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사막의 기간트(3)
#1
다르파한 사막 최상위 포식자인 그레이트 샌드웜과의 전투 이후.
한 시간여를 더 이동한 ‘22번 섬멸조’는 드디어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었다.
‘아무것도 없군...’
‘그래, 정말로 아무것도 없어.’
‘아무것도 없긴 뭐가 아무것도 없어요? 사방 천지에 모래가 이렇게나 많은데.’
‘모래를 퍼먹고 싶은 게 아니라면... 입 닥쳐, 트랜.’
‘눈치 좀 챙기라니까... 쯧.’
‘......’
비록 선배들에게 갈굼을 당하긴 했지만. 트랜트 벤틀리의 말처럼 주변 360도를 아무리 둘러봐도, 아득하게 보이는 저 먼 지평선까지 온통 모래뿐인 사막 한가운데였다.
‘후... 이거 비트 만드는 것부터 한세월이겠는데?’
‘하필 사막이니... 어쩔 수 없지.’
‘사막에서 비트를 만드는 게 어렵나요? 모래라 잘 파질 것 같은데.’
‘트랜, 너 사막은 처음이냐?’
‘네.’
‘물론 모래라 파면 파는 데로 잘 파지긴 하겠지.’
‘그럼 뭐가 문제죠?’
‘네가 모래를 파면, 파낸 곳 가장자리의 모래들은 네가 비트를 완성할 때까지 기다려 준다디? 네가 뭐... 저기 대장 같은 마법사라도 되냐?’
‘아...’
다르파한 사막의 고운 모래들은 한동안 머물러야 할 비트를 만들기엔 최악의 지형이나 다름없었다.
다른 건 다 제쳐두고서라도, 파낸 곳을 곧바로 메워버리는 모래들은 반드시 해결해야만 했다.
‘그럼 어떡하죠?’
‘뭐, 귀찮긴 하지만. 방법이야 여러 가지가 있지. 가장 많이 쓰이는 건 일단 물을......’
트랜틀 벤틀리가 선배 용병으로부터 몇 가지 노하우를 전수받는 동안, 일행들은 각자의 짐을 한쪽에 내려놓은 채, 작업에 착수할 준비에 들어갔다.
이곳에 온 이들은 군 간부이자 귀족인 란센 티그리스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신분의 차이가 없는(물론 실력으로 인한 등급과 대우의 차이는 존재하지만) 고등급 용병들이었다.
더군다나 일행의 우두머리가 까마득한 경지의 실력자였기에. 상급 엑스퍼트라 한들, 감히 ‘짬때리기’ 같은 스킬을 사용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10인의 고급 인력들(란셀 티그리스 역시 스노우의 눈치를 보며 대열에 합류)이 한숨을 푹푹 내쉬며 작업에 착수하려 할 때였다.
‘기다려라.’
그들의 귓가로 사막의 분위기를 닮은 건조한 목소리가 들려왔고.
용병들과 란셀 티그리스가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썰매를 아공간 주머니(마라몬트 왕국군에게 뜯어낸 대용량, 베른 요새에서 얻은 것의 5배)에 수납한 스노우가 주변을 둘러보는 모습을 목격할 수 있었다.
‘이 근처 아무 곳에나 비트를 만들면 되는 건가?’
‘네? 아, 네! 그렇습니다.’
얼떨결에 답한 란셀 티그리스가 품에서 황급히 지도를 꺼내 들며 다가가려 했지만, 스노우가 손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
그리고는 오른손 검지로 한참 떨어진 위치를 가리켰다.
‘모두, 짐을 챙겨서 저기까지 떨어져라.’
10인의 조원들은 영문도 모른 채 그의 지시를 따라 짐을 챙겼다.
고작 몇 시간 함께한 것에 불과했지만, 자신들의 (임시)지휘관이 어떤 스타일인지 눈치채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일행들이 모두 일정범위 밖으로 물러난 것을 확인한 스노우는...
파아아아아아앗
다시 한번 기간트 크로스보우를 소환했다.
#2
‘대체 뭘 하려고...’
‘기간트로 땅을 파려는 건가?’
‘뭔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좀 전에 못 봤어? 대장은 정령사이자 마법사라고. 이 주변을 꽁꽁 얼린 다음 땅을 파면 일이 쉬워질 거야.’
‘오, 그럴듯한데?’
‘음, 내 생각엔 차라리 그것보다는...’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크로스보우를 바라보고 있던 조원들은 이후에 벌어질 일을 추측하기에 바빴다.
하지만 스노우가 이후 벌일 일들을 정확하게 예측해내는 데 성공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레이트 샌드웜을 처리하는 과정이 스노우라는 인간의 종합적인 전투력과 오너로서의 역량을 일부분이나마 엿볼 수 있는 기회였다면.
22번 섬멸조에게 배정된 지정 좌표에 도착한 이후 벌어진 일들은...
말 그대로 ‘고위 마법사’만이 일으킬 수 있는 이적의 극한이라 할 수 있었다.
