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첫 번째 기간트 대전(5)
#1
화아아아아아앗
몸통을 꿰뚫린 카이샨의 고등급 기간트가 빛과 함께 자취를 감추었다.
기간트가 사라진 자리에는 상체의 절반 이상이 처참하게 으깨진 30대 후반 사내의 시체만이 남아있었다.
쿠웅쿠웅쿠웅쿠웅...
[멜빈 가이우스라는 자입니다. 20년 넘게 이름을 떨친 거물 용병이죠. 이 자가 이렇게 쉽게 죽어버릴 줄은...]
내가 있는 곳으로 다가온 아란델에게서 카일 어네스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고개를 돌려 아란델의 상태를 확인했다.
기간트의 상태로만 보자면, 오히려 이쪽이 먼저 죽지 않은 게 천운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움직일 수 있나?]
[외부 장갑이 대부분 박살 나긴 했지만, 그 외에는 괜찮은 것 같습니다.]
[그래?]
나는 지체없이 그에게 ‘리프레쉬(C)’ 스킬을 한 번 더 사용했다.
이렇게 되면 전투가 끝난 이후 제법 고생하게 될 테지만, 헬레나 오도넬과 함께 아군의 가장 강력한 패 중 하나인 그에게는 아직 할 일이 남아있었다.
[헬레나를 도와라.]
[알겠습니다.]
군말 없이 달려가는 카일 어네스트를 확인한 나는, 저스틴 크로비스와 맷 스팅리가 격전을 벌이고 있는 전열의 우측으로 몸을 날렸다.
그러자 눈치 빠른 적 오너 하나가 오버클럭을 일으키며 엄청난 공세를 퍼붓더니, 저스틴 크로비스의 카트린이 주춤한 틈을 타 도주를 감행했다.
“오, 좋은 판단인데?”
빠른 판단으로 목숨을 부지한 동료와는 달리.
몸을 빼지 못해 순식간에 2대1 상황을 마주하게 된 적 기간트는 빠르게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굳이 무리해서 도망치는 적을 쫓거나, 다 죽어가는 적을 막타 칠 생각은 없었다.
“먹잇감이라면 차고 넘칠 정도니까.”
나는 아군 기간트들에게 일방적인 공세를 퍼붓고 있는 적의 주력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제껏 확인한 바로는, 아군의 주력 기간트 28기 중 전투 불능으로 전장을 이탈한 기체는 넷이었고 그중 둘은 오너가 사망했다.
그에 반해 적 기간트는 11기의 기간트가 전장을 이탈했으며, 죽은 오너는 여섯이었다.
현재까지의 전과로만 따지자면 그야말로 대승이 따로 없었다.
물론 내가 개입하지 않는다면 지금부터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었을 테지만... 그건 의미 없는 가정일 뿐이었다.
마력을 아끼기 위해 매토템과 곰토템을 제외한 모든 스킬을 해제했다.
적의 주력은 대부분 1500rp 이하의 기간트들이었고.
그중에서도 절반 이상이 1200rp인 드워프제 기간트 바이샨이었기에, 두 개의 버프면 충분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타아아아앗
공중으로 20여 미터를 도약한 나는...
서걱
먹이를 노리는 매처럼 아래로 내려꽂히며, 아군 기간트의 몸통에 검을 꽂아 넣으려는 바이샨 한 기의 목을 잘라버렸다.
그런 다음, 중심을 잡지 못하고 비틀거리는 놈의 추가 장갑을 칼질 두 번으로 해체한 뒤.
콰아아아아아아악
카아아아아아아앙
훤하게 드러난 가슴에 검을 꽂아 넣었다.
콰드득
“2킬... 그런데 이거, 추가 장갑이 있으니 확실히 거추장스럽긴 하군.”
콰아아악
나는 바이샨의 몸에 박힌 검을 뽑아냈고, 그 틈새로 소량의 핏물이 뿜어져 나왔다.
물론 어디까지나 기간트의 덩치에 비해 소량이었다.
나는 옅은 빛을 발산하기 시작하는 기간트를 그대로 두고는 세 번째 먹잇감을 탐색했다.
“저놈이 좋겠어.”
대략 1700~1900rp 정도 되어 보이는 은색 기간트였다.
현재 전열에 남아있는 적 기간트 중엔 덩치가 가장 컸고.
거기에 추가 장갑까지 그 어느 기간트보다 충실하게 보강한 녀석이었다.
아무래도 카이샨 좌군의 지휘관일 확률이 높아 보였다.
“뭘 저리 많이 달아놨어? 쩝, 마력이 아깝긴 하지만... 인첸트 메가 라이트닝.”
스킬을 시전하자 들고 있던 검의 주위로 황금빛 전류가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타다다다다다다다... 타아앗
적 지휘관의 기체를 향해 다시 한번 뛰어오른 뒤, 중력 스킬까지 사용해 무게를 한껏 늘린 검을 내리찍었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엄청난 폭음이 전장을 뒤흔들었고, 전면부 추가 장갑이 죄다 날아가 버린 채 외부 장갑까지 시커멓게 그을린 적 기간트의 모습이 드러났다.
