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투기 버리고 기간트 탑니다-97화 (97/169)

97화 승전

#1

자신보다 15살가량 어린 상대가 처음으로 전장에 모습을 드러낸 이후.

근 20여 년간 크고 작은 전투에서 얼굴(대부분은 기간트의 얼굴)을 마주해왔던 로버트 서튼과 그의 기간트 배틀엑스.

‘뭔가 이상하군...’

카이샨 최강의 엑스퍼트이자 최강의 기간트 오너이기도 한 대전사 아르한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자리 잡았다.

‘제대로 싸울 생각이 있기는 한 건가?’

마라몬트 왕국에서 배틀엑스라는 고등급 기간트를 소유한 오너는 둘이었지만, 오랜 세월 서로에게 익숙해진 탓에 검술과 기동의 일부만으로도 첫눈에 상대를 알아볼 수 있었다.

아르한은 비록 적국의 인물이라 한들, 마라몬트 최강의 오너인 로버트 서튼이 꽤 마음에 들었다.

카이샨의 오너들은 자신의 나이(65세)와 지위(현 국왕의 스승)로 인해 그와 제대로 손을 섞는 걸 꺼려했기에.

여전히 강자와의 싸움을 갈망하는 아르한에게 있어, 언제나 전력을 다해 달려드는 로버트 서튼과 같은 젊은이(?)는 꽤나 기꺼운 상대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두 사람의 대결은 언제나 아르한의 승리로 마무리되곤 했으니, 그로서는 상대와의 만남이 기다려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오늘도 여느 때와 같았다.

물론 이런 대규모 전장에서 마주하는 건 처음이었지만, 어쨌든 이곳이 전장이라는 사실은 다르지 않았다.

서로가 중군의 수장으로 전장에 나섰고, 언제나처럼 로버트 서튼은 자신의 공세를 막아내는 것에 급급할 따름.

다만 변수라면...

쉐에에에에에에엑

타아아아아아아앙

묵직한 기세가 실린 테세우스(아르한의 기간트, 2500rp, 드워프제)의 대검이 내리꽂혔고.

배틀엑스가 왼팔에 장착한 카이트실드를 이용해 간신히 방어에 성공하는 순간.

쉬이이이이이이이이익

날렵한 몸매의 기간트 하나가 마치 암살자와 같은 은밀한 기동을 펼치며 그의 배후를 찔러왔다.

카아아아아아아앙

아르한의 뒤를 노린 것은 그 역시 익히 알고 있는 용병 오너, 헬레나 오도넬의 비에리였다.

아르한은 자신의 배후를 노린 비에리의 검격을 어렵지 않게 방어해 낼 수 있었으나, 그로 인해 수세에 몰려 있던 배틀엑스가 자신의 영역 밖으로 벗어나는 걸 지켜보아야만 했다.

“허, 이번에도...”

무엇보다 이상한 점은 헬레나 오도넬의 비에리가 자신의 주변을 맴돌며 간간이 견제만을 시도할 뿐, 로버튼 서튼의 배틀엑스와 호흡을 맞춰 합공하려는 의도를 내비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아무리 카이샨 최강의 오너라 한들, 마라몬트 왕국 최고의 실력자 로버트 서튼과 대륙의 용병 오너 중 열 손가락 안에 꼽힌다는 헬레나 오도넬의 합공이라면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다.

“아니, 승리는커녕... 목숨이 위태로울 테지.”

물론 이 전장에는 저 두 오너와 자신만 존재하는 게 아니었다.

헬레나 오도넬의 견제가 계속되자 아르한의 직속 부하들이 그녀를 마크하기 위해 자리를 이탈하려 했으나, 그때마다 마라몬트측 오너들의 격렬한 공세에 발목이 붙잡혀 그 시도는 번번이 무산되고 말았다.

무리한 공격을 감행한 탓에 마라몬트의 기간트들이 막대한 손해를 입는 경우가 빈번하게 발생했지만.

반대로 카이샨의 기간트들이 무리하게 자리를 이탈하려다 타격을 입는 경우도 있었다.

