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투기 버리고 기간트 탑니다-73화 (73/169)

73화 첫 번째 기간트 대전(4)

#1

모든 점을 고려한 상대의 실력은 여전히 카일 어네스트 자신보다 한 수 정도는 앞서고 있었다.

2년 전, 그때도 역시 적으로 만났었던 용병 오너 멜빈 가이우스.

당시에는 자신과 같은 엘프 오너의 도움으로 그에게 큰 타격을 입혀 전장을 이탈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1대1로는 결코 그의 상대가 되지 못했었고.

그건 2년이 지난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강하다... 왕국의 대전사들 정도는 되어야 상대가 가능할 것 같아.’

엘프 왕국의 근위기사들 중에서도 단 세 명에게만 돌아가는 ‘대전사’의 칭호.

카일 어네스트가 판단하기에, 지금 자신이 상대하고 있는 바실론의 오너 멜빈 가이우스는 충분히 그 대전사들에 비견 될 만했다.

실력과 기체에서도 밀리는 판에, 정령까지 역소환 당해버린 그에게 더이상 승산이란 건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때...

화아아아아아아악

자신의 기간트인 아란델의 몸에서 옅은 빛이 발산되기 시작했다.

그 직후 차오르기 시작한 이유 모를 고양감.

단지 기분 탓이 아니었다.

실제로 온몸에 활기가 돌기 시작하더니, 정령의 역소환으로 인해 깨질 듯 아팠던 머리마저 씻은 듯 맑아졌다.

그리고 전신을 뜨겁게 달구며 치솟아 오르는 힘.

“이게 대체...”

이런 일을 벌인 게 누구인지는 고민할 필요조차 없었다.

“그가... 아군 기간트에게 건 마법이 이것이었나?”

종류는 달랐지만 스노우가 벌인 일이란 것은 틀리지 않았다.

“믿을 수가 없군.”

본신의 힘을 증폭시키는 능력이라면 엘프족인 그에겐 그리 낯설지 않은 이적이었다.

바람의 정령을 능숙하게 다루는 카일 어네스트 본인 역시, 자신이나 타인의 이동속도를 올려주는 것 정도는 얼마든지 가능했으니까.

“그런데 기간트를 탄 채로 그런 일이 가능하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는데.”

궁금한 것이 많았지만, 그의 상념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지금은 전투 상황이었으니까.

다행히 적 기간트 역시 무언가 일어났다는 걸 눈치챘는지 조금 당황한 듯 보였고.

덕분에 약간의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엄청난 고양감에 휩싸인 카일 어네스트가 동화율을 극한까지 끌어올리며 상대를 향해 달려들었다.

쉬이이이이이익

바람의 정령의 가호를 받고 있을 때와 별반 달라진 게 없는 스피드.

이전과 비교해 훨씬 더 강해진 힘.

거기에 이글이글 타오르는 검까지.

콰아아아아아아앙

퍼어어어어어엉

[크윽!]

바실론의 통신 마법진을 통해, 전투 개시 후 처음으로 멜빈 가이우스의 신음이 흘러나왔다.

한층 묵직해진 검격과 맞부딪힌 직후 자신이 있는 방향으로 터져 나오는 폭발.

이에 깜짝 놀란 멜빈 가이우스가 황급히 거리를 벌리며 뒤로 물러났다.

타아아앙

그런 바실론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무서운 기세로 땅을 박차며 달려오는 아란델.

콰아아아아아아앙

퍼어어어어어엉

카아아아아아아앙

퍼어어어어엉

[윽, 젠장...]

상대의 검에서 터져 나오는 폭발과 불길은 2300rp의 바실론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입힐 정도는 아니었다.

크샨트제의 특장점이 바로 그 어느 곳에서 만든 기간트보다 뛰어난 마법 방어력에 있었으니까.

[상체 외부장갑 파손율 4.8%, 4.9%...... 5.3%.]

하지만 미약한 피해도 피해는 피해였고, 검을 한 번 부딪힐 때마다 시야 한 편을 어지럽히는 파손율 현황 역시 거슬리는 건 마찬가지였다.

띠릭

그는 의식을 집중해 시야 오른편을 어지럽히던 모니터를 껐다.

