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기간트 '제라스'(1)
#1
시간을 조금 되돌려 크로스보우가 폭발하기 직전의 상황.
‘파일럿(S)’ 특성으로 인해 오버클럭의 한계가 대폭 늘어났다고는 하지만.
아무리 사기적인 능력의 특성이라 한들, 한계라는 것을 무한정 확장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었고.
마력엔진의 출력이 1180rp를 넘어서는 순간.
나는 직감할 수 있었다.
‘한계야, 터진다!’
평범한 오너들의 오버클럭 한계점이 1130rp 전후(크로스보우의 경우)라는 걸 감안하면... ‘1180’이라는 숫자는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수치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높아진 한계점에 비례해, 폭발의 위력 또한 폭증할 것은 자명한 이치.
나는 황급히 격납고에 잠들어 있던 또다른 기간트 안티가를 불러낸 다음, 곧바로 ‘기체 갈이’를 시도했다.
기간트의 콕피트에서 콕피트로 옮겨 타는 건, 이제껏 단 한 번도 시도해 본 적이 없는 일이었지만.
본능적으로 그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안티가에 의념을 집중시키며 탑승 주문을 내뱉었고.
잠시 뒤, 내가 있는 곳은 화이트스펀으로 둘러싸인 안티가의 콕피트 내부였다.
나는 마력을 발산해 안티가를 깨움과 동시에.
‘원격조종(S)’ 스킬을 이용해 크로스보우에게 마지막 명령을 내렸다.
‘최대한 붙잡고 늘어져라.’
물론 내가 탑승한 상태의 절반도 안 되는 성능밖에 발휘할 수 없었기에, 크로스보우가 끌 수 있는 시간은 얼마 되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은 ‘찰나’의 시간조차 매우 소중한 상황.
나는 안티가의 마력엔진이 가동됨과 동시에 곧바로 오버클럭을 일으키며, 가능한 모든 버프를 쏟아부은 뒤 사막의 모래 위를 내달리기 시작했다.
안티가에 탑승한 내가 30여 미터를 이동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채 2초가 되지 않는 짧은 순간이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원격조종으로 연결되어있는 크로스보우의 양팔이 떨어져 나가는 게 적나라하게 느껴졌으며.
팔이 떨어지며 알칸트라를 놓친 직후.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엄청난 굉음과 함께 폭발이 일어났고.
곧이어 등 뒤로부터 무시무시한 압력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크으윽... 실드, 실드, 실드...... 중력 조절! 페더폴!”
타아아아앗
나는 곧바로 안티가의 몸을 띄워 올린 뒤.
후방에 일곱 개의 실드를 생성해 충격에 대비한 다음.
‘중력 조절(C)’ 스킬을 최대치로 발휘해 기간트의 무게를 줄였고.
여기에 낙하 운동 시 무게를 줄여 속도를 줄여주는 ‘페더폴(C)’ 스킬을 더했다.
잠시 뒤, 엄청난 충격파가 실드를 강타했다.
파칭
파칭
파칭
.
.
.
파칭
일곱 개의 실드가 순차적으로 박살 나버렸고.
“베리어!”
파츠츠츠... 츠캇
마지막으로 생성한 ‘베리어(C)’ 스킬마저 순식간에 깨져버리고 말았다.
터어어어어어엉
다행히도 실드와 베리어가 완충재 역할을 한 탓에, 폭발로 인한 충격파의 위력은 눈에 띄게 감소했고.
안티가의 몸을 100여 미터가량 밀어낸 뒤 그 여파가 완전히 사그라들었다.
“그놈은?”
타아아아아앗
나는 사막의 모래를 박차며 ‘천리안(C)’ 스킬을 시전했다.
크로스보우가 폭발한 지점을 중심으로 엄청난 크기의 크레이터가 생성되어 있었고.
폭발에 휘말려 모래 속에 처박혀 있는 적 기간트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설마 죽었... 을 리가 없지.”
외부 장갑이 너덜너덜해진 상태이긴 했지만, 치명적인 피해는 아니었는지 몸을 일으키는 동작에 어색함은 없었다.
“빌어먹을... 그 미친 폭발로, 고작 저 정도 피해가 끝이라고?”
무려 1100rp짜리 기간트 한 기를 통째로 갈아 넣은 공격이었다.
최후의 최후에나 생각해 봄직한 수법을 사용하고도, 고작 외부 장갑의 일부를 파손시키는 데 그치다니.
“역시... 정면으로 맞붙지 않길 잘했어.”
저건 고작 크로스보우 정도의 기체로는 손쓸 방법이 없는 괴물이었다.
천리안 스킬을 유지하며 적의 동태를 살핀 나는 곧바로 안티가의 소환을 해제했다.
아직은 움직임을 보이고 있지 않지만, 적이 건재한 이상 이대로 사막을 내달리는 건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내가 죽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마냥 긍정적으로 생각하기엔, 갑자기 등장시킨 안티가의 존재가 거슬렸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으니... 그렇게 생각해줄 리는 없나?”
