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알타몬트 대회전(5)
#1
콰아아아아앙
초고등급 기간트 알칸트라가 전투의 여파로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대지를 박찼다.
어마어마한 마력이 실린 기간트의 기동으로 인해, 포탄이 터지는 듯한 굉음이 발생함과 동시에 박살 난 대지의 파편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여전히 롱소드 한 자루만을 고집 중인 알칸트라의 오너 블레이크 벨이었지만.
롱소드의 검신에 넘실거리는 푸른빛은 짙어질 대로 짙어지다 못해, 마치 실제 불꽃과 같이 유형화하려는 듯한 기색마저 보이고 있었다.
쉐에에에에에에에엑
타아앗
쉬이이이이이이이익
타아아앗
무려 소드마스터가 펼치는 지고한 경지의 검술이었다.
게다가 불꽃처럼 활활 타오르기 시작한 검에 실린 마력 또한 심상치 않았다.
이 무시무시한 조합을 오직 날카로운 반사신경과 버프 스킬들로 강화된 기간트의 성능에 의지하여 피해내던 스노우.
그런 그의 관자놀이를 타고 식은땀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뭐야, 저건? 설마 저게... 소드마스터의 오러블레이드?”
알칸트라의 공격에 점점 더 흉포한 기세가 더해지고 있었고.
그와 비례해 알칸트라로부터 느껴지는 강자의 아우라 역시 조금씩 증폭되는 중이었다.
이는 쉽게 말해, 전투를 지속할수록 알칸트라의 오너인 용병왕의 실력이 점점 더 진화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카아아아아아아아아앙
실제로 알칸트라의 검에 실린 마력의 형태가 변화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한 이후.
단 두 번의 맞부딪힘만으로 멀쩡하던 제라스의 롱소드에 군데군데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는 검에 실린 마력의 질이 상승했다는 명백한 증거.
“설마... 진짜로 그딴 게 튀어나오는 건 아니겠지?”
스노우가 이 세계에서 만나본 소드마스터라곤 눈앞에 있는 블레이크 벨이 유일했고.
그마저도 기간트를 통한 대면이 전부였으니, 오러블레이드라는 걸 실제 목격한 경험이 있을 리 만무했다.
다만...
“그러고 보니 저 마력의 형태... 저건 예전에 알버트 자작이 보여준 것과 비슷한 것 같은데?”
브라이드 백작 휘하에 남기 위해 백작위도 거절한 루페른 왕국 최강의 엑스퍼트 알버트 자작.
비록 처참한 파일럿 재능 탓에 오너의 길은 진즉에 포기해야만 했지만, 검에 대한 엄청난 재능과 노력으로 소드마스터라는 거대한 벽과 마주하고 있었던 그 사내가... 분명 저것과 비슷한 걸 보여준 적이 있었다.
‘소드마스터라... 나도 직접 본 건 딱 두 번에 불과하지만, 솔직히 비벼볼 엄두가 나지 않더군. 뭐, 애초에 소드마스터를 상대할 수 있는 건 소드마스터뿐이니까. 아, 물론 이건 기간트라는 병기가 등장하기 이전의 이야기지. 아무튼, 이론적으로는 최상급 엑스퍼트 수십으로도 소드마스터를 상대할 순 없어. 물론 이것도 이론적으로만 그렇다는 거야. 사실 그들도 인간인 이상, 최상급 엑스퍼트 수십이 차륜전이라도 펼친다면...... ......아, 쓸데없이 말이 길어졌군. 아무튼, 소드마스터가 인외의 괴물로 취급받았던 이유는 딱 하나야.’
‘그게 뭐지?’
‘그건 바로...’
당시 말을 끊은 알버트 자작은 짓궂은 미소를 띠며 천천히 검을 들어 올렸었다.
직후, 그가 들어 올린 검은 거대한 불꽃의 형상을 띤 마력을 외부로 발산하기 시작했고.
그 마력의 불꽃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검신을 둘러싼 형태로 압축되기 시작하더니.
이내 푸른빛을 머금은 선명하고 거대한 검날의 형태를 재현해 내기에 이르렀다.
푸스스스...
물론 그 시간은 찰나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짧았다.
알버트 자작의 말에 의하면...
‘대충 이런 느낌? 최상급의 끝에 이르러서야 아주 잠깐 흉내 정도는 낼 수 있게 됐지만. 실제 소드마스터의 오러블레이드는 거의 완벽하게 검날의 형태를 띠고 있지.’
당시 알버트 자작이 보여준 ‘흉내 낸 수준’의 오러블레이드를 완성하기 직전 단계인 거대한 불꽃.
그것이 현재 알칸트라의 롱소드에 맺힌 마력의 형상과 매우 흡사했다.