갑자기 마법검으로 변해버린 아란델의 검으로 인해 귀찮아진 것을 제외하자면, 상대의 전체적인 능력치는 여전히 자신의 아래.

다행히 검격을 교환할 때마다 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길은 약해졌고, 그에 따라 폭발의 위력 역시 줄어들고 있었다.

‘분명 빛이었어. 전투 초반 그 녹색 빛, 그것과 같아. 색이 좀 다르긴 했지만... 이 번에도 저 마법 기간트의 농간이겠지? 대체 저기 타고 있는 놈의 정체가 뭐길래...’

올해 49세, 용병 경력 31년에 오너 생활만 21년째에 접어든 멜빈 가이우스로서도 듣도 보도 못한 괴사였다.

기간트의 능력을 상승시키는 마법이라니?

검에 서린 불길이 약해졌고, 상대의 움직임 역시 점차 이전으로 회귀하고 있었기에 또다시 승기를 잡는 데는 무리가 없었다.

카아아아아아아앙

퍼어어어엉

자세를 낮추며 아란델의 검을 아래에서 위로 쳐올리자 폭발의 여파가 그를 비껴갔다.

그대로 주저앉다시피 하며 강하게 다리를 휘둘렀고.

콰아아아아아앙

[크윽!]

쿠당탕탕...

오른쪽 다리를 얻어맞은 아란델이 대지 위를 굴렀다.

절호의 기회.

하지만 멜빈 가이우스는 석벽 위의 기간트가 신경 쓰여 섣불리 공세를 이어갈 수 없었다.

[후우우...]

그는 잠시 숨을 고르며 석벽 위 크로스보우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그의 눈에 들어온 광경은...

[하, 저 개 같은 놈이...]

석벽 위의 기간트는 가슴까지 오는 석벽에 걸친 한쪽 팔로 턱을 괸 채, 삐딱한 자세로 간간이 마법을 구사하고 있었다.

멜빈 가이우스는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는 당장이라도 석벽을 뭉개버린 뒤 저 건방진 기간트를 지면에 처박아 버리고 싶었지만...

카아아아아아앙

퍼어어엉

어느새 몸을 바로 세운 채 자신을 향해 검을 휘둘러 온 아란델로 인해 목적을 이룰 수 없었다.

[빌어먹을!]

#2

기다리던 순간이 도래하고 있었다.

나는 석벽 위에서 세 군데로 나뉜 전장을 돌아보았다.

탁 트인 평원인데다, 엄청나게 넓은 범위도 아니었던 터라 ‘천리안(C)’ 스킬까지 사용할 필요도 없었다.

수백 기가 엉킨 전장.

그곳에 서서히 균열의 징후들이 드러나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징후들은 마라몬트군에 있어 결코 좋은 소식이 아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먼저 붕괴되기 시작한 건 마라몬트의 기간트 부대 중 유일하게 수적 우위를 차지하고 있던 좌군이었다.

그리 큰 차이는 아니었지만, 고작 서너 기 차이로 인해 승패가 결정되는 경우도 빈번한 게 바로 기간트 대전이었다.

그에 비해 무려 7기나 많은 숫자로 적과 맞부딪힌 좌군은 사실상 가장 먼저 상대를 제압했어야만 하는 상황.

하지만 현재 그들은 최초의 격돌 지점에서 70미터 가까이 뒤로 밀린 상태였고, 전장을 이탈하는 기간트 수 역시 적에 비해 월등하게 많았다.

“뭐, 그래도 버틸 만큼 버텼으니... 상관은 없지.”

멀리서 보기에도 패배의 원인은 너무나 명확해 보였는데.

아군 전열의 양쪽 측면을 공략한 적 기간트 두 기의 눈부신 활약이 바로 그것이었다.

가슴에 큼지막한 늑대 머리를 양각해 놓은 날렵한 순백의 기간트.

비정상적으로 머리가 작고 어깨에 마력포 한 문을 달고 있는 보라색 기간트.

마라몬트의 우군을 상대로 날뛰고 있는 기간트들은 그 외형부터가 매우 특별했다.

“저게 그 하얀 늑대란 녀석이로군.”

그는 최상급 엑스퍼트에 이른 실력자답게 엄청난 검술 실력을 과시하고 있었고, 기간트 운용 실력 역시 매우 뛰어났다.

