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사막의 기간트(1)
#1
알마탄은 말 그대로 사막 한가운데 위치한 요새였다.
사막의 모래 위를 평지처럼 걷는 바잘(사막 운송에 이용되는 몸길이 3미터가량의 초식동물)의 빠른 걸음으로 4일 정도가 걸리는 ‘바스코잔’이, 이곳 최전방 국경 요새로부터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영지였다.
카이샨의 기간트 부대가 생각지도 못한 초단기 패배를 기록한 탓에.
그들의 선택은 무조건적인 후퇴 이외엔 그 무엇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로 인해 카이샨의 병력이 숨어든 알마탄 요새는 마라몬트 왕국군에 의해 완벽하게 포위당할 수밖에 없었는데.
서부 국경에서 완벽하게 승기를 잡았다고 판단한 마라몬트 왕실은 10만의 병력을 추가로 파견.
물경 30만의 병력으로 알마탄 요새를 물 샐 틈 없이 봉쇄해버렸다.
“공간 이동 방해 마법진?”
“정확하게는 좌표 교란 마법진이지.”
“그런 걸 102개나 설치했단 말이지?”
“그래, 피어슨 자작님 얼굴 못 봤냐? 3일 만에 10년은 늙으신 것 같던데.”
“피어슨 자작님만? 마법사 수백이 죄다 똑같은 얼굴이더구만 뭘... 그게 엄청나게 힘든 작업이긴 한 모양이더라고.”
“힘들기만 한 게 아니라, 돈도 엄청나게 많이 들었다고 하더군.”
“그래? 대체 얼마나 많이 들었길래?”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콜린에게 듣기로는 최소 100만 골드는 쏟아부었다고 하던데?”
“콜린? 마법사인 네 사촌? 그런데 100만 골드라고? 미쳤네...”
“그렇긴 하지. 그 돈이면 기간트가 몇긴데...”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든 전황으로 인해, 지난 며칠간 마라몬트 소속 군인들과 용병들의 관심은 대부분 단 하나에 쏠려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알마탄 요새와 700미터가량 떨어진 위치에 일정 거리마다 배치되기 시작한 대규모 마법진이었다.
마법진 설치 초반, 이상 징후를 눈치챈 적 마력 병기의 방해가 빈번하게 시도되었지만.
기간트를 이용한 철통같은 방어로 인해,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하자 이내 포기한 듯 잠잠해졌다.
사실 공간 이동 마법으로 군량을 수송하는 건 명확한 한계가 존재했기에, 굳이 100만 골드가 넘어가는 막대한 금액까지 퍼부어가며 시도할 정도로 의미 있는 작전은 아니었다.
하지만 상대가 카이샨 왕국인 이상, 최대한 지독하게 약점을 공략하는 건 마라몬트인이라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고.
이는 카이샨인이라고 해서 다를 게 없었다.
#2
‘공간 이동 방해 마법진’이 완성된 이후.
알마탄 요새 내부의 병력을 말려 죽이기 위해.
수천의 정찰조가 본격적으로 가동되기 시작했다.
일반적인 정찰조 하나가 10인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니, 수만의 병력이 요새 넘어 카이샨 왕국 방향으로 퍼져나간 셈이었다.
그리고 기간트 오너가 포함된 섬멸조 역시, 각자 일정한 거리를 두고 활동하게 되었는데.
“대장, 진짜 혼자 가겠다고? 위험... 할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하나보단 둘이 낫지 않겠어? 내가 같이 가주도록 하지.”
“저리 꺼져, 저스틴. 너같이 무식한 놈은 사막에선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자고로 사막 같은 특수 지대에선 나 같이 지략을 겸비한... 으억! 젠장, 헬레나! 뭐 하는 짓이야!”
“너나 저놈이나 멍청한 건 마찬가지야. 단장, 전 마클리 사막에서 1년간 임무를 수행한 경력이 있어요. 함께 가면 도움이... 아앗. 어떤 자식이... 카일?”
“잠깐 실례하지. 단장님, 사막에서 가장 필요한 게 뭐겠습니까? 시원한 물과 더위를 시켜줄 바람이죠. 저와 함께 하신다면 사막에서도 쾌적한 환경을...”
“이 치사한 자식, 감히 정령으로 로비를 해?”
“맞아, 게다가 소문에 의하면 대장도 정령을 부릴 수 있다고!”
“그러니까 저 멍청이들보다는 저랑...”
‘혼란스럽군...’
섬멸조에는 역량에 따라 보통 3~5인의 오너가 포함된다.
