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투기 버리고 기간트 탑니다-69화 (69/169)

69화 개전

#1

바르틴 요새의 수뇌부를 통해 마라몬트 군부와 용병 계약을 맺은 이후 일주일이 흘러갔다.

마라몬트 왕국의 최전방 요새인 바르틴과 카이샨 왕국 최전방 알마탄 요새 간의 거리는 평범한 진군 속도로 5일 정도의 거리다.

물론 지형에 구애받지 않고(사막의 모래 위에서도 최대 속도의 80%까지 가능) 달릴 수 있는 바이크와 5분간의 비행 능력(24시간에 4번 가능)을 보유하고 있는 내겐 왕복 6시간이면 충분했지만, 사실 하루 만에 두 요새를 왕복하는 건 어지간한 엑스퍼트에게도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바르틴 요새의 부사령관 리오넬 백작이 전해준 말에 따르면, 최근 두 요새 사이에서 벌어지는 척후 부대 간의 소규모 교전이 점점 더 치열한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고 한다.

‘전쟁이 임박했다는 증거지.’

‘이번이 다섯 번째 전쟁인가?’

‘전면전만 따지면. 자잘한 것까지 따지자면 숫자를 헤아리는 게 무의미할 테고.’

‘전쟁이 임박했다면 척후로 나간 이들이 위험할 텐데?’

‘...그들의 가족에겐 최고 수준의 보상이 지급될 거다.’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 없었다.

지구에서라면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지만. 이곳은 국가 간 이해관계에 따라, 개인의 목숨 따위는 얼마든지 ‘소모품’으로 취급될 수 있는 세계였다.

‘뭐, 대놓고 저지르지 않았을 뿐... 사실 그쪽도 그닥 다를 건 없었던 것 같기도 하고.’

어쨌건...

이제 어느 쪽이든, 한쪽이 심지에 불을 붙이는 순간 ‘왕국 전쟁’이라는 폭탄은 터진다.

그리고 이제껏 그래왔듯, 심지에 불을 붙이는 역할은 높은 확률로 사막 왕국 카이샨이 맡을 것이다.

목숨을 걸고 알마탄 요새 방면에서 활약 중인 척후병들의 정보에 따르면.

얼굴이 알려진 카이샨 측 오너들이 속속 모습을 드러내고 있으며. 기존 가빈 올맥과 하얀 늑대에 이어, 그 두 사람에 버금가는 실력을 지닌 용병 오너 다섯이 추가로 카이샨 쪽에 합류한 것 같다고 한다.

그들에 대한 정보를 전달받은 저스틴 크로비스가 혀를 내둘렀다.

‘엘런 싱클레어, 로빈 화이트, 나타샤 테프먼... 휘유, 이름만 들어도 살 떨리는 놈들 뿐이로군.’

‘아는 이름들인가?’

‘모르는 게 이상한 일이지. 이것들, 죄다 2000rp급 이상을 타는 괴물들이라고.’

지금까지 확인된 카이샨측 용병 오너 중 출력 2000rp 이상의 기간트를 소유한 오너만 넷에, 가장 낮은 등급의 기간트가 1700rp의 자벨린(샌포드제, 오너 가빈 올맥)이었을 정도로.

용병 오너들의 질적인 면에 치중하는 카이샨 왕국이었다.

여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존재했는데.

드워프들로부터 원하는 만큼 기간트를 공급받을 수 있는 카이샨의 전력은, 양적인 면에서는 ‘이펜타르크’와 ‘크샨트’ 두 제국을 제외한 대륙의 15왕국 중 수위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보유한 기간트는 알려진 것만 350여 기.

이는 마라몬트 왕국이 공식적으로 보유한 267기와 무려 100여 기에 가까운 차이였는데.

그 대신이라고 해야 할지, 카이샨 오너들의 기간트 운용 수준은 대체로 타 왕국의 오너들에 비해 떨어지는 편이었다.

아마도 그 질적인 면을 보강하고자 선택한 것이, 서대륙의 최정상급 용병 오너들을 포섭하는 작업이었을 터였고.

이에 반해 뛰어난 오너들을 적지 않게 보유한 마라몬트 왕국의 전략은 최대한 다수의 용병 오너들을 끌어모으는 것이었다.

물론 그런 와중에도 기준점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몬스터와의 전투와는 다르게, 인간 오너들 사이의 대규모 전투에서는 기준 출력(1000rp) 이하의 기간트들은 거의 쓸모가 없었기에.

마라몬트 왕국이 계약을 맺은 용병 오너들은 모두 기준 출력 이상의 기간트를 보유한 이들이었고, 실제로 바르틴 요새에 합류한 용병 오너 중 가장 저등급 기간트는 내가 가지고 있는 크로스보우(1100rp)였다.

전쟁이 임박한 현재, 바르틴 요새에는 군부 소속 오너 78인과 용병 오너 31인을 합해 총 109인의 기간트 오너가 주둔 중이었고. 이 숫자는 최종적으로 최소 150인까지 불어날 예정이라고 했다.

