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투기 버리고 기간트 탑니다-81화 (81/169)

81화 동부 전선(1)

#1

“이건, 꿈인가...?”

“대장의 실력이 대단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기간트 아홉 기를 작살 내는데 고작 10여 분밖에 안 걸리다니...”

“그가 무명이었던 걸 감사하게 생각해야겠군.”

“응?”

“명성을 날린 뒤였다면... 아마 카이샨 놈들이 무슨 수를 쓰든 끌어들이려 했겠지.”

“새, 생각만 해도 끔찍하군.”

“고작 크로스보우를 타고도 저렇게 날아다니는데, 만약 고등급 기체라도 손에 넣는 날에는...”

“새, 생각만 해도 끔찍......”

스아아아아아...

전장에 남아 있던 마지막 기간트마저 희미한 빛과 함께 모습을 감추었다.

남은 카이샨 병력들의 군량 소각 시도가 있었지만.

이는 듣도 보도 못한 엄청난 크기의 정령들에 의해 저지되었다.

심지어 불을 꺼버린 거대 정령들은 엑스퍼트가 다수 포함된 100여 명의 병력을 순식간에 전멸시켜 버리는 위용까지 과시했다.

후방에 남아 전장을 주시하고 있던 22번 섬멸조.

무려 ‘섬멸조’라는 이름을 달고 사막으로 진출했건만.

이들이 한 일이라고는, 지정 좌표(비트 위치)까지 이동하는 동안 중급 몬스터 십수 마리를 상대한 것이 전부였다.

그 외에는 비트 안에서 벌인 ‘심심함’과의 사투와 스노우의 대활약을 멀찍이서 감상한 것이 전부.

하지만 그러한 사실에 불만을 가지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받는 보상에 비해... 이렇게 편한 임무는 용병질을 시작한 이후 처음이로군.”

“심지어 부수입도 짭짤했지.”

그들은 그레이트 데스웜의 부산물을 처리한 대가로, 이미 최소 수백 골드의 부수입을 약속받은 상황이었다.

그리고 모든 적들이 사라진 전장에는, 그레이트 데스웜과는 비교도 안 되는 엄청난 양의 전리품이 남아 있는 상황.

“어쩌면 이번에도...”

“허, 한 일도 없는 주제에 뭘 바라는 거냐?”

“그럼 넌 줘도 안 받으려고?”

“그럴 리가.”

그런 그들의 시야에 자신들을 향해 손짓하는 강철 거인의 모습이 잡혔다.

“대장이 부른다.”

“빨리 가!”

“달려!”

22번 섬멸조 조원 10인(보좌관이자 기록관 란셀 티그리스 포함)은 사막의 모래를 박차며 엄청난 양의 전리품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2

카이샨 수송부대와의 전투가 끝난 뒤.

나는 대기하고 있던 조원들을 불러들였다.

상기된 얼굴로 빠르게 달려온 그들은 전장에 남겨진 200여 마리의 바잘 무리와 그 위에 실린 군량 더미들을 발견하고는, 하나 같이 혀를 내두르며 감탄을 토해내기 바빴다.

“장난이 아닌데?”

“가까이서 보니 오히려 실감이 안 나는군.”

“이 정도면 10만 골드는 우습겠는데?”

“하, 10만? 바보냐? 딱 봐도 15만 골드는 넘겠구만.”

“허...”

나는 디그 마법을 이용해 거대한 구덩이를 판 뒤.

표면과 가장자리를 얼려 모래가 스며들지 못하게 막은 다음.

그 안으로 카이샨측 오너와 병사들의 시체를 묻을 것을 지시했다.

이대로 놔둔다면 그들의 시체는 사막 몬스터들의 먹잇감으로 전락할 터였고.

설령 적이라 한들, 그런 꼴을 당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조원들은 내 지시에 군말 없이 따랐다.

그리고 물었다.

“조장님, 적들의 갑옷이랑 무기들은...”

“너희가 알아서 처리해라.”

“......!”

“감사합니다!”

닳을 대로 닳은 용병인 조원들은 신바람을 내며 멀쩡한 갑옷을 벗겨내기 시작했고, 무기들 역시 모두 수거해 한 곳에 차곡차곡 모으기 시작했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지 그들의 손길은 익숙하기 그지없었다.

하기야 용병으로 살아오며 저만한 실력을 지니기까지... 얼마나 많은 일을 겪어 왔겠는가.

정령들의 공격으로 인해 군데군데 상처 입은 갑옷들과는 달리, 제대로 뽑아보지도 못한 무기들은 대부분 멀쩡하기 그지없는 상태였다.

