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투기 버리고 기간트 탑니다-88화 (88/169)

88화 용병왕(4)

#1

다시 봐도 경악스러운 실력, 놀라운 전투 방식이었다.

지난번 다르파한 사막에서의 임무 당시, 이미 스노우라는 인간의 기간트 전투를 목격한 바 있었던 란셀 티그리스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감정이 무뎌지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다.

“이걸 직접 보지 못한 인간들은... 아무리 떠들어 봐야 절대 믿을 수 없을 거야.”

고작 출력 1100rp의 크로스보우다.

오너가 되었다는 것에서 이미 평범이란 단어에 어울리는 인간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마라몬트 왕국의 ‘평범한’ 오너들이 ‘예비’라는 딱지를 떼게 되면 가장 먼저 타게 되는 기간트가 바로 저것이었다.

물론 개중 주머니 속 송곳 같은 몇몇 오너들의 경우, 처음부터 그보다 상위 기체를 지급받는 경우도 있긴 했지만.

그건 말 그대로 상위 ‘5%’에게나 해당되는 일.

그런 크로스보우를 탄 스노우는 기적에 가까운 움직임과 마법으로 자신보다 고등급 기간트들을 농락하는 중이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희생양이 된 바이샨 두 기는 제대로 된 합을 나누지도 못한 채.

크로스보우의 플레일과 대검에 몸통을 관통당해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고.

이어 등장한 아홉 기의 기간트를 상대로는 숨 돌릴 틈조차 없이 마법 폭격을 쏟아부은 뒤.

마법에 직격당해 빈틈을 드러낸 두 기의 바이샨에게 빠르게 접근해 몸통을 갈라 버렸다.

이윽고 카이샨의 근위기간트 트리온과 3기의 타이가가 추가로 등장하며 적의 숫자는 다시 11기로 늘어났지만.

그들을 상대로, 다르파한 사막에서 선보인바 있었던 엄청난 위력의 빙결 계열 마법(이번에는 폭설까지 만들어 냈다)을 사용한 스노우는 또다시 아트론 한 기를 해치우는 데 성공했다.

“대체 저 마법은...”

란셀 티그리스는 입을 쩍 벌린 채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자신이 알고 있던 모든 상식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비록 기간트 조종에 관한 재능이 없어 오너가 되지는 못했지만, 상급 엑스퍼트이자 제법 높은 직위의 무관인 그가 일반적인 기간트 간의 전투 양상을 모를 리 없었다.

외부 장갑의 엄청난 방어력과 조금은 굼뜰 수밖에 없는 움직임(딜레이가 존재하기에)이 맞물려, 대체로 지루하리만큼 정석적인 공방을 주고받는 것이 기간트 간의 싸움이었다.

때문에 주머니 속 물건 꺼내듯, 저렇게 쉽사리 적 오너의 목숨을 끊어버리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물론 저런 일을 해낼 수 있는 이들이 존재한다는 사실 정도는 란셀 티그리스 역시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크로스보우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고등급 기간트의 주인들이지.”

그리고 고작 크로스보우 따위를 타고 있는 저 스노우라는 인간은... 생전 처음 보는 기상천외한 마법을 사용해, 기어이 근위기간트 트리온에게 치명상을 입히는 데 성공했다.

크로스보우가 사막의 모래 속에 처박힌 트리온을 마무리하기 위해 움직이려던 찰나.

“응?”

순간 동작을 멈춘 크로스보우의 고개가 두 왕국의 국경 방향을 향했다.

전장을 관찰하던 란셀 티그리스의 고개 역시 크로스보우가 바라보는 방향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곳에는...

엄청난 모래 폭풍을 발생시키며 질주하고 있는 한 기의 기간트가 있었다.

란셀 티그리스는 그 기간트의 정체를 한 눈에 알아보았다.

모를 수가 없었다.

저건 세상에 단 세 기만 존재하는 기체였고.

그 세 기의 오너 중, 마음대로 대륙을 활보할 수 있는 건 오직 한 사람뿐이었으니까.

“아, 알칸트라... 블레이크 벨!”

동부 전선에 모습을 드러냈다는 용병왕 블레이크 벨이 분명했다.

그는 란셀 티그리스가 조금 전 떠올렸던 ‘5%의 오너’, 그중에서도 ‘1%’에 해당하는 괴물 중의 괴물이었다.

“대체 저자가 왜 이곳에...”

그때, 스노우가 사막의 하늘 위로 두 번째 불꽃을 그려냈다.

무조건적인 퇴각.

그 신호를 본 란셀 티그리스는 녹화 중이던 아티팩트를 아공간 주머니에 집어넣은 뒤, 황급히 몸을 돌려 서쪽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스노우라해도... 저 괴물을 상대로 살아남는 건 힘들어.’

안타까운 일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오너도 아닌, 일개 상급 엑스퍼트에 불과한 그가 스노우를 도울 방법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그러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해야만 했다.

그것은 동부 전선의 ‘게임 체인저’ 용병왕 블레이크 벨이...

