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알타몬트 대회전(2)
#1
400rp의 출력 차를 제외하고도, 루페른 왕국산 기간트인 크로스보우와 이펜타르크 제국산 기간트인 제라스의 차이는 극명했다.
뭐, 그전에 두 기간트의 공동점부터 짚고 넘어가자면... 단연 대륙의 기간트들 중 한 손에 꼽힐만한 뚱뚱한 체형이라 할 수 있었는데.
전혀 다른 형태인 얼굴을 제외한다면. 도색을 지우고 뿔을 제거할 경우, 쌍둥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닮아있었다.
심지어 두 기간트는 신장 차이조차 단 0.1미터에 불과했다.
외형적인 부분에서는 그토록 닮아있는 크로스보우와 제라스였지만, 양국 기간트들의 특성상 실제 탑승 후기는 꽤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었는데.
사실 이건 ‘파일럿(S)’라는 사기적인 특성을 가진 내게만 해당하는 사항이었고.
두 기간트를 타는 다른 오너들의 경우엔, 출력 차를 제외하면 그렇게까지 큰 차이를 느낄 수는 없을 터였다.
실제로 전장에서 두 기간트의 역할은 대부분 최선두에서 상대 기간트들의 돌진을 저지하는 탱커 포지션이었고.
이를 위해 기동성을 일정 부분 포기하는 대신, 내구력과 저지력을 극한까지 증가시키느라 지금의 육중한 몸매를 지니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특성’을 지닌 내게 두 기간트는 어떻게 달랐느냐?
우선 기간트와 신체를 완벽하게 일체화시킬 수 있는 내게 있어, 크로스보우는 단점보다는 장점이 두드러지는 기체였다.
‘동화율 보정’이 가능한 스펀 중 가장 낮은 단계인 ‘레드 스펀’이 탑재되어 있었지만, 고작 그것만으로도 기간트와의 ‘일체감’이 확연히 증가하는 걸 느낄 수 있었는데.
‘화이트스펀’이 탑재된 안티가에 이어 보다 상위 등급 기간트인 제라스까지 타보았기에, 그 차이를 더욱 확실하게 체감할 수 있었다.
‘특히 스킬을 사용할 때, 그 차이를 확연하게 실감할 수 있었지.’
마력엔진의 출력 차이로 인해, 제라스를 탄 채 사용하는 스킬이 조금 더 위력적일 수밖에 없었지만.
스킬의 시전 속도나 정령과의 교감(명령과 반응) 면에서는 오히려 등급이 낮은 크로스보우쪽이 더욱 뛰어났다.
그렇다면 제라스의 장점은?
이건 직접 타보고 나서야 느낄 수 있었던 점인데.
이펜타르크 제국은 마법적인 요소를 제외한, 기간트의 ‘신체’를 제작하는 기술이 매우 뛰어났다.
동화율 보정을 받지 못해 ‘찰나의 간극’이라는 것이 크로스보우에 비해 조금 더 길어질 수밖에 없었음에도.
그 ‘간극’을 월등한 신체 능력으로 커버해 버리는 느낌이랄까?
한 마디로 크로스보우의 신체가 상급 유저라면, 제라스는 초급 엑스퍼트 수준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그 성능차가 극명했다.
거기에 400rp라는 무시 못 할 출력 차가 더해지니...
종합적인 전력은 최소 크로스보우에 탑승했을 때의 2배에 달할 정도였다.
그리고 나는 ‘스노우라는 오너가 탑승한 제라스’의 위용을.
마라몬트 서부군 수뇌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진행된.
로버트 서튼 대장의 ‘배틀엑스(2500rp, 루페른제, 블루스펀 탑재)’와의 대결에서 확실히 각인시켜 주었다.
#2
“흐으음...”
마라몬트 왕국의 오너 중 최강의 자리를 다투는 로버트 서튼은 치밀어 오르는 긴장감으로 인해 저도 모르게 옅은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긴장? ...이 내가?”
그는 대대로 장군을 배출해낸 유서 깊은 명문가의 자제로 태어나, 어릴 적부터 검술의 천재 소리를 들으며 성장해온 엘리트 중의 엘리트였다.
게다가 16세에 입학한 아카데미의 교수들로부터, 오너로서의 재능 역시 검술에 못지않다는 평가를 받았고.
그들의 평가가 틀리지 않았다는 듯, 고작 22살의 나이에 왕국의 정식 오너로 인정받으며 크로스보우의 주인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정식 오너가 된 로버트 서튼은 크로스보우와 무려 10년의 세월을 함께했다.
5년 차에 코페시로 기간트를 교체할 기회가 있었지만, 자신의 첫 번째 (기준 출력 이상의)기간트를 애지중지 아꼈던 그는 이를 거절했는데.