하지만 난 다른 오너와 동행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나 혼자 먹기도 바쁜데, 딴 놈을 왜 데려가?’
그런데 용병기사단의 에이스인 4명의 오너가 모두 나와 함께 임무를 나가겠다며 떼를 쓰는 요상한 상황이 벌어졌다.
뒤가 구린 녀석들이라 뭔가 꿍꿍이가 있다는 건 진즉에 알고 있었다.
그래도 하나같이 범상치 않은 배경(몰락 귀족인 저스틴 크로비스는 뭐...)을 지닌 인간들이라 나름 친분을 유지하려 하고 있긴 했지만.
‘귀찮아.’
저 녀석들의 신분을 생각하면, 어쩌면 미래의 내게 이득을 안겨줄 인연으로 발전할 가능성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마라몬트 왕국과의 계약이 끝나는 순간까지는 굳이 저들을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다들 시끄럽다. 네녀석들도 각자 조원을 꾸리도록. 이견은 받지 않겠다.”
“아니, 그러지 말고...”
“쳇!”
“이게 다 멍청한 네놈들 때문이다.”
“...알겠습니다.”
나는 마지막까지 엉겨 붙으려는 저스틴 크로비스의 엉덩이를 걷어 차준 뒤.
활짝 열린 막사의 입구를 나섰다.
#3
특정한 기후의 지역에서는 임무 자체의 난이도보다도, 그곳의 환경으로 인한 어려움으로 인해 더욱 애를 먹고는 한다.
‘22번’이라는 불길한 숫자(마라몬트 왕국에서 2를 좋지 않은 숫자라 생각하는 미신이 존재)의 섬멸조에 속하게 된 중급 엑스퍼트 트랜트 벤틀리.
소속된 용병대가 한꺼번에 마라몬트 왕국과 계약하는 바람에, 원치 않게 전장으로 끌려온 그의 목표는 단 하나.
이 전쟁에서 살아남아 홀로 자신을 키워준 노모와 결혼식을 올린 지 5개월밖에 안 된 아내를 다시 만나는 것이었다.
2년 전인 28살에 중급 엑스퍼트의 경지에 올랐고.
실력을 인정받으며 용병대 내에서도 나쁘지 않은 대우를 받아왔지만.
그 실력 탓에 빼도 박도 못하게 섬멸조라는 무시무시한 임무를 맡게 되고야 말았다.
‘코리, 그 자식이 뒤에서 수를 쓴 게 틀림없어.’
자신과 비슷한 실력인데다, 사이가 그리 좋지 않은 코리 알로마는 섬멸조에 뽑히지 않았고. 그가 용병 단장의 조카라는 점에서 그의 의심은 꽤나 합리적이라 할 수 있었다.
‘처음부터 운이 좋다 싶더라니...’
기간트 대전이 패배로 끝날 경우.
가장 먼저 쓸려나가는 건 기간트들의 추격을 늦출 트레거 부대였고.
다음이 왕국군 앞에 배치된 용병들이었다.
이 배치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기에, 이를 가지고 토를 다는 멍청한 용병은 없었고.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재주껏 잘 살아남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이게 웬일.
아군 기간트 부대가 고작 첫 교전 만에 적들의 진영을 완전히 무너뜨렸고, 급기야 전투 시작 후 채 1시간도 지나지 않아 퇴각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내몰아 버리는 게 아닌가.
이후 추격하는 군대에 섞여 알마탄 요새까지 달린 것이, 이번 전투에서 그와 용병들이 한 일의 전부였다.
용병단 유일의 기간트 오너인 단장이 맥주를 마시며 밤새도록 떠들어댄 이야기는 소심한 그의 가슴조차 뛰게 만들 만큼 대단한 것이었고.
그중 대부분은 용병 기간트 부대를 지휘한 엄청난 실력의 마검사 오너에 관한 것이었다.
‘세상에 그런 인간이 존재할 수 있다니...’
그가 속한 용병 부대가 저지대에 자리 잡고 있었던 탓에 기간트들의 전투를 직접 보지 못한 그로서는... 그저 들은 것과 상상만으로 당시의 상황을 그려보는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섬멸조에 뽑혔다는 말을 전해들은 이후, 그딴 상상은 머릿속에서 말끔히 날아가 버렸다.
섬멸조가 무엇인가?
말 그대로 정찰조가 발견한 적 부대와 직접적으로 교전해 섬멸하는 부대 아니던가.
그리고 그 전투 중 십중팔구는 기간트가 동원될 터였고.