아무래도 마법사인 내가 무언가 수를 썼다고 생각할 확률이 높았다.
“뭐, 아무래도 상관없어.”
저놈이 나를 죽일 수 있는 기회는... 오늘이 마지막이었을 테니까.
내가 크로스보우의 오너‘였던’ 오늘이.
나는 아공간에서 ‘루흐의 날개’를 꺼내어 착용한 뒤.
타아앗
모래를 박차며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3
그렇게 루흐의 날개까지 이용해 추격의 여지를 완전히 차단했고.
전투 중 입은 내상을 다스리며 3일 만에 알마탄 요새로 복귀할 수 있었다.
2일 전 새벽.
바닥난 군량으로 인해 수성의 한계를 맞은 카이샨군의 대대적인 퇴각 작전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이미 들어 알고 있었다.
적 기간트들이 군대의 후미를 지키며 분전했지만.
포위망을 뚫는 과정과 마라몬트군의 추격을 받는 과정에서, 또다시 5만이 넘는 병력을 잃어버렸다고 한다.
그리하여 내가 도착한 알마탄 요새의 성벽 위에는 마라몬트 왕국의 깃발이 펄럭이는 상황이었다.
‘이쪽은 순조롭게 돌아가고 있는 모양이로군... 나쁘지 않아.’
알마탄 요새를 점령할 수 있었던 과정에서 내가 세운 공을 빼놓을 수는 없었고.
심지어 극도로 불리하게 전개되고 있던 동부 전선의 숨통까지 틔워주지 않았던가.
‘내가 뭘 요구하건, 어지간하면 들어줄 수밖에 없을 테지.’
마라몬트 왕국쪽으로 조금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다고는 하지만, 전체적인 전황은 여전히 팽팽한 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지금껏 ‘게임 체인저’의 역할을 해준 날 무시할 수는 없을 터.
게다가 결정적인 작전을 성공시키는 과정에서 기간트까지 날려먹었으니... 양심이 있다면 내 요구를 거부할 수 없을 것이다.
‘괜히 거지꼴을 하고 온 게 아니란 말이지.’
이는 협상을 조금이라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한 꼼수였다.
돌아가는 분위기를 봤을 때, 내가 용병왕을 마주쳤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는 없는 듯했다.
성문을 지키는 병사들조차 내 죽음을 기정사실화하고 있을 정도니, 군 수뇌부의 생각은 고려할 필요조차 없을 것 같았다.
‘뭐, 그 작자가 괴물이긴 했으니까...’
종합적인 전력을 고려했을 때, 고작 기준 출력을 조금 넘어서는 크로스보우로 그 손아귀를 벗어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생환’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격적일 수밖에 없을 터.
그건 성문을 통해 우르르 몰려나온 인물들을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는데.
나를 발견한 윌리엄 다이슨 사령관을 비롯한 마라몬트군 수뇌부와, 대략 서른 정도의 용병 오너들은 하나 같이 입을 쩍 벌린 채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들 중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이는 함께 테러 작전을 수행했던 저스틴 크로비스였다.
“대장! 역시 살아있었어! 살아있었다고! 크하하하하하!”
그의 말이 기폭제가 된 듯.
30명이 넘는 용병기사단원(오너)들이 우르르 내 주위로 몰려들었다.
“단장, 살아있었군!”
“믿고 있었습니다!”
“용병왕을 만났다면서... 대체 어떻게 살아있는 거죠?”
“헬레나! 무슨 말을 그렇게... 단장이 죽기라도 바란 겁니까?”
“그, 그런 뜻이 아니라... 그 괴물한테서 살아 돌아온 게 믿기지 않아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 어, 어어... 밀지 마!”
“으헉! 밀지 말라고!”
나는 땀내 나는 용병놈들을 밀어내며 길을 텄고.
이내 윌리엄 사령관 앞에 도달했다.
그리고 여전히 경악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그를 향해 말했다.
“서로 할 말이 많을 것 같은데... 시간 좀 내주시죠.”
멍한 표정의 그는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3
다이슨 후작가는 마라몬트 왕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위상을 지닌 유서 깊은 가문이었다.
대대로 고위 관료를 배출하며 정치와 행정으로 이름 높은 다이슨 가문에서, 기사의 길을 선택해 결국에는 군부의 핵심으로 성장한 윌리엄 다이슨은 이질적인 존재였다.
그 군공과 명성이 얼마나 드높았는지, 다섯 살과 세 살 많은 두 형들을 제치고 명문가 다이슨의 가주 자리를 차지했을 정도.
이는 수백 년 역사를 지닌 다이슨 가문 최초의 군인 출신 가주였다.
무예는 물론 오너로서의 재능 역시 탁월했던 그가 전장을 누비며 군공을 쌓을 동안, 가주를 대신해 가문의 내부를 단속했던 건 그의 여동생이자 가문의 상단을 이끄는 캐서린 다이슨이었다.