“젠장... 전투 중에 이러는 건 반칙 아냐?”
아무래도 무언가가 용병왕 블레이크 벨의 각성 스위치를 눌러버린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무언가는 생각할 것도 없이 제라스의 오너인 스노우 자신일 터.
그렇지 않아도 버거운 상대가 전투 중에 더욱 강해지다니...
미치고 환장할 노릇임이 분명했지만.
정작 당사자인 스노우는 인상을 찡그린 채 몇 마디를 투덜거릴 뿐, 그 어디에도 절박한 위기감 따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S급 기체와의 교전 시간이 5분을 넘겼습니다.]
[S급 기체와의 교전 시간이 10분을......]
[S급 기체와의 교전 시간이 20분을......]
교전 시간이 길어질수록 시야의 가장자리에 의미심장한 메시지들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마침내 30분을 넘기는 순간.
[S급 기체와의 교전 시간이 30분을 넘겼습니다. 교전 경험치가 한계에 이르러 ‘파일럿(S)’ 특성의 고유스킬들이 성장합니다.]
[고유스킬 ‘위대한 결속’의 숙련도가 대폭 상승합니다.]
[고유스킬 ‘마력기체’의 숙련도가 대폭 상승합니다.]
[고유스킬 ‘한계돌파’의 숙련도가 대폭 상승합니다.]
[고유스킬 ‘원격조종’의 숙련도가 대폭 상승합니다.]
[고유스킬 ‘수복’의 숙련도가 대폭 상승합니다.]
[고유스킬 ‘호랑이 교관’의 숙련도가 대폭 상승합니다.
[고유스킬 ‘격납고’의 공간이 대폭 확장됩니다.]
[고유스킬 ‘변형’의 변형 한계가 대폭 증가합니다.]
엄청난 양의 메시지가 폭발하듯 시야의 한편을 가득 채웠다.
즉, 교전을 거듭할수록 강해지는 건...
알칸타라의 오너인 블레이크 벨만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2
블레이크 벨의 감정은 제라스와의 전투가 시작된 이후 몇 번이고 변화를 거듭하는 중이었다.
처음에는 얄미운 놈에게 앙갚음할 기회가 왔다는 기대감이 그의 뇌리를 가득 메웠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기대감은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상대에 대한 짜증과 분노, 미약한 경외심에 그 자리를 내어주어야만 했다.
그렇게 마치 동그란 원안에서 추격전을 벌이듯 1대1 대결을 이어나가던 순간.
그의 인생에서 몇 없었던, 그리고 아주 오래전에 마지막으로 느꼈었던 감정이 그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성장’이라는, 이제는 그와 먼 이야기가 되어 버린 단어에서 비롯된 ‘쾌감’이었다.
오르비스 대륙 최강자 1하나인 블레이크 벨.
소드마스터라는 지고의 경지에 오른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성장은 멈추어버렸다.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벽 너머에, 대륙의 수천 년 역사상 단 9인만이 올랐었다는 ‘그랜드마스터’의 경지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모르지는 않았지만.
블레이크 벨은 직감적으로 자신의 한계가 여기까지임을 알 수 있었다.
그때부터 그토록 갈구하던 ‘강함’을 위한 노력을 멈추었다.
성장이 멈춘다 한들, 그는 이미 대륙에서 손꼽히는 강자의 반열에 오른 상태였기에 미련을 버리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때가 벌써 5년 전.
그는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이후 처음으로 ‘성장의 쾌감’을 만끽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것도 무려 기대하지도 않았던 ‘오너’로서의 성장이었다.
기간트의 시대가 열린 이후, ‘소드마스터’가 곧 국력을 상징하던 건 옛이야기에나 단골로 등장하는 소재가 되었고.
그만큼 현 대륙의 국가들은 ‘검’보다는 ‘조종술’을 우선시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오너가 된 지 20여 년이 지난 블레이크 벨의 성장은 놀라운 일일 수밖에 없었다.
오너로서의 역량은 엑스퍼트로서의 역량보다도 더욱더 타고난 재능에 좌우된다는 인식이 팽배해 있었기에, 뒤늦게 경지 자체가 달라질 정도로 성장을 하는 사례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도 엑스퍼트에 빗대자면, 무려 상급 엑스퍼트가 최상급 엑스퍼트로 진화한 것에 맞먹는 수준의 성장.
무아지경의 경지에서 서서히 깨어나기 시작한 블레이크 벨 역시 자신의 변화가 믿어지지 않았다.
“이게 무슨... 하, 이 나이에 더 성장할 여지가 남아있었다는 건가?”
성장의 원인은 명백했다.
알칸트라의 오너가 된 이후 단 한 번도 만나본 적 없었던 호적수의 존재.