그리고 17인에서 31인으로 늘어난 용병 오너 중에는 나름 쓸만한 녀석들이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두 사람은 비에리(2000rp)의 주인인 헬레나 오도넬 만큼은 아니었지만.

카트린(1800rp)의 오너인 저스틴 크로비스에 버금가는 능력치를 보유한 실력자들이었다.

#2

‘대륙 남부 칼루아 왕국에서 태어나 가장 먼 나라인 이펜타르크 제국에서 다이아몬드 등급 용병 오너가 된 용병 업계의 전설 맷 스팅리’

이것이 요새에 새로 합류한 출중한 실력의 흑인 용병 오너가 스스로를 설명한 프로필이었다.

하지만...

[네드 험버(A) : 41세, 오르비스 대륙 북부 이펜타르크 제국의 황태자 휘하 비밀기사단 ‘칼리브(영광)’의 일원

189cm, 92kg

파일럿 재능 ? 85/88(현재/최대치)

훈련 가능 기체

제우스(C) - 숙련도 0/100

토마호크 SS7 스피릿(E+) - 숙련도 0/100

안티가(B-) - 숙련도 0/100

크로스보우(B+) - 숙련도 0/97]

‘전부 다 개소리였군.’

마가 끼기라도 한 건지, 용병 오너 중 제법 실력이 출중한 놈들은 하나 같이 뒤가 구렸다.

어쩌면 그의 입으로 스스로를 소개한 프로필 역시 진실일지도 모르지만...

‘뭐, 등급에 상관없이 용병이라는 직업을 선택한 인간 중 사연 없는 이가 어디 있으랴 만은... 아무리 그래도, 대륙 최강국의 황태자 직속 수하란 놈이 남의 나라 전쟁엔 대체 끼어든 거야?’

더군다나 현재 그 황태자란 녀석은 한창 황위 계승을 위해 형제들과 내전을 치르고 있지 않던가.

이놈의 원래 성격이 그런 건지, 아니면 철저하게 용병이라는 컨셉을 지키고 있는 것인지는 몰라도.

마라몬트의 왕도에서 이미 용병 계약을 맺은 이후 요새에 합류한 녀석은, 저스틴 크로비스와 마찬가지로 다짜고짜 내게 시비를 걸어왔다.

콰아아아아아아앙

퍼어어어어어엉

콰아아아아아아아앙

크로스보우의 주먹(검과 방패는 소환조차 하지 않았다)과 마법에 흠씬 두들겨 맞은 맷 스팅리의 ‘바클리(1800rp, 이펜타르크제)’의 외부 장갑은 완전히 너덜너덜해진 상태였고.

[더 할 테냐?]

[하, 항복...]

지면에 나뒹군 바클리를 내려다보는 크로스보우를 바라보며.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굴욕적인 항복 선언 이외엔 존재하지 않았다.

“씨발, 이건 사기야!”

사제의 치료를 받으며 욕지거리를 내뱉는 맷 스팅리.

그런 그에게로 2미터가 훌쩍 넘는 거한이 음흉한 웃음소리를 흘리며 다가왔다.

“크크크크, 그러니까 상대를 알아보고 덤볐어야지.”

“웃지 마! 저스틴, 이 의리 없는 새끼야! 말리기는커녕 내기를 부추겨? 게다가 나보다 먼저 작살난 주제에 여유 있는 척하지 마! 그래도 난 1만 골드밖에 안 잃었다고!”

“쳇, 벌써 들었냐?”

오랫동안 대륙 북부를 무대로 활동해온 두 용병(겉으로 드러난 신분은), 저스틴 크로비스와 맷 스팅리는 이미 안면이 있는 사이였고.

지독하게 얻어맞은(물론 기간트로) 맷 스팅리는 내 실력에 대해 잘 알고 있었음에도 자신을 말리기는커녕, 내기를 부추긴 저스틴 크로비스를 원망스러운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저게 연기라면... 비밀기사단 따위가 아니라 배우를 해야 할 놈이로군.’

내 기준에는 아니지만, 이 세계에선 천재라는 평가를 받고도 남을 ‘A+’급 재능의 헬레나 오도넬과 ‘A’급인 두 바보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정말 대단한 실력입니다. 진심으로 감탄했어요.”

마치 그림으로 그린 듯한 조각 같은 외모의 20대 중반의 사내.

헬레나 오도넬의 ‘비에리’와 같은 2000rp의 출력을 자랑하는 엘프제 기간트 ‘아란델’의 주인인, 본인 피셜 ‘하프 엘프’ 카일 어네스트가 바르틴 요새 31인의 용병 오너 중 최정예라 할만한 인재들이었다.

