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용병왕(3)
#1
콰아아아아아앙
콰드드득
보급품 창고를 지키던 기간트들의 수장 격인 크로노스의 몸통이 케일 마틴이 내지른 롱소드에 의해 꿰뚫렸다.
400rp의 출력차가 나는 중갑형 기간트 크로노스의 외부 장갑을 관통하기 위해, 오버클럭까지 일으킨 케일 마틴은 완전히 지쳐 버리고 말았지만.
쿠우우우우우웅
마지막으로 쓰러진 크로노스를 끝으로 3대3 기간트 결전은 원정대의 승리로 마무리되었다.
장소가 장소이니만큼, 제법 실력 있는 오너들을 배치해 둔 탓에 생각보다 많은 시간을 소비하고 말았지만.
한 등급 차이를 극복해 내지 못한 바이샨의 오너가 케일 마틴의 록산느에 의해 목숨을 잃은 이후, 승부의 추는 급속도로 기울었다.
화아아아앗
크로노스가 처참하게 으깨진 오너의 시체만을 남긴 채 사라졌고.
외부 통신 채널을 개방한 저스틴 크로비스가 말했다.
[제대로 타지 않는 것들이 있을 수도 있으니, 스크롤이 붙어 있지 않은 보급품들을 최대한 망가뜨려라. 잘못해서 깃발이 꽂혀 있는 더미를 때리지 않도록 주의해. 그리고 요한슨... 준비는 끝났겠지?]
어느새 모습을 드러낸 요한슨이 고개를 끄덕이며 엄지를 치켜들었다.
기간트들이 격전을 치르는 사이.
빠르게 움직인 그는 남아 있는 카이샨의 경비병력을 척살하며, 창고 내부와 외부를 기름으로 흠뻑 적셔놓은 상태였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앙
퍼어어어어억
콰아아아아아아앙
세 기의 기간트가 수천 더미의 보급품들을 박살 내기 시작했다.
상상 이상으로 거대한 창고의 내부는 엄청난 양의 보급품으로 가득 차 있는 상태였는데.
그중 스크롤이 부착되어있는 수십 개의 더미의 꼭대기에는 눈에 확 띄는 붉은색 깃발이 꽂혀 있었다.
혹시라도 스크롤에 일정 이상의 충격이 가해질 경우, 그대로 폭발해 버릴 위험이 있었기에 표식을 남겨둔 것이다.
카트린을 비롯한 기간트들이 절반 가량의 보급품 더미를 박살 냈을 때였다.
피슈우우우우...... 퍼어어어어어엉
창고 밖에서 엄청난 굉음이 터져 나왔고.
화들짝 놀란 세 기의 기간트와 상급 엑스퍼트 요한슨이 창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헉! 저, 저건...”
“두 번째 불꽃?”
“젠장,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지체할 시간이 없어요, 저스틴. 빨리 마무리하고 도망쳐야 합니다.”
요한슨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린 저스틴 크로비스가 다시금 창고 안으로 내달렸다.
두 번째 불꽃은 ‘무조건적인 도주’를 의미했기에, 스노우의 실력을 믿고 있던 원정대원들로서는 사실상 볼 일이 없으리라 생각했던 것이었다.
그리고 저것이 등장한 이상, 그들이 할 일은 오로지 살아남기 위한 필사의 도주밖엔 없었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해야만 하는 일이 남아 있었다.
동화율을 한계까지 끌어올린 저스틴 크로비스는 짧은 순간 오버클럭까지 일으키며 마력 엔진을 혹사시켰다.
그러자 카트린의 전신에서 옅은 황금빛이 발산되기 시작했고.
이내 그 황금빛은 두 어깨에 달린 마력포로 몰려들었다.
고오오오오오오오......
한계까지 마력을 빨아드린 두 포신이 짙은 황금빛을 머금었다.
그리고...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새빨간 불길이 엄청난 굉음을 동반한 채 깃발이 꽂혀 있는 보급 더미들을 강타했고.
콰아아아아아아아앙
퍼어어어어어어엉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
.
.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연쇄 폭발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됐다! 튀어!]
마력포를 발사한 직후, 황급히 창고를 빠져나온 카트린의 뒤쪽으로.
