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투기 버리고 기간트 탑니다-77화 (77/169)

77화 사막의 기간트(2)

#1

내게 부여된 (임시)기사단장 전용 막사 앞에는 열 명의 엑스퍼트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용병 아홉과 군부 소속 간부 하나였는데.

용병 중 두 명과 군부 소속 간부는 상급 엑스퍼트였고, 나머지 일곱은 모두 중급 엑스퍼트로... 이들이 바로 내게 소속된 섬멸조의 조원들이었다.

마라몬트 군부 소속 상급 엑스퍼트가 한 발 앞으로 나서 인사를 건네왔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단장님의 보좌를 맡게 된 란셀 티그리스입니다.”

“이야기는 들었다. 전투는 신경 쓰지 말고 네 본분에 충실하도록.”

“네? 아... 네!”

란셀 티그리스.

그는 명목상 내 부관으로 되어있었지만, 사실은 내 전공을 기록하기 위해 따라붙은 군부의 기록관이었다.

내가 몇 명의 오너를 해치웠는지, 나와 용병들의 말만을 듣고 그대로 믿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이런 건 확실한 게 좋지. 마음에 드는군.’

나중에 딴소리하는 놈들보다는, 대놓고 일을 처리하는 쪽이 내 취향과도 일맥상통했다.

“그럼 출발하지.”

““네!””

알마탄 요새 포위 4일 차.

나는 아홉 명의 용병과 한 명의 군인을 대동한 채.

‘다르파한(알마탄 요새 이후 3개의 영지를 포함하고 있는 거대한 사막 지대)’이라는 이름의 광활한 사막으로 발을 들였다.

#2

‘22번 섬멸조’의 다르파한 사막 진출 2일 차 아침이 밝았다.

홀로 사막 한가운데 멍한 표정으로 앉아 있던 트랜트 벤틀리.

끝없이 펼쳐진 지평선을 바라보던 그는 서너 번 두 눈을 끔뻑거리더니.

“하아아아아아아아암... 쩝쩝...”

이내 입이 찢어져라 긴 하품을 내뱉으며 입맛을 다셨다.

조금 전, 어린 시절부터 유독 추위에 약했던 그는 미약한 한기를 느끼며 잠에서 깨어났다.

“한낮의 사막에서 한기를 느끼다니...”

물론 다르파한 사막은 유독 지독한 일교차로 유명한 곳이었고.

밤이 되면 온도가 급격하게 내려가기에, 자신과 같은 용병들에게도 야외 숙영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조원 중 막내였던 터라 중간 순번에 불침번을 설 수밖에 없었던 트랜트 벤틀리는 새벽이 다 지나갈 때 즈음에야 잠자리에 들 수 있었고.

한기를 느끼며 깨어난 시각은 이미 해가 떠오른 지 한참이나 지난 시점이었다.

그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온통 모래뿐인 사막의 한 지점을 바라보았고.

그곳에는 모래와 똑같은 색으로 위장된 비트의 입구가 존재했다.

다시 시선을 정면으로 돌린 트랜트 벤틀리.

그는 멍한 눈을 한 채.

전날 아침, 22번 섬멸조의 지정 좌표인 이곳으로 출발한 이후에 겪었던 신비한 일들을 회상하기 시작했다.

#3

알마탄 요새를 우회한 이후, 22번 섬멸조는 대략 7시간 동안 쉼 없이 북진을 거듭했다.

얼마 되지 않는 휴식 시간과 수면 시간을 제외하면 끊임없이 움직여야만 하는 정찰조와는 달리.

섬멸조의 경우, 정찰조가 적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지정된 좌표에 비트를 만든 뒤 그곳에서 대기하는 것이 임무였다.

7시간의 행군을 거쳐 지정된 좌표에 도착할 때까지만 해도 별 다를 것은 없었다.

조장인 스노우가 아공간 주머니에서 1인용 썰매를 꺼낸 뒤.

‘실피드, 끌어라.’

