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첫 승리의 주역
#1
“추격해라!”
“카이샨 놈들을 죽여!”
“우워어어어어어어!”
도망치는 25만(현재는 그보다 줄어들었을 테지만)과 이를 뒤쫓는 20만 병력으로 세미놀 평원의 대지는 때아닌 몸살을 앓고 있었다.
후퇴하는 카이샨의 군대를 가장 먼저 덮친 것은 거대한 강철거인들이었다.
“막아! 트레거(기간트의 움직임을 제한하고자 만들어진 거대한 창. 후미를 지면에 박아 넣을 수 있고, 옆면에는 수십 개의 손잡이가 달려 있다)를 들어! 트레거를 들란 말이다!”
병사 수십 명이 달라붙어 10여 미터가 넘는 거대한 창을 들어 올렸다.
“끄아아아아아아아!”
“제에에에에엔자아아아앙!”
“다 죽어버려!”
“어머니이이이이이!”
곳곳에서 악쓰는 소리와 함께 수백 개의 트레거가 일제히 머리를 들어 올렸고.
아무리 기간트라고 한들, 엄청난 크기의 거창으로 이루어진 적의 전열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콰아아아아앙
콰아아아앙
콰지지직
[젠장, 성가신 놈들!]
[뭐가 이리 많아?]
[쓸데없는 소리 지껄일 시간에 하나라도 더 치워!]
트레거를 다루는 카이샨 보병들의 활약으로 적 기간트들의 이동속도를 늦추는 데는 성공했지만...
“크어어억!”
“으아아아악!”
“사, 살려줘!”
곧 있으면 다가올 운명의 선택지에 적힐 단어가 ‘죽음’ 이외엔 없다는 사실은... 그들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1만여 명에 달하는 트레거 부대의 희생을 비웃기라도 하듯.
장애물 따위에 아랑곳하지 않고, 카이샨의 본대를 향해 질주하는 마라몬트의 기간트까지 존재했다.
통
통
통
.
.
.
타아앗
7미터가 넘는 금속 덩어리의 기동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가벼운 몸놀림으로, 트레거의 창두를 마치 징검다리 밟듯 디디며 달리는 뚱뚱한 기간트.
그것의 정체는 전장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루페른제 기간트 크로스보우였다.
마침내 마지막 트레거를 밟고 엄청난 높이로 도약한 크로스보우.
그 거체(巨體)가 아군의 후퇴를 돕기 위해 남아 있던 몇 안 되는 기간트 중 한 기를 덮쳤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앙
“크으으윽! 무, 무슨 힘이...”
자세를 낮춘 채, 남은 오러의 절반을 방패에 투입해 크로스보우의 검격을 받아낸 아트론(1400rp) 오너의 입에서 고통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찌나 무거운 공격이었던지, 아트론의 발은 대지를 50cm 이상 파고 들어간 상태.
그는 다음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정신을 집중하려 노력했지만... 미처 말을 끝맺을 새도 없었다.
방패를 타격한 반동으로 인해 공중으로 떠오르는 듯했던 크로스보우가 한순간 엄청난 속도로 지면을 향해 내리꽂히더니.
서걱
서걱
전쟁 내내 든든하게 버텨주던 추가 장갑을 마치 종잇장처럼 잘라내 버렸다.
잘린 부위는 정확히 몸통의 한가운데.
들어 올린 방패를 채 내리지도 못한 짧은 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런 빌어머... 크아아아아악!”
콰드드득
정확하게 기간트의 검 하나가 들어갈 만한 틈 사이로.
붉게 빛나는 크로스보우의 검이 벼락처럼 날아들었고.
그것이 아트론의 오너가 이승에서 목격한 마지막 광경이었다.
쿵쿵쿵쿵쿵쿵쿵
쿵쿵쿵쿵쿵쿵쿵...
모종의 명령이 떨어지기라도 한 것인지.
