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알타몬트 대회전(3)
#1
최후의 대회전까지 남은 시간은 5일.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
“이곳에서 승전보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외상값은 주고 가야지, 저스틴!”
“마라몬트 왕국을 부탁합니다!”
“행운을 빌겠습니다, 스노우님!”
뭔가 좀 이상한 게 섞여 있기는 했지만.
나를 포함한 용병기사단원들은 서부전선의 방비를 위해 남는 소수 인원의 열렬한 응원을 뒤로 한 채 알마탄 요새를 출발했다.
이곳에서 대회전이 펼쳐질 알타몬트 대평원까지는 일반적인 행군 속도로 최소 10여 이상 걸리는 먼 거리였지만.
전원 상급 엑스퍼트로 이루어진 데다, 말과 마차를 이용해 달릴 용병기사단에겐 3일 정도의 시간이면 충분했다.
일행에 단 한 대뿐인 마차는 엄청나게 크고 화려했는데.
마차로 이동하는 호사를 누리는 건 스노우를 포함한 에이스급 오너들과 여전히 스노우의 부관을 자하고 있는 란셀 티그리스뿐이었다.
답답한 건 질색이라는 저스틴 크로비스와 맷 스팅리가 말을 타기를 자처했기에, 단 넷뿐인 마차 안은 오히려 휑하게 느껴질 정도.
나와 헬레나 오도넬, 카일 어네스트는 모두 말을 많이 하는 편이 아니었기에, 이동하는 내내 마차 안에 맴돌던 목소리는 대부분 란셀 티그리스의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말을 받아주는 이가 없음에도 꿋꿋하게 떠들어 댈 수 있는 뻔뻔한 정신력의 소유자였는데.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대부분 쓸데없는 것들이었지만, 아주 가끔은 알타몬트 대평원쪽 소식을 비롯해 꽤 쓸만한 것들도 존재했기에 완전히 무시해 버릴 수는 없었다.
“헬레나님 오늘도 여전히 아름다우시군요. 아침 식사는 하셨습니까? 여기 주인 아내의 음식 솜씨가 제법......”
“어젯밤 토니와 케일이 다퉜다고 하더군요. 주먹다짐 직전까지 간 걸 브레드가 간신히......”
“카이샨쪽 기간트가 벌써 290기를 넘어섰다고 합니다. 이쪽은 어제까지 279기가 합류......”
“오늘 점심은 닭고기가 먹고 싶군요. 제 고향에선 밀가루를 바른 닭을 기름에 튀겨서 먹는......”
“어젯밤 펍에서 만난 모험가에게 들은 말인데, 드워프 왕국에 뭔가 큰일이 생긴 모양이더군요. 아, 어디까지나 정보 수집을 위한 방문이었습니다. 절대로 술이 마시고 싶어서 간 게 아니란 뜻이죠. 어쨌든, 드워프 왕가의 이름으로 모험가와 용병을 끌어들이고 있는데... 그 대가가 그야말로 엄청나다는...... ......그래서 카이샨쪽 드워프 용병들이 하루빨리 전쟁이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고 하더군요. 캬아, 드워프의 보상이라니... 제가 군인이 아닌 용병이었다면 당장이라도......”
특히 알타몬트 대평원에 도착하기 직전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이 내 흥미를 자극했다.
나는 주절주절 다른 내용으로 넘어가려는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잠깐, 조금 전에 했던 얘기... 조금 더 자세히 해보도록.”
“네?”
“드워프.”
“아, 넵! 그러니까 그게......”
어쩌면 왕국 전쟁 이후의 행선지가...
정해진 것일지도 모르겠다.
#2
결전의 날이 밝았다.
알타몬트 대평원이 최후의 대회전 장소로 정해짐으로써, 이미 이곳을 넘어 필리스 백작령에 속한 두 개의 영지를 점령했던 카이샨 군은 대평원의 1/3 지점에 위치한 알론소 자작의 영지까지 군을 물렸고.
마라몬트 왕국 역시 그에 상응하는 위치까지 군을 후퇴시키느라 점령 중이었던 두 개의 영지를 포기해야만 했다.
그리고 양국의 수뇌부들이 1부씩 나누어 가진 계약서의 제1조항에 따라, 패전국은 자신들이 점령한 영토를 모두 포기 한 채 국경까지 군을 물려야만 했고.
승전국의 경우엔 대회전으로 인해 후퇴한 곳까지의 영토를 자국의 영토로 편입시킬 수 있었다.
만약 전쟁에서 승리를 거머쥘 수만 있다면, 승리한 쪽이 얻을 수 있는 이득은 너무나 명확한 것이었는데.