“그리고 저건... 샌포드제? 굳이 저걸 탈 필요가 없는 녀석처럼 보이는데.”

대충 봐도 하얀 늑대와 엇비슷한 수준의 실력이었다.

그런 강자에게 어울리는 기간트라면 얼마든지 있을 터였다.

“저스틴처럼 특이한 취향을 가진 녀석인가 보군.”

저스틴 크로비스가 카트린을 구입한 건 ‘마법에 대한 로망’이라는 쓰잘데기 없는 이유 때문이었는데.

출중한 검술을 지닌 엑스퍼트가 오너라면, 사실상 동화율을 보정 해 주는 루페른제나, 기체의 성능 자체가 출중한 이펜타르크제, 그것도 아니라면 오버클럭의 한계치를 높여주는 드워프제 기간트가 효용성이 높았다.

콰아아아앙...

조금 떨어진 전장에서 들려오는 아득한 포성.

적 기간트의 마력포에서 뿜어져 나온 벼락으로 인해 또 하나의 아군 기간트(크로스보우)가 전투 불능에 빠지고 말았다.

빠르게 기동하면서도 마력포를 터뜨려대는 걸 보니, 그 숙련도만큼은 확실히 엄지를 치켜들 만했다.

좌군의 전열이 급속도로 붕괴되자,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미약하게나마 적을 밀어붙이고 있던 중군 오너들 역시 눈에 띄게 동요하기 시작했다.

적 기간트 서넛을 한꺼번에 상대하는 배틀엑스(2500rp)의 주인, 로버트 서튼 백작의 활약 덕분에 아직까지 박빙을 유지하고 있긴 했지만.

좌군의 침몰로 인한 스노우볼이 중군을 덮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 같지는 않았다.

여기까지 버텨낸 것만으로도 눈부신 전과라 칭찬받아 마땅할 우군 역시 이제는 한계에 다다른 상황.

콰아아아아아아앙

타아아아아아앙

쿠우우우우우우웅

만신창이가 된 아군 기간트들은 여전히 10여 기 이상 많은 적 기간트들의 공세를 간신히 막아내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일방적으로 공격을 퍼붓고 있는 적 기간트들 역시 움직임이 눈에 띄게 무뎌졌고.

전장을 이탈한 기체 역시 적이 아군에 비해 두 배 이상 많다는 사실이었다.

이 전장에서 그나마 쌩쌩한 건, 양군 주력의 양 사이드에서 맞붙고 있는 6인의 에이스급 용병 오너들 뿐이었다.

나는 전장을 돌아보던 시선을 거둬들였다.

개전 이후 20여 분을 훌쩍 넘긴 상황.

“슬슬 시작해도 될 것 같군.”

기간트를 타고 전력으로 기동할 수 있는 시간은 일반적으로 30분을 넘지 못한다.

게다가 단 한 순간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이런 대규모 전쟁이라면, 체력소모는 더더욱 심해질 수밖에 없다.

고로 오너들 대부분의 체력이 한계를 향해 달려가고 있을 이 시점.

정신력이 부족한 체력을 지탱하기 시작할 지금 이 시점이야말로.

내가 전장에 난입할 최적의 타이밍이었다.

그리고 내 첫 번째 목표는 석벽 밑에서 가공할 검술을 발휘하고 있는 적의 대장기(실력적으로는)였다.

타아아아아앗

나는 석벽을 박차고 날아오르며.

적 기간트의 공세를 힘겹게 막아내고 있는 아란델과의 통신 채널을 열었다.

[전력을 다해 물고 늘어져라.]

그리고 내 말뜻을 단번에 이해한 카일 어네스트는 기특하게도...

정말로 전력을 다해 적 기간트를 물고 늘어지기 시작했다.

#3

[전력을 다해 물고 늘어져라.]

버프의 힘이 다한 탓에 죽을 맛이었던 그의 귓가를 파고든 한 줄기 음성.

사실상 저 목소리의 주인의 존재로 인해, 현저하게 밀리고 있었던 카일 어네스트가 침착함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직까지 석벽 위에만 머무르고 있기는 했지만...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자신들의 (임시)단장이, 아군인 자신이 죽도록 내버려 두진 않으리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근데 아니면 어쩌지? 살짝 정상이 아닌 것 같긴 하던데...’