바람의 정령을 썰매 개 대용으로 사용한 것을 제외하면.

그 편안한 모습에 땀을 뻘뻘 흘리며 이동하던 대부분의 용병들이 부러움과 질투심을 드러냈지만.

그중 경험이 풍부한 몇몇은 그것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짓거리인지 알아채고는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지금 몇 시간 째지?’

‘...못해도 세 시간은 지난 것 같은데?’

‘세 시간이 넘도록 정령을 소환해 둘 수 있다고?’

‘심지어 그냥 소환만 해둔 게 아니잖아. 저길 봐, 엄청나게 부려 먹고 있어. 대체 정령력이 얼마나 높으면...’

‘정령력이 문제가 아니야, 정령에게 몇 시간이나 썰매를 끌도록 하는 건... 어지간한 정령 친화력으론 죽었다 깨어나도 불가능한 일이라고.’

‘사실은 엘프나 하프 엘프쯤 되는 거 아닐까?’

‘음, 일리가 있어... 그 냉정한 카일 어네스트도 저 사람한텐 엄청 살갑게 굴었잖아.’

인간 정령사 자체가 매우 희귀한 존재였지만(마라몬트 왕국에는 중급 정령사 1명과 하급 정령사 2명이 전부), 그들이 알기로는 중급 정령사라 할지라도 저런 짓은 불가능했다.

중급 정령사가 하급 정령을 소환해 둘 수 있는 시간은 대략 다섯 시간 정도.

하지만 그건 소환만 해둘 경우에나 가능한 일이었고.

모래 위에서 썰매를 끄는 것 따위의 중노동을 시킬 경우, 그 시간은 순식간에 줄어들어 버릴 터였다.

게다가 설령 정령력이 허용한다 한들, 저런 짓을 오랫동안 시키면 정령이 화를 내며 정령계로 돌아가 버려야 정상일 텐데...

어쨌든, 그것을 제외하면 정말로 별다를 게 없었다.

푹푹 찌는 더위와 사막의 모래로 인해 푹푹 파이는 발밑.

그리고 시도 때도 없이...

푸아아아아아아아악

‘하나 더 올라왔다. 이놈은 내게 맡기고 헨리 네가 가!’

‘젠장, 더럽게도 많이 튀어나오는군.’

‘정신 똑바로 차려, 트랜! 살아서 다시 네 마누라 엉덩이를 두드리고 싶다면!’

‘뭐라구요? 그 발언은 용납할... 으아아아악!’

등장하는 몬스터들까지도 그저 일상적인 일일 뿐이었다.

터어어어어엉

‘방금 내가 네 마누라의 엉덩이를 구했다. 인정하냐?’

‘감사... 아니, 그러니까 왜 자꾸 제 마누라 엉덩이를...’

몸길이 4미터 전후의 거대 사막 전갈 ‘코르티스’나 최대 8미터까지 성장하는 4족 보행 사막 몬스터 ‘펠컨’ 같은 중상급 몬스터들이 툭하면 튀어나왔지만.

상급이 셋이나 포함된 엑스퍼트 10인의 일상을 색다르게 채색하기엔 역부족인 전력이었다.

하지만 지정된 좌표에 도착하기 1시간 전.

그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

소름 끼치는 울음소리와 함께, 모래를 뚫고 모습을 드러낸 70여 미터 길이의 거대한 몬스터가 등장하면서부터...

22번 섬멸조의 색다른 하루가 시작되었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악!”

“그, 그레이트 샌드웜이다!”

엄청난 속도로 솟구쳐 오르는 그레이트 샌드웜의 아가리를 상급 엑스퍼트 요한슨이 간발의 차이로 빠져나왔다.

그 모습을 목격한 트랜트 벤틀리의 등줄기로 식음땀이 흘러내렸다.

‘나, 나였으면 절대 못 피했어.’

운이 좋았다.

