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투기 버리고 기간트 탑니다-68화 (68/169)

68화 서열 정리(2)

#1

용병 오너로서만 10년이라는 세월을 보낸 베테랑 저스틴 크로비스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애초에 마검사와 대결을 벌이며 그가 촉각을 곤두세운 건 상대의 마법뿐이었다.

상급의 극에 이르렀건 아니면 최상급이건 간에, 기간트에 탑승한 상태라면 검술만으로는 절대로 자신의 상대가 되지 않으리라 판단했었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판단의 바탕은 상대의 오너 경력이 고작 한 달 남짓밖에 되지 않는다는 정보에 있었다.

‘아무리 대단한 실력자라고 해봐야... 기간트 운용이란 건, 결국 함께한 시간이 절대적으로 작용하는 법이지.’

본신의 실력 면에서는 상대가 안 될 것이 불 보듯 뻔했기에.

기간트 운용 실력으로 압도해 용병 오너들 사이의 주도권을 자신이 차지할 생각이었다.

이는 바르틴 요새 최강의 용병 오너인 헬레나 오도넬이 권력 싸움 따위에는 관심이 없는, 철저한 독고다이형 인간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 미친년은 딱히 귀찮게 하지만 않으면, 주변 상황엔 관심도 없는 인간이니까.’

하지만 그의 계획은 전제부터가 잘못된 것이었다.

목을 노리고 날아든 검격을 기가 막힌 방패술로 흘려낸 뒤.

휘이이이익

그 자리에서 눈에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회전.

콰아아아아아아앙

뒤로 시원하게 내뻗은 오른쪽 다리에.

쿠당탕탕탕......

배를 얻어맞은 카트린은 볼품없이 대지를 구를 수밖에 없었다.

“크으윽, 이런 미친...”

대륙의 기간트 중 장갑이 두껍기로는 첫 손에 꼽히는 기간트가 크로스보우다.

그런 기간트를 타고 있는 주제에, 저 말도 안 되는 움직임은 대체 뭐란 말인가?

재빨리 몸을 일으킨 카트린을 향해 크로스보우가 빠르게 쇄도해 들어왔다.

카아아아아아앙

콰아아아아아아앙

카아아아아아앙

딱히 고절한 검술을 펼치는 것도 아니었다.

기본적인 횡베기와 종베기, 찌르기가 전부인 간결한 공격.

하지만 납득이 가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움직임과 공세 하나하나에 실력 힘으로 인해, 제대로 된 반격을 가하는 것조차 버거울 정도였다.

‘젠장, 아직 마법은 사용하지도 않았는데...’

양쪽 기간트의 출력 차이는 무려 700rp.

상식적인 선에서는 도무지 맞상대가 될 수 없는 등급이었기에.

등급이 높은 저스틴 크로비스의 카트린이 오히려 뚜렷한 열세에 처해있다는 건 단 하나의 사실을 가리켰다.

‘천재다. 기간트 운용의 천재야. 그것도 고작 계약한 지 한 달 남짓 된 기간트로 저 정도 실력을 보여준다는 건, 천재 중에서도 천재라고 밖엔...’

그때, 크로스보우의 통신 마법진을 통해 스노우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봐, 어깨에 달린 그건 장식품인가? 이대로는 너무 싱거우니, 좀 더 분발해 줬으면 좋겠는데.]

그 말을 듣는 순간, 사그라들던 그의 호승심에 다시 한번 불길이 일었다.

‘네가 대단한 실력자라는 건 인정하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감히 카트린의 마력포를 좆으로 봐?’

샌포드제 기간트의 특색인 마력 병기.

카트린의 경우 양어깨에 달린 두 개의 포신에 각각 6써클 화염계열 마법과 빙결계열 마법이 장착되어 있었다.

물론 한 번 쏘는데 무려 5000골드에 가까운 어마어마한 자원이 소모되었기에,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거나 확실하게 킬 포인트를 올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면 절대로 사용하지 않는 무기였다.

하지만 자존심에 크나큰 상처를 입은 저스틴 크로비스는 눈이 돌아가 버린 상황이었고.

마치 맘대로 해보라는 듯 거리를 벌린 채, 여유 있는 자세로 서 있는 크로스보우에게 제대로 된 한 방을 먹여주지 않고서는... 도무지 세상을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오냐, 그게 소원이라면...”

저스틴 크로비스는 마력엔진을 한계까지 오버클럭시켰다.

곧바로 붉게 달아오르는 카트린의 전신.

그리고 그 붉은 기운들이 순식간에 기간트의 어깨에 달린 포신으로 빨려들어가자...

“미, 미친... 아군간의 대련에서 마력포를!”