어깨에 요한슨을 태운 케일 마틴의 록산느와 격전으로 인해 외부 장갑이 군데군데 파괴된 애덤 가필드의 록산느가 따라붙었고.
합류를 마친 세 기의 기간트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젖 먹던 힘을 다해 영지의 북문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2
‘젠장, 이게 대체 무슨 꼴이야?’
꽤 먼 거리, 그것도 전쟁 상대 국가의 국경 안으로 파고들어 수행해야 하는 임무였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임무에 대한 부담감 같은 건 눈곱만큼도 없었을뿐더러, 임무 도중 위기에 빠질 가능성 같은 건 생각조차 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거대한 모래 폭풍을 일으키며 나를 쫓고 있는 한 기의 기간트로 인해, 나는 생전 느껴본 적 없는 절대적인 생명의 위기를 실감하고 있었다.
사실 지구에 있을 당시의 ‘최상위권 S급 헌터들의 실력’과 ‘내 본신 실력’의 간극은, ‘크로스보우에 탑승한 지금의 나’와 ‘나를 뒤쫓고 있는 붉은 기간트’의 그것보다 훨씬 더 멀리 떨어져 있었다.
쉽게 말해, 지구에서 나와 S급 헌터들의 차이가 상급 엑스퍼트와 소드마스터 정도로 비교 불가의 수준이었다면.
크로스보우에 탑승한 나와 붉은 기간트의 경우, 상급 엑스퍼트의 극에 이른 자와 노련한 최상급 엑스퍼트 정도의 차이에 불과했다.
‘그 정도가... 맞겠지?’
아무튼,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내가 느끼고 있는 위기감은 지구의 S급 헌터들로부터 느꼈었던 그것의 수십 배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는데.
그것은 아마도, 내 본신의 감각이 그저 상대방의 ‘막연한 강함’ 정도만을 알아챌 수 있는 수준에 불과했다면.
기간트에 탑승하며 진화에 가깝게 증폭된 현재의 감각으로 인해, 상대와 나의 간극을 완벽하게 파악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리라.
‘뭐, 결국 정면 대결은 죽음... 이라는 건 매한가지였지만.’
실력의 간격이 비교적 좁다고 한들, 아예 차원이 다른 수준에 도달해 있는 저 붉은 기간트를 상대로 정면 승부를 감행할 시... 승산이 한없이 ‘0’에 수렴한다는 건 변함이 없으리란 뜻이었다.
“디그, 아이스 스피어, 파이어 스피어, 메가 라이트닝, 샌드 스파이럴......”
거대한 구덩이가 붉은 기간트의 균형을 흔들었고.
얼음의 창과 불의 창이 일정한 간격으로 쉬지 않고 쏟아졌으며.
머리 위로 낙뢰가 내리친 직후.
발밑에서 생성된 모래의 소용돌이가 거체를 집어삼켰다.
쉴 새 없이 발을 놀리는 와중, 내 입 역시 쉬지 않고 일을 했고.
내가 시전한 수십 가지 스킬로 인해, 나와 붉은 기간트의 거리는 간신히 300미터 이하로 좁혀지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공격 스킬은 기간트의 몸을 둘러싼 마력장에 의해 막혀버렸고.
마력장을 뚫어낸 소수의 스킬 역시, 붉은 기간트가 들고 있는 한 자루 롱소드(그 이외의 장비는 없었다)에 의해 간단하게 막혀 버렸다.
나는 후방 시야를 이용해 그 광경을 확인하곤 내심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쯧, 마법이나 스킬도 아니고, 그저 마력을 사용하며 달리는 것만으로도 저런 강력한 마력장이 발생하다니... 세상 참 불공평하군.’
정말 끔찍한 상상이었지만, 저 꼴을 보니 아무래도 붉은 기간트의 오너는 평범한 수준의 전사가 아닌 것 같았다.
“혹시 저게... 사령관이 말한 그 용병왕이란 놈인가?”
아무래도 맞는 것 같았다.
마라몬트와 마찬가지로, 카이샨 왕국에도 소드마스터는 존재하지 않았다.
양국을 통틀어 이 전쟁에 참전하고 있는 유일한 소드마스터.
그가 바로 초고등급 기간트 ‘알칸트라’의 주인인 용병왕 블레이크 벨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놈의 기간트가 붉은색이라고 했었지... 아무래도 맞는 것 같군.”