이는 젊은 시절부터 온갖 잡다한 전장을 돌아다니며 경력을 쌓은 윌리엄 다이슨 사령관 같은 지휘관 타입과는 달리, 처음부터 왕국의 에이스 오너로 키워진 로버트 서튼이 온전히 수련에만 집중할 수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만약 오너로서의 입지를 다진 이후 커다란 규모의 전쟁이 발발했다면 이야기는 달라졌을 테지만.
카이샨 왕국과의 전쟁이 발발하기 이전의 20여 년간, 자잘한 국경 분쟁이나 무역로를 지키기 위한 해적과의 전투 이외에는 이렇다 할 대규모 전쟁은 없었다.
아무튼, 로버트 서튼은 32살에 덜컥 최상급 엑스퍼트의 경지에 올라버렸고.
그 탓에 더 이상 크로스보우만을 고집할 수 없게 되어버렸는데.
그때 이미 그의 실력은 왕국 내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힌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교체한 기간트는 출력 2000rp의 브로드(루페른제).
그리고 그로부터 7년 뒤, 2500rp의 배틀액스로 다시 한 번 등급 업을 했으니.
크로스보우는 여전히 그의 인생에서 가장 오랜 기간을 함께한 기간트로 남아있었다.
그렇기에 알 수 있었다.
스노우라는 오너가 크로스보우를 타고 선보인 퍼포먼스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솔직히...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지.”
그리고 그가 제라스를 소환해 그것에 탑승한 순간.
그 숨 막힐 듯한 압박감에 다시 한번 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하아아아... 이거... 괜히 붙어보겠다고 했나?”
#3
출력 2500rp의 배틀액스는 사실상 루페른 왕국이 생산하는 기간트 중 최고 등급의 기체다.
국왕 전용기인 3000rp짜리 초고등급 기간트 ‘바스타드’가 버젓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중급 엑스퍼트에 불과한데다 조종 실력이 형편없다고 소문난 현 루페른 국왕이 그걸 타고 전장에 나서는 일 따윈 일어날 리 없었으니.
실제로는 배틀액스야말로 루페른 왕국이 자랑하는 최고의 기간트라 할 수 있었다.
무려 ‘퍼플스펀(최고 등급)’이 장착되어 최대 5~6%의 동화율 보정을 받을 수 있었고.
루페른 왕국의 기간트 제작 기술들이 집대성된 기체인 만큼, 기체의 성능이나 외관 역시 무척이나 뛰어났다.
현 근위기간트인 할베르트(2300rp)와 함께 외부 반출 불가인 기체였지만.
오랜 동맹국인 마라몬트 왕국 국왕의 간청으로 단 두 기만을 내어주었고.
그중 한 기가 루페른제 기간트만을 고집하는 로버트 서튼 백작에게 배정된 것이다.
엄청난 동화율 보정 기능으로 인해, 현존하는 모든 기간트 중 한 손에 꼽히는 성능을 자랑하는 기간트가 배틀액스였고.
그 배틀액스가 최고의 오너를 만나 펼치는 기동은 과연 감탄이 절로 나올 정도로 대단했다.
다만, 현재 그가 상대하고 있는 존재가 기간트의 성능 차이만으로는 잡아낼 방도가 없는 괴물이라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쉐에에에에에에에에에...
8.6미터의 신장과 10.2톤의 무게를 지닌 강철 거인이 검날의 길이만 4미터가 넘어가는 거대한 검을 휘둘렀고.
대기를 찢어발기는 듯한 섬뜩한 파공음과 함께 검날에 서린 강렬한 빛이 번뜩였다.
평범한, 아니 어지간한 엑스퍼트의 눈으로도 확인하기 힘든 검격이었음에도.
공격의 대상이 된 기간트는 마치 산책이라도 하듯 가벼운 움직임으로 몸을 빼며, 단 5,6센티미터 차이로 검에 실린 마력의 영향권에서 벗어났다.
그리고는 오른손으로 잡고 있던 장창(대련이기에 플레일에 달린 가시 박힌 철구는 제거한 상태)을 양손으로 쥐며, 검을 휘두르느라 노출된 기간트의 팔과 어깨의 연결부위를 찔러 들어갔다.
터어어어어어엉
콰아아아아아아앙
쿵쿵쿵쿵쿵쿵쿵쿵쿠웅
그 쾌속한 반격에 놀란 배틀엑스가 마력을 잔뜩 머금은 왼손으로 창대를 쳐내는 데는 성공했지만.
궤도가 비틀린 창대를 놓아버린 뒤 뛰어든 제라스의 팔꿈치에 가슴부위를 강타당하며 뒤로 아홉 걸음이나 물러나야했다.