“거기! 정면에 있는 놈들! 죽기 싫으면 피해! 오발이라도 나면 다 뒈진다고!”

“저스틴 크로비스, 저 미친 새끼가 기어이 대형 사고를 치는구나!”

“말려야 되는 거 아냐?”

“말려? 대체 누가?”

이윽고, 한계까지 마력이 응축된 마력포의 포신이 불을 뿜었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마력포가 발사되기 직전, 이미 크로스보우를 중심으로 반경 30여 미터를 뒤덮고 있던 얼음의 대지에서 높이 10여 미터, 두께 3미터가량에 이르는 거대한 얼음의 벽 3개가 솟아올랐고.

촤르르르르륵......

그 얼음의 벽들에 투명한 무언가가 겹겹이 둘러싸기 시작했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연달아 3개의 방해물을 파괴한 채 크로스보우에게로 날아든 (기간트의 마력엔진에 의해 증폭된) 화염마법.

하지만 3개의 얼음벽을 통과하느라 그 힘의 대부분을 소진해 버린 저스틴 크로비스 회심의 일격은.

타아앙

마력으로 은은한 빛을 발하는 크로스보우의 방패에 막혀 허무하게 흩어져버리고 말았다.

파앗

방패를 소환 해제한 크로스보우에게서 또다시 오너인 스노우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쁘지 않은 공격이었다.]

실제로도 어지간한 기간트의 외부장갑 정도는 단번에 뚫어버릴 만한 위력이 담겨 있는 공격이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정통으로 공격을 허용했을 때의 이야기였지만.

스르륵

크로스보우가 오른손에 든 검을 들어 올렸다.

[항복하겠나?]

이미 역량의 차이는 명백하게 드러난 상황.

저스틴 크로비스가 패배를 선언한다 해서 이상할 것은 없었다.

하지만 비록 몰락했다고는 하나, 긍지 높은 제국의 귀족이었던 그는 자신의 입으로 항복이라는 말을 꺼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좆까.]

물론 그의 언행은 여전히 귀족답지 않았다.

이에 작게 고개를 아래위로 움직인 크로스보우는...

타아아아아앗

이전에 보여주었던 것보다 갑절은 빨라진 움직임으로 카트린에게 접근한 뒤, 마력에 의해 붉게 물든 검을 횡으로 휘둘렀고.

카아아아아아아아앙

노련한 오너인 저스틴 크로비스는 이를 막아내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콰아아아아아아앙

콰아아아아아아앙

콰아아아아아아앙

[크헉!]

검이 맞닿는 순간.

머리와 어깨, 허리를 타격한 거대한 얼음의 창으로 인해 자세가 흐트러졌고.

카아아아아아아아앙

목을 노리고 휘둘러지는 검격 역시 절륜한 검술을 발휘해 방어해 낼 수 있었으나.

서걱

숨 돌릴 틈조차 없이 뒤쪽에서 날아든 5미터 크기의 바람의 칼날에 의해 왼쪽 다리가 절반 이상 잘려 나가고 말았다.

[끅...]

무려 80%가 넘는 동화율을 유지하고 있었던 탓에, 오너가 느끼는 고통은 상당할 수밖에 없었고...

서걱

이번에야말로 카트린의 목이 잘려 나가는 걸 막지 못하며.

삽시간에 어둠에 빠져들고 마는 저스틴 크로비스였다.

터어어엉

카트린의 손에 들려 있던 검이 대지 위로 떨어졌고.

이는 곧, 저스틴 크로비스가 패배를 인정했다는 뜻이었다.

연병장을 둘러싼 채 이를 지켜보던 이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하, 크로스보우로 카트린을 가지고 놀다니...”

“마력포 업그레이드에 엄청나게 돈을 쏟아부은 걸로 아는데... 난 저스틴 녀석이 저걸로 팔망카 요새의 성문을 박살 내는 걸 본 적도 있다고.”

“기간트를 타고 저런 엄청난 마법을 사용하는 게 가능한 건가? 저런 건 들어본 적도...”

“아니 그보다, 고작 내기 대련에서 기간트의 목을 잘라버렸어. 저 스노우라는 남자도 절대 정상은 아니란 증거야.”

“그러네...”

#2

“떨어져.”

“에이, 대장. 앞으로 같이 작전 나갈 일도 많을 텐데, 좀 친하게 지내자고.”

“냄새난다. 이나 닦고 와서 얘기해.”

“아니, 용병 중에 그런 거 제대로 하는 놈이 얼마나 된다고? 그래도 난 3일에 한 번 정도는 꼬박꼬박 닦아.”

“...매일 닦아라.”

“아니 그러니까......”

식당으로 향하는 와중 옆에 들러붙어 치근대는 엄청난 덩치의 백인 사내.

