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투기 버리고 기간트 탑니다-90화 (90/169)

90화 기간트 '제라스'(2)

#1

윌리엄 다이슨 사령관과의 협상은 만족할 만한 조건들로 채운 계약서에 그와 내가 사인하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사실 만족스러웠다는 건 일방적인 내 입장일 뿐이었고. 사령관의 내심이 어땠을지는 알 수 없지만, 그래도 협상이 마무리되는 시점의 표정이 나쁘지 않았으니 좋은 쪽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기간트 제라스를 곧바로 인도받기로 했지만. 얼마 전까지 적국의 국경 요새였던 알마탄에 계약되지 않은 기간트가, 그것도 종류별로 대기하고 있을 리 없었다.

제라스와 계약하기 위해서는 마라몬트 왕국의 왕도인 ‘크리드’에서 2km 정도 떨어진 곳에 자리하고 있는 ‘기간트 관리국’으로 직접 방문해야만 했다.

왕도까지의 여정에는 두 사람이 따라붙었는데, 두 번의 작전을 함께한 마라몬트 군부의 란셀 티그리스와 용병 상급 엑스퍼트 요한슨이었다.

“이번 전쟁이 끝날 때까지 스노우님을 수행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아, 사실 자원했습니다. 제가 마차 하나는 기가 막히게 몰거든요.”

부관과 마부가 모두 상급 엑스퍼트라니.

어쨌든 1500rp급 기간트의 오너(예비)와 상급 엑스퍼트 둘로 구성된 일행이 마차 한 대에 몸을 싣고 왕도 크리드를 향해 출발했다.

윌리엄 다이슨 사령관이 내준 마차는 평범한 겉모습에 비해 승차감이 남달랐는데.

“알레온(마라몬트 왕국에 본부를 둔 마탑)에서 만들어진 물건입니다. 무려 2000골드짜리죠. 외부를 이렇게 만들어 놓은 건, 너무 화려하면 벌레들이 자주 달라붙는지라...”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란셀 티그리스가 언급한 그 ‘벌레들’이 등장했다.

“멈춰라. 마차와 가진 것들을... 끄아아아아악!”

‘탐색(C)’ 스킬로 확인한 결과 20여 명의 산적이 마차 앞을 가로막고 있었고. 그중 넷은 마력을 개방했는지 다른 이들에 비해 크고 짙은 점으로 표시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봤자 마부석을 차지한 상급 엑스퍼트 요한슨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고.

“크어억!”

“괴, 괴무우울... 커억!”

“사, 살려... 끄악!”

잠시 소란스러워졌던 바깥은 채 1분도 지나지 않아 고요함을 되찾았다.

“출발하겠습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한 어조로 말한 요한슨이 다시금 마차를 출발시켰다.

그리고 여정 3일째에 산길로 들어선 이후, 우리는 하루에 2,3번 꼴로 산적들과 맞닥뜨려야 했다.

국토의 1/4이 산악지형인데다, 기본적으로 ‘상인’의 나라인 마라몬트인지라 산적들이 기승을 부린다고 하는데.

주기적으로 토벌대를 운용하고 있음에도, 완전히 뿌리 뽑는 건 불가능하다고 했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마라몬트 왕국의 부유함과는 별개로, 왕국민들의 사정은 썩 좋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다른 일을 해서 잘 먹고, 잘 살 수 있었다면.

뭣 하러 산적질 따위를 하겠는가.

‘내가 이곳 사람들의 사정까지 신경 쓸 이유는 없지만...’

이건 뭐, 시도 때도 없이 튀어나와 요한슨의 검에 몰살당하길 반복해 대니, 기분이 좋을 수는 없었다.

여정 5일 차의 밤.

마라몬트 왕국을 관통하는 푸스케 산맥의 한가운데를 지나던 탓에 산중에서 마차를 멈출 수밖에 없었고.

요한슨은 야영 준비로, 란셀 티그리스는 서부 국경 사령부와 연락을 위해 분주히 움직여야 했지만.

딱히 할 일이 없었던 나는 마차에 기대어 앉아 밤하늘에 떠오른 3개의 달을 멍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스노우님.”

무려 2만 골드를 호가하는 장거리용 통신 마법구를 이용해, 사령부와 연락을 마친 란셀 티그리스가 마차로 다가왔다.

“별다른 사항은 없었습니다. 여전히 서부 전선은 저희가, 동부 전선은 적이 우세한 상황이라는군요. 다만 용병왕의 알칸트라가 동부 전선으로 복귀......”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일주일가량 전선에서 사라졌던 용병왕이 다시금 동부 전선에 모습을 드러냈고.