[베르나르도 르 바라탄(A+) : 106세, 오르비스 대륙 북부 하르세리안 왕국의 국왕 ‘베르세우스 엘 바라탄’의 일곱 번째 아들. 하르세리안 왕국 특무부대 ‘아켈메(상수리나무)’의 부대장

184cm, 69kg

파일럿 재능 ? 87/92(현재/최대치)

훈련 가능 기체

제우스(C) - 숙련도 0/100

토마호크 SS7 스피릿(E+) - 숙련도 0/100

안티가(B-) - 숙련도 0/100

크로스보우(B+) - 숙련도 0/100]

그런데 이 새끼들...

어째 제대로 본명을 밝힌 놈이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나마 몰락 귀족인 저스틴 크로비스는 평범한 편.

‘제국 공작 가문의 장녀인 주제에 대륙 최대 정보 길드의 간부인 년이랑, 그 제국의 황태자 직속 비밀기사단원이라는 놈. 거기에 엘프 나라 왕자인데 특무부대 조장이기도 한 나이 많은 애새끼까지...’

혼란하다, 혼란해...

뭐, 내 계획을 방해하지만 않는다면야 딱히 상관은 없지만.

만약 방해가 된다면?

고민할 게 있나?

당연히 죄다 치워버려야지.

#3

마라몬트 왕국과 카이샨 왕국의 전쟁은 단순히 바다를 얻기 위한 카이샨의 욕심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다.

분명 첫 전쟁의 이유는 그것이었지만, 이후 반복된 세 차례의 전쟁에는 뚜렷한 전조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카이샨의 왕좌를 차지하는 부족의 교체였다.

사막의 여덟 부족의 집합체인 카이샨 왕국은 핏줄로 왕위를 계승하지 않는다.

왕이 죽으면 부족의 대표들이 모여 회합을 가지고, 그곳에서 가장 많은 부족의 지지를 이끌어낸 부족의 대표가 왕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그리고 왕의 자리가 결정되기까지, 사막에는 필연적으로 수많은 이들의 피가 흐르게 된다.

그리하여 왕의 자리에 오르게 된 이(부족)는, 자신의 치세를 공고히 하기 위한 업적이 필요했고.

그 제물로 수십 년에 걸쳐 원한이 쌓인 마라몬트 왕국보다 좋은 상대는 없었다.

같은 부족이 연이어 왕좌를 차지한 경우에는 소규모 국지전 정도에서 그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나, 왕좌를 차지하는 부족이 바뀌었을 시에는 어김없이 2,3년 안에 전면전이 일어났다.

그리고 현 카이샨 왕국의 왕좌는 3년 전 ‘키리히’ 부족에서 ‘툴루에’ 부족으로 이양되었다.

이에 마라몬트 왕국 역시 전쟁이 일어날 것을 확신하고 철저한 준비를 해온바.

스노우가 용병 계약을 맺고 바르틴 요새에 머문 지 보름이 지났을 때. 요새에는 총 159명의 오너와 그 숫자만큼의 기간트, 그리고 20만 병력이 집결한 상태였다.

그리고 반대편 알마탄 요새 역시, 184기의 기간트와 왕국 북부에서 내려온 25만의 병력으로 인해 성 내부가 미어터지기 직전이었다.

그로부터 3일 뒤.

드디어 카이샨의 선전포고가 있었다.

타박타박타박타박......

사막을 건너고 너른 들판을 지나 바르틴 요새의 앞까지 도착한 거대한 동물 21마리가 걸음을 멈추었다.

푸르르르릉......

이는 사막의 대표적인 이동 수단인 ‘바잘’이라는 동물이었고.

그들을 이곳까지 몰고 온 인원은 모두 도망이라도 친 것인지, 인간이라고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단지...

21마리 바잘들의 등에는 모두 211개의 둥그런 물체가 매달려있었고.

이는 선전포고문과 함께 전달된 마라몬트측 척후부대원들의 머리였다.

선전포고를 앞두고 기간트까지 동원한 카이샨 왕국군의 청소 작전으로 인해, 300여 명의 척후병 중 고작 90여 명만이 생환에 성공했기에.

이는 이미 예견되었던 광경이었다.

척척척척척척척척......

바르틴 요새의 사령관 윌리엄 다이슨 후작을 비롯한 20여 명의 기사들이 요새의 성문을 나섰다.

그리고 각자 한 마리의 바잘 앞에 선 그들은...

서걱

서걱

서걱

.

.

.

서걱

일제히 카이샨 왕국군이 보내온 바잘들의 머리를 잘라버렸고.

거대한 동물의 목에서 뿜어져 나온 피가 온몸을 적시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바잘의 몸에 매달린 척후병들의 머리를 일일이 회수해 병사들이 가지고 온 상자에 담았다.

마지막으로 선전포고문을 회수한 윌리엄 다이슨 사령관이 마력을 한껏 담아 큰소리로 외쳤다.

“개저어어어어어어어언(開戰)!”

마라몬트와 카이샨의 전쟁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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