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투기 버리고 기간트 탑니다-83화 (83/169)

83화 동부 전선(3)

#1

18 VS 4.

말도 안 되는 전력 차가 언급되었음에도 동요하는 원정대원은 없었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그랬고, 아마 속으로도 그리 다르지는 않을 터였다.

이들 중 엑스퍼트 둘은 사막의 전투를 처음부터 끝까지 목격한 섬멸조원이었고, 나머지 세 오너는 첫 번째 기간트 대전 때 내 활약을 지근거리에서 목격한 녀석들이었으니까.

해가 지평선에 걸치며 하늘이 붉게 물든 시각이었다.

아직은 시간이 이르다.

예로부터 기습이란 전략은 주로 밤늦은 시각에 이루어졌고.

가능하다면 보초병들의 경계가 가장 느슨해지는 새벽녘이 가장 선호되어왔다.

물론 지금부터 우리가 버릴 일은 기습과는 조금 거리가 있긴 했지만, 어쨌든 어둠이 도움이 되는 건 매한가지.

스르륵

스윽

원정대원들은 강렬한 햇볕을 가리기 위해 온몸을 꽁꽁 싸매고 있었던 천을 풀어낸 뒤.

각자의 아공간 주머니에 들어있던 갑옷과 장비들을 착용하는 중이었다.

“세 시간 뒤 작전을 시작한다.”

“너무 이르지 않나? 자정은 넘기는 게 어때?”

대부분의 기간트 오너들이 이용하는 고급 가죽 갑옷을 착용한 저스틴 크로비스가 고개를 이리저리 꺾어대며 말을 이었다.

“세 시간 뒤면 고작 아홉 시? 그 시간엔 잠을 자는 녀석도 없을 거라고.”

“바로 그 이유 때문이다. 잠결에 늦장 부리는 놈이라도 몇 있으면 너희들이 곤란해질 테니까.”

“응? 그런가? 뭔가 좀 이상하긴 한데...”

나는 더 이상의 설명을 생략한 채 나머지 인원에게도 좀 더 세세한 지시를 내렸다.

일행 중 특별히 할 일이 없는 건 내 기록관으로 합류한 란셀 티그리스밖에 없었다.

“네가 할 일은 지난번과 같다. 작전은 신경 쓸 것 없이 내 전과만 제대로 기록하도록.”

“네! 그렇지 않아도 영상저장용 마법 수정 3개를 지급받았습니다.”

뭐, 그거라면 혹시라도 실수할 일을 없을 테지.

어려운 임무를 맡아서 좋은 점 중 하나는 고용주의 씀씀이가 커진다는 것인데.

참고로 영상을 저장할 수 있는 마법 수정은 가격이 개당 300~500골드였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했던가?

영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위치였음에도 적들의 경계는 퍽 느슨한 편이었고.

우리는 가벼운 위장만을 펼친 채 세 시간을 흘려보냈다.

환경오염이랄 게 거의 없는 이 세계의 풍광은 어느 곳이나 지구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아름다웠지만.

세 개의 달이 떠오른 사막의 밤하늘은 그중에서도 가히 압권이라 할 만했다.

이곳에 떨어진 뒤 처음으로 나를 당황스럽게 만들었던 세 개의 달.

나는 아름다운 세 개의 달과 수천, 수만의 별무리가 아름답게 수 놓인 밤하늘을 바라보며...

“시작한다.”

테러의 시간이 도래했음을 알렸다.

#2

“반드시 신호를 확인한 다음 움직여라.”

“걱정하지 마. 하늘 위 거대한 불꽃! 확실하게 기억했어.”

“명심해라, 하늘 위다.”

“알았다니까! 나만 믿으라고! 나만!”

오른쪽 팔에 거대한 알통을 만들어 보이며 장난스럽게 웃는 저스틴 크로비스의 모습은 썩 믿음직스럽지 않았다.

