다시 소환해내는 장면은.

적어도 오너인 후작과 백작에겐, 요새의 성벽을 무너트린 마법보다 더 인상적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그 엄청난 마법이 담긴 매개체 역시, 원거리에서 회수한 검이 아니었던가.

이어 어마어마한 석벽의 산을 쌓아 올린 뒤, 보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떨려오는 엄청난 마법으로 성벽을 박살 내는 장면이 다시 한번 재생되었다.

두 번째 상영이 끝난 뒤.

잠시 생각에 잠겼던 윌리엄 다이슨 후작이 노만 리오넬 백작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영입하게. 어떠한 조건을 걸던, 어지간하면 다 받아주란 뜻이야.”

스노우의 거취가 결정되는 순간이자.

마라몬트와 카이샨, 두 왕국 간 전쟁의 판도가 뒤흔들리는 순간이었다.

#2

노만 리오넬 백작과 다시 마주한 곳은 전날과 같은 시각, 그의 집무실이었다.

카이샨 알마탄 요새에서 일어난 대규모 소란을 요새의 부사령관이 모를 리 없었고, 그 역시 그 사실을 숨길 생각이 없었는지 곧바로 그 문제를 언급했다.

“어젯밤... 한바탕 거하게 했더군.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일을 벌인 건가?”

원래 목적은 이쪽저쪽 저울질을 해보려 했던 것이지만, 그걸 그대로 떠벌리는 건 바보짓이었다.

“앞으로 상대하게 될지도 모를 적들의 수준이 궁금하더군. 덤으로 몸값도 좀 올리고 말이야.”

말도 안되는 개소리였지만, 백작에게는 꽤 그럴 듯 하게 들렸던 모양이다.

“그런가? 그런 의도였다면 적중한 셈이군. 사령관님께서도 어지간한 조건은 다 받아주라고 하셨으니 말이야.”

사령관이?

‘누군진 모르지만, 보고서를 제대로 작성한 모양이로군.’

어제의 전투는 얼떨결에 거대한 전과를 올리긴 했지만, 사실 나조차도 내 스킬들의 조합이 그렇게 어마어마한 위력을 발휘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성벽이 무슨 비스킷도 아니고... 그렇게 와르르 무너질 줄은 몰랐지. 보통 최전방 요새 정도 되면 방어 마법진으로 떡칠을 해놓지 않나? 아니면 카이샨이 마법 방면으론 좀 낙후된 편인가?’

아무튼 성벽을 타격한 마법에 적 기간트들의 이목이 쏠리는 걸 틈타, 두세 기 정도 더 파괴한 다음 몸을 빼내려던 것이 최초의 계획이었지만.

생각 이상으로 엄청난 스킬의 위력으로 인해 더 이상의 실력 발휘는 불필요할 듯했기에.

곧바로 크로스보우를 소환 해제한 뒤, 은신 스킬을 사용함과 동시에 사막의 밤하늘로 날아올랐었다.

그리고 간밤의 일이 헛되지 않았는지, 리오넬 백작은 어제보다 더욱 몸이 달아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들뜨려는 기색을 가라앉히며 낮은 어조로 입을 열었다.

“조건을 말하지.”

리오넬 백작은 물론, 계약서 작성을 위해 동석한 두 관료의 얼굴에도 긴장감이 어렸다.

나는 그들과 일일이 눈을 맞춘 뒤 말을 이었다.

“마라몬트 왕국의 킬 포인트를 확인했다.”

정확하게는 ‘기간트 킬 포인트’.

사실 더 정확하게는 ‘기간트 오너 킬 포인트’가 되어야 하겠지만.

어쨌든 대부분 국가는 전쟁 시 오너들의 공적을 기록하기 위해 이 킬 포인트라는 걸 부여하는데.

기간트의 등급에 맞춰 점수를 부여하고, 적기를 잡아낼 때마다 이 포인트를 부여해 최종 논공행상에 반영한다.

예를 들면 800rp급인 제페토(이펜타르크제)는 5점, 1400rp인 아트론(드워프제)은 10점, 1800rp인 베너젤(드워프제)은 18점, 2200rp인 트리온(드워프제)는 25점인 식이었다.

이 점수는 국가마다 차이가 조금씩 있었는데, 마라몬트의 경우는 위와 같았다.

나는 킬 포인트 언급에 놀란 듯 눈을 뜨는 세 사람을 무시한 채 내 조건을 말했다.

“킬 포인트를 기록하는 만큼, 그에 어울리는 기간트를 대가로 원한다.”

#3

내 조건을 듣고 당황해 버린 노만 리오넬 백작.

“자, 잠시만 기다려 주게.”