게다가 수십의 엑스퍼트가 포함되어 있었던 만큼, 수십 골드를 웃도는 무기 역시 적지 않았기에.

이를 모두 팔아치운다면 또다시 각자에게 수백 골드씩은 떨어질 터였다.

나는 기간트에 탄 채로 사막의 모래 위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은 채 조원들이 일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크흠, 난 이것들이면 충분할 것 같군.”

귀족인 란셀 티그리스였다.

그는 체면을 의식해서인지 시체들이 입고 있는 갑옷에 손을 대지는 않았지만, 쓸만해 보이는 병장기 몇 개를 챙기는 것은 잊지 않았다.

그가 고른 병장기들이 최상품이기는 했지만, 금액으로 따지자면 일행에게 돌아갈 몫에 비해 과하지는 않았기에 다들 수긍하는 분위기였다.

멀쩡한 갑옷을 모두 벗겨낸 조원들은 적들의 시체들을 하나하나 구덩이로 밀어 넣기 시작했다.

용병인 섬멸조 조원 중 마라몬트 출신은 없었기에 굳이 시체를 험하게 다루는 이는 없었다.

마라몬트의 귀족인 란셀 티그리스의 속마음을 알 도리는 없었지만, 그 역시 겉으로는 기분 나쁜 티를 내지 않았다.

폭발에 휘말려 시체조차 남기지 못한 트리온(조원들이 알려주었다)의 오너를 제외한 100여 구의 시체가 구덩이를 가득 채웠고.

나는 실피드에게 명령을 내려 그 위를 모래로 덮도록 했다.

사아아아아아아아아...

실피드가 일으킨 거대한 바람에 의해 모래들이 허공으로 날아올랐고.

곧이어 거대한 회오리 형태로 변하며 구덩이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제 남은 것은 식량 더미를 실은 바잘 무리.

“사령부와 연락을 마쳤습니다. 적의 추격이 있을 수 있으니, 우선은 대기 장소(비트)로 이동하라는 명령입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바잘 무리를 바라보았다.

저것들을 버리고 가는 선택지 따위는 있을 수 없었다.

‘돈이든 포인트든 장난이 아닐 텐테.’

나는 22번 섬멸조원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가축 키우는 일을 해 본 적이 있다, 거수.”

#3

소심하게 손을 든 건 22번 섬멸조의 막내인 트랜트 벤틀리였다.

“정식으로 일을 한 건 아닙니다. 다만 프케를 키우는 일을 집안 대대로 해온지라 어릴 때 일을 조금 거든 정도......”

뒤에 뭐라 뭐라 덧붙이기는 했지만, 내게 중요한 건 녀석이 가축 다루는 일을 해봤다는 사실뿐이었고.

설명에 따르면 ‘프케’는 바잘과 서식하는 환경만 다를 뿐, 그 외형이나 습성이 매우 비슷한 동물이라고 했다.

“좋군. 지금부터는 네가 리더다. 다른 녀석들에게 지휘를 내릴 권한을 줄 테니, 저놈들을 비트까지 인솔하도록.”

“네? 아... 네! 알겠습니다!”

그리하여 11인의 인간과 200여 마리 바잘 무리의 대이동이 시작되었다.

한 가지 이상한 점은...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 바잘들이, 조장님에게 관심이 많은 것 같습니다.”

굳이 트랜트 벤틀리의 설명이 아니어도 알 수 있었다.

‘이놈들, 대체 왜 이렇게 치대는 거야?’

처음에는 트랜트 벤틀리가 이끄는 데로 움직이던 바잘 무리가, 어느 순간부터 틈만 나면 실피드가 끌고 있는 썰매 곁으로 이동해 머리를 들이밀거나 몸을 비벼대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이런 일들이 처음은 아니었다.

‘이곳으로 넘어온 다음부터, 몬스터고 짐승이고... 이상할 정도로 날 따르긴 했지.’

덕분에 막내에서 리더로 잠시나마 신분 상승의 달콤함을 맛봤던 트랜트 벤틀리는...

“트랜, 감히 우릴 제일 안 좋은 자리에 배정했겠다?”

“그 용기만큼은 칭찬해 주지. 그런데 어쩌냐? 이젠 네가 할 일도 없어진 것 같은데.”

따로 인도하지 않아도 스노우가 타고 있는 썰매를 졸졸 쫓아가는 바잘 무리로 인해, 다시금 막내 신세로 강등되고 말았다.

게다가 소심한 그로서는 안면이 적은 용병들을 선택할 수 없었던 탓에, 바잘 무리의 후방을 지키게 했던 두 용병단 선배의 분노를 온몸으로 감당해야만 했다.

“야, 이 냄새 어떡할 거야? 어?”