용병 상급 엑스퍼트 두 사람은 물론, 스노우의 기록관으로 참여한 란셀 티그리스 역시 전력을 다해 공격을 퍼부었다.

나머지 인원들의 경우에는 샌드웜의 전신 모공에서 흩뿌려지는 산성 체액을 피하는 것만으로도 벅찬 상태.

그나마 상급 엑스퍼트 셋이 메뚜기처럼 이리 뛰고 저리 뛰며 공격을 시도하고는 있었지만,

사막 최상위 몬스터인 그레이트 샌드웜에게 생채기를 내는 것 정도가 최선이었다.

이대로 가면 전멸이 확정적일 수밖에 없는 절체절명의 순간.

‘귀찮은 놈이 나왔군.’

여태껏 조원들의 전투를 느긋하게 지켜보고만 있던 스노우가 썰매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고.

그 직후, 트랜트 벤틀리의 뇌리에 영원히 새겨질 인상적인 장면이 눈 앞에 펼쳐지기 시작했다.

‘모두, 그놈에게서 떨어져라.’

확성 마법이라도 사용한 것인지 우렁우렁 울려 퍼지는 건조한 음성과 뒤이어 허공에 생성되기 시작하는 십여 개의 얼음 창.

콰아아아아아아앙

콰아아아아아앙......

스노우의 얼음 창은 그레이트 샌드웜에게 아무런 데미지도 입히지 못한 것 같았지만, 상급 엑스퍼트들이 후퇴할 시간을 벌어주는 데는 성공했다.

그리고...

파아아아아아앗

옅은 빛이 사라짐과 동시에 신장 7.2미터짜리 강철 거인이 사막 한가운데 모습을 드러냈다.

‘테리마.’

스노우가 크로스보우에 탑승했고.

곧바로 기간트의 곁에 거대한 물방울 하나가 생성되었다.

또로로로록

청명한 소리와 함께, 생전 처음 본(실상 트랜트 벤틀리가 목격한 정령이라곤 네 시간 전 스노우가 불러낸 실프드가 전부) 거대한 크기의 물의 정령이 물질계에 강림했다.

‘저, 저게 뭐야?’

트랜트 벤틀리가 놀라건 말건, 완벽한 여성의 형상을 갖춘 거대한 정령의 몸으로부터 엄청난 양의 물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고.

촤아아아아아아아아악...

츠츠츠츠츠츠츠츠츠츠...

잠시 뒤 그는 사막의 모래 위에 새하얀 빙판이 생성되는 기적을 목격할 수 있었다.

쿠오오오오오오오오오

빙판 사이에 끼어버린 형국이 되어버린 그레이트 샌드웜이 신경질적으로 몸을 흔들며 괴성을 내질렀다.

피어의 일종인 그 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자, 빙판 지대를 벗어나기 위해 움직이던 트랜트 벤틀리는 공포감과 함께 구역질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우워어어어...’

한 차례 헛구역질을 한 뒤, 정신을 차리기 위해 고개를 휘휘 젖고 눈가를 마구 비볐다.

그리하여 간신히 정신을 차린 그의 시야에 들어온 광경.

빙판 지대 위로 엄청난 눈보라가 휘몰아 치고 있었고.

이내 수북이 쌓인 눈들이 허공으로 떠올랐으며.

떠오른 눈들이 저들끼리 뭉치더니 어린아이의 얼굴만 한 크기의 구슬이 생성되었다.

빙판과 눈보라로 인해 더욱 격하게 몸부림치는 화염 속성 몬스터 그레이트 샌드웜과 그 괴물을 둘러싼 수백 개의 얼음 구슬.

이는 마치 신화 속 이야기의 한 장면을 연상케 하기에 충분했다.

스르륵

크로스보우가 손바닥을 활짝 펼친 오른팔을 들어 올렸고.

이내 펼쳤던 손바닥을 강하게 움켜쥐자.

피슝

피슝

피슝

.

.

.