아직까지 전투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지는 않았지만.

그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는 강자였기에, 대책을 마련하느라 골머리를 앓고 있다고 했다.

다행스러운 점은, 알마탄 요새를 점령한 서부군이 연이어 세 개의 카이샨 왕국 영지를 점령하며 순조로운 진군을 거듭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마라몬트 역시 국경 요새와 두 개의 영지를 빼앗긴 상태였으니, 여전히 전황은 나름 팽팽하게 유지되는 상황이라 할 수 있었다.

타닥타닥타닥......

나는 모닥불을 중심으로 둘러앉아 식사에 열중하고 있는 두 사람을 흘깃 바라보았다.

이들은 상급 엑스퍼트라는 것 이외에도 다른 한 가지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는데.

란셀 티그리스 : D-

요한슨 : F+

그건 바로 두 사람 모두 처참한 파일럿(오너) 재능의 소유자라는 사실이었다.

그중에서도 요한슨의 경우는...

한마디로 모터가 달린 물건이라면, 절대 근처에도 가지 못하게 막아야 할 수준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녀석이 여전히 ‘오너’에 대한 미련을 놓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상급 엑스퍼트씩이나 되는 주제에, 마부를 자청하면서까지 내게 엉겨 붙으려는 것 역시.

눈앞에서 미친 기간트 조종 실력을 선보인 내게, 뭐라도 한 수 배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의도임을 알고 있었다.

‘안타깝지만 호랑이 교관 스킬을 적용해도 갱생 불가야. 저 처참한 재능 등급으론...’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를 향해 한 마디를 던지고야 말았다.

“앞으로는 ‘검술’에 더욱 집중하도록 해.”

그리고 그 말에 담긴 의미를 단번에 파악한 눈치 빠른 요한슨은...

“오너... 오너가 되고 싶어요...”

...라며 울상을 지었지만.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포기해. 안 그럼 네 인생만 고달파질 테니.”

#2

둥글고 납작한 헤드와 양어깨 위로 우뚝 솟아 있는 3개의 뿔.

이펜타르크제 기간트 중 가장 육중한 덩치를 자랑케 하는 외부 장갑.

검정색으로 도색 된 무릎과 발의 일부를 제외하면, 전체가 파란색 일색인 탓에 ‘블루나이트’라는 이명으로도 불리는 중갑형 기간트.

제라스.

7.4미터의 신장과 9.8톤의 무게, 1500rp의 최대 출력.

이것이 잠시 후면 내 소유가 될 이 멋진 기간트의 스펙이었는데.

이펜타르크제 기간트답게 특별한 이능(동화율 보정, 정령력 증폭등)을 지니고 있지는 않았지만, 엄청난 가성비와 기체 자체의 뛰어난 성능이 특장점인 녀석이었다.

안내를 위해 따라붙은 마라몬트 왕국의 엔지니어가 말했다.

“멋진 녀석이죠. 저희 왕국의 오너들은 대부분 이 녀석보단 루페른 놈들이 만든 코페시(1500rp인 제라스와 동급인 1400rp, 루페른제)를 선호하긴 하지만... 자신의 실력에 자신이 있는 기사라면, 제라스와 계약하는 것이 훨씬 더 현명한 선택이라 자신 할 수 있습니다. 이 녀석에 대해 조금 더 설명을 드리자면, 우선 2중으로 제작되어 충격 흡수에 탁월한 외부 장갑......”

이 엔지니어가 이토록 제라스를 찬양하는 이유는, 그가 이펜타르크 제국 아카데미에서 엔지니어링 기술을 배운 유학파였기 때문이다.

‘뭐, 마라몬트 왕국엔 기간트 제작 기술이 없으니. 모든 엔지니어가 타국 출신 아니면 유학파일 수밖에 없지만.’

하지만 개인적으론 같은 등급일 경우, 동화율 보정을 받을 수 있는 루페른제 기간트가 무조건 낫다고 생각했다.

이펜타르크제 기간트를 타본 경험이 없기에 할 수 있는 판단이긴 했지만, 동화율 1,2%에 목숨을 거는 오너들의 특성상 이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동화율이 의미가 없는 내 경우는 달랐다.

‘기대되는군.’

기체의 특성을 따지기 전에, 과연 400rp라는 출력 차이가 어느 정도 수준일는지 궁금했다.

기준 출력 이하인 안티가와 크로스보우의 차이(300rp)를 극명하게 느낄수 있었던 만큼, 기준 출력을 훌쩍 넘기는 제라스와 크로스보우의 차이는 그보다 더할 가능성이 컸으니까.