카이샨 왕국은 꿈에 그리던 대평원의 일부(1/3가량)를 영토로 편입해 대규모 곡창지대를 손에 넣을 수 있었고.
마라몬트 왕국의 경우엔 자원의 보고로 이름 높은 ‘다르다넬’ 산맥의 남부를 차지해, 기간트 생산국으로 발돋움하기 위한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뿌우우우우우우우우우...
어느 순간부터 일정 간격으로 뿔고동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이는 곧 전투가 멀지 않았음을 의미했고.
이미 양군의 기간트 대다수가 각각 30만(마라몬트)과 33만(카이샨) 병력을 등 뒤에 두고 속속 중앙으로 집결한 상태였다.
나와 함께 대열에 합류하는 기간트들을 바라보고 있던 저스틴 크로비스가 헛웃음을 지었다.
“허허... 테페리, 제페토, 안티가, 리노스, 폴암에 엘가까지? 양쪽 모두 저등급 기간트들까지 아주 싹싹 긁어모았군.”
마찬가지로 아직까지 본진에서 대기 중이던 맷 스팅리가 답했다.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을 테지. 결과가 어떻게 되든... 의뢰금만 받으면 그만인 우리완 달리. 저들은 이 전투에 사활을 걸었을 테니까.”
“그거야... 얼씨구? 저건 벨루가잖아. 저거 출력 500짜리 아냐?”
“600이야.”
“600이나 500이나 이런 곳에 기어 나올 기체는 아니지 않나?”
“저건 내가 생각하기에도 좀... 아, 본진으로 돌아가는군. 뭐, 혈기를 주체 못 한 견습오너 놈이 제멋대로 끌고 나오기라도 했나 보지.”
출력 700rp급 이하의 기간트는 대부분 외부 장갑이 따로 없는 구조로 제작되었기에. 고등급 기간트들이 득시글거리는 이런 대규모 전투에 나왔다가는, 눈먼 칼에 스치기만 해도 전투 불능 상태가 되어버릴 확률이 높았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뿌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
앞서보다 배는 긴 뿔고동 소리가 알타몬트 대평원에 울려 퍼졌다.
“시간이 됐군.”
임시로 설치된 지휘관 막사에서 마라몬트군의 수뇌부들이 모습을 드러냈고.
나 역시 앉아 있던 의자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총사령관인 윌리엄 다이슨 후작을 필두로, 부사령관 버논 헤이우드 공작과 서부군 기간트 부대장 로버트 서튼 백작 그리고 버논 헤이우드 공작의 아들인 동부군 기간트 부대장 랑슬롯 헤이우드 백작이 임시 사령부가 위치한 구릉지대의 끄트머리로 걸음을 옮겼다.
지난 여러 번의 전투에서 큰 전공을 기록한 로버트 서튼 백작이 중군의 지휘를 맡게 되었고.
용병왕을 막아내는 과정에서 커다란 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2주가량 전장을 이탈해 있었던 랑슬롯 헤이우드 백작이 우군을, 서부군 부사령관인 노만 리오넬 백작이 좌군을 이끌게 되었다.
그리고...
“작전은 기억하고 있겠지?”
나는 내 좌우로 서 있는 네 명의 에이스급 용병 오너 넷을 번갈아 바라보며 물었다.
“뭐,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니니까.”
“이 바보는 몰라도 난 믿어도 좋아.”
“걱정 말아요.”
“저희는 문제없습니다. 다만... 단장님은 몸 조심하십시오. 용병왕은 정말로 무서운 자...”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들어 올리는 것으로 카일 어네스트의 말을 끊었다.
“내 걱정은 할 필요 없다. 용병왕은 내가 알아서 상대할 테니, 너희는 맡은 임무만 충실히 수행하도록.”
저스틴 크로비스와 맷 스팅리, 카일 어네스트를 포함한 용병기사단 31인은 노만 리오넬 백작이 이끄는 좌군에 소속되었는데.
이곳에는 무려 5명의 근위기사를 포함한 마라몬트군의 최상위 오너들까지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우군 105기
중군 120기
좌군 90기
이것은 중군과 우군에 비해 눈에 띄게 적은 숫자를 배치해 적의 이목을 속이는 작전이었다.
이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근위기간트인 할베르트(2200rp, 루페른제) 3기와 아트록스(2200rp, 크샨트제) 2기의 외부 장갑을 비슷한 신장을 지닌 1800rp급 기간트 제녹스(크샨트제)로 위장하는 꼼수까지 부렸고.