피슝

허공에 떠오른 채 정지해 있던 구슬들이 중심지를 향해 엄청난 속도로 쏘아졌다.

콰아아아아아앙...

쩌저저저저저적...

수백 개의 구슬에 직격당한 그레이트 샌드웜이 삽시간에 얼어붙었고.

타앗

크로스보우가 평지라도 되는 양 사막의 모래를 밟고 엄청난 높이로 도약했다.

파아앗

정점에서 낙하하는 기간트의 손에 소환된 거대한 검.

파츠츠츠츠츠츠츠츠츠...

황금빛 전류가 마치 뱀처런 기간트의 대검을 휘감으며 넘실거렸다.

후우우우우우우우웅

마침내 그레이트 샌드웜의 머리를 노리고 내려쳐지는 검.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몬스터의 거대한 머리가 수박처럼 터져나갔다.

사방으로 비산하는 살점과 체액.

쿠우우우우우우우웅

머리 잃은 그레이트 샌드웜의 거체가 사막의 모래 위로 떨어져 내렸다.

그 과정을 모두 지켜본 22번 섬멸조의 조원들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 그레이트 샌드웜을 한 방에...’

‘미친...’

‘그런데 한 방이라고 하기에는...’

‘어쨌든 존나 빨리 잡은 건 사실이잖아.’

‘믿을 수가 없군...’

근위기간트급 기체에 탑승한 근위기사급 오너라면, 저 몬스터를 홀로 잡아내는 게 불가능하지는 않을 터였다.

하지만 고작 30초도 안 되는 짧은 시간 안에 해낼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못해. 얼마 전에 죽은 멜빈 가이우스나 마라몬트의 로버트 서튼 백작 같은 실력자라도 그런 건 불가능할 거야.’

그때, 옆에서 용병단 선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와씨, 그러고 보니 저거... 존나 비싼 몬스터잖아.’

‘아...’

‘그러고 보니...’

‘헉!’

‘피, 피를 받아야 해! 죄다 흘러내리기 전에.’

몬스터의 부산물 중 가장 비싼 건 당연히 마정석이었다.

오우거보다 두 단계는 윗줄의 몬스터이니 만큼, 마정석의 가격은 최소 2만 골드부터 시작이었다.

게다가 그레이트 샌드웜은 마정석을 제외하고도 버릴 것이 없는 몬스터로 유명했는데.

비록 스노우의 크로스보우에 의해 머리가 한 방에 터져버리기는 했지만, 녀석의 피부는 어지간한 기간트의 공격도 몇 번이나 받아낼 수 있을 만큼 단단했기에 꽤 비싼 가격에 거래되고 있었고.

최상급 포션의 재료로 사용되는 피는 그보다도 훨씬 더 값어치가 높았다.

눈을 희번득거리며 사체로 달려가려던 용병들 중 하나가 번뜩 정신을 차리고 외쳤다.

‘자, 잠깐! 저건 우리가 잡은 것도 아니잖아!’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마치 짜기라도 한 듯 동시에 움직임을 멈추는 22번 섬멸조의 조원들.

그들이 아차 하는 표정을 지으며 스노우의 눈치를 살피던 그 순간.

나지막한 음성이 들려왔다.

‘마정석을 찾아서 가져와라. 그리고... 3할을 바칠 녀석은 부산물을 챙겨도 좋다.’

‘......?’

‘......!’

뒤늦게 그의 말을 이해한 용병들(과 군인 하나)이 환호성을 올리며 그레이트 샌드웜의 사체를 향해 달려갔다.

소심한 트랜트 벤틀리 역시 그 대열에 끼어들었다.

‘지, 진정한 대인배다! 세금이 고작 3할이라니... 7할을 가져간다 해도 뭐라 할 사람이 없을 텐데. 어머니! 여보! 내가 전장에서 귀인을......’

이것이 지정된 좌표 도달 한 시간 전까지 그가 겪은 일이었다.

그리고 진정 신비한 경험은...

그때부터가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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