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서열 정리(1)
#1
바르틴 요새 내부에 자리한 한 대형 펍.
“어어이~ 형씨, 그쪽 실력이 그렇게 대단하다던데. 나랑 한판 붙어볼 생각 있어? 아, 물론 기간트로 말이야. 기간트!”
홀로 앉아 맥주를 홀짝이고 있는 내게, 이름을 알지 못하는 용병 오너 한 놈이 다가와 입을 털어대고 있었다.
현재 바르틴 요새에는 총 42명의 기간트 오너가 주둔 중이었고, 그중 17명이 마라몬트 왕국과 계약을 맺은 용병 오너였다.
근래 소수의 용병 오너들을 영입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카이샨 왕국이 영입한 이들은 이쪽 업계에서도 5% 안에 들어가는 실력자들로 한정되어 있었고.
불과 몇 주 전까지는 이마저도 영입했던 사례가 없었기에, 전쟁에 관심이 있는 용병 오너들은 마라몬트 왕국으로 몰려들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계약한 용병 오너 중 가장 선임(용병들 사이에 그게 무슨 상관이겠냐 만은)이 불과 두 달이 넘지 않았을 만큼, 마라몬트 역시 용병 오너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건 전운이 짙어지기 시작한 비교적 최근의 일이었다.
그리고 바로 어제 성사되었던 내 계약에 관한 소식이 바르틴 요새 전역을 휩쓸었다.
정확하게는 내가 ‘백지 계약서’를 받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요새의 분위기를 달아오르게 만든 것이다.
당연하게도 이에 가장 큰 영향을 받은 것은 나와 같은 처지의 용병 오너들이었다.
사실 계약에 관한 내용을 비밀로 하는 것정도는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었지만.
이 소문이 요새 사령관인 윌리엄 다이슨 후작의 명에 의해 의도적으로 퍼뜨려진 것이라는 건, 바르틴 요새에서 고작 다섯 사람만이 알고 있는 비밀 아닌 비밀이었다.
‘한 가지 부탁이 있네.’
‘뭡니까?’
‘요새에는 자네를 제외하고도 열여섯이나 되는 용병 오너가 있지. 물론 앞으론 그 숫자가 최소 두 배는 늘어날 걸세.’
‘큭, 설마... 놈들 사이에서 기강이라도 잡아달라는 겁니까?’
‘용병들의 분위기를 모르는 건 아니야. 당연히 존중할 마음도 있다네. 그런데 이번에 계약한 오너 중... 몇몇은 조금 선을 넘는 경향이 있더군. 이걸 군부 쪽에서 단속하기엔 그림이 영 좋지 않아서 말이지. 그렇다고 그 녀석들의 행패를 두고만 보자니 병사들의 사기에 영향이 있을 것 같고. 어떤가? 내 부탁을 들어주겠나?’
‘설마 맨입으로...’
‘그럴 수는 없지. 이건 계약과는 별개의 사안이니, 따로 3만 골드를 주겠네. 자네가 용병 오너들을 완벽하게 장악해 준다면 말일세.’
‘5만 골드로 하죠.’
‘...그렇게 하지.’
5만 골드가 추가되면 내 재산은 10만 골드를 넘기게 된다.
이 정도면 어지간한 저등급 기간트를 한 대 더 구매할 수도 있는 금액.
물론 안티가가 있는 이상, 그와 비슷한 등급의 기간트를 구매할 일은 없겠지만.
아무튼, 나로서는 거부할 이유가 없는 제안이었다.
어차피 전쟁이 시작되면 대부분의 작전을 함께하는 건 마라몬트 군부 소속 오너들이 아닌, 나와 같은 용병 오너들일 확률이 높을 테니... 한 번 정도는 제대로 서열 정리를 해둘 필요가 있었다.
“설마 쫄았냐? 한판 붙어보자고. 백지 계약서를 받으신 분의 실력은 얼마나 대단한지 궁금해서 잠이 안 올 지경이야. 당연히 기간트로! 설마 치사하게 여기서 검을 빼 들 생각은 아니겠지?”
내가 (알려지기로는)6써클 마법사이자 최소 상급 엑스퍼트의 극에 이른 마검사라는 소문은 이미 퍼질 대로 퍼진 상태였기에.
시비를 거는 쪽이 되려 땀을 삐질삐질 흘려대는 진풍경이 연출되기도 했는데.
이런 놈들의 경우, 말은 끝까지 건들거리는 주제에 자세는 퍽 겸손했고. 하나 같이 ‘기간트로!’라는 말을 습관적으로 외쳐댔다.
그리고 이런 놈들의 특징은 대부분 말없이 몇 초 정도 눈을 마주쳐주기만 해도...
“크흠, 지금은 타이밍이 아닌 것 같군. 나, 나중에 꼭 한 번......”