다행히 헬레나 오도넬이나 이전에 보았던 샌포드 왕국의 이름 모른 오너(아트론) 만큼 천재적인 파일럿 재능을 지닌 건 아닌 듯했다.
하지만 알버트 자작(최상급의 극에 이른 엑스퍼트)의 경우에서도 알 수 있듯. 아무리 본신의 실력이 뛰어나다 한들 오너로서의 재능이 받쳐주지 못하면 기간트는 크고 비싼 이동 수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되어버린다.
그런 점에서, 용병왕으로 예상되는 녀석의 파일럿 재능은 아마도 B+급~A급 정도일 것이다.
‘그 이상이었다면 이미 따라잡히고도 남았을 테지.’
만약 이 세계의 소드마스터가 지구의 S급 육체 계열 헌터와 비슷한 수준이라면, 틀림없이 그렇게 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나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를 사실을 떠올리며 스킬 쿨타임이 돌아온 ‘가속(C)’ 스킬을 시전해 속도를 높였다.
조금씩 벌어지는 거리.
그리고 그 순간, 붉은 기간트로부터 변화의 조짐이 보였다.
모안다 영지에서부터 일정한 속도로 따라붙으며 스킬들을 파훼하기 바쁘던 용병왕의 기간트 알칸트라(예상).
그 강철 거인의 온몸이 청광에 휩싸이며.
이전보다 배는 빨라진 속도로 나와의 거리를 급속도로 좁혀오기 시작한 것이다.
#3
블레이크 벨은 생각했다.
어쩌면 자신의 46년 인생을 통틀어, 가장 놀라운 하루가 바로 오늘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어떻게 저럴 수가 있는 거지?”
300여 미터 앞에서 달리고 있는 저 기간트는, 대륙 최강의 10인 중 하나로 손꼽히는 자신의 추격을 무려 1시간 동안이나 뿌리치고 있는 중이었다.
물론 십수 년간 용병 오너로 지내오는 동안 끝내 자신의 추격을 뿌리치는 데 성공한 이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심지어 도주하기는커녕, 정면으로 승부를 걸어오는 존재도 있었다.
하지만 그랬던 이들의 공통점은 하나 같이 블레이크 벨 자신과 비슷하거나, 혹은 그보다 윗 등급의 기간트를 소유한 오너들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저건 크로스보우잖아? 그리고 이 말도 안 되는 마법들은 대체...”
처음으로 발밑에 직경 6미터가량의 구덩이가 생겨났을 때는, 균형을 잃고 모래 위를 굴러 체면을 제대로 구길 뻔하기도 했었다.
그 이외에도 하나하나가 어지간한 기간트에게도 피해를 줄 만한 강력한 마법들의 향연이 이어졌고.
전력을 다해 달리고 있음에도 두 기간트 사이의 거리는 어느 순간 전혀 좁혀지지 않고 있었다.
사실 정말로 블레이크 벨을 경악하게 만든 건 크로스보우의 오너가 보여주는 기상천외한 마법쇼 같은 게 아니었다.
‘움직임이... 결코 내 아래가 아니야. 대체 크로스보우로 어떻게? 혹시 마스터인가? 아니야, 마라몬트에 마스터는 없어. 게다가 설령 마스터라 한들, 고작 크로스보우 같은 저등급 기간트를 타고 저런 움직임을 보일 수는 없을 텐데...’
그리고 이와 같은 생각은, 매우 무서운 한 가지 사실로 귀결되었다.
“만약 비슷한 등급의 기간트를 타고 있다면?”
과연 저 크로스보우의 오너를 상대로 승리를 장담할 수 있을까?
등줄기를 타고 스물스물 기어오르는 소름을 느끼며.
블레이크 벨은 다짐했다.
“오늘, 지금 여기서... 반드시 죽여야 한다.”
다짐과 동시에 동화율을 한계까지 끌어올린 뒤, 오버클럭까지 일으킨 그는.
기간트의 발밑으로 엄청난 마력을 분출해 내기 시작했다.
#3
콰직
콰지직
콰직
카아아아아아아앙
“크으윽...”
급하게 시전한 3개의 실드를 종잇장처럼 찢어발기며 쇄도해 들어오는 붉은 기간트 알칸트라의 검격.