윌리엄 다이슨의 평가에 따르면, 남자로 태어났다면 최소 재상이나 군의 총사령관이 되고도 남을 인물이 바로 캐서린 다이슨이었고.
무엇보다 그녀가 지닌 통찰력은 일반적인 범주를 넘어 ‘예지’의 경지에 이르러 있는 수준이었다.
그런 그녀가 전쟁에 나서는 윌리엄 다이슨에게 이르길...
‘힘든 전쟁이 될 거예요. 왕좌를 거머쥔 툴루에 부족의 지배력이 상상 이상으로 강한 탓에, 오합지졸 같았던 카이샨의 군대는 이전과 다를 테니. 게다가 소문에 의하면 대륙에 이름난 용병...... ......아마 이렇다 할 변수가 존재하지 않는 이상 승전은 힘들 테죠. 그러니 최대한 손해 보지 않는 길을 찾아요. 그리고 혹시라도 변수가 발생한다면, 절대로 놓치지 마세요. 절대로...’
윌리엄 다이슨은 현명한 여동생의 말을 기억했다.
그로 인해 상대의 요구 조건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고.
최대한 조국에 이로운 방향으로 협상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어차피 포인트도 다 채웠으니, 무리한 부탁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스노우가 요구한 것은 전쟁 종료 후 지급하기로 했던 기간트의 선지급이었다.
이는 계약상 들어줄 의무가 없는 요구였지만.
임무 도중 기간트를 잃어버렸다는 사실로 인해, 명분(보상해야 할 의무는 없다)상 우위를 점한 건 스노우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무려 ‘용병왕’이 그 자리에 나타날 때까지 아무런 정보를 전달해주지 못했다는 것 역시, 이쪽이 목소리를 높일 수 없는 이유였다.
더욱 골치 아픈 것은 스노우가 기간트 망실을 핑계로 무리한 요구를 하는 것도 아니란 사실이었다.
그가 원하는 기간트를 지급받기 위해 필요한 킬 포인트는 ‘500’.
그리고 작전 성공 보상과 그 와중에 잡아낸 적 기간트로 그의 킬 포인트는 이미 500을 넘어선 상황이었으니까.
한동안 고심하던 윌리엄 다이슨이 입을 열었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아군 소속으로 참전한다는 약속을 해준다면... 제라스를 내주겠네.”
출력 1500rp의 이펜타르크제 벨런스형 기간트 ‘제라스’.
윌리엄 다이슨의 제안을 들은 스노우는 즉답을 피했다.
그는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기더니.
약 5분여의 시간이 흐른 뒤 감았던 눈을 뜨며 입을 열었다.
“제가... 그 빌어먹을 용병왕이란 놈에게 죽을 뻔했다는 건 알고 계실 겁니다.”
사실 그가 위기에 처한 장면을 목격한 이는 없었지만, 용병왕이라는 존재와 적으로 마주쳤다는 사실만으로도 고개가 절로 끄덕여질 수밖에 없었다.
스노우의 말이 이어졌다.
“해서, 정당한 대가를 받고 이 전쟁에서 빠질까 고민도 했습니다마아안...”
스노우가 말끝을 길게 늘였고.
윌리엄 다이슨을 비롯한 마라몬트군 수뇌진의 얼굴에는 그늘이 드리웠다.
비록 기간트를 잃기는 했지만, 고작 1100rp에 불과한 크로스보우의 오너가 용병왕을 상대로 살아남은 것이다.
그것도 어디 하나 상한 곳 없이 멀쩡한 상태로.
바로 그 용병왕으로 인해 전선 하나가 완전히 밀려버린 마라몬트 왕국 입장에서는, 그의 대항마가 될 가능성이 있는 ‘스노우’라는 패를 절대로 놓아버릴 수 없었다.
윌리엄 다이슨이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원하는 게 있나? 왕국에 힘을 보태주기만 한다면, 내 능력이 닿는 한 어지간한 건 모두 들어주겠네.”
그가 말을 끝맺은 이후에도, 스노우는 한동안 침묵하며 장고를 거듭했다.
또다시 10여 분이 흐르고.
마라몬트측 인사들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려가기 시작할 때쯤.
드디어 그가 입을 열었다.
“사령관님이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역으로 한 가지 제안을 하겠습니다.”
“......?”
좌중의 시선이 스노우의 입을 향했다.
“이 전쟁이 끝날 때까지... 용병왕이란 존재를 전장에서 지워드리죠.”
“......!”
상상치 못한 놀라운 제안에 마라몬트군 수뇌부들이 눈을 휘둥그레 떴고.
그에 아랑곳하지 않은 스노우는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제 말대로 이루어진다면 그 대가는...”
스노우의 손가락이 (임시)사령관실 벽에 걸려있는 아군 기간트 현황판으로 향했고.
그곳에 적혀 있는 이름 중 하나를 가리켰다.
“저것으로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