후퇴하는 본진의 후미에 남아 전의를 불태우고 있던 카이샨의 기간트들이 아군의 피해를 도외시 한 채, 일제히 도주하기 시작했다.
“끄아아아악”
“아니, 대체 왜!”
“다, 다리가!”
거대한 금속 덩어리들의 막무가내식 질주였고.
이로 인한 아군 사상자의 발생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크로스보우는 달리는 것을 멈춘 채.
고오오오오오오오오...
직경이 6~7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화염구 10개를 소환했고.
이를 카이샨 트레거 부대를 향해 날려보냈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퍼어어어어어어어엉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후미에 있던 수십의 트레거와 1000여 명이 넘는 병력이 불타오르거나 터져나갔고.
마라몬트의 기간트들은 손쉽게 남은 트레거 부대를 돌파해낼 수 있었다.
수십 기의 기간트가 태연하게 서 있는 크로스보우를 바라보았고.
스르르륵
그가 오른쪽 팔을 들어 올린 뒤, 곧게 편 검지로 도주하는 카이샨의 군대를 가리키자...
[달려!]
[추격해!]
[카이샨 놈들을 죽이자!]
사기충천한 기간트 부대가 일제히 적의 후미를 향해 쇄도하기 시작했다.
#2
“이곳에 불시착한 뒤로... 마력이 1000 이하로 떨어진 건 처음이로군.”
아무리 내 마력 회복 속도가 사기적인 수준이라지만.
40여 분이라는 시간 동안 수백 번의 스킬을 쓰고도 버텨낼 재간은 없었다.
“뭐, 첫 전투에서 아홉 기 정도면 나쁘지 않지.”
쿠웅쿠웅쿠웅쿠웅쿠웅...
카이샨의 본대를 뒤쫓는 아군 기간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검은색 베이스에 붉은 도색이 군데군데 들어간 날렵한 기간트가 내게로 다가왔다.
헬레나 오도넬의 ‘비에리(2000rp)’였다.
[하얀 늑대는 놓쳤습니다.]
[응? 아... 그래. 뭐, 쉽게 잡을 수 있는 놈은 아니었으니까.]
사실 헬레나 오도넬을 그놈에게 붙여 놓은 건, 한 기라도 많은 기간트를 잡기 위한 포석일 뿐이었기에.
당시의 상황은 이미 뇌리에서 지워진 지 오래였다.
하얀 늑대의 경우, 크로스보우에 탄 채로는 10합 이내에 제압하기 어려운 실력자인 듯했고.
그런 강자가 내게 붙으면 자칫 올릴 수 있는 킬포인트가 줄어들 가능성이 있었기에, 비슷한 실력의 헬레나 오도넬을 놈에게 붙인 것이다.
당연히 그녀가 하얀 늑대를 잡아낼 수 있을 거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음성에는 분한 기색이 역력했기에 굳이 쓸데없는 말을 내뱉지는 않았다.
[쉽게 잡을 수 있는 놈이 아니더군. 그 녀석을 잡아둔 덕분에 아군의 피해가 줄었으니, 네 몫은 다한 셈이다.]
[네, 그쪽도... 실력이 정말 대단하더군요. 그...]
헬레나 오도넬은 무언가 할 말이 남은 듯했지만, 끝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나와 함께 사령부가 있는 곳을 향해 발길을 옮겼다.
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
아군 기간트들의 뒤를 따라.
세미놀 평원을 달리는 20만 병력의 모습은 일대 장관이라 할 만했다.
적과 아군의 최종 종착지는 카이샨의 국경 요새 알마탄이 될 것이고.
아마도 그곳에 도착하기까지 엄청난 피가 사막의 모래를 붉게 물들이게 되겠지.
그리고 그 피의 대부분은...
카이샨 병사들의 것일 테고.