만약 이쪽 오너들이 패하기라도 하는 날엔...
‘죽은 목숨이지.’
더군다나 그가 속한 섬멸조에 포함된 오너가 단 한 명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신분이고 뭐고 자신에게 상황을 알려주던 작전관을 향해 주먹을 날릴뻔했었다.
물론, 소심한 트랜트 벤틀리는 끝내 꽉 움켜쥔 주먹을 들어 올리지 못했었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단 하나였다.
‘내가 죽으면 의뢰금과 보상금이 가족에게 전달되는 건 확실하겠지요?’
바로 자신이 사망할 경우 유족들이 받게 될 의뢰 잔금과 보상금에 대한 확인.
잠시 그를 이상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작전관은 이내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왕국과 내 명예를 걸고, 자네 가족에게 확실하게 전달될 거라 맹세하지. 그런데 자네, 내 말 못 들었나? 자네가 소속될 섬멸조를 이끌 오너가......’
작전관이 뭐라 말을 덧붙이긴 했지만, 맹세한다는 말 이후로는 그 어떤 말도 들리지 않았다.
‘젠장, 아직 아빠가 되어보지도 못했는데...’
이후 도살장에 끌려가는 심정으로 섬멸조에 속하게 된 엑스퍼트들과 합류한 트랜트 벤틀리.
다행스럽게도, 열 명 중 둘이 자신과 같은 용병단 소속 선배들이었다.
“왜 그렇게 죽상을 하고 있냐?”
“뭐야? 설마 겁먹은 거냐, 트랜?”
빙글거리는 두 사람의 얼굴을 보고 부아가 치민 트랜트 벤틀리.
그는 아내인 메리가 만들어준 부적을 쥔 손에 한껏 힘을 주며 말했다.
“...두 사람 다, 뭔 좋은 일이라도 있습니까? 설마 섬멸조가 얼마나 위험한 임무인지 모르는 건 아니겠죠? 그런데 달랑 오너 한 명이랑 저 미친 사막으로 나가 적과 싸우라니... 이게 그냥 죽으란 말이 아니면 뭡니까?”
그러자 서로의 얼굴을 돌아본 두 사람이 황당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뭐야? 작전관한테 아무것도 못 들었어?”
“너 22번 섬멸조 조장이 누군지 못 들었냐?”
두 사람의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에, 뭔가 이상함을 느낀 트랜트 벤틀리가 물었다.
“그, 그게 누군데요?”
“뭐야? 진짜 몰랐다고?”
“하, 그래서 그렇게 똥 씹은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던 거냐?”
그때, 그들이 대기하고 있던 막사의 입구를 가린 천이 들썩이며 내부의 소음이 흘러나왔다.
선배 용병 중 한 명이 씨익 미소 지으며 손가락으로 천막의 입구를 가리켰다.
“지금 나오는 것 같군. 네 눈으로 직접 확인해.”
펄럭
천막이 걷히며 등장한 것은...
“헉!”
마라몬트측에 합류한 용병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인물들이었다.
그중에서도 트랜트 벤틀리의 이목을 단번에 잡아끈 것은...
성격이 더럽기로 유명한 저스틴 크로비스의 엉덩이를 걷어차는 검은 머리 사내였다.
“저, 저 사람은!”
또 다른 선배 용병이 그의 말을 받았다.
“맞아, 바로 그 사람이다. 서전을 승리로 이끈 용병 오너들의 대장. 그리고... 우리와 함께 할 22번 섬멸조의 조장이기도 하지.”
트랜트 벤틀리는 기억해 냈다.
‘당시엔 적들의 공격을 막아내느라 정신이 없었지. 그래서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무려 그 멜빈 가이우스의 바실론을 1분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에...... ......건 직접 봤다고. 그건 정말이지... 인간의 실력이 아니었어. 믿을 수 있겠냐? 고작 40여 분만에 오너 아홉을 저세상으로 보내 버렸다는 걸?’
용병 단장이 열변을 토하며 그를 찬양하던 모습을.
그의 눈가에 찔끔 눈물이 맺혔다.
‘어머니, 여보... 나 어쩌면... 살아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몰라.’
그리고 그 모습을 본 두 용병의 얼굴은 더욱더 황당함으로 물들었다.
“어라? 야... 이 새끼 우는 것 같은데?”
“응? 트랜, 임마... 용병대 망신시키지 말고 뚝 그치지 못해!”
비록 두 선배 용병에게 한동안 갈굼을 당해야 할 테지만.
지금 이 순간.
트랜트 벤틀리는 행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