나는 망설임 없이 마력을 불어넣은 검을 녀석의 몸통에 쑤셔 넣었다.
콰드드득
“3킬.”
죽기 전 명령을 내린 건지, 아니면 다른 지휘관이 있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3번째 킬 포인트를 획득하는 순간, 적의 좌군에 속해 있던 기간트들이 매서운 공격을 퍼부어 아군과의 거리를 벌린 이후 일제히 몸을 돌려 도주하기 시작했다.
“벌써 빠진다고?”
시선을 돌려 확인했지만, 다른 두 전선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이는 카이샨 좌군만의 후퇴라는 뜻이었다.
나는 빠르게 몸을 날렸고.
콰아아아아아아아앙
콰드득
가장 후퇴가 늦었던 바이샨 한기를 더 잡아내는 성과를 올린 뒤.
아군 채널을 열어 지시를 내렸다.
#2
[카일, 기동 가능한 아군과 함께 적당히 추격하는 척해라. 적이 다시 전장에 합류하지 못하도록 하는 게 목적이다. 적진 깊숙이 들어가지는 말란 말이야.]
[알겠습니다.]
아직 모든 전장의 승패가 나뉜 게 아니었으니, 전과를 확대하기 위해 무리할 필요는 없었다.
카일이 여력이 남아있는 17인의 용병 오너들을 이끌고 적 기간트들의 추격과 견제를 위해 떠나갔고.
나는 추가 지시를 내렸다.
[저스틴, 맷. 너희는 곧바로 좌군에 합류한다. 목표는 리오넬 부사령관을 최대한 보호하며 아군의 지원을 기다리는 것. 여의치 않으면 부사령관만 빼내 후퇴해도 상관없다.]
[맡겨두라고!]
[어려울 것 없는 일이로군.]
비슷한 수준의 상대를 잡아두는 것에만 주력했던 저스틴 크로비스와 맷 스팅리는 여력이 남아있는 상태였고.
곧바로 중군이 있는 전장의 중앙을 크게 우회해 마라몬트의 좌군을 향해 달려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적의 우군에게도 이쪽의 패퇴 소식이 전해질 테니 동요가 없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 저만한 실력자 둘이 합류한다면 전선이 완전히 무너지는 것 만큼은 막을 수 있을 테지.
나는 마지막으로 남은 헬레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넌 나를 따라오도록. 중군을 지원한다.]
[네.]
나는 용병 오너 중 최강의 실력자인 헬레나 오도넬을 대동한 채 카이샨 중군의 옆구리를 향해 쇄도해 들어갔다.
#3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던 마라몬트 왕국 기간트 부대의 대장인 로버트 서튼 백작.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아군의 뛰어난 오너들과 자신의 활약으로 인해 미세하나마 승기를 잡아가고 있던 그는 낭패감을 감출 수 없었다.
“오히려 좌군이 무너지다니...”
용병 오너 33인으로 구성된 우군만으로 적 기간트 부대의 한 축을 막겠다는 작전을 전해 들었을 때, 그는 사령관이 치매라도 걸린 건 아닌지 의심스러운 마음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지휘관이라는 마검사 용병 오너의 실력을 직접 확인하고 나서야 조금은 수긍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여전히 이 작전이 성공하리란 확신은 없었다.
“그저 조금이라도 더 적의 발목을 잡아주길 바랐을 뿐이었는데...”
용병 부대의 지휘관은 상상 이상의 능력을 지닌 이레귤러였다.
무슨 수를 쓴 것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멀리서도 확인 가능한 그의 마법 폭격은 어지간한 경험을 지닌 그조차 탄성을 감출 수 없을 정도였다.
무려 17기의 차이를 극복하고 팽팽하게 전선을 유지해준 용병들 덕분에, 한때 이 첫 번째 기간트 대전의 승리를 확신했었던 로버트 서튼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전투 개시 20여 분이 지나자 마라몬트측 좌군의 기간트들이 속절없이 무너지기 시작했고, 그 여파는 자신이 지휘하고 있는 중군에게까지 미쳤다.
[동요하지 마라! 눈앞의 적에게만 집중해라!]
콰드드득
아군 통신 채널을 통해 부하들을 독려하며 카이샨의 아트론 한 기의 몸통을 꿰뚫는 로버트 서튼.
이 전장에서만 이미 4개의 킬 포인트를 올린 그가 빠르게 아군의 상황을 살폈다.
고작 서른 기 정도만 남은 좌군 기간트들이 40여 기의 카이샨측 기간트들의 맹공에 시달리고 있었다.
‘빌어먹을...’
아군 통신 채널에 의해 들어온 보고로는 이미 좌군에서만 7명의 오너가 사망했고, 전투 불능으로 이탈한 기간트 역시 사망자 포함 20기가 넘는다고 한다.
이에 반해 적 우군의 사망자는 고작 셋. 전투 불능으로 이탈한 기간트는 사망자 포함 10기 정도에 불과하다고.
“젠장, 노만 이 자식, 대체 지휘를 어떻게 했길래...”