하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가벼운 모습과는 다르게, 속은 꽤나 음흉한 놈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뭐, 어차피 일이 잘못되면, 뒈지는 건 저놈일 테니까.’

“식량 창고는 영지의 북서쪽에 있다. 북문 방향으로 진입할 경우, 오른쪽 대각선으로 난 대로를 따라 쭉 이동하면 오래 걸리지 않아 눈에 들어올 거다.”

“거길 크로노스 한 기랑 바엘로그 두 기, 바이샨 네 기가 지키고 있다고? 그 정도면 해 볼 만 하지.”

“너희들의 목적은 적기를 해치우는 게 아니라는 걸 명심해라, 저스틴 크로비스. 어디까지나 목적은 군량을 없애는 것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영지 내부의 기간트 수가 3기 이하로 줄어들면 신호를 주겠다.”

“아 글쎄, 알았다니까! 네가 우리 엄마냐?”

퍼어어어억

“크악! 아오 씨!”

선을 넘으려는 저스틴 크로비스의 뒤통수를 후려갈겨 버린 뒤.

눈을 부라리는 녀석을 마주 노려봐주는 것으로 최종 점검을 마쳤다.

“아오, 대가리야...”

“그럼...”

“살아서 뵙겠습니다.”

오너인 저스틴 크로비스와 케일 마틴, 애덤 가필드가 영지의 외성을 크게 우회해 달리기 시작했고.

꾸벅

작전을 보좌할 요한슨이 꾸벅 인사를 건넨 다음 오너들의 뒤를 따랐다.

그들의 목적지는 외성의 북문.

네 사람이 도착하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필요할 테지만.

내가 맡은 역할이 ‘어그로’를 끄는 것인 만큼, 일찍 시작한다고 해서 나쁠 건 없었다.

나는 빠르게 멀어지는 네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말했다.

“지난번과 마찬가지다. 전황이 불리해지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퇴각하도록.”

“만약 그렇게 된다면 중간 접선지는...”

“없다. 정말로 그런 상황이 온다면... 그런 걸 신경 쓸 정신은 없을 테니. 어떻게든 살아남는 것에만 집중해라.”

“명심하겠습니다.”

나는 마지막으로 남은 란셀 티그리스의 배웅을 받으며 구릉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굳이 서두르지는 않았다.

“처음부터 서두를 필요는 없겠지.”

오늘 밤은 꽤 바쁘게 움직여야 할 테니까.

나는 굳이 마력을 사용하지 않은 채 신발 밑창에 닿는 모래의 감촉을 느끼며 한발 한발 내디뎠다.

“@#[email protected] $#@$%%... $#%#$^!”

소환 방해 마법진이 활성화된 위치에 다다랐을 때쯤.

드디어 내 존재를 발견한 것인지 성문 쪽이 소란스러워졌다.

‘이건 군기가 빠졌다고 하기에도, 그렇다고 제대로 들었다고 하기에도 어정쩡하군... 그래도 전시 상황인데 빠진 쪽이 맞겠지?’

속으로 시답잖은 생각을 한 나는 오른쪽 손목에 차고 있는 네스트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email protected]#%! @%@$#%! $%#@%$!”

영지 외성의 성문 쪽에서 느껴지는 소란스러움이 더욱 커졌다.

나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탑승 주문을 외웠다.

“테리마.”

기간트에 탑승하자 익숙한 압박감이 나를 반긴다.

외부로 마력을 발산하자 주변을 감싼 파란색 알갱이들이 녹아내렸고.

곧이어 평소의 3배에 달하는 시야를 확보한 나는 이제는 익숙한 해방감을 느끼며 첫발을 떼었다.

츠륵

모래가 밀려나는 옅은 소음.

10톤가량의 금속 덩어리가 낸 소리라기에는 너무나 미약한 그것이.

훗날 마라몬트와 카이샨(특히 카이샨) 두 왕국에서 전설로 회자 될.

‘모안다 혈전’의 서막이었다.