“씨발, 도대체 웬 똥을 그렇게 싸대는 거냐고.”

“저것들 덩치를 봐라.”

“아무튼 너 이 새끼, 비트에 도착해면 두고 보자.”

성실하게 명령을 수행했을 뿐인 트랜트 벤틀리는 억울했다.

‘어머니... 여보...’

그는 어느새 붉게 물든 다르파한 사막의 하늘을 바라보며.

눈시울을 붉혔다.

#4

알마탄 요새 앞 마라몬트 서부군 임시사령부.

“으음...”

마라몬트 서부군 총사령관 윌리엄 다이슨 후작의 앞에는 동시에 도착한 두 개의 보고서가 놓여있었다.

하나의 낭보와 하나의 비보.

알마탄 요새 건너 다르파한 사막에서 들려온 낭보는 적들이 준비한 대규모 군량 수송부대의 전멸이었고.

그 주인공은 첫 번째 기간트 대전에서 믿을 수 없는 전과를 올린 용병 오너 스노우가 포함된 22번 섬멸조였다.

게다가 그들이 거둔 전과는 단순한 적의 섬멸이 아니었다.

“적의 군량을 온전히 강탈하다니...”

물론 100% 용병 오너 스노우가 거둔 전과인 만큼, 그 전리품 역시 모두 그의 차지가 되는 것은 당연했다.

어지간한 실력자라면 어떻게 해서든 왕국의 지분을 늘려보려 했을 테지만, 어쩌면 전쟁의 향방에 거대한 영향을 미칠지도 모를 엄청난 실력자를 상대로 그런 짓을 벌일 수는 없었다.

‘그런 짓을 하려는 놈이 있다면 목을 날려 버려야지.’

아마도 그렇게 되기 이전에 스노우 본인이 가만있지 않을 테지만.

아무튼 전선에 집결한 30만 대군의 식량을 보급하는 것은 마라몬트 왕국으로서도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고.

섬멸조가 획득한 전리품을 사들인다면 식량 사정은 한결 여유로워질 터였다.

“대가야... 어차피 킬 포인트로 지급하면 될 테고.”

애초에 스노우란 자가 원하는 것 역시 오직 킬 포인트뿐이었으니,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정작 문제는...

스륵

윌리엄 다이슨 후작은 오른쪽에 있던 보고서를 집어든 뒤 다시 한번 읽어 내려갔다.

“으으음...”

길게 나열된 문장들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동부군 패퇴.]

양국 북부 국경의 ‘동부’에서 맞붙은 기간트 대전에서 이곳 서부와는 정반대의 결과가 나와버린 것이다.

그로 인해 무려 3만의 병력을 잃고 동부의 바르틴 요새라 할 수 있는 ‘프리몬트’로 후퇴한 마라몬트군은 현재 25만의 카이샨 왕국군에 의해 포위된 상태라고 한다.

‘192명의 오너 중 39명 사망, 전투 불능 기간트 62기라...’

병력으로 따지면 서부 전선에서 패한 카이샨 왕국군의 피해가 훨씬 더 컸지만, 기간트의 경우에는 동부에서 패퇴한 마라몬트 왕국군의 피해가 더욱 극심했다.

그렇다는 것은 결국, 현재 전황이 마라몬트 왕국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일이 이렇게 흐르게 된 데에는 결정적인 이유가 존재했는데.

“용병왕 블레이크 벨... 그자가 카이샨 쪽에 붙다니...”

서대륙 17개국은 엘프족과 판족의 나라를 제외하면(두 국가에는 용병 길드가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판족의 경우 ‘모험가 길드’가 이를 대신한다.) 모두 독립된 용병 길드가 존재했고.

이 길드들 간에는 타국에서 측정된 등급을 인정해 주는 등의 공조가 제법 잘 이루어지고 있었다.

규모에 상관없이, 용병단이나 용병대는 모두 이 15개 길드 중 하나에 소속되어 있다고 볼 수 있었는데.

그런 만큼 용병 길드의 길드장들이 가진 힘은 매우 막강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런 용병 길드의 우두머리 중 그 누구에게도 ‘용병왕’이라는 칭호는 허락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서대륙에 단 15명밖에 없는 소드마스터이자.

출력 2700rp의 기간트 ‘알칸트라’의 주인인.

대륙 최강의 용병, ‘용병왕’ 블레이크 벨의 존재 때문이었다.

그리고 ‘왕’이라는 칭호가 무색하게도 언제나 홀로 움직이는 그가...

아군 기간트 오너 12인 살해를 포함, 총 15기의 기간트를 다운시키는 전과를 거둬.

마라몬트 왕국 동부군에게 대패의 수모를 안긴 원흉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