스르르륵
크로스보우가 오른손 검지로 사막의 일정부분을 가리키자.
퍼어어어억
순식간에 엄청난 양의 모래가 연속으로 솟구치며 거대한 구덩이가 생성되었다.
‘디, 디그?’
‘미친...’
‘저게 디그 마법이라고? 그 마법으로 저렇게 큰 구덩이를 만들 수가 있나?’
‘6써클 마법사와 임무를 수행한 적이 있어. 그때 저 마법을 쓰는 걸 본 적이 있지. 그런데 만들어낸 구덩이는 저것의 1/3 정도였다고. 분명 그게 최선이라고 했는데...’
‘마법을 한 번만 쓴 게 아닌 것 같은데?’
‘어, 그런데 모래가...’
스르르르르르르르르......
무려 직경과 깊이가 15미터는 될 듯한 구덩이를 사막의 모래들이 빠른 속도로 메워가고 있었다.
일행이 걱정스런 눈으로 크로스보우를 바라본 순간.
진정 놀라운 일들이 연속으로 펼쳐지기 시작했다.
드르르르르르르륵
드르르르르르르륵
드르르르르르르륵......
높이 10미터 두께 4미터가량의 석벽 6개가 사막의 모래 속에서 솟아올랐고.
서걱
서걱
서걱......
크로스보우에 의해 네모반듯하게 잘린 석벽들이.
터어업
쿠우우우웅
쿠우우우웅......
모래가 스며들고 있는 구덩이 내부에서 바닥과 벽의 모양을 이루며 자리를 잡았다.
‘오오오오오오오!’
‘저건!’
‘허...’
‘미친... 모래 아래에 돌로 비트를?’
스노우의 의도를 눈치챈 조원들의 입에서 저절로 탄성이 튀어나왔다.
천장을 제외한 비트의 외형을 대강이나마 완성한 크로스보우는 한동안 움직임이 없었다.
‘어, 안으로 모래가 조금씩 스며드는데?’
‘그래도 그것만 어떻게 하면 썩 괜찮은......’
대략 30여 초 정도 고민에 잠겼던 스노우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드르르르르르르륵
그는 석벽 하나를 더 소환했다.
그리고 그것을 각기 다른 크기의 여러 조각으로 잘라 비트 안으로 던져 넣었다.
그것은 누가 보기에도...
‘계단이다.’
‘계단이네?’
‘계단이로군...’
‘대충 막 던져 넣은 것 같은데... 어떻게 저렇게 정확하게 모양을 갖춘 거지? 저것도 마법인가?’
실제로 ‘중력 조절(C)’과 ‘염력(C)’ 스킬이 사용되었지만, 조원들이 그것을 알 방법은 없었다.
서걱
쿠우우우웅
사람이 드나들 만한 크기의 구멍을 낸 석벽을 위에 얹는 것으로 비트의 외양이 완벽하게 완성되었다.
하지만 내부 인테리어(?)는 물론, 여전히 모래가 스며드는 것조차 해결되지 않은 상태.
스르르르르르......
비트가 완성된 구덩이는 사막의 고운 모래에 의해 이미 절반 정도가 잠겨버린 상태였다.
조원들의 관심이 자연스럽게 크로스보우의 다음 행보에 쏠렸다.
그리고 이에 부응하기라도 하듯.
그 거대한 몸뚱어리 앞에 십수 개의 자그마한 존재들이 모습을 들어내기 시작했다.
파앗
파앗
파앗
.
.
.
파앗
소환을 알리는 옅은 빛과 함께.
#3
빛이 사라진 뒤 모습을 드러낸 건, 일행의 허리춤에도 미치지 못하는 신장을 가진 난쟁이들이었다.
트랜트 벤틀리를 비롯해, 10인의 조원 모두 생전 처음 보는 이 자그마한 생명체들을 향해 호기심을 드러냈다.
‘나, 난쟁이? 드워프... 는 아닌 것 같은데?’
‘그걸 말이라고 하냐? 드워프 본 적 없어? 실제론 걔들, 인간이랑 별 차이 없다고. 키는 조금 작지만 떡대는 그쪽이 더 커.’
‘그럼 땅의 정령인가?’
‘땅의 정령은 전신이 흙색인 못생긴 늙은이 모습이야.’
‘그럼 저건 대체 뭐야?’
‘그야... 나도 모르지.’
이곳 오르비스 대륙인들이 이들의 정체를 알지 못하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이 난쟁이들은 스노우의 스킬에 의해, 완전히 다른 차원에서 불려온 존재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의 정체는 인간에 버금가는 지능을 지닌 요정족 ‘하플링’.
전투에 있어서는 일반 병사보다 못한 존재들이었지만, 명석한 두뇌와 뛰어난 손재주를 지니고 있어 전투를 제외한 거의 모든 분야에서 꽤 도움이 되는 소환수들이었다.
소환된 하플링은 모두 15마리.