이렇게 알아서 꼬리를 내리며 쭈그러들었다.
물론 이마저도 알마탄 요새에서 벌인 난장판이 알려지지 않았기에 일어나는 일들이었다.
당연하게도, 내가 기다리고 있는 건 저런 잔챙이들이 아니다.
카이샨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마라몬트쪽에 합류한 오너들 중에도 진짜배기라 할 만한 놈들이 몇 있었다.
그러니까...
“비켜.”
쿠당당
“어떤 새끼가... 저, 저스틴?”
“덤빌 용기도 없으면서 나대지 마라, 하버.”
“크윽, 젠장...”
조금 전까지 내 앞에서 알짱거리던 1200rp급 기간트 오너의 뒷덜미를 낚아채 주저 없이 던져버린.
이 신장 216cm의 거한 저스틴 크로비스 같은 녀석이.
그는 1800rp의 출력을 자랑하는 샌포드제 기간트 ‘카트린’의 오너이자.
11년 전 상급 엑스퍼트의 경지에 이른 검사였고.
나를 제외한 마라몬트 소속 용병 오너 중 서열 2위의 강자였다.
그 말인즉.
‘서열 정리의 제물로 쓰기에 손색이 없는 놈이라는 뜻이지.’
#2
[발터 크로비스(A) : 42세, 오르비스 제국 동부에 위치한 크샨트 제국의 몰락 귀족
216cm, 129kg
파일럿 재능 ? 86/89(현재/최대치)
훈련 가능 기체
제우스(C) - 숙련도 0/100
토마호크 SS7 스피릿(E+) - 숙련도 0/100
안티가(B-) - 숙련도 0/100
크로스보우(B+) -숙련도 0/96]
‘하, 이놈 봐라?’
‘파일럿(S)’ 특성의 전지전능함을 알 수 있는 부분 중 하나가 바로 훈련병 프로필이다.
프로필 메시지창에는 훈련병 스스로가 생각하는 자신의 ‘정체성’이 나타나는데. 그 숫자는 하나가 될 수도 있고 두 개, 세 개가 될 수도 있었다.
저스틴이라는 가명을 쓰고 있는 발터 크로비스의 경우엔 ‘용병’이나 ‘기간트 오너’가 아닌 ‘몰락 귀족’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유추해 낼 수 있는 것은...
‘용병질로 돈과 명성을 얻어, 몰락한 집안을 일으켜 세우려는 놈이로군.’
그게 아니라면 프로필에 ‘몰락 귀족’ 따위가 뜰 이유가 없었다.
하다못해 귀족이었다는 긍지만 남은 놈이었다면, 단순히 ‘귀족’이라는 한 단어면 충분했을 테니까.
‘뭐, 놈의 사정이야 내 알바는 아니고.’
중요한 건 요새의 용병 오너 중 가장 심각한 패악질을 부리는 게 바로 이놈과 그의 동료들이라는 사실이다.
다만 녀석도 내 실력에 대한 소문이 부담스러웠는지, 험악한 인상에 비해 일정 거리 이내로 접근하려 하지 않는듯한 인상이 역력했다.
하지만 발터... 아니, 저스틴 크로비스 역시 무려 31살에 상급 엑스퍼트의 경지에 오른 천재 검사인데다(비록 최상급의 벽에 가로막히긴 했지만).
파일럿 재능 역시 무려 A등급으로, 현재 능력치 86은 팬텀기사단 소속 오너였던 로빈슨 슈왈츠마저 월등히 넘어서는 수준이었다.
한 마디로, 앞서 깝죽거리던 녀석과는 차원이 다른 강자라는 뜻.
철그렁
테이블 위에 묵직한 주머니 하나를 던진 저스틴 크로비스가 나를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그냥 한판 붙는 건 재미가 없지. 내기로 하자고. 3000골드 어때?”
“오오오오오오!”
“과연, 저스틴!”
“저 녀석은 괴물이야! 베어 밸리 전투에서 토리노(크샨트제 1100rp 기간트) 3기를 혼자 때려잡은 적도 있다고!”
주변의 용병들이 흥분하며 추켜세워주자 녀석의 어깨가 한껏 올라갔다.
그리고는 상체를 좀 더 꼿꼿하게 세우며 깔보듯이 말했다.
“설마 ‘빙하의 마검사’라는 거창한 이명까지 얻은 인간이... 엉덩이를 뒤로 빼려는 건 아니겠지?”
‘빙하의 마검사? 그런 게 붙었나? 그래도 지구에서 붙었던 이명에 비하면 뭔가 그럴듯해 보이긴 하는군.’
나는 지구에서 여러 가지 이명으로 불렸었는데, 그중 대표적인 건 ‘하늘 위 개쌍놈’과 ‘미치광이 폭탄마’였다.