“마침 미계약 상태인 제라스가 딱 하나 남아있었습니다.”

“운이 좋았군.”

“정비는 완벽하게 마친 상태입니다. 부디 이 녀석과 함께 왕국에 승리의 영광을 안겨주십시오.”

“뭐... 노력해보지.”

대화를 마친 엔지니어가 뒤로 물러섰고.

나는 제라스의 오른쪽 정강이에 손바닥을 올렸다.

[동기화 가능. ‘제라스’와의 동기화를 시도하시겠습니까? 동기화 완료 시까지 2분 32초의 시간이 소요됩니다.]

“진행해.”

[동기화를 진행합니다. 0.7%, 4.2%, 6.9%......]

뒤쪽에서 의문스런 시선이 느껴지긴 했지만, 나는 꿋꿋하게 동기화를 끝냈고.

마지막에는 이곳의 방식을 흉내 내는 것으로 제라스와의 계약을 마쳤다.

“아트록시아.”

파아아아아아앗

제라스의 몸에서 옅은 빛이 뿜어져 나왔고.

잠시 뒤.

내 오른쪽 손목에는 미세한 검은 줄무늬가 새겨진.

청색 팔찌 하나가 자리하고 있었다.

#3

마라몬트 왕국의 기간트 관리부는 왕도에 적용된 소환 방해 마법진의 범위 밖에 위치했기에. 이곳에서는 얼마든지 기간트를 소환할 수 있었다.

나는 엔지니어에게 부탁해 기간트 관리부 내에 위치한 기동 시험장을 안내받았고.

그곳에 도착한 뒤 네스트에 마력을 불어 넣어 제라스를 소환했다.

파아아아아앗

크로스보우보다 아주 조금 작은 신장(0.1m 차이)에 조금 더 무거운 중량(0.5톤 차이)의 육중한 청색 기간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망설임 없이 탑승 주문을 외웠다.

“테리마.”

눈 깜짝할 새 이동한 제라스의 콕피트 내부는 안티가와 같은 화이트스펀으로 가득한 상태였다.

외부로 마력을 발산하자 스펀들이 녹아내리며 나와 제라스의 일체화가 진행되었다.

특이하게도 제라스의 눈은 납작한 얼굴의 거의 전부를 차지하고 있었고, 심지어 외눈이기까지 했다.

뭐, 눈이 하나건 둘이건... 내가 보는 시야는 다른 두 기간트(안티가, 크로스보우)와 다를 바 없었기에 신경 쓸 이유는 없었다.

......89%, 93%, 98%, 100%.

순식간에 동화율을 100%까지 끌어올린 후, 천천히 마력엔진을 예열시키기 시작했다.

1389, 1408, 1432...... 1489.

어디까지나 시험주행일 뿐이었기에 일반적인 오너들의 수준에 맞춰 출력을 조절했고.

쿠우우웅

기념비적인 세 번째(두 번째 기간트는 사막의 먼지가 되어버렸지만) 기간트의 첫발을 떼었다.

쿠우웅쿠웅쿠웅......

나는 기동 시험장의 벽을 따라 천천히 걸었고.

대략 300미터가량을 걷자 새로운 신체(제라스)에 완전히 적응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확실히... 크로스보우에 비할 바가 아니야.”

신체 능력만으로 한정했을 때, 400rp의 차이가 얼마나 엄청난 격차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인지를 말이다.

쿠웅쿵쿵쿵..... 타다다다다......

나는 서서히 속도를 높여 종국에는 80% 수준까지 끌어올렸다.

그러자 사방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저, 저, 저, 저게 뭐야?”

“제대로 보이지도 않잖아!”

“뭐야? 제라스라고 하지 않았어? 제라스를 타고 저런 움직임을 보여줄 수 있다고?”

“말도 안 돼!”

이윽고 속도를 100%까지 끌어 올리자....

츠파아아아앗

타아아앗

츠팟

“미친! 더 빨라졌어!”

“이젠 진짜 안 보여.”

“나, 난 잔상 정도는...”

“애초에 저렇게 빠르게 움직이라고 만들어진 기간트가 아닌데...”

크로스보우에 특수 스킬(한계 돌파, 버스커)을 제외한 모든 버프 스킬을 퍼부었을 때와 흡사한 수준의 움직임을 재현해 내는 게 가능했다.

“크흐흐흐... 이거 진짜 끝내주잖아.”

입가를 비집고 흘러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이 정도면 정말로 지킬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용병왕과 그의 기간트 알칸트라를...

전장에서 완전히 지워버리겠다는 약속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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