그의 정체는 수리비에 보태라는 말과 함께 내기 금액의 절반인 15000골드를 돌려준 이후, 틈만 나면 내게 엉겨 붙으려 드는 기간트 카트린의 오너 저스틴 크로비스였다.

이 녀석을 통해 용병 오너들을 관리할 요량으로 조금 약을 친 것뿐이었는데...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대결로부터 일주일이 지난 현재까지도 마치 오리새끼라도 되는 것마냥 내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중이었다.

저스틴 크로비스가 그러고 있으니 그의 추종자인 두 오너 역시 졸졸...

덕분에 요새 내 어느 곳을 가나 이목이 쏠리는 건 당연했는데.

나를 쫓아다니기 시작한 이후, 이 세 녀석의 행패가 멈췄기에 대부분의 요새 사람들은 이를 반기는 눈치였다.

‘허허허, 과연 대단하군. 이렇게 빨리 정리해 버릴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의뢰주인 윌리엄 다이슨 후작 역시 만족한 모양이니 뭐, 그냥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조금 냄새나고 귀찮은 걸 빼면... 저스틴 크로비스는 말할 것도 없고, 케일과 애덤이라는 나머지 두 오너 역시 각각 파일럿 재능 B+와 B를 기록한 꽤 쓸만한 인재였기 때문이다.

이들을 이끌고(?) 요새에서 가장 인기 있는 식당으로 들어서려는 찰나, 저스틴 크로비스의 입에서 뜻밖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응? 헬레나?”

이름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으나, 직접 대면하는 건 처음인 이펜타르크 용병 길드 소속 오너인 헬레나 오도넬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저스틴 크로비스를 포함한 요새 내 모두가 인정하는 최강의 기간트 오너였다.

호기심이 동한 나는 슬며시 스킬을 발동시켰다.

파아앗

[헬레나 발렌타인(A+) : 36세, 이펜타르크 제국 발렌타인 공작 가문의 장녀. 오르비스 대륙 최대의 정보길드 ‘아헨달의 그림자’의 간부

169cm, 52kg

파일럿 재능 ? 90/93(현재/최대치)

훈련 가능 기체

제우스(C) - 숙련도 0/100

토마호크 SS7 스피릿(E+) - 숙련도 0/100

안티가(B-) - 숙련도 0/100

크로스보우(B+) - 숙련도 0/100]

‘여기 왜 이 모양이야?’

‘한 놈’은 이름을 가명으로 쓰고 있더니, ‘한 년’은 성을 감췄다.

그리고 프로필에 나타난 정체성은...

‘어지럽네. 저건 대체...’

그래서 난 그녀의 정체성에 관해서는 신경을 꺼버리기로 했다.

내 관심을 끄는 건 따로 있었으니까.

‘A+?’

A+라는 엄청난 잠재력 수치는 물론이거니와 현재의 능력치 역시 무려 90으로, 여태 내가 목격한 그 어떤 오너보다도 높은 수준에 도달해 있었다.

‘로빈슨 슈왈츠에게 죽은 아트론의 오너라면 저와 비슷한 수준이었을지도...’

지독한 불운이 겹쳐 죽어버리는 바람에 직접 확인해 보지는 못했지만. 지친 상황에서도 무려 900rp에 이르는 출력 차를 극복해내는 모습을 보여주었던 그자라면, 눈앞의 여자와 비슷한 수준의 재능을 가졌을 확률이 높았다.

‘확실히 군부와 용병 통틀어 최고의 오너라는 말을 들을 만하군. 더군다나 실력에 비해 나이도 그리 많지 않은 편이고.’

다른 사람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저스틴 크로비스를 발견한 헬레나 오도넬이 미간을 찡그렸다.

하지만 시선을 아래로 내려 내 얼굴을 확인하고는, 곧장 굳었던 표정을 풀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제국의 귀족이라는 ‘정체성’을 알고 있어서인지, 걸음걸이조차 우아하게 느껴졌다.

내 앞에서 걸음을 멈춘 그녀가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저 머저리를 혼내주는 모습이 퍽 인상 깊더군요. 헬레나 오도넬이에요. 알고 계시겠지만, 비에리(2000rp, 이펜타르크제)의 오너죠. 전쟁이 끝날 때까지... 잘 부탁드려요.”

머저리라는 말을 들은 저스틴 크로비스의 얼굴이 구겨졌지만, 나는 먼저 손을 내미는 그녀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나 역시.”

나는 흔쾌히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용병의 손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부드러웠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아무려면 어떤가...

독불장군이라 불리는 그녀가 먼저 손을 내밀어 왔으니.

용병 오너 간의 서열 정리는.

이로써 완전히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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