#3

작전의 개요는 간단하기 그지없었다.

내가 크로스보우를 이용해 노골적으로 어그로를 끌고.

모안다 영지에 존재하는 18기 중 15기 이상이 나에게 어그로가 끌렸을 때.

내 신호를 받은 저스틴 크로비스 포함 3명의 오너가 식량 창고를 습격한다.

고작 세 줄로 설명이 가능한 습격 작전.

뭐, 혼자서 15기의 기간트를 상대해야 한다는 것부터가... 사실상 말도 안 되는 작전이긴 했다.

기간트의 오너가 내가 아니었다면 말이다.

군사적 요충지답게 일반적인 영지의 외성에 비해 몇 배는 높은 성벽.

그리고 성벽의 중앙에 있는 거대한 성문 앞에는 두 기의 기간트를 비롯해 카이샨의 군복을 입은 수백의 병력들이 대열을 갖춘 채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소란이 금세 가라앉은 것으로 보아, 생각보다 군기가 엄정하게 유지되고 있는 듯했다

쿠웅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성문 앞에 장승처럼 서 있던 두 기의 바이샨 중 하나였다.

파아앗

아무것도 없던 바이샨의 오른손에 기간트용 롱소드가 소환되었고.

천천히 검을 들어 올려 나를 겨눈 기간트가...

쿠웅쿠웅쿵쿵쿵쿵...... 타앗

별안간 나를 향해 쇄도해 들어오더니.

후우우우우우우웅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검을 내질렀다.

그런데...

“과감한 건 좋지만, 빈틈이 저렇게나 많아서야...”

파아앗

나는 지난 사막 전투에서 내구성을 다해버린 장창을 대신해 2번 슬롯에 넣어둔 플레일(편곤)을 소환했다.

그리고는 허공에 도약한 채 나를 노려오는 바이샨을 향해.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전력을 다해 내질렀다.

#4

카이샨의 오너인 카잘의 기분은 최근 들어 저기압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26세에 중급 엑스퍼트의 경지에 오르고, 비슷한 실력을 지닌 이들 중 눈에 띄는 오너의 재능을 인정받아 28세 첫 번째 기간트를 하사받았다.

물론 카이샨 왕국군 소속 오너들의 기간트는 모두가 왕실의 소유였음으로 결국에는 임대나 마찬가지였지만.

국가를 배신하거나 오너의 사망을 제외하면, 기간트를 회수해 가는 경우는 오직 한 가지 이유뿐이었다.

그것은 바로 기간트 등급업.

출력 800rp의 이펜타르크제 기간트 ‘스니커’와 동고동락한 지 4년.

카이샨의 서쪽에 위치한 거대한 산맥을 넘나들며 꾸준한 성과를 보인 그는, 32세가 되던 1년 전 꿈에 그리던 승급을 이뤄낼 수 있었다.

그리하여 새롭게 얻게 된 기체가 바로 바이샨.

카이샨 왕국의 기간트 중, 기준치(1000rp)를 넘기는 최하급 기체가 바로 출력 1200rp의 바이샨이었고.

바이샨 이상의 기간트와 계약을 맺어야만, 비로소 온전한 카이샨 왕국의 오너로 대접받을 수 있었다.

‘상급에 올랐다면 아트론을 받을 수 있었을 텐데.’

상급의 경지에 이르지 못해 바이샨으로 만족해야만 했지만.

이전 기체와의 결별과 새로운 기체에 대한 적응에만 1년여의 시간을 소모한 카잘은 지금 당장 상급 엑스퍼트의 경지에 들어선다 한들, 곧바로 기간트를 교체할 생각 같은 건 추호도 없었다.

‘어지간히 고생을 했어야지... 뭐, 스니커에 비하면 바이샨도 나쁘진 않고.’

어쨌든, 기간트 교체의 후유증과 적응 문제를 모두 해결한 카잘이 처음으로 나선 무대가 무려 마라몬트 왕국과의 전장이었다.