사실 그도 알고 있었다. 기간트 대전에서는 전술적인 차이보다는 개개인 오너의 역량에 의해 승패가 갈리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대체 어떤 전략을 사용한 것인지, 고작 33기로 50기의 기간트와 동수를 이룬 아군 용병 부대의 활약 같은 건 정말로 드물디드문 경우였다.
[대장님, 적 우군 기간트 다섯 기가 난입했습니다.]
[페트릭이 당했습니다!]
[하얀 늑대입니다! 하얀늑대가 측면으로 난입...]
[대장ㄴ......]
좋지 않은 소식들이 통신 채널을 통해 흘러들어왔지만, 그라고 한들 딱히 별다른 방법이 있을 리 없었다.
‘이렇게 된 이상 조금 무리를 해서라도...’
그가 동화율을 극한까지 끌어올리는 동시에 오버클럭을 일으키려 할 때였다.
전장에 이변이 발생했다.
퍼어어어어어어엉
콰아아아아아앙
콰아아아아아앙
콰드드드득
거대한 불덩어리가 가장 우측에 있던 적기를 덮치더니.
불꽃과 연기를 가르며 나타난 뚱뚱한 기간트 한 기가 엄청난 검격으로 적기의 전면부 추가 장갑을 순식간에 날려버렸다.
그리고는 붉은빛이 감도는 검으로 마치 두부를 가르듯 몸통을 꿰뚫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크로스보우? 그런데 저 움직임은 대체... 아!”
순간 어리둥절하던 로버트 서튼은 저 크로스보우의 오너가 누구인지 알아차리곤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헉, 그럼 우군의 상황은...”
때마침 아군 통신 채널에서 보고가 들어왔다.
[우군이! 우군이 적을 패퇴시켰습니다. 적 기간트 13기 다운. 남은 적기는 모두 본진으로 후퇴. 우군의 주력이 후퇴한 적기들의 전장 진입을 견제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용병 단장을 비롯한 수뇌부는 좌군과 중군으로......]
단번에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낭보였다.
마침 무지막지한 실력을 발휘 중이던 적 용병 오너 ‘하얀 늑대’에게 달려드는 비에리(2000rp)의 모습이 보였다.
로버트 서튼도 익히 알고 있는 아군 최고의 실력자 중 하나인 용병 오너 헬레나 오도넬이었다.
카아아아아아아앙
중군(마라몬트 기준)의 좌측면에서 엄청난 공방을 주고받기 시작하는 두 실력자.
로버트 서튼 자신조차 쉽사리 제압하기 힘든 상대인 하얀 늑대의 난동을 저지하는 것만으로도, 아군은 금세 전열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게다가 미친 것처럼 전장을 활보하며 킬 포인트를 올리고 있는 크로스보우는 ‘사신’ 그 자체였다.
“실로 하늘이 내린 천재라 할 만한 실력이로군.”
이 전장에서 크로스보우보다 못한 기체는 없었다.
하지만 1200rp의 바이샨도, 1400rp의 아트론도, 심지어 1800rp의 크라노스조차도 채 다섯 합을 버티지 못한 채 전장의 연기로 사라지고 있었다.
중군에 난입한 지 채 3분조차 지나지 않았음에도.
무려 3기의 기간트를 잡아내는 말도 안 되는 위용을 과시한 것이다.
당연하게도 카이샨의 중군은 급속도로 전열이 무너져내리기 시작했다.
“믿을 수가 없군...”
로버트 서튼 본인이라 할지라도 전장에 저 정도로 큰 영향력을 행사할 자신은 없었다.
어쩌면 단 한 사람으로 인해.
전투의 판도가 바뀌어버린 것이다.
시선을 돌려 좌군을 확인했다.
그곳으로 합류한 두 용병 실력자가 리오넬 백작과 함께 적의 우군을 몰아치자.
중군을 지원하기 위해 하얀 늑대와 다섯 기의 기간트가 이탈한 적들이 오히려 수세에 몰리는 형국이었다.
그리고 그때.
뿌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
카이샨의 본진에서 마법으로 증폭된 뿔고동 소리가 터져 나왔다.
“퇴각 신호?”
카이샨의 중군과 우군에 남아있던 기간트들이 한순간 이를 악문 공세를 펼친 후, 일제히 뒤로 돌아 전장을 이탈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단 하나였다.
“이겼군.”
첫 번째 기간트 대전의 승자가 마라몬트 왕국으로 결정되었다는 것.
그리고 승전의 희열과 흥분을 가라앉히려 애쓰던, 로버트 서튼 마라몬트 기간트 부대 대장은 볼 수 있었다.
타다다다다다다다다다... 타아앗
엄청난 속도로 도망치는 적들을 추격한 이후 도약.
적의 최후미에 있던 바이샨을 향해 검격을 내려치는 용병 대장 스노우의 기간트 크로스보우를.
“허어, 대체 전투 한 번에 킬 포인트를 몇 개나...”
그는 모르고 있었지만.
콰드드득
방금 몸통을 꿰뚫린 바이샨이 스노우가 기록한 여덟 번째 킬 포인트였고.
이는 단일 전장 기준.
마라몬트 왕국 소속 오너가 기록한 최다 킬 포인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