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투기 버리고 기간트 탑니다-96화 (96/169)

96화 알타몬트 대회전(6)

#1

쨍그랑

카이샨 왕국군 총사령관 구탄은 피처럼 붉은 액체가 담긴 크리스탈잔을 바닥에 내팽개쳐 버렸다.

마라몬트 왕국과 마찬가지로 알타몬트 대평원에 산재한 구릉 중 하나에 자리 잡은 카이샨 왕국군의 사령부.

현 카이샨 국왕의 사촌 동생이자 최상급 엑스퍼트인 구탄은 그곳의 중심에 위치한 화려한 의자에 앉아, 한 병에 50골드를 호가하는 이펜타르그 제국의 명주(銘酒) ‘보로닌’을 음미하며 전장을 관망하던 중이었다.

형편없이 밀려버린 서부 전선과는 달리, 그가 사령관을 맡은 동부 전선의 군대는 연전연승을 거듭하며 원수인 마라몬트 왕국의 요새와 영지들을 함락시켰고.

자칫 치욕적인 패배로 기록될 뻔한 전쟁의 균형을 유지해내는 데 성공했다.

물론 각종 로비를 통해 초강자인 용병왕을 동부 전선으로 끌어온 덕에 이룰 수 있었던 쾌거였지만.

‘로비’를 터부시하지 않는 문화를 지닌 카이샨에선, 그 또한 구탄의 뛰어난 면모로 인정받고 있었다.

게다가 다소 오만하고 게으를지언정, 명민한 두뇌와 무(武)에 대한 탁월한 재능을 지닌 구탄은 썩 유능한 지휘관이기도 했다.

그런 그가 판단하기에 ‘용병왕’이란 변수를 제외한 양측의 전력은 막상막하라 할 수 있었는데.

서로가 한곳의 전장에서 손해를 보았지만, 다른 한 곳에서 그만큼 만회를 한 데다.

너무나 극명하게 갈려 버린 첫 번째 기간트 대전으로 인해, 오히려 두 전장 모두 패배한 쪽이 대규모의 전투를 꺼리게 되었고.

이로 인해 애초에 막상막하라 평가받고 있던 양국의 기간트 전력이 비교적 온전하게 유지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멍청한 파투, 고작 마라몬트 놈들 따위에게 그리 형편없이 밀리다니.’

동부 전선 사령관이었던 바크람 부족의 대전사 카투가 패전의 책임을 떠안으며 목이 잘렸고.

이후 왕국 전쟁의 키는 온전히 구탄의 손에 쥐어졌다.

그리고 그는 확신했다.

전력의 양(큰 차이는 아니지만 20여 기 정도 우위)뿐만 아니라 질(용병왕으로 인해)에서도 우세한 카이샨 왕국의 승리를.

‘내게 맡겨준다면 저 간악한 마라몬트 놈들의 왕도를 함락시켜, 왕의 목을 베어버렸을 텐데.’

내심 마라몬트 왕국과의 협상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구탄.

그는 느긋한 마음으로 자신의 애주를 즐기며 수백 기의 기간트가 벌이는 격전을 감상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카이샨의 우군과 중군이 단번에 우위를 점하고.

열세에 처한 좌군 역시 용병왕의 참전 직후 곧바로 기세를 올리는 걸 목격했을 때만 해도...

분명 그의 마음은 대해와도 같이 평온하고 여유로웠다.

하지만 잔잔하던 대해에 비바람이 일고 파도가 몰아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큭, 저 머저린 뭐지? 전장의 광기에 잡아먹히기라도 한 건가?’

전장에 난입하자마자 적의 크로스보우 한 기를 해치워버린 알칸트라.

그 천외천의 강자 앞을 고작 1500rp의 제라스가 막아설 때만 해도, 그 안에 타고 있는 오너를 향해 콧방귀를 끼며 비웃던 구탄이었다.

하지만...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구탄이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키기까지는 채 5분조차 필요하지 않았다.

‘고작’이라고 하기에는 제라스의 오너가 펼쳐 보이는 실력이 너무나 대단했던 것이다.

중갑형인 데다 평범한 출력을 지닌 기체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는 엄청난 스피드로 알칸트라의 공세를 족족 피해내더니.

그마저도 한계에 달할 때면, 생전 듣도 보도 못한 ‘기간트 마법’을 활용해 위기를 벗어나 버렸다.

그런 모습이 무려 20여 분 이상 반복되었고.

구탄은 자신의 애주가 담긴 아끼던 잔을 집어던져 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잔이 깨지는 순간을 기점으로.

전장의 판도가 급변하기 시작했다.

#2

‘왜 이렇게 불안한 거지?’

‘하얀 늑대’라는 이명으로 더욱 유명한 용병 오너 크로이얀 볼튼은 전신을 엄습하는 불길함을 느끼며 주변을 살폈다.

전투가 시작된 지 이제 막 25분이 지났고.