최전선이 아닌, 후방 보급기지 모안다 영지에 나타났다는 사실을 본진에 전달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예상되는)스노우의 마지막 역시.

#2

크로스보우와 처음 검을 맞대는 순간.

이 전투는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고 확신했던 블레이크 벨이었다.

물론 상대의 마법은 정말이지 대단했다.

특히 순식간에 중첩되어 앞을 가로막는 거대한 실드 마법은 생전 듣도 보도 못한 것이었는데.

비록 오러블레이드에 의해 단번에 박살 나버리기는 했지만, 그 실드 마법으로 인해 조금이나마 검의 위력이 감소했고.

결국 평범한(?) 무기로 자신의 오러블레이드를 막아내는 신기를 보여주기에 이르렀다.

“대체 어떻게 저럴 수가 있는 거지? 통짜 오리하르콘으로 만들어진 무기인가?”

물론 그럴 가능성은 한없이 낮았다.

저 정도 크기의 플레일이 통짜 오리하르콘이라면, 그 가격은 본체인 크로스보우를 10기는 사고도 남을 만큼 천문학적인 금액일 테니까.

“그럼 미스릴...”

당연히 그런 전설상의 금속은 티끌만큼도 섞여 있지 않았다.

크로스보우의 무기들이 스노우의 스킬과 끝을 모르는 마력에 의해, 비정상적으로 강화된 사실을 알지 못했기에 발생한 오해.

이후 30여 합의 교환 끝에 플레일이 박살 나버리며, 블레이크 벨의 오해는 사라졌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의 경각심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위험한 놈이다. 무조건 이 자리에서 죽여야 해.’

같은 등급의 기간트는 고사하고, 2000rp급 기체에만 타고 있더라도 자신이 승리하는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다.

‘이런 기분은... 파스킨 그 영감탱이 이후 처음이군.’

대륙 10강이니 5강이니, 대륙의 강자들을 줄 세울 때 빠지지 않는 블레이크 벨이었지만.

확실한 것은 그가 대륙 최강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블레이크 벨이 직접 만나본 존재 중 최강은...

단연 이펜타르크 제국의 수호검 ‘파스킨 알바레즈’ 공작이었다.

제국에서 활동하던 시기, 단 한 번 알바레즈 공작과 맞붙어 볼(대련) 기회가 있었고.

블레이크 벨은 태어나 처음으로, 본신과 기간트 두 분야 모두에서 패배를 경험하고 말았다.

그나마 본신의 실력은 100여 합까지 버틸 수 있었으나, 기간트 대결의 경우는 그야말로 어른과 아이의 싸움이나 마찬가지였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당시 이미 2700rp의 출력을 자랑하는 알칸트라의 오너였던 블레이크 벨에 비해.

파스킨 알바레즈 공작의 기간트는 고작(?) 2300rp에 불과한 ‘아이아스’였다는 사실이었다.

“정말 괴물 같은 늙은이였지...”

물론 3년 전 이미 62살이던 파스킨 알바레즈 공작의 외모는 고작 20대 후반에 불과했다.

어쨌든, 블레이크 벨이 판단하기에 저 크로스보우의 오너는 어쩌면 공작보다도 더 위험한 녀석일지도 몰랐다.

게다가 우호적인 관계였던 공작과는 달리, 이미 전장에서 적으로 마주친 상황.

블레이크 벨은 후환을 남기고 후회를 곱씹는 타입과는 거리가 멀었다.

플레일이 박살 난 이후 소환한 대검과 마법의 연계로 어떻게든 자신의 공격을 막아내고는 있었지만.

노련한 전사인 그가 판단하기에, 타고 있는 인간은 몰라도 기간트의 신체와 마력엔진은 이미 한계에 다다른 상황이었다.

“이대로 조금만 더 끌면...”

마법이라는 변수가 존재하는 이상, 굳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었다.

이대로 시간만 끌더라도 관절이 박살 나던, 아니면 마력엔진에 이상이 생기던 자멸할 것이 분명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기계적으로 오러블레이드를 휘두르고 있을 때였다.

쿠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

순간 불길한 소음을 토해낸 크로스보우의 전신이 붉게 물들더니.

말도 안 되는 속도로 20여 미터의 거리를 삭제시키며 알칸트라의 코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뭐, 뭐야?”

당혹스러움에 곧바로 반응할 수 없었던 블레이크 벨은 크로스보우의 대검에 상체 외부 장갑을 꿰뚫리고 말았다.

콰득

카아아아아앙

다행히 소드마스터의 초인적인 반사신경이 무의식적으로 그의 팔을 움직였고.

적의 대검이 내부장갑을 파고들기 직전, 그 전진을 막아 세울 수 있었다.

“빌어먹을!”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블레이크 벨의 몸에서 폭발적인 마력이 뿜어져 나왔고.

오러블레이드가 한층 짙어졌으며.

알칸트라를 둘러싼 마력장이 마치 불길처럼 타오르기 시작했다.

