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투기 버리고 기간트 탑니다-80화 (80/169)

80화 사막의 기간트(5)

#1

대검을 던져 다섯 번째 기간트 오너를 살해한 크로스보우.

파아앗

그 육중한 기간트의 손에 첫 번째 희생자인 크로노스의 몸통을 관통했던 장창이 소환되었다.

그제야 공포감에 몸이 굳어 있던 카이샨의 오너들이 하나둘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상대는 동부(북부 국경의 동쪽) 전선을 이끌고 있는 카이샨 왕국 최강의 오너, ‘대전사 아르한’과 비견되는... 아니, 두 오너가 소유한 기체의 성능 차이가 어마어마하다는 걸 감안한다면.

사실상 그 이상의 괴물일지도 몰랐다.

불행하게도 사막의 전장에서 적으로 만나고 말았지만, 싸울 수 있는 기간트가 네 기나 남아 있는 이상 도망친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적어도 아직은...’

카이샨 왕국의 근위기사 쿠르드는 자신의 뒤편으로 주욱 늘어선 군량 수송부대를 힐긋거렸다.

최악의 경우, 저것들이 마라몬트 왕국의 수중에 넘어가는 것만은 막아야 했다.

그는 아군 통신 채널을 개방하며 크게 소리 질렀다.

[정신차려!]

[아...]

[네!]

[으아아아아아아...!]

쿠르드의 기간트인 트리온의 주위로 남은 카이샨의 기간트 3기가 모여들었다.

적의 스피드가 상상을 초월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상, 서로 간의 간격을 벌리는 건 차례차례 죽여달라는 뜻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구잘, 전투가 시작되면 즉시 군량...]

쿠르드는 자신의 다음 서열인 크로노스의 오너 구잘에게 군량의 소각을 명하려 했다.

하지만 그가 명령을 채 끝마치기도 전, 장창을 소환한 크로스보우의 기동이 재개되었다.

인상을 찡그린 쿠르드가 외쳤다.

[밀집 대형! 방패 올려!]

하지만 이번엔 대검을 들고 엄청난 속도전을 벌이던 이전 공세와는 그 형태가 확연히 달랐다.

화르르르르륵

스르르르르륵

파츠츠츠츠츠...

크로스보우의 머리 위 허공에 생성된 불과 얼음의 창이 지상을 향해 쏟아져 내렸고, 손으로부터 뻗어 나온 전격의 사슬 역시 눈 깜짝할 새 카이샨의 기간트들을 덮쳤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앙

콰아아아아아아아앙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마치 물속을 헤엄치는 물고기처럼 움직인 마법의 창들이, 카이샨 기간트들의 방어를 피해 그들의 외부 장갑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설상가상 기간트 네 기를 연쇄적으로 타격한 전격 계열 마법은 동화율을 한계까지 끌어올리고 있던 오너들에게 적지 않은 고통을 선사했다.

파츠츠츠츠츠츠츠츠츠...

[크윽!]

트리온과 80 중반의 동화율을 유지하고 있던 쿠르드 역시, 기간트 오너가 된 이후 좀처럼 느껴보지 못한 엄청난 격통에 이를 악물어야만 했다.

[빌어먹을!]

과연 왕국의 근위기사답다고 해야 할까?

고통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다른 세 오너에 비해, 그의 대처는 무척이나 빨랐다.

퍼어어어억

사막의 모래를 박차고 달려 나간 그는 마력이 듬뿍 담긴 거대한 방패를 크로스보우를 향해 내던졌다.

동화율 86.9, 87.7,... 90.3%.

마력 엔진 2287, 2318...... 2359.

과도한 집중으로 인해 무아지경에 빠져든 쿠르드의 동화율이 최초로 90%(고등급 기체일수록 동화율 상승이 힘들다)를 돌파했고.

드워프제 기간트답게 무려 3%에 가까운 오버클럭까지 일으켰다.

시퍼런 청광을 발산하기 시작한 트리온.