이는 ‘폭격’이라는 공격의 특성상 어느 정도 아군의 피해를 감수할 수밖에 없었기에, 내 미사일 폭격에 휘말린 경험이 있는 헌터들의 입을 통해 퍼져나간 이명이었다.
그에 비하면 ‘빙하의 마검사’는 조금 오글거리는 것 빼고는 꽤 멋들어진 이명이 아닌가.
나는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고 있는 저스틴 크로비스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수십의 용병들을 천천히 둘러본 뒤, 허리춤에 매달려있는 아공간주머니를 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세 장의 종이를 꺼냈다.
탁
‘......?’
내가 테이블 위에 종이들을 내려놓자 좌중의 시선이 그것에 집중되었다.
그리고...
“헉!”
“사, 사, 사...”
“삼만 골드!”
내가 꺼낸 것은 카보넬 상단의 로이얀 카보넬에게서 받은 1만 골드짜리 수표 3장이었다.
수표는 총 4장이었지만, 건방진 용병 오너놈이 들이민 금액이 3000골드였기에 10배라는 상징성을 위해 3장만 꺼낸 것이다.
그리고 그 효과는 과연 대단했다.
이 자리에 있는 용병들은 대부분 한가락 하는 실력자들이었기에 목돈을 만지는 일이 적지 않았지만.
그런 그들로서도 기간트 오너가 아닌 이상, 3만 골드라는 거금은 생전 처음 보는 이들이 대부분일 수밖에 없었다.
나는 살짝 고개를 들어 저스틴 크로비스와 시선을 맞췄다.
“애들 장난도 아니고, 3000골드? 3만 골드 정도는 되어야 도전을 받아 줄 마음이 들 것 같은데. 설마 이 정도 돈도 없지는 않을 테고...”
나는 오른쪽 입가를 가볍게 들어 올리며 말을 이었다.
“쫄리면 꺼져.”
#3
스노우의 도발은 적중했다.
“건방진 새끼, 쫄긴 누가 쫄았단 말이냐!”
“3만 골드를 걸겠단 건가?”
“기다려! 케일, 애덤! 이리 와봐!”
저스틴 크로비스의 부름에 건장한 체격의 두 사내가 용병들 틈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요새 내에서 저스틴 패거리로 악명을 떨치고 있는 용병 오너 케일 마틴과 애덤 가필드였다.
그런데 두 사람의 표정이 썩 좋지 않았다.
“저기... 괜찮을까? 보통 실력이 아니라고 하던데.”
“그래, 3만 골드는 너무 커. 그냥 1만 골드 정도로 하자고 하는 건...”
“좆까! 감히 내 실력을 의심하는 거냐?”
“그건 아니지만...”
“소문이...”
“소문이란 건 믿을 게 못 돼! 아무리 강하다 한들, 고작 크로스보우 따위로 날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아?”
“그건... 그렇지.”
“음...”
“투자한 돈을 두 배로 불려줄 테니, 잔말 말고 꺼내!”
이렇게까지 된 이상, 두 사람 거부할 방법은 없었다.
게다가 저스틴 크로비스의 실력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무려 700rp의 출력 차가 나는 기간트를 상대로, 그가 패배할 확률은 높지 않다고 판단했다.
저스틴 크로비스의 수중에는 당장 3만 골드라는 거액이 없었지만, 두 용병 오너 둘의 주머니까지 탈탈 털자 간신히 금액을 맞출 수 있었다.
터어엉
다만 그들의 아공간 주머니에서 나온 수표라고는 만 골드짜리 한 장과 천 골드짜리 아홉 장, 그리고 백 골드짜리 서른다섯 장이 전부였기에. 나머지 7500골드를 일일이 헤아려 자루를 채우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걸릴 수밖에 없었다.
엄청난 크기의 자루를 테이블 옆에 내려놓은 저스틴 크로비스가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3만 골드다. 이제 와 딴소리를 하진 않겠지?”
그가 내려놓은 돈자루를 확인한 스노우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으며 몸을 일으켰다.
“좋아, 거기 그쪽... 군부 소속 오너 맞지?”
스노우에게 지목당한 한 사내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결이 끝날 때까지 이것들을 좀 보관해 줘야겠어. 대신 술은 내가 사는 걸로 하지.”
탁
나는 테이블 위에 50골드를 내려놓았고.
이미 상관으로부터 언질을 받고 펍에 대기 중이었던 군부 소속 오너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고비와 돈 자루, 수표 3장을 챙겼다.
저스틴 크로비스 역시 익히 얼굴을 알고 있는 오너였기에, 별다른 불만 없이 수긍했다.
곧이어 펍에 있던 모든 이들이 우르르 연병장을 향해 몰려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