나는 내구도가 다한 플레일을 대신해 소환한 대검을 들어 올려 간신히 알칸트라의 롱소드를 막아냈지만, 그 반동으로 인해 비틀거리며 십여 걸음을 물러나야만 했다.
“빌어먹을...”
순식간에 따라잡힌 이후, 블레이크 벨로 추정되는 상대 오너는 거리를 벌릴 틈을 주지 않았다.
순식간에 30여 합이 지나갔고, 온갖 스킬 콤보와 순간적인 오버클럭을 이용해 간신히 치명적인 타격을 입는 것만큼은 면하고 있었지만.
특수 합금으로 제작되고 마력으로 강화된 플레일은 무려 희미한 오러블레이드(마스터의 상징, 기간트에 탑승한 상태라 완벽하지는 않다)를 몇 번이나 막아낸 뒤 내구도가 다하며 박살 나 버렸고.
대결의 구도는 대검을 소환한 이후에도 비슷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잘못하면 진짜 뒈진다.’
이제야 기간트라는 영혼의 파트너를 만났건만, 이대로 죽을 수는 없었다.
“고작 크로스보우에서 끝낼 수는 없어.”
마라몬트 왕국으로부터 받게 될 기간트를 포함해, 격납고의 용량이 허락하는 한 손에 넣어야 할 기간트가 한두 개가 아니었다.
생각이 거기까지 이르자 두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카아아아아아앙
나는 전력을 다해 가슴을 노려오는 알칸트라의 롱소드를 쳐낸 뒤.
연속으로 스킬을 전개하며 녀석과의 거리를 벌렸고.
숨 돌릴 틈도 없이 마력엔진의 출력을 한계 이상으로 증폭시키기 시작했다.
1118, 1127, 1139...... 1177
쿠르르르르르르르르......
크로스보우의 마력 엔진이 당장이라도 폭발할 듯 거대한 울음을 토해낸다.
알칸트라와 나의 거리는 대략 20여 미터.
여기서 좀처럼 쓰지 않는 한 가지 스킬을 시전했다.
“한계 돌파.”
붉게 물든 크로스보우의 몸이 마치 엿가락처럼 늘어나며 알칸트라를 향해 쇄도했다.
그 속도는 가히 초월적이라 할 만했기에, 용병왕의 2700rp짜리 기간트조차 한 박자 늦게 대응할 수밖에 없었다.
콰득
카아아아아앙
외부장갑을 뚫고 들어간 대검이 알칸트라의 롱소드에 의해 진격을 멈추었다.
게다가 고등급 기간트에서 뿜어져 나오는 압도적인 마력장에 의해 온몸이 찌그러질 듯한 고통이 엄습해왔다.
“제에에에에에에에장!”
나는 이를 악물며 대검의 손잡이를 놓아 버린 뒤, 알칸트라의 거대한 신체를 온 힘을 다해 껴안았다.
‘................’
너무나 예상 밖의 행동이었는지, 잠시 정적과 함께 동작을 멈춘 알칸트라.
하지만 이내 양팔에 힘을 주자 엄청난 반동이 밀려들었고.
알칸트라의 상체를 감싼 크로스보우의 양팔이 더이상 버티지 못하고 떨어지기 직전.
마지막까지 남겨두었던 비장의 수를 드러냈다.
“안티가!”
[안티가(B+)가 출격합니다.]
파아아아아앗
옅은 빛무리와 함께 사막의 모래 위에 등장한 안티가.
갑자기 마법처럼 등장한 기간트의 존재에 상대의 집중력이 일순간 흐트러졌고.
1177, 1178, 1180...... 1185.
한계의 한계까지 마력엔진의 출력을 끌어올린 나는.
“테리마!”
곧장 안티가를 향해 의념을 집중하며 탑승 주문을 외쳤다.
잠시 후.
화아아앗
나는 새하얀 알갱이로 둘러 쌓인 안티가의 콕피트 내부로 이동했고.
이것저것 잴 것 없이 온몸을 감싼 화이트스펀에 마력을 주입해 안티가에게 생명을 불어넣은 뒤.
“바람의 인도, 매토템, 고양이 발걸음, 가속......”
타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
온갖 민첩 관련 스킬을 쏟아내며 사막의 모래 위를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크로스보우의 마력 엔진이 폭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