이미 크로스보우와 린저(1200rp 샌포드제), 제녹스(1800rp 크샨트제)를 각각 한 기씩 다운시킴으로써 몸값에 상응하는 활약을 톡톡히 해내고 있던 그였다.

게다가 그가 속한 카이샨 기간트 부대의 우군은 수적 우세를 바탕으로 마라몬트의 좌군을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는 중.

이처럼 전장의 흐름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상황으로 흘러가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그의 ‘감각’은 계속해서 위험신호를 보내오고 있었다.

크로이얀 볼튼은 지난 수십 년간 무수한 위기에서 스스로를 구원했던 자신의 ‘감각’을 신뢰했다.

그는 카이샨군의 선두에서 활약 중이던 ‘하얀 늑대(원명(原名) 크라일, 2000rp, 임페르노제)’를 티 나지 않을 정도로 느릿하게 전열에서 후퇴시켰다.

천천히 아군 기간트 들 사이로 섞여 들어간 크로이얀 볼튼.

이후 비교적 높은 지대로 이동한 그는 마력을 두 눈에 집중시켜 중군과 우군의 상황을 살폈다.

그리고 보았다.

“저게 뭐야... 제라스? 제라스로 저 괴물을 상대한다고?”

수인족 혼혈인 그의 날 선 감각이 보내오는 경고신호가 한층 거세졌다.

용병왕의 알칸트라는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크로이얀 볼튼조차 감히 20합을 받아 낼 수 있다 장담하지 못하는 괴물 중의 괴물이었다.

그런 괴물의 공격을 너무나 쉽게 피해내며 오히려 마법 폭격을 가하고 있는 충격적인 모습.

그리고 그 마법을 본 순간, 제라스의 오너가 누구인지 단박에 알아챈 크로이얀 볼튼이었다.

사실 서부 전선의 첫 번째 기간트 대전에 참전했던 오너라면 그의 존재를 모를 수가 없었다.

하지만...

“분명 크로스보우의 오너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고작 한 달 만에 기간트를 바꿔 탄다고?”

그 실력으로 볼 때 기간트의 등급을 높이는 건 너무나 당연해 보였지만, 교체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은 기체를 타고 전장에 나온다는 건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완벽한 기동은 대체... 게다가 마법의 위력이 더 강해진 것 같은데...”

따라 할 수조차 없는 마법은 차지하고서라도. 중갑형 기간트 제라스로 선보이는 기동 역시, 크로이얀 볼튼이 엄두조차 낼 수 없는 고절한 수준에 올라 있었다.

무려 그 ‘용병왕의 알칸트라’에 비해서도 전혀 뒤떨어지지 않는 속도와 민첩함, 거기에 말도 안 되는 위력의 마법까지.

시종일관 공세를 퍼붓고 있는 용병왕이었지만, 엄청난 퍼포먼스를 선보이며 얄밉게 거리를 벌리는 제라스에게 단 한 번의 유효타조차 성공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크로이얀 볼튼은 불안함의 원천을 깨달았다.

‘용병왕이 단 한 기의 기간트로 인해 발목을 잡혔다.’

그리고 넓어진 그의 시야에, 적의 전열에 속속 모습을 드러내는 익숙한 생김새의 기간트들이 들어왔다.

“카트린, 바클리... 아란델? 저 녀석들이 이쪽에 있었나? 왜 지금까지는 보이지 않았......!”

세 기 모두 흔하게 볼 수 없는 기체인데다, 그 오너들이 워낙에 유명했기에 단박에 정체를 눈치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정체를 깨닫는 순간.

그의 뇌리를 강타하는 단어 하나.

‘함정!’

조금 더 집중력을 높여 적진을 살폈다.

그러자 그들의 주위로 마라몬트 왕국의 고등급 기간트들이 하나둘 합류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제껏 적의 전열을 차지하고 있던 건, 몇몇 지휘관급으로 보이는 기간트들을 제외하면 대부분 1500rp 이하의 중하급 기체들이었다.

‘어쩐지 전열을 돌파해 적진으로 침투한 놈들이 너무 잠잠하다 했더니...’

아마도 저 고등급 기간트들에 의해 순식간에 정리되어 버린 듯했다.

그리고 그렇게 숨죽이며 기다리던 이들이 전면으로 나섰다는 건...

“젠장, 텄어. 이번엔 배팅을 잘못한 거야.”

전세를 뒤집을 수 있다는 확신이 생겼다는 뜻이었고.

그 확신은 십중팔구 용병왕을 붙잡아 놓은 제라스의 오너로 인한 것일 터였다.

크로이얀 볼튼 역시 용병왕의 합류로 인해 카이샨의 압승을 예상했었다.

그렇기에 자신에게 온 제안 역시 흔쾌히 받아들인 것.

하지만 그의 감각은 이번 전쟁이 아군의 ‘패배’로 끝날 것이라 말하고 있었다.