공격을 허용하는 와중에도 마력을 이용해 외부 장갑을 강화한 뒤, 중심을 뒤로 빼며 충격을 흡수한 로버트 서튼의 훌륭한 대처가 아니었더라면.
지금쯤 꼴사나운 모습으로 훈련장의 대지 위를 구르고 있을 배틀액스였다.
뒤로 물러나는 와중 정신을 다잡고 배틀액스의 균형을 바로 세운 로버트 서튼.
대련을 시작한 이후 단 한 번도 우세를 점하지 못해 자존심이 상한 그가 동화율을 최대치로 끌어올리며, 마력엔진 역시 한계에 가깝게 가동시키기 시작했다.
2436, 2448, 2452...... 2489.
어디까지나 아군간의 대련이었기에 오버클럭까지 일으키지는 않았을 뿐.
전력을 다하기 시작한 로버튼 서튼이 대검을 치켜들며 배틀엑스의 발을 움직였다.
이내 엄청난 속도로 제라스를 향해 쇄도하는 배틀엑스.
카아아아아아아아아앙
터어어어어어어엉
콰아아아아아아아앙
순식간에 30여 합이 흘러갔고.
팽팽한 승부가 유지되고 있었지만, 이를 지켜보던 마라몬트 서부군 수뇌부들과 소수의 용병 오너들은 직감할 수 있었다.
‘제라스 쪽의 우세.’
무려 1000rp라는 출력 차이에도 불구하고 배틀엑스의 무시무시한 공세를 여유 있게 받아내는 제라스에게서는... 강자만이 보여줄 수 있는 품격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게다가...
넋을 놓은 채 두 괴물의 대결을 바라보고 있던 에이스 용병 오너 4인방 중 퍼뜩 정신이 든 저스틴 크로비스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대장이... 지금까지 한 번이라도 마법을 쓴 적이 있냐?”
그의 곁에서 몽롱한 표정으로 대련을 관전하던 맷 스팅리가 홀린 듯한 어조로 답했다.
“아니... 처음부터 저 막대기만 주구장창... 응? 뭐야, 그러니까 저 인간, 지금 마법을 봉인하고도 저 괴물 같은 기간트랑...”
그의 말을 받은 건 (알려지기로)하프엘프 오너인 카일 어네스트였다.
“막상막하... 아니, 저 여유로운 움직임을 보아하니 봐주고 있는 게 확실하군요.”
그의 말을 들은 주위 인물들이 하나 같이 고개를 끄덕이거나 많은 의미가 담긴 한숨을 토해냈다.
그리고 그들의 중심에서 대련을 지켜보던 윌리엄 다이슨 사령관은 치밀어 오르려는 웃음을 참아내기 위해 입가를 실룩이고 있었다.
‘어쩌면... 정말로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 그 빌어먹을 용병놈을 붙잡아 놓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그것은 곧...
이 전쟁의 승자가 마라몬트 왕국으로 결정될 확률이 높다는 것을 뜻했다.
#4
마라몬트 왕국 북동부에 위치한 알타몬트 대평원.
그곳으로 양국의 수십만 병력과 수백 기의 기간트들이 속속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소수만을 남겨둔 서부 전선의 대병력이 동부로 이동해야 했던 터라, 대회전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양국의 합의 하에 이루어지는 최후의 결전인 만큼, 대륙의 관례와 양국의 요청에 따라 이펜타르크 제국과 크샨트 제국 그리고 하이데른 성국의 고위 귀족 소수가 참관인이자 중재자 자격으로 알타몬트 대평원으로 향하고 있었기에.
만약 패배한 쪽이 약속을 이행하지 않을 시, 체면을 구긴 세 나라로부터 엄청난 압박을 받게 될 터였으므로.
계약서에 적힌 조건들이 이행되지 않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사실 대륙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전쟁은 몇 번의 기간트 대회전, 그리고 계약서에 기재될 조건을 놓고 치열하게 벌어지는 양국 고위 관료들의 설전만으로 마무리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마라몬트 왕국과 카이샨 왕국의 전쟁은 여태껏 단 한 번도 이 공식을 따른 적이 없었는데.
이는 원수지간인 두 나라가 한쪽의 왕도가 함락되거나, 그에 준하는 위협을 받는 지경에 이를 때까지 끝까지 전쟁을 이어나갔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이한 양상으로 전개된 이번 전쟁에서는 양국의 왕도가 동시에 위협받게 되는 황당한 일이 벌어졌고.
이로 인해 두 왕국 간의 전쟁사 최초로 양측의 관료들이 협상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길고 긴 설전 끝에 협상은 타결되었고.
양국 도합 700여 기에 가까운 엄청난 수의 기간트가 집결한 알타몬트 대평원에서.
전쟁의 승패를 가리는 최후의 대회전만을 남겨두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