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용병왕(2)
#1
고아인 블레이크 벨은 정확한 자신의 나이를 알지 못했다.
다만 기억에 남아 있는 어린 시절을 대충 서너 살 정도라 가정한다면, 올해로 마흔다섯 혹은 마흔여섯 정도가 되리라 추측하고 있을 뿐이었다.
블레이크 벨이 지닌 최초의 기억은 나이만 왕국(대륙 북동부에 위치한 왕국)의 거지 소굴에서 시작된다.
그는 14살(최초의 기억이 남아있는 나이를 4살이라 가정한다면)까지 대략 10년 정도의 시간을 나이만 왕국 중서부에 위치한 자유도시 ‘발로란’의 거지 무리 속에서 성장했다.
14살에 이미 여느 성인과 다를 바 없는 신체조건을 지니게 된 블레이크 벨.
게다가 천부적인 싸움 실력까지 지니고 있었던 탓에, 휘하 거지들을 학대하던 우두머리와 그 수하 10여 명을 격투 끝에 모조리 때려죽여 버렸고.
그대로 거지들의 우두머리가 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을 테지만.
운명의 신은 그의 발걸음을 다른 곳으로 인도했다.
마침 근방을 지나던 한 용병이 블레이크 벨과 거지들의 싸움을 목격했고. 마력을 사용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무려 10여 명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그의 재능에 감탄을 금치 못하게 된다.
호기심에 시체들이 잔뜩 널린 싸움터로 접근한 용병.
그는 날이 잔뜩 서 있던 블레이크 벨에게 공격을 받았지만.
단 한 수만에 그를 제압해 버렸고.
머리통을 얻어맞은 블레이크 벨은 정신을 잃고 만다.
정신을 차린 블레이크 벨을 취조(?)한 결과 그의 나이가 14살에 불과하다는 걸 알게 된 그는 자신을 따라갈 것을 제안했고.
그의 정체가 당시 나이만 왕국 용병 길드의 간부인 ‘리차드 벨’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블레이크 벨은, 미련 없이 거지 무리를 떠나 리차드 벨과 함께 용병 길드가 있는 왕도 ‘플레밍’으로 향한다.
함께 여정을 시작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리차드 벨로부터 마력 수련법을 전수받기 시작한 블레이크 벨.
그는 수련을 시작한 지 정확하게 2년 만인, 불과 16살의 나이에 초급 엑스퍼트의 경지에 올라 길드 소속 용병들을 기함하게 만들었고.
또다시 2년이 흐른 18살에는 중급 엑스퍼트가 되어 천재 중의 천재로 유명새를 떨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즈음, 가족이 없던 리차드 벨의 양자로 입적하며 정식으로 ‘벨’이라는 성을 가지게 된 블레이크 벨.
이후로도 오직 수련만을 거듭한 결과 3년이 지난 21세에 상급 엑스퍼트가 되었고.
그때부터 나이만 왕국의 용병 길드에서 그의 검을 받아 낼 수 있는 용병은 길드장을 포함 고작 셋 정도에 불과했다.
정식으로 수련을 시작한 것이 14살이란 늦은 나이인 걸 감안하면,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성장.
그리고 그런 불가해한 재능은 마치 정해져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에게 비극을 안겨주었다.
블레이크 벨의 비상식적인 성장에 위기를 느낀 나이만 용병 길드의 수장이 리차드 벨과 블레이크 벨을 제거하기 위해 함정을 팠고.
그 함정에 걸린 두 사람은 수십의 용병을 도륙하며 분전했지만 중과부적이었다.
양자인 블레이크 벨을 진심으로 사랑했던 리차드 벨이 스스로를 희생함으로써, 간신히 블레이크 벨의 도주로를 뚫어내 그를 탈출시키고 장렬하게 산화했다.
그로부터 5년 뒤.
불과 26세의 어린 나이에 최상급 엑스퍼트의 경지에 오른 블레이크 벨이 나이만 왕국 용병 길드에 나타났다.
그는 길드장을 비롯한 관련자 전원을 갈가리 찢어버린 뒤, 길드 본부 건물마저 완전히 무너뜨려 버린다.
그렇지 않아도 세력이 약했던 나이만 왕국의 용병 길드는, 이일을 계기로 대륙 최하위 레벨로 곤두박질치며 유명무실한 단체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복수를 완성한 블레이크 벨은 그때부터 정처 없이 대륙을 떠돌기 시작했다.
그가 오너가 된 것은 28살의 일이었는데.
이펜타르크 황가의 의뢰를 완수하고, 그 대가로 출력 1000rp의 기간트 ‘테페리’를 받아낸 것이다.
그런데 최상급 엑스퍼트였던 그는 기간트 운용에서도 발군의 실력을 발휘했고.