“뭐, 가끔은 틀릴 때도 있는 법이지.”

물론 용병인 그에게.

카이샨 왕국의 패배가 그리 뼈아플 이유는 없었다.

단지...

‘추가(승리)수당은 물 건너갔군.’

받아낼 대가가 대폭 줄어들었을 뿐.

#3

퍼어어어어어엉

퍼어어어어엉

퍼어어어어어엉

‘서리바람(B)’ 특성의 고유스킬 ‘눈사람 소환(B)’으로 만들어낸 10여 미터 전후의 서번트들.

제라스를 탄 채 이들을 소환해 미리 전력을 알아본 결과, 프랙탈 필드와 프리징 레인의 버프를 모두 받은 서번트 한 마리의 위력은 중급 엑스퍼트가 탑승한 500rp급 기간트 정도의 수준이었다.

만약 상대가 일반 병사들이었다면 ‘만인지적’의 위용을 뽐내고도 남았을 정도의 전력이었을 테지만.

기간트, 그것도 초고등급 기간트인 알칸트라를 상대로는 검에 실린 여파에 스치는 것만으로도 펑펑 터져나가는 수준에 불과했다.

하지만 내 목표는 알칸트라에게 유효한 타격을 입히는 것이 아니었다.

아군이 완벽하게 승리를 확정 짓는 순간까지, 이젠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시간을 버텨내기만 하면... 이 전투의 실질적인 승자는 내가 될 터.

“눈사람 소환, 눈사람 소환, 눈사람 소환.......”

나는 풍선처럼 터져나가는 서번트들에 아랑곳하지 않은 채 쉴 새 없이 스킬을 시전했고.

때로는 거대한 장벽이나 손, 발 혹은 크기를 수배로 키우는 등 다양한 형태로 알칸트라의 앞을 막았다.

거기에 더해 발밑은 미끄러운 빙판인데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얼음 결정들은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으니.

아마도 지금쯤, 용병왕이라는 작자는 울화통이 터지기 직전의 상황일 확률이 높았다.

스킬 효과에 의해 미약하나마 디버프를 받는 알칸트라와는 달리.

내가 만들어낸 이 순백의 세상 안에서 오히려 행동력 보정을 받는 제라스였기에.

두 기간트간의 거리가 좁혀질 리 만무했고.

인내심이 한계에 이르렀는지, 드디어 알칸트라의 전신에서 옅은 푸른빛이 발산되기 시작했다.

“오버클럭? 뭐, 이 정도면 오래 참은 건가?”

30여 분이나 전투를 지속하고도 오버클럭을 일으킬 여유가 있다니.

소드마스터가 지닌 오러의 양은 일반적인 엑스퍼트에 비할 바가 아닌 듯했다.

이윽고, 시야를 확보하기 힘들 정도로 쏟아지는 얼음 결정들을 뚫고 알칸트라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콰아아아아아앙

콰아아아아앙

콰아아아아아아앙

얼음 조각과 대지의 파편을 비산시키며 수십 미터의 거리를 한순간에 제로로 만들어 버리는 초고등급 기간트의 움직임은 내게도 위협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나 역시 아껴두었던 최강의 수를 차례대로 풀어내야만 했다.

“한계 돌파(S), 아이스 비드(B).”

나는 한계 돌파 스킬을 이용해 알칸트라에 뒤지지 않는 속도로 움직이며 거리를 유지했고.

뒤이어 서리바람 특성의 고유스킬이자, 내가 지닌 최강의 공격 스킬

‘아이스 비드’를 시전했다.

스르르르르르

스르르르르

츠르르르르르...

시작은 허공에 생성된 3cm 크기의 자그마한 얼음 결정이었다.

하지만 주위의 냉기를 흡수해 순식간에 10배 가까이 몸집을 불리는 수천 개의 얼음 구슬들.

그중 일부가 빠르게 움직이는 알칸트라의 신체에 닿았고.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곧바로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폭발 이후 드러난 알칸트라의 외부 장갑에는 별다른 흔적이 남아있지 않았지만.

저 괴물 같은 기간트의 발을 멈춰 세웠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엄청난 전과라 할 수 있었다.

게다가 여전히 주변에는 수천 개의 구슬이 빼곡하게 들어찬 상태.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콰아아아아아앙

콰아아아아아아아앙

.

.

.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검을 휘둘러 오러를 외부로 발출하는 고절한 수법으로 구슬들을 파괴해 나가던 알칸트라.

하지만 새로운 구슬들이 곧바로 그 자리를 메꾸는 걸 확인하고는...

파아앗

돌연 들고 있던 롱소드를 역소환했다.

그리고...

[젠장, 이런 개같은 꼴을 당하는 건 정말 오랜만이로군. 거기 너, 듣고 있겠지?]

알칸트라의 외부 통신 마법진에서.

용병왕으로 짐작되는 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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