빨간 모자를 눌러쓴 늙은 하플링이 파이프를 뻐끔거리며 허리를 숙이자. 녀석의 뒤에 도열한 14마리의 젊은 하플링들 역시 스노우를 향해 공손하게 인사를 건네왔다.
스노우는 작게 고개를 끄덕여 그들의 인사를 받아준 뒤 명령을 내렸다.
‘석벽들을 완전히 고정시켜라. 그리고, 모래가 스며들어서도 안 돼.’
그의 지시가 끝나자 늙은 하플링이 뒤를 돌아 무언가를 지시하는 듯 했지만.
‘.....................’
조원들의 귀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잠시 뒤, 각자의 옷에 달린 커다란 주머니에서 온갖 공구와 재료를 꺼내 들고 스노우가 가리킨 비트의 입구를 향해 일제히 달려가는 하플링들.
쿠웅
‘....................!’
그중 한 녀석은 주머니에서 자신보다 큰 석판을 들고 달려가다 입구를 통과하지 못해 뒤로 발라당 넘어졌고.
한동안 늙은 하플링의 설교를 들어야만 했다.
다다다다다다다...
이윽고 마지막 하플링까지 시커먼 어둠만이 존재하는 정육각형의 비트 안으로 사라졌다.
잠시 뒤 통로를 통해 희미한 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고.
곧이어 뚱땅거리는 소리가 아스라이 뒤를 따르더니.
10분 정도가 흐르자 비트의 입구 부분이 소란스러워졌다.
탕탕탕탕탕...
타앗
‘오오오오..’
‘허어...’
‘문! 문이다!’
‘자, 잘 만들었는데?’
‘대체 뭐야... 저것들은?’
마지막으로 구멍을 막은 문이 몇 번이고 ‘열렸다 닫혔다’를 반복하더니.
열린 입구를 통해 하플링들이 우르르 쏟아져나왔다.
그들은 어느새 기간트에서 내려온 스노우를 향해 공손하게 인사한 뒤.
서서히 안개처럼 흐릿해지다가.
끝내 완전히 모습을 감췄다.
이미 구덩이는 완전히 메워져 비트의 윗부분만이 드문드문 드러나 있는 상태였다.
모든 일이 진행되는 동안, 모래가 들어가는 줄도 모르고 입을 헤 벌리고 있던 10인의 엑스퍼트들.
‘들어가도 좋다.’
그들은 스노우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빠르게 발을 놀려 비트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들이 목격한 광경은...
‘마, 말도 안 돼.’
‘이게 대체...’
비트의 네 벽면에는 고풍스런 느낌의 마법등이 은은한 빛을 발하고 있었고.
11명이 사용하기에 충분한 거대한 탁자와 의자들이 비트의 한편을 차지하고 있었다.
또한 칸막이를 이용해 만들어 둔 독립된 공간에는 대체 어떻게 가져다 놓은 것인지, 매우 편안해 보이는 나무 침대 하나가 놓여 있었다.
‘이걸 다 뭘로 만든 거야?’
‘아까 못 봤냐? 그 녀석들이 주머니에서 저들 키만한 나무판자 꺼내는 거.’
‘근데... 왜 침대는 하나뿐이지?’
‘그걸 몰라서 물어?’
침대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굳이 생각해 볼 필요도 없었다.
주변을 둘러보던 트랜트 벤틀리가 무의식적으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여기... 너무 더운 것 같지 않아요?’
‘그러게. 1시간만 있어도 통구이가 될 것 같은데...’
아직 해가 완전히 떨어지지 않는 사막의 모래 아래에 만들어진 비트였으니.
엑스퍼트인 그들이라 한들, 그 더위를 버텨낼 재간이 없었다.
그 순간.
또로로로록
스르르르르르르르륵...
다시 나타난 운디네(성인 손바닥 크기)와 함께, 비트의 바닥과 벽면을 타고 얇은 눈결정들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이미 의자에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는 스노우가 존재했다.
‘운디네, 바닥의 얼음을 제거해.’
그의 말이 떨어지자, 놀랍게도 바닥을 뒤덮은 얼음이 녹으며 그 물기가 운디네의 자그마한 몸으로 흡수되었다.
투명한 얼음으로 뒤덮인 비트의 벽면에 손을 가져다 댄 트랜트 벤틀리가 감탄사를 터뜨렸다.
‘엄청 시원해요!’
다른 조원들 역시 만족한 표정을 지으며 이리저리 자리를 잡고 앉아 휴식을 취하기 시작했다.
그중 상급 엑스퍼트인 요한슨이 말했다.
‘그런데 이거... 어디 가서 말하면 믿어주기나 하려나?’
사막의 한가운데에서 누리게 된 놀라운 호사.
당연히 직접 겪어보지 못한 이들은 쉽사리 믿기 힘든 일일 터였다.
당시, 나머지 22조 섬멸조원들은 일제히 고개를 가로저었었다.
그리고 여기까지가...
한낮에 한기를 느끼고 깨어난 트랜트 벤틀리가.
사막 한가운데에서 겪은 신비한 경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