잠깐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적도 있었지만.

어차피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스노우라는 작자를 믿고 눈앞의 적을 상대하는 것 이외엔 없었다.

그리고 카일 어네스트의 믿음은 보상을 받았다.

스노우의 의도를 단박에 알아챈 그는 순간적으로 오버클럭까지 일으키며 방어를 도외시한 격렬한 공세를 퍼부었고.

“크윽...”

그 와중에 적의 칼날에 몇 번이나 난도질당하며 상체 장갑의 50%가 파괴되어버렸다.

하지만 그 덕분에 바실론 역시 손과 발이 바빠질 수밖에 없었고.

온갖 버프를 몸에 두른 채 허공에서 떨어져 내리는 크로스보우를 인지하는 타이밍이 조금 늦고 말았다.

투각

투각

스르르르르르륵

갑작스레 발밑에서 치솟아 오른 거대한 바위 송곳들이 바실론의 몸에 박혀 들었고(물론 장갑을 뚫지는 못했다).

기간트의 팔뚝만 한 두께의 넝쿨들이 양쪽 다리를 타고 오르며 옥죄기 시작했다.

비록 스킬들의 연계를 피해내지 못하고 속박당하긴 했지만.

멜빈 가이우스의 판단은 빨랐다.

그 역시 기체를 순간적으로 오버클럭 시켰고.

아란델의 공격을 맞받아침과 동시에 몸을 크게 흔들어 바위와 넝쿨들을 떼어낸 뒤.

뒤로 훌쩍 뛰어 공중에서 내려치는 공격을 피해냈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크로스보우의 검이 지면을 내리찍었고.

그 위력이 어찌나 강했는지 자그마한 크레이터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멜빈 가이우스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도 전.

츠츠츠츠츠츠츠츠츠츠

크로스보우를 중심으로 급격하게 뻗어 나오기 시작한 얼음의 대지가 반경 100여미터를 뒤덮었고.

촤르르르르르르륵

바실론의 발밑에서 이번에는 마치 뱀과 같은 거대한 얼음덩어리가 솟아오르며 그의 하체를 속박했다.

[이건 또 뭔...]

콰아아아앙

콰아아아아앙

자신을 옥죄고 있는 얼음덩어리를 검으로 내리쳐 간신히 속박에서 벗어난 바실론.

놀랍게도 얼음덩어리는 이전 바위나 넝쿨에 비해 훨씬 더 단단했고.

이를 빠져나오기 위해 상당한 시간과 힘을 소모해야만 했다.

게다가 한 번 빠져나왔다고 해서 끝이 아니었다.

바실론은 여전히 얼음의 대지 위에 발을 딪고 있었고.

촤르르르르르르르륵

촤르르르르르르르륵...

얼음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뱀들은 끝도 없이 솟구쳐 올랐다.

결국 양쪽 발은 물론 허리까지 단단히 속박당하고만 바실론.

그런 그를 향해 크로스보우가 엄청난 속도로 쇄도해 들어왔다.

[빌어먹을!]

대검마저 뱀 형상의 얼음덩어리에 속박당한 멜빈 가이우스는 다급하게 방패를 소환해 크로스보우의 공격을 막으려했지만.

스르르르르르륵

허리를 휘감고 있던 얼음덩어리가 일순간 주욱 늘어나며, 순식간에 사람과 비슷한 형상을 갖추었고.

그것은 상체를 길게 늘어뜨리며 방패를 들고 있는 왼팔에 달라붙더니.

삽시간에 크기를 불리며 방패와 팔 전체를 감싼 거대한 공 모양의 얼음덩어리로 변해버렸다.

이로써 완벽한 무방비 상태가 되어버린 바실론.

오너인 멜빈 가이우스의 눈동자에 절망의 그림자가 스며들었다.

[젠장...]

콰드드드드드득

붉은 기운이 넘실거리는 크로스보우의 검이 바실론의 외부장갑과 내부장갑을 모조리 뚫고 몸통을 관통했다.

[크허억!]

대륙의 용병 중 능히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갈 만한 강자.

멜빈 가이우스의 허무한 최후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