극한에 이른 오러블레이드로 상대의 대검을 잘라버리려던 찰나.

그보다 한발 앞서 대검의 손잡이를 놓아버린 크로스보우가 온 힘을 다해 알칸트라의 상체를 껴안았다.

“... 이, 이건 또 뭔 해괴한 짓거리냐!”

잠시 멈칫했던 블레이크 벨이 양팔에 마력을 집중하며 상대방의 속박을 떨쳐내려 했다.

덩치는 물론, 출력에서도 비교가 안 되는 크로스보우의 양팔이 어깨에서 떨어져 나가기 직전.

파아아아아앗

갑자기 허공에서 나타난 처음 보는 생김새의 기간트 한 기.

“뭐, 뭐야!”

예상치 못한 ‘기간트의 마법 같은 등장’으로 인해, 블레이크 벨의 집중력이 흐트러졌다.

그 탓에 크로스보우의 속박을 벗어나는 타이밍이 늦춰졌고.

타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

‘......?’

등장하자마자 곧바로 도주를 감행하는 의문의 기간트로 인해 느낀 황당함 탓에, 그 타이밍은 또 한 번 늦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그로 인한 결과는 치명적이었다.

고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

피처럼 붉은빛과 함께 엄청난 열을 발산하기 시작하는 크로스보우.

블레이크 벨은 무슨 일이 일어나려는 것인지 직감했다.

“자폭? 이 미친 새끼가!”

그는 황급히 남아 있는 마력을 모조리 끌어올렸고.

타아아앗

그 마력을 이용해 외부 장갑과 마력장을 극한까지 강화하며 사막의 모래를 박찼다.

알칸트라를 속박하던 크로스보우의 두 팔은 이미 어깨에서 떨어져 나간 상황.

이 모든 것이 갑작스레 등장한 기간트가 도주를 감행한 이후 눈 깜짝할 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알칸트라가 크로스보우로부터 막 벗어난 순간.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엄청난 굉음과 불꽃, 모래 폭풍이 터져 나오며 천지사방을 휩쓸었다.

“크으으으윽...”

이상할 정도로 거대한 폭발에 휘말린 알칸타라가 수십 미터 위 허공으로 치솟아 올랐다.

그리고...

쿠우우우우우우웅

모래 위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엄청난 소리를 동반하며 사막의 대지 위에 처박히고 말았다.

“이이...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콕피트 내에서 악을 쓰는 블레이크 벨.

실핏줄이 터진 그의 두 눈에서 붉은 안광이 폭사 되었다.

“죽인다. 반드시 내 손으로......”

어지간한 기간트였다면 형체조차 남기지 못했을 거대한 폭발이었지만.

2700rp의 고등급 기간트인 알칸트라와 소드마스터인 블레이크 벨의 능력이 시너지를 일으켜, 치명적인 피해만큼은 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치명상이 아니라 한들 상처는 상처.

[상체 외부 장갑의 27%가......]

[하체 외부 장갑의 22%가......]

[오른쪽 어깨 관절 부위 손상......]

[왼쪽 무릎......]

시야 한 편에 주르륵 떠오르는 피해 현황.

그것을 확인하며 온몸을 부르르 떤 블레이크 벨은.

“하아아아아...”

긴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아 버리고 말았다.

어쨌든 결과로만 놓고 본다면 나쁘지 않았다.

둘도 없는 친우의 아들을 무사히 구해낸 셈이었으니까.

친우 마굴의 얼굴을 떠올린 블레이크 벨은 생각했다.

‘수리비는 물론이고, 수고비까지 톡톡히 받아내야겠군. 젠장...’

#3

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

어느새 마라몬트군에 의해 점령된 카이샨 왕국의 국경 요새 알마탄.

그곳의 성문 앞에 거지꼴을 한 사내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경비병들이 그를 향해 창을 겨누며 막아서려 했지만.

사내의 얼굴을 알아본 경비대의 수장이 경악한 얼굴로 그들을 만류하며 달려 나왔다.

“머, 멈춰! 멈추라고, 이새끼들아! 헉, 헉, 헉... 스, 스노우님. 스노우님 아니십니까?”

사내는 덥수룩한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두 눈을 번뜩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주위에 있던 모든 이들이 경악했다.

“스, 스노우라면?”

“용병기사단장?”

“그자라면... 동부 전선쪽 카이샨 왕국의 군량을 홀라당 태워버렸다는 원정대의 대장이잖아?”

“기간트 학살자...”

“그런데... 그는 사막에서 용병왕에게 죽었다고 하... 허업!”

마지막 말을 내뱉던 병사는 스노우의 무시무시한 눈빛을 받고는 황급히 두 손으로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다다다다다다다다다....

성문 안쪽이 소란스러워지며 수많은 인원의 인기척이 빠르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시선을 그곳으로 향한 스노우의 눈빛이 한 순간 냉정하게 가라앉았다.

그것은 커다란 거래를 앞둔...

상인의 눈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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