“큭, 그렇다면 이건... 저 녀석에게 고마워해야 하나?”
알칸트라의 매서운 검격을 날렵하게 몸을 날려 피해낸 뒤, 요란한 마법들을 쏟아내며 거리를 벌리는 제라스.
이를 바짝 추격하며 옅게 미소 짓던 블레이크 벨이 순간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가가 이상했기 때문이다.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전투 중 엄청나게 성장한 블레이크 벨이었다.
그가 느끼기로는 흡사 최상급 엑스퍼트에서 소드마스터에 올랐을 때와 필적할 수준으로, 이는 격 자체가 달라졌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그런데...
“왜 저놈은... 전투를 시작할 때와 달라진 게 없는 거지?”
그랬다.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무시무시할 정도로 일변한 알칸트라의 공세를.
저 비만 체형의 기간트 제라스는 처음과 똑같은 방식으로.
너무나 태연하게 받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3
사실 ‘파일럿(S)’ 특성의 고유스킬 중 대부분은 전투 중 성장을 이뤄냈다 한들 곧바로 티가 나는 종류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위대한 결속(S)’과 ‘마력지체(S)’, 이 두 가지 고유스킬 만큼은 달랐다.
‘미쳤군. 예전엔 몰랐는데 이거... 완전히 크로스보우의 동화율 보정 기능이나 마찬가지잖아?’
기체와의 결속을 더욱 공고히 해준다는 심플한 설명을 지닌 고유스킬 ‘위대한 결속’.
이는 말 그대로 기간트와 오너의 일체감을 상승시켜주는 스킬이었고.
크로스보우로 동화율 보정 기능을 맛본 바 있었던 난 확신 할 수 있었다.
“이 정도면 블루... 어쩌면 퍼플스펀 이상의 효과일지도.”
애초에 스킬의 효과는 각성 이후 계속해서 적용되고 있었으나.
전투 도중 이토록 극적으로 상승한 적은 처음이었기에, 그 차이를 절감할 수 있었다.
‘적어도 크로스보우에 탑재된 레드스펀보단... 훨씬 더 증가 폭이 높은 게 확실해.’
그리고 두 번째 고유스킬 ‘마력지체’
지구에서는 미사일에 마력을 투사하는 용도로만 사용했던 이 기능의 효과 역시 처음으로 체감할 수 있었는데.
“무기는 물론이고, 기간트로 전달되는 마력 양이나 속도가 훨씬 더 빨라졌어. 이렇게 되면 오버클럭의 효율 역시 증가하겠군.”
그리고 이는, 이야기로 들은 바 있었던 드워프제 기간트의 특장점이기도 했다.
“역시 파일럿은... 적어도 기간트 오너에게만큼은 개사기 특성이었어.”
덕분에 교전 초반에 비해 적어도 50% 이상은 강해진 듯한 알칸트라의 공세를 무리 없이 받아낼 수 있었다.
카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으윽... 젠장, 이건 더는 못 쓰겠는데.”
단지 알칸트라와 정명으로 검을 맞대는 것만큼은 철저하게 피할 수밖에 없었는데.
고유스킬들이 대폭 강화되었다고는 하나, 오러블레이드의 전조 증상을 보이는 알칸트라의 검기만은 그 어떤 스킬로도 대항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 증거로 어쩔 수 없이 알칸트라의 검과 맞부딪힌 제라스의 롱소드를 지면에 내팽개치자.
터어엉
파각
대번에 검날이 두 조각으로 분리되어 버렸다.
파아아아아앗
나는 2번 슬롯에 들어있던 플레일을 소환한 뒤.
이제껏 아껴두었던 두 번째 특성 ‘서리바람(B)’의 고유스킬들을 시전했다.
“프렉탈필드, 프리징 레인.”
곧바로 제라스를 중심으로 두꺼운 얼음의 대지가 생성되었고.
하늘에서는 직경 3,4cm의 얼음덩어리들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 엄청난 이적에 일순간 격렬하던 전장이 멈추어버렸다는 착각마저 들었을 정도.
나는 주변의 분위기에 아랑곳하지 않은 채.
10여 미터에 이르는 신장을 지닌 서번트 10여 마리를 소환했고.
이 전투의 클라이막스를 대비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내가 용병왕과 드잡이질을 벌이는 30여 분 동안...
[좌군이 적 우군을 완전히 무너뜨렸습니다! 적 기간트 50여 기 전투불능! 현재 좌군 기간트들이 카샨트 중군의 측면을 기습......]
아군의 숨겨진 칼날이었던 좌군이 적의 우군을 무너뜨리며.
마지막 대회전의 승기를 잡았다는 란셀 티그리스의 열띤 음성이.
본진과의 통신 채널을 통해 들려왔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