전권을 일임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도무지 결정할 엄두가 나지 않았는지 황급히 자신의 집무실을 빠져나간 백작은 조금 뒤 강인한 인상의 40대 초반 사내와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윌리엄 다이슨이라고 하네.”

“스노우입니다.”

요새의 총사령관이자 후작이라는 작위를 가진 인물, 더군다나 리오넬 백작에게 듣기로는 이미 50을 넘긴 나이였기에 존대할 이유는 차고 넘쳤다.

“흥미로운 조건을 걸었더군.”

“일한만큼 받아가겠다는 겁니다.”

“뭐, 자네 실력이야 이미 확인했지. 그래, 구체적으로 말해보겠나?”

나는 품속에서 종이 하나를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를 받아든 윌리엄 다이슨 후작이 천천히 종이를 펼쳤다.

거기에 적힌 것은...

[100포인트 : 800rp급

200포인트 : 1200rp급

300포인트 : 1500rp급

400포인트 : 1800rp급

.

.

.

1000포인트 : 2500rp급]

“으음...”

윌리엄 다이슨 후작의 입에서 나지막한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한동안 종이에 적힌 숫자들을 들여다보던 그가 고개를 들며 나를 바라보았다.

“다른 건 그렇다치고... 1000포인트라니, 혼자서 카이샨의 기간트들을 죄다 때려잡기라도 할 셈인가?”

“카이샨의 기간트 숫자가 그것밖에 안 됩니까?”

“뭐라고? 허허...”

카이샨의 근위기간트라 알려진 트리온 20기만 해도 500포인트나 되니, 고작 그 정도 숫자밖에 안 될 리가 없지.

물론 후작 역시 몰라서 한 말은 아닐 터였다.

“사실 다른 오너가 이런 조건을 내걸었다면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수락했을 걸세.”

“그렇습니까?”

“그래, 지난 카이샨과의 전쟁에 참전한 오너가 기록한 킬 포인트 중 최고 기록이 얼만지 알고 있나?”

나는 고개를 저었고, 작게 고개를 끄덕인 후작이 말을 이었다.

“184포인트라네.”

그때, 곁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리오넬 백작의 입이 열렸다.

“여기 계신 다이슨 후작님이 거둔 군공이시지.”

아, 그랬나?

그나저나 리오넬 백작 저 양반... 가만 보면 투머치토커의 기질이 다분한 것 같다.

윌리엄 다이슨 후작 역시 굳이 할 필요 없는 말을 했다는 듯, 그를 향해 눈총을 주었고.

백작의 얼굴은 울상이 되었다.

후작의 말이 계속되었다.

“수십, 수백 기가 엉키는 전장에서는 오너가 죽음에 이를 정도의 타격, 그러니까 킬 포인트를 기록하는 게 쉽지 않다네.”

“알고 있습니다.”

다수가 얽히는 전장에서는 아군이 서로의 등 뒤를 지킨다.

1대1 대결처럼 상대의 틈을 발견했다고 해서, 그것이 곧바로 승부의 결착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뜻.

게다가 기간트라는 건 기본적으로 엄청난 방어력을 지닌 데다, 대규모 전투라면 방패는 필수였다.

거대한 덩치들이 엉겨 붙는 가운데, 정확하게 콕피트를 노려 검을 찔러넣는 건 대단히 어려운 일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마법을 다루는 자네라면... 조금 다를지도 모르겠군.”

말을 마친 뒤 잠시 고민하던 후작이 내가 건넸던 종이에 약간의 수정을 가한 뒤, 다시 내쪽으로 내밀었다.

수정된 내용은 이러했다.

[100포인트 ? 800rp급

200포인트 -> 300포인트 : 1200rp급

300포인트 ?> 500포인트 : 1500rp급

400포인트 ?> 700포인트 : 1800rp급

.

.

.

1000포인트 ?> 1500포인트 : 2500rp급]

“어떤가? 굳이 기간트를 조건으로 걸겠다면, 이 정도는 되어야 할 것 같네만.”

후작의 생각을 알 것 같았다.

일단 800rp급 한 대는 선심 쓰듯 내준다.

그리고 아마도, 달성할 수 있는 최대치를 1200rp급 정도로 잡은 것 같은데...

300포인트를 기록하려면 아트론(1400rp)급 기간트의 오너 30명을 죽여야 한다.

500포인트는 트리온(2200rp)에 탑승한 근위기사 스무 명을 해치워야 하고.

그래서 결론은?

나는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펜을 집어 든 뒤 계약서에 사인을 휘갈겼다.

스스스슥

사인을 마친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후작에게 손을 내밀었다.

“약속은 지키시리라 믿겠습니다, 후작 각하.”

비록 조금 수정하긴 했지만...

이 조건을 받아들인 걸 후회하게 만들어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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