엄청난 속도로 날아가는 방패를 따라잡은 기간트는, 그것의 뒤에 몸을 숨기듯 자세를 낮추며 두 손으로 검을 움켜쥐었다.

5미터짜리 금속 덩어리의 물리력에 더해, 상급 엑스퍼트 마력으로 강화된 라운드실드가 허공에 생성된 투명한 막과 충돌했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콰아아아아아아아앙

터어어어어엉

실드 마법 두 개를 연달아 파괴한 방패가 세 번째 실드의 벽 앞에 무릎을 꿇었고.

이에 굴하지 않은 트리온의 검이 세 번째 실드를 가격했다.

콰아아아아아아앙

콰아아아아아아앙

콰아아아아아아아앙

마력으로 극한까지 강화된 검격으로 네 번째, 다섯 번째 실드까지 모조리 파괴한 트리온의 검이 크로스보우의 상체를 향해 섬광처럼 날아들었다.

휘우우우우우우웅

이에 크로스보우 역시 붉은빛을 발산하고 있는 장창을 앞으로 내뻗으며 트리온의 검을 맞이했다.

카아아아아아아앙

이후 연달아 10여합을 겨루는 두 기간트.

그 엄청난 기동 속도와 무기의 마주침으로 발생하는 어마어마한 충격파로 인해, 카이샨의 세 오너는 그들의 곁으로 접근할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카아아아아아아아앙

콰아아아아아앙......

총 15합의 교환.

그 끝에 우위를 점한 것은 트리온이었다.

두 기간트의 움직임은 우위를 가리기 힘들었지만, 익힌 검술에서 확연한 차이를 보인 것이다.

서걱

콰아아아아아앙

몇 번의 공격을 허용한 크로스보우의 외부 장갑에 조금씩 상처가 늘어나기 시작했고.

승기를 놓지 않으려는 쿠르드가 최후의 공세를 펼치기 위해 검에 남은 마력의 대부분을 밀어 넣는 순간.

화아아아아아아악

크로스보우의 외부 장갑에서 불길한 붉은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하더니.

눈에서 발산하던 안광조차 시뻘겋게 변해버렸고.

그 직후...

츠팟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크아아아악!]

이전보다 한 차원 진화한 움직임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2

살기로 가득한 사막의 전장.

순식간에 다섯 오너의 목숨이 사라졌고.

그로 인해 적들이 느끼고 있는 당혹스러움이 피부를 통해 느껴질 정도였다.

“이건... 너무 싱거운데?”

솔직히 아홉 기나 되는 숫자에다, 처음 보는 고등급 기간트까지 끼어있어 조금 기대를 했던 것도 사실이다.

내가 ‘강함’에 대해 집착했던 이유는 어디까지나 ‘강자’들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고자 하는 열망 때문이었다.

비록 능력의 한계로 인해 ‘양학’의 달인으로 이름을 떨치긴 했었지만, 기본적으로 나는 약한 놈들을 괴롭히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 쓸데없는 짓에 왜 힘을 빼.’

물론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굳이 피할 이유도 없었기에, 약자에 대한 자비 같은 것과도 거리가 멀긴 했지만.

그런 의미에서 카이샨 기간트들의 반응은 내 기대치를 한참 밑돌았고.

내심 실망스러운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하지만 이는 너무 섣부른 판단이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오버클럭을 일으킨 카이샨의 고등급 기간트가 갑자기 엄청난 공세를 펼치기 시작한 것이다.

“대체 얼마나 무리하고 있는 거야?”

자폭이라도 할 셈인 건지, 갑자기 세 배는 강력해진 듯한 공세에 방어하는 것조차 힘겨울 정도.

이미 ‘바람의 인도(C)’와 ‘매토템(C)’ 스킬을 사용하고 있는 상태였지만, 두 가지 스킬만으로는 상대의 변화한 템포에 따라가는 게 불가능할 것 같았다.

나는 황급히 내가 지닌 나머지 버프형 스킬들을 모조리 시전했다.