#3
기간트 대전. 그것도 전쟁의 서막을 여는 첫 번째 기간트 대전이 이토록 순식간에 승패가 갈린 건, 서대륙의 전쟁사를 더듬어봐도 매우 희귀한 경우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런 일이 벌어지면 패배한 쪽은 매우 잔인한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기간트와 병력을 연계해 적의 추격을 막을 것인가?
아니면 소중한 전력인 기간트들의 안전한 퇴각을 위해 병력의 희생을 감수할 것인가?
안타깝게도 거의 모든 전장에서 수뇌부들은 후자를 선택했고.
그 선택은 병사들에게 있어 재앙이라고 밖엔 표현할 길이 없었다.
마라몬트 왕국과 카이샨 왕국의 서전은 누가 뭐라해도 마라몬트 왕국의 대승이었다.
마라몬트 왕국
전투 불능 기간트 ? 34(좌군 23, 중군 8, 우군 3)
오너 사망 ? 11(좌군 8, 중군 3, 우군 0)
카이샨 왕국
전투 불능 기간트 ? 42(좌군 13, 중군 18, 우군 11)
오너 사망 ? 23(좌군 7, 중군 12, 우군 4)
전투 불능으로 퇴각하거나 귀환 포인트로 사라진 기간트의 수는 그리 차이가 나지 않았지만, 두 배가 넘는 오너가 사망한 것이 너무나도 뼈아픈 카이샨이었다.
실질적인 피해는 전투 불능이 된 기간트와 오너의 사망이 더욱 크겠지만.
수치로 느껴지는 피해로만 따지자면 감히 이쪽과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마라몬트 병력 사상자 ? 873명.
카이샨 병력 사상자 ? 최소 9만 이상.
전장에서 알마탄 요새에 입성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하루 하고도 한나절.
이 과정에서 카이샨 왕국이 잃어버린 병력은 무려 10만에 가까운 엄청난 숫자였다.
거대한 막사 내부에 임시로 설치된 마라몬트 사령부.
그곳에서는 윌리엄 다이슨 사령관과 로버트 서튼 기간트 부대 대장, 노만 리오넬 부사령관, 안톤 피어슨 마법병단장 겸 참모장을 비롯한 10여 명의 마라몬트 군 수뇌부들이 서전의 승리 이후 첫 회의를 가지고 있었다.
용병기사단의 (임시)단장인 스노우에게도 참여할 것을 권했으나, 그는 딱 잘라 거절했다.
“얼떨떨하군...”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사령관인 윌리엄 다이슨 후작이었다.
그는 말 그대로 얼떨떨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이번 전투에서 그가 한 일이라고는 퇴각하는 카이샨 군대를 가리키며 ‘추격하라’라는 말을 내뱉은 게 전부였으니까.
기간트 대전이라는 전투 방식이 오래 끌면 3일 밤낮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 만큼, 그 역시 여차하면 전장으로 뛰어들기 위한 마음의 준비를 끝낸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의 자랑인 테라칸(2500rp, 크샨트제)이 전장에 모습을 드러낼 기회는 없었다.
그러기엔 너무나도 짧은 시간에 승패가 갈리고 말았으니까.
그리고 전쟁의 서전을 승리로 장식할 수 있게 만든 1등 공신은...
“정말 대단하더군요. 그 스노우라는 자.”
기간트 부대를 이끌었던 로버트 서튼 백작의 입이 열리자.
막사 안에 있던 군 수뇌부가 다들 한두 마디씩 뱉어내기 시작했다.
“지휘관으로서의 역량도 무척 뛰어나더군요.”
“하, 그딴 건 그자의 마법 실력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소.”
“다들 눈이 옹이구멍인가? 정말 대단한 건 그자의 검술......”
내용은 조금씩 달랐지만, 하나 같이 그의 활약에 대한 감탄이었다.
이번 전쟁에서 자칫 패배의 빌미를 제공할 뻔했던 노만 리오넬 백작의 경우, 얼굴까지 붉혀가며 스노우에 대한 찬양을 늘어놓기 바빴다.