이는 할베르트와 아트록스가 모두 벨런스형 기체인 데다, 중갑형 기간트인 제녹스가 동급 기체 중 가장 큰 신장을 지니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어쨌든, 사실상 마라몬트군의 주력은 중군도 우군도 아닌 가장 적은 숫자의 좌군이었고.
이들이야말로 적들의 숨통을 끊어놓기 위해 마라몬트 왕국이 준비한 숨겨진 칼날이었다.
그렇다면 남은 한 명의 에이스급 용병 오너 헬레나 오도넬은?
그녀에게는 다른 셋과는 다른 특별한 임무가 주어졌는데.
그것은 바로 용병왕을 제외한 카이샨군 최강의 오너이자 중군 지휘관인 대전사 아르한의 ‘라이칸(2600rp, 임페르노제)’을 상대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녀와 시선을 맞추며 말했다.
“혼자서 맞설 생각은 버려라. 네 역할은 전투의 향방이 결정될 때까지, 아르한으로부터 서튼 백작을 보호하는 것이니.”
“명심하죠.”
물론 이 모든 작전은 한 가지 조건이 갖추어져야만 의미를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조건이란 것은...
내가 ‘용병왕’이라는 절대적인 변수를 완벽하게 통제해 내는 것.
그러니까 이 전쟁의 승패는.
나와 용병왕의 대결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3
마라몬트 왕국과 카이샨 왕국의 마지막 전투가 될 ‘알타몬트 대회전’은 일반적인 기간트 대전의 그것과 다를 것 없는 양상으로 진행되었다.
다만 중군에 잔뜩 힘을 주고 나선 카이샨 왕국에 비해, 이쪽의 중군은 수에서만 밀리지 않을 뿐 실력 있는 오너들이 좌군과 우군으로 대부분 빠져나간 탓에 초반부터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전략적으로 힘을 숨기고 있는 좌군 역시, 의도적으로 밀리는 모습을 연출하며 작전을 알지 못하는 대다수 마라몬트측 인원들의 애간장을 녹이는 중이었고.
오직 수에서 균형을 맞추고 질적인 면에선 앞서 있는 우군만이 카이샨군의 좌군을 상대로 우세한 전투를 펼치고 있었다.
좌군이 힘을 숨기고 있는 이유는 아직까지 전장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용병왕으로 인한 것이었는데.
이제까지의 경험으로, 그가 가장 불리한 전장에 모습을 드러낼 확률이 높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선택된 것이 아군의 힘을 집중시킨 좌군과 가장 멀리 떨어진 우군이었고.
아니나 다를까...
“알칸트라!”
“용병왕이다! 용병왕이 나타났다.!”
“우군쪽이야! 블레이크 벨이 적의 좌군에 합류했어!”
나와 함께 임시 지휘부가 있는 구릉의 끄트머리에서 전장을 주시하고 있던 윌리엄 다이슨 총사령관이 내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스노우경, 부탁하네.”
“걱정마십시오. 제 입으로 한 말은 반드시 지킬 테니.”
이건 내가 한 약속은 반드시 지킬 테니, 너희도 약속을 지키라는 약간의 압박이기도 했다.
하지만 단 한 번의 전투로 국경선을 다시 그리게 될 처지에 놓인 마라몬트 왕국군 총사령관에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은 것 같았다.
“믿겠네. 그리고... 아무래도 안 되겠어. 나도 중군에 합류하겠네. 마지막 전투에서까지 뒷짐만 지고 있을 순 없는 노릇이지.”
그리곤 누가 말릴 새도 없이 자신의 기간트인 트라칸(2500rp, 크샨트제)을 소환하더니.
파아아아아앗
“테리마!”
쿠웅쿠웅쿠웅쿵쿵쿵쿵쿵.......
그대로 기간트에 탑승한 채 전장을 향해 달려가 버렸다.
“사, 사령관님!”
“각하아아아아아!”
“다, 당장 중군 오너들에게 통신을! 사령관님을 보호...”
“자네 미쳤나! 그렇지 않아도 밀리고 있는데, 정신까지 어지럽게 해서 뭘 어쩌자는 건가?”
“그래도 사령관님의 안전이...”
나는 패닉에 빠진 참모들의 아우성을 뒤로한 채 네스트에 마력을 불어넣었고.
파아아아아앗
옅은 빛과 함께 모습을 드러낸 제라스에 탑승한 뒤.
“그럼, 시작해 보자고.”
치밀어 오르는 흥분과 열기를 애써 억누르며.
마라몬트측 기간트들을 박살 내고있는 용병왕의 알칸트라를 향해 몸을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