“곰토템, 거북이토템, 강철피부, 경화......”

그리하여 힘과 속도는 어느 정도 균형을 맞출 수 있었지만.

‘움직임이야 어떻게든 따라갈만한데... 저 검술이 문제야.’

숙련도에서는 차이가 날 수도 있겠지만, 검술 자체의 고절함만큼은 이 세계에서 만난 이들 중 가장 강했던 알버트 자작의 그것과 별다른 차이가 없는 듯했다.

순식간에 두 개로 분화된 검이 위와 아래, 혹은 앞과 뒤, 그도 아니면 오른쪽과 왼쪽을 동시에 노려왔고.

급기야 한순간 세 개까지 늘어났을 땐 방어에 실패해 오른쪽 옆구리의 외부 장갑이 뭉텅이로 썰려 나갔을 정도였다.

“젠장, 우습게 볼 게 아니었군.”

이미 오버클럭을 일으킨 지 30여 초가 넘어가는 만큼, 저런 움직임을 지속할 수 있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고작 한두 합 만에 커다란 피해를 입는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어쩔 수 없군... 버서커.”

나는 이 세계에 떨어진 이후 두 번째로 ‘C등급 육체강화’ 특성의 고유스킬 ‘버서커(C)’를 사용했다.

사용 후 반동이 너무나도 심해, 어지간하면 봉인해 두려고 마음먹은 스킬이었는데.

다행스럽게도 지난번 스킬 사용 이후, 한 가지 고무적인 사실이 발견되었다.

그건 바로 기간트에 탑승한 채로 이 스킬을 사용할 경우, 본신의 상태로 사용했을 적에 비해 그 반동이 절반 이하로 줄어든다는 것.

“그래도 짜증나는 건 마찬가지지만.”

급격하게 치솟아 오르는 고양감과 힘을 느끼며 상대방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동화율은 전투 개시 직후 언제나 100%를 유지 중이었고.

여기에 크로스보우의 마력 엔진까지 오버클럭시켰다.

1128, 1137,1144...... 1155.

극도의 해방감과 카타르시스가 정신과 신체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나는 목과 허리를 노리고 날아드는 두 개의 검을 ‘동시’라 해도 좋을 만큼 빠르게 쳐내는 데 성공했다.

카아아아아앙

카아아아아아앙

그리고는 목을 노리고 날아오던 검을 쳐낸 반동을 이용해 몸을 180도 회전시키며 뒤편을 향해 창을 찔러넣었다.

카아아아아아앙

여전히 오버클럭 상태를 유지 중인 적기가 어렵지 않게 창날을 쳐냈다.

나는 창날과 검날이 만나는 순간 쥐고 있던 창대를 놓아버렸다.

휘리리리리리리릭

장창은 멀찌감치 날아가 버렸고.

찰나의 순간, 상대가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빠르게 몸을 비스듬하게 세우며 자세를 최대한 낮췄고.

오른쪽 어깨로 적기의 가슴을 겨냥했다.

이후 발밑으로 마력을 발출.

그와 동시에 ‘도약(C)’ 스킬까지 사용했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콰지지지지직

크로스보우의 어깨와 상대 기간트의 가슴 부위 외부 장갑이 충돌했고.

[상체 외부 장갑 파손율 : 36%]

어마어마한 충격과 함께 크로스보우의 상체 장갑 파손율이 21%에서 36%로 치솟았다.

한마디로 어깨 부위 외부장갑이 완벽하게 파괴되어 버렸다는 뜻이었고.

[상체 관절 파손율 : 12%]

심지어 오른쪽 어깨 부위의 관절까지 적지 않게 상해버렸다.

하지만 이는 적 기간트의 상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직격 이후 20여 미터를 날아가 지면에 처박힌 적기의 상체 외부장갑은 전면부의 대부분이 날아가 버린 상태였고.