오너가 된 지 반년 만에 참가한 크샨트 제국과 포인츠 왕국의 국경 분쟁에서, 38일의 계약기간 동안 홀로 크샨트 왕국의 기간트 14기를 잡아내며 다시 한번 전대륙에 명성을 진동시켰다.
그로부터 18년이 흘러 46세가 된 현재.
오르비스 대륙에 몇 안 되는 소드마스터이자, 출력 2700rp의 초고등급 기간트 ‘알칸트라’의 주인이 된 그는 대륙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강자로 평가받고 있었고.
오너와 본신의 무력, 두 분야 모두 ‘오르비스 대륙 10강’으로 꼽히는 세 존재 중 하나가 되어 있었다.
그런 그가 사막의 밤하늘 아래를 걷고 있는 이유는...
“무녀의 예언에 그리 휘둘리다니. 아무리 사막 부족이라지만, 마굴 그 친구도 참...”
카이샨을 구성하는 8부족 중 하나인 ‘라샨’의 ‘하판(족장, 지배자)’ 마굴의 간절한 부탁 때문이었다.
블레이크 벨보다 다섯 살이 많은 마굴은 아직 ‘하르판(후계자)’의 신분이던 23년 전.
들끓는 혈기를 주체하지 못한 채, 몰래 부족을 뛰쳐나와 대륙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녔던 흑역사를 지니고 있었다.
그가 양아버지를 잃고 복수심에 불타는 블레이크 벨을 만난 것이 바로 이 시기였다.
자신보다 어린 블레이크 벨의 엄청난 실력에 반한 마굴이 그를 지극정성으로 대하며 친분을 쌓았고.
결정적으로 그의 복수를 열성적으로 도와(대부분 물질적인 부분), 두 사람은 둘도 없는 친우가 될 수 있었다.
마라몬트 왕국과의 전쟁에 그를 섭외한 것 역시, 마굴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서부(마라몬트 입장에서는 동부) 전선은 블레이크 벨을 포함한 몇몇 실력 있는 용병 오너들과 카이샨 정예들의 활약에 힘입어 마라몬트의 국경 요새를 포위하는 데 성공한 상황이었고.
적들이 워낙 큰 피해를 입은 탓에 얼마 지나지 않아 요새를 빼앗고 진격을 이어나갈 수 있을 것이라 예측되고 있었다.
덕분에 현 카이샨 왕국군의 최고 전력인 블레이크 벨이 최전선에서 잠시 몸을 뺄 여유가 생겼던 것이다.
그는 어젯밤 자신의 오랜 친우 마굴로부터 급한 연락을 받았고.
마법 통신구 속에 나타난 그는 파리한 안색으로 간절하게 부탁했다.
‘내 아들을 구해주게!’
마굴의 얘기를 모두 듣고 난 블레이크 벨은 어이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결국 그의 불안은 한낱 무녀가 꾼 꿈으로 인한 것이었는데.
장황한 설명에 비해 무녀가 꿨다는 꿈은 단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었다.
‘마굴의 아들이 거대한 거인의 발에 짓밟혔다.’
친우의 아들에게 직접 무예를 지도해준 적이 있는 블레이크 벨은 그가 얼마나 뛰어난 오너인지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무려 ‘근위기사’이자 ‘하르판’이라는 어마어마한 신분까지 지닌 그 녀석이 위기에 처할 가능성이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물론 전쟁 병기인 기간트의 오너인 이상, 누구나 죽음의 위험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고.
이는 블레이크 벨이라 하여 예외가 아니었다.
물론 그의 경우엔 그 위험이라는 걸 가능케 할 요소가 한없이 제로에 수렴하긴 했지만.
‘내가 보기엔 걱정이 과한 것 같은데? 고작 무녀의 꿈 따위로...’
‘그녀는 카이샨 최고의 무녀야! 수십 년전 대수림 몬스터 대침공도, 제국의 내전도, 알텐시아에서 모습을 드러낸 레드드래곤도 모두 정확하게 예언했다고!’
‘흠...’
그렇다면 조금 이야기가 달랐다.
예로부터 사막의 예언가들이 영험하다는 이야기가 유명하기도 했고.
물론 블레이크 벨은 그런 미신을 믿지 않는 부류였지만, 그렇다 해도 이런 이야기를 들은 이상 무시하는 것도 찝찝한 일.
그는 마굴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다.
사실 친우의 부탁과 왕실이 약속한 엄청난 대가로 인해 참전했을 뿐, 카이샨 왕국의 승리는 그에겐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마라몬트군에 그의 상대가 될 만한 강자가 없었던 것도 블레이크 벨의 결정에 한몫을 거들었다.
‘큭, 예언이 맞아떨어졌으면 좋겠군.’