그런 그가 불만에 가득 차 있는 이유는...

[젠장, 아무리 승급 이후 첫 임무라곤 하지만... 내 짬밥에 성문 경비가 뭐냐고!]

[큭, 이젠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냐? 그러게, 누가 1년이나 쉬다 오래?]

[쉬다니! 내가 얼마나 개고생을...]

[잠깐!]

카잘의 친구이자 그보다 1년 늦게 오너가 된 하산이 그의 말을 막았다.

[저길 봐, 카잘. 수상한 놈이다.]

하산의 바이샨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가자, 정말로 이쪽을 향해 걸어오는 검은 머리 사내의 모습이 보였다.

[뭐야? 피부색 안 보여? 정찰조나 전령이겠지.]

[너야말로 장님이냐? 옷을 봐. 저런 걸 입는 사막의 전사는 없어.]

[어, 그러고 보니...]

이쪽을 향해 천천히 다가오고 있는 사내의 복장은 누가 보더라도 사막의 그것과는 거리가 멀었고, 오히려...

[저 갑옷, 마라몬트 녀석들이 만든 거다.]

[맞아, 게다가 전령이나 정찰조라면 저렇게 여유 부리며 걸어올 리가 없지.]

그들의 추측은 그럴듯한 결론에 다다랐지만.

이후에 벌어진 사태로 인해 쓸데없는 일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파아아아아앗

어두운 밤하늘 아래라 더욱 잘 보이는 빛무리.

그리고 나타난 한 기의 기간트.

[크로스보우!]

[적이다!]

두 오너는 물론 성문 앞을 지키던 모든 병력이 당혹스러움을 금치 못했다.

순식간에 마음을 진정시킨 하산이 입을 열었다.

[뭐지? 혼자서 뭘 하려고...]

그리고 조금 흥분한 기색의 카잘이 검을 소환하며 그의 말을 받았다.

[이유가 중요해? 중요한 건 눈앞에 적이 나타났다는 사실뿐이야.]

[뭐?]

[마침 근질근질했는데 잘됐군. 저놈은 내가 잡는다.]

[잠깐, 기다려 카ㅈ...]

하산이 다급히 만류하려 했지만, 카잘은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미 대지를 박찬 상태였다.

[상대의 의도도 알지 못하는데... 저자식이 기어코 사고를 치는군.]

친구의 돌발행동에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면서도, 고작 크로스보우를 상대로 카잘이 밀릴 것이라고는 추호도 생각하지 않는 하산이었다.

비록 적응 기간이 오래 걸리기는 했지만.

비슷한 경지(중급 엑스퍼트)의 전사 중, 카잘의 기간트 운용 실력은 매우 뛰어난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뭐, 조금 밀린다 한들... 그때 가서 협공하면 그만이지.’

하산이 다소 속 편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파아앗

크로스보우의 손에 끝부분에 가시가 숭숭 돋아난 1미터가량의 철편이 달린 기다란 막대기가 소환되었다.

[플레... 일?]

하산은 기간트가 사용하는 플레일을 생전 처음 보았다.

‘저건 그냥도 다루기 어려운 무기일 텐데? 기간트로 다룰 수 있을 리...’

검을 치켜든 채 내리꽂히는 바이샨을 향해.

붉은빛에 휘감긴 크로스보우의 플레일이 마치 섬광과도 같은 속도로 뻗어나갔다.

그리하여 플레일을 따라 시선을 움직이던 하산이 생각을 채 끝마치기도 전.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엄청난 굉음이 사막의 밤하늘에 울려 퍼졌고.

잠시 뒤.

상체의 절반이 날아가 버린 채, 사막의 모래 속에 파묻힌 바이샨의 처참한 모습이 하산과 카이샨 병사들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리고...

땡땡땡땡땡땡땡땡땡땡땡땡.......

뒤늦은 경고음이 사막의 밤하늘을 가득 메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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