심지어 기하학적인 도형과 문자들이 새겨진 내부 장갑 역시 여기저기 균열을 드러낸 채 움푹 파인 상태였다.

다만 이 일격으로 오너의 생명을 거두는 데는 실패한 듯, 기간트는 사지를 바둥거리며 어떻게든 몸을 바로 세우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버스커 해제. 크윽...”

카이샨의 고등급 기간트가 전투 불능에 빠진 이상.

더 이상의 위험요소는 존재하지 않았고.

나는 곧바로 버서커 스킬을 해제했다.

스킬의 유지 시간이 짧을수록 반동 역시 줄어들었으니까.

파아앗

스킬의 반동을 참아내며 대검을 소환한 나는 곧바로 쓰러진 적기를 향해 천천히 다가가기 시작했다.

쿵쿵쿵쿵쿵쿵쿵쿵...

뒤늦게 사태를 파악한 세 기의 기간트가 움직였다.

하지만 이들의 실력은 지금은 쓰러져 버린 고등급 기간트의 오너와는 비교하는 것이 민망한 수준이었다.

“록스피어, 바인딩, 바인딩......”

사막의 모래를 뚫고 솟아오른 바위의 창과 넝쿨들이 세 기간트의 몸을 속박했고.

“아이스 스피어, 아이스 스피어...... 인첸트 메가 라이트닝!”

사막과는 어울리지 않는 십수 개의 얼음 창들이 기간트들의 외부 장갑을 타격하는 가운데.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오른손에 소환한 장창에 인첸트 된 전격 계열 최강 스킬(스노우가 익힌 것 중)이 그들의 중앙에 있는 크로노스(1800rp)에게 적중했다.

그 여파로 크로노스의 상체 외부장갑이 완전히 파괴되어 버린 것은 물론, 내부 장갑까지 처참하게 망가지며 움직임이 멎어버렸고.

두기의 바이샨 역시 장갑의 일부가 파손된 채 사막의 모래 위를 나뒹굴었다.

타앗

나는 모래를 박차고 가볍게 뛰어올라.

콰드득

콰드득

쓰러진 두 기간트의 몸통에 대검을 찔러넣었다.

이제 살아있는 오너는 단 한 명.

여전히 몸을 일으키지 못하는 적 기간트로부터 가느다란 음성이 흘러나왔다.

[시, 식량... 식량을 소각...]

나는 곧바로 쓰러진 기간트의 상체를 향해 대검을 집어 던졌고.

쿠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이미 한계에 달해있던 마력 엔진이라도 건드린 것인지.

어마어마한 굉음과 함께 폭발해 버렸다.

“꽤 비싼 기간트 같았는데... 저건 이제 재사용도 안 될 테니, 추가 포인트를 달라고 해도 되겠어.”

.......................

아홉 기의 기간트가 모조리 사라져 버린 사막 위에는 몇 구의 시체와 적막만이 감돌았다.

“다, 다 죽었어!”

“빌어먹을!”

“불을 질러! 식량을 마라몬트 놈들에게 빼앗길 순 없다!”

“불을 질러라!”

죽음을 직감한 카이샨의 병사들이 최후의 발악으로 바잘의 등에 실린 식량 더미를 불태우려 들었지만...

“운디네, 샐러맨더, 실피드.”

물과 불, 바람을 다스리는 거대한 정령들 앞에서는 무의미한 발악일 뿐이었다.

그들의 시도는 고작 식량 가마니 대여섯 개를 절반쯤 불태우는 데 그쳤고.

“끄아아악!”

“커어어억!”

“사, 살려... 커헉!”

불을 진화한 거대 정령들의 공격을 받아 모조리 목숨을 잃고 말았다.

나는 크로스보우와 정령들을 모두 소환 해제했다.

그러고 나니 이제 사막에 남은 것이라곤...

200여 마리의 바잘 무리와.

그 위에 쌓인 엄청난 양의 식량뿐이었다.

나는 그것들을 바라보며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렸다.

“저건... 몇 포인트나 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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