호위들에 둘러싸여 있을 조카(마간)를 위협할 수 있을 정도라면, 어지간한 실력으로는 불가능할 테니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수행원으로 동행한 중급 엑스퍼트와 함께 호쿰(평균 몸길이 2미터, 신장 1.5미터의 사막 동물, 모래 위를 빠르게 달릴 수 있다)을 타고 달리던 블레이크 벨.
.......어어어어어어어어......
“응?”
“허억!”
아련하게 들리는 폭발음과 함께 사막의 밤하늘을 수놓는 불꽃을 발견한 두 사람이 호쿰의 고삐에 힘을 주며 속도를 줄였다.
“불꽃?”
“소리로 보아 꽤 떨어진 곳입니다. 아마도 목적지인 모안다 영지 부근인 것 같은데... 그 위치에서 저 정도로 확연하게 보이는 마법이라니... 정말 엄청난... 브, 블레이크님?”
타앗
마굴이 붙여준 수행원의 말을 무시한 채 호쿰에서 뛰어내린 블레이크 벨이 기간트를 소환했다.
파아아아아앗
신장 8.7미터의 짜리 적색 강철 거인이 사막의 모래 위에 모습을 드러냈고.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는 불꽃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블레이크 벨이 말했다.
“먼저 가지. 테리마!”
기간트의 등장에 놀라 날뛰는 호쿰 두 마리의 고삐를 움켜쥔 당황스런 표정의 수행원을 남겨 둔 채.
콰과과과과과과과과과과과과......
블레이크 벨의 기간트 알칸트라가 불꽃이 수놓인 방향을 향해 엄청난 속도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기간트의 무게와 폭발하는 마력으로 인해 발생한.
무시무시한 모래폭풍을 동반한 채.
#2
25킬 포인트를 놓치는 건 아까웠지만,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저놈을 마무리하겠다고 시간을 끄는 순간.
척 보기에도 엄청난 속도로 접근하고 있는 저 붉은 기간트... 엄청나게 불길한 아우라를 뿜어대고 있는 저놈에게서 벗어나게 될 기회를 놓치게 될 테니까.
[마, 막아아아아아아아아!]
트리온의 오너가 외부 통신용 채널을 통해 악을 쓰자, 남아 있던 카이샨의 기간트들이 일제히 달려들기 시작했다.
‘귀찮군...’
원래라면 스킬을 이용한 치고 빠지기로 피해를 누적시키며, 어렵지 않게 전멸시킬 수 있는 전력이었지만.
순간순간이 아까운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꽤 성가신 존재들일 수밖에 없었다.
“록월, 록월, 록월...... 눈사람 소환!”
나는 여러 개의 석벽을 소환해 그들의 진로를 가로막은 뒤, 7미터 크기의 서번트 15마리를 소환했다.
갑작스레 등장한 거대한 존재에 일순간 적들의 움직임이 주춤했고.
비록 단 10초도 걸리지 않아 모조리 파괴되고 말았지만, 그사이 쉬지 않고 내달린 나는 적들과의 거리를 꽤 벌릴 수 있었다.
문제는...
엄청난 속도로 사막의 밤하늘을 향해 치솟아 오르고 있는 모래폭풍과의 거리가 조금도 벌어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 말인즉슨, 붉은 기간트와의 거리를 조금도 벌리지 못했다는 뜻이나 마찬가지였다.
석벽과 서번트들을 소화한 뒤, 곧바로 힘 스텟의 하락분만큼 민첩 스텟을 증가시키는 ‘서리바람(B)’ 특성의 고유스킬, ‘바람의 인도(B)’까지 사용했음에도 거리를 벌릴 수 없다는 사실만으로도.
적 기간트와 그 오너의 실력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하, 진짜 x된 상황 같은데...”
도대체 어디서 저런 괴물이 튀어나온 건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중간 보스는 죄다 건너뛰고... 갑자기 최종 보스냐?”
적 기간트는 최소 출력 2500rp는 넘어가는 괴물이 분명했고.
그런 기간트를 탈 수 있는 오너라면 보통 실력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하물며 내 감각이 말해주고 있었다.
기간트 안에 있는 녀석 역시...
저 붉은 기간트 만큼이나 괴물이 틀림없다고.
고작 출력 1100rp의 크로스보우에 탑승한 상태로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곱게 죽어줄 수는 없지. 저것과 정면승부를 벌일 순 없겠지만... 따돌리는 것 정도는, 못 할 것도 없으니까.”
나는 쿨 타임이 돌아온 ‘가속(C)’ 스킬을 사용하며 속도를 높였고.
모래폭풍과의 거리를 조금씩 벌려나갔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괴물 같은 적 기간트를 떨궈낼 수 없으리란 건 알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콰과과과과과과과과과과과......
더욱 빨라진 모래폭풍의 접근 속도로 인해, 내 짐작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이를 확인한 난 속도를 줄이지 않은 채.
후방을 향해 온갖 스킬들을 난사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