“......뻔했다니까요. 조금만 늦었어도, 전 아마 이 자리에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믿어지십니까? 그는 단 한 번 전투에서 무려 157 킬포인트를 올렸어요. 물론 그중 40포인트는 임무 성공에 대한 대가라곤 하지만. 117이라는 숫자 역시 대단한 건 마찬가지죠. 설마 이 자리에... 그가 획득한 킬포인트를 아깝게 여기는 사람은 없을 거라 믿겠습니다.”
윌리엄 다이슨 사령관이 낮게 웃으며 그의 말을 받았다.
“크크크... 진정하게, 노만. 여기 그런 머저리는 없을 테니까. 내줘야 할 대가가 커지긴 하겠지만, 그가 해낸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추격 시간까지 포함해) 고작 40여 분 만에 스노우가 해치운 기간트는 무려 아홉 기에 달했다.
군부 최고 실력자인데다, 미세하나마 우세한 전장에서 날뛰었던 로버트 서튼이 기록한 킬 수가 4라는 걸 감안하면.
그야말로 엄청난 업적이 아닐 수 없었다.
스노우가 처리한 기간트와 그로 인해 획득한 킬포인트는 다음과 같았다.
바이샨(1200rp, 킬포인트 9) x 4 : 36 킬포인트
아트론(1400rp, 킬포인트 10) x 2 : 20 킬포인트
크로노스(1800rp, 킬포인트 18) x 2 : 36 킬포인트
바실론(2300rp, 킬포인트 25) x 1 : 25 킬포인트
합계 : 117 킬포인트
“그 멜빈 가이우스를 그리 쉽게 죽여 버리다니...”
“그건... 정말 대단했습니다.”
비록 카일 어네스트의 아란델과 교전 중이었다고는 하나, 딱히 교전 중에 피해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기에.
대륙 전체에서도 이름 높은 강자인 멜빈 가이우스를... 엄청난 속도로 죽음에 이르게 만든 스노우의 실력에는 다들 경악을 금치 못했었다.
윌리엄 다이슨 사령관이 말했다.
“안톤.”
“네, 사령관님.”
“알마탄 요새 주위에 공간 왜곡 마법을 실행하게. 적은 양의 군량이라도 요새 안으로 들이게 해서는 안 돼.”
설령 공간이동 마법으로 식량을 반입한다 한들, 그 양에는 한계가 분명했다.
하루에 고작 수백, 많아 봐야 수천이 먹을 정도에 그칠 터.
그렇기에 요새 전체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선 엄청난 자원이 소모되는 공간 왜곡 마법진까지 사용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지만.
상대는 마라몬트 왕국의 철천지원수인 카이샨 왕국이었다.
“철저하게 준비하겠습니다. 굶어 죽기 싫으면 성문을 열고 나오겠죠. 뭐, 모조리 굶어 죽어버려도 상관없고.”
고개를 끄덕인 사령관이 말을 이었다.
“적들의 수송부대가 요새에 접근하는 일이 일어나선 안 돼. 그렇게 되면 기간트들을 총동원해서라도 식량을 확보하려 들 테니까. 정찰조를 최대한 많이, 최대한 넓게 퍼트리고... 오너들 역시 교대로 투입하도록.”
“알겠습니다.”
“네!”
알마탄 요새에는 여전히 15만이 넘는 병력이 주둔 중이었기에, 식량의 소모 속도가 엄청날 수밖에 없었고.
식량의 유입을 차단하는 것은, 이와 같은 상황에서 가장 효율적인 공성 방법이라 할 수 있었다.
굳이 힘들게 성문을 열거나 성벽을 기어오를 필요가 없는 것이다.
굶어 죽을 게 아니라면, 요새를 버리고 퇴각하는 것 이외엔 방법이 없을 테니까.
그렇게 되면 적 기간트 오너들이야 어떻게든 몸을 빼는 게 가능할 테지만.
카이샨의 일반 병력은 또다시 떼죽음을 면하기 힘들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