이를 보다 못한 아르한이 아군 통신 채널을 통해 명령을 내렸다.

[내게 신경쓰지 말고 위치를 지켜라!]

상관의 지엄한 명령이 떨어졌고.

결국 그의 부하들은 눈앞의 상대에게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가장 많은 수의 기간트가 맞붙은 중군의 상황은 무려 20여 분이 넘도록 똑같은 양상으로 흘러갔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타아아아아아앙

쉐에에에에에에에에엑

카아아아아아아앙

헬레나 오도넬의 비에리는 여전히 로버트 서튼이 위기에 처한 순간에만 전투에 끼어들었고.

날카로운 검격을 날려 아르한의 주위를 흐트러뜨리고는, 곧바로 다른 기간트들의 틈에 섞여 들어가기를 반복했다.

‘이상하군. 이대로는 마라몬트가 승리할 가능성 따윈 없다는 걸, 모르진 않을 텐데...’

만약 반대의 경우라면, 자신은 협공을 통해 가능한 한 빠르게 상황을 정리한 다음.

어떻게든 세 곳의 전선 중 한 곳만이라도 우위를 점하기 위해 전력을 다했을 터였다.

초전부터 압도적으로 전선을 밀어 올리고 있는 우군.

그리고 우군만큼은 아니지만 확실하게 우위를 점하고 있는 중군.

게다가 초전에 밀렸다 한들 용병왕이 날뜀으로써 반전되었을...

“잠깐...”

2대1의 대결을 이어가는 와중에도 다급히 본진과의 통신 채널을 개방한 아르한이 물었다.

“좌군! 용병왕이 합류한 좌군의 상황은 어떠한가?”

[............]

분명 채널이 연결되었음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자,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걸 확신한 그가 다시 한번 외쳤다.

“항명으로 죽고 싶지 않으면 빨리 보고해!”

[......죄, 죄송합니다. 현재 용병왕의 알칸타라는 적 기간트 제라스와...... ......군이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적의 좌군에 주력 기간트들이 대거 포진된 것을 확인......]

이후 들려온 보고는 온통 믿을 수 없는 것들뿐이었다.

용병왕이 고작 1500rp급 기간트 제라스에게 발목을 잡혀 30여 분이 다 되어가도록 전장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로도 모자라.

완전히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한 우군이 적의 좌군에게 일순간에 밀려버렸다는 비보.

“이럴수가...”

현재 남아 있는 오러는 1/4 정도.

무려 최상급 오너 둘을 상대로 반 시간의 격전을 벌인 참이라 남은 오러의 양은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아르한은 오너가 바닥나는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오버클럭을 일으켰고.

동시에 동화율을 극한까지 끌어올리며 배틀엑스를 향해 무시무시한 공세를 퍼부었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카아아아아아아앙

콰지지지직

순간적인 폭딜을 감당하지 못한 배틀엑스의 왼팔이 팔뚝 부분부터 잘려 방패와 함께 날아가 버렸고.

이어지는 연격에 오른쪽 어깨의 외부 장갑까지 뭉텅이로 잘려 나갔다.

이에 기함한 헬레나 오도넬의 비에리가 황급히 끼어들려 했지만.

카아아아아아아아아앙

엄청난 마력이 담긴 테세우시의 검을 맞받아친 대가로 반대 방향을 향해 포탄처럼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쿠당탕탕......

이제까지와는 반대로 비에리를 구원하기 위해 오버클럭까지 일으킨 배틀엑스가 빠르게 움직였고.

엄청난 속도로 기동해 비에리의 앞을 막아선 로버트 서튼의 시선이 정면으로 향했을 때.

아르한의 테세우스는 이미 두 사람의 곁을 벗어나, 형편없이 무너지고 있는 카이샨의 우군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 순간 맥이 탁 풀려버린 로버트 서튼.

그는 쓰러져 있는 헬레나 오도넬(비에리)을 향해 손을 내밀며 생각했다.

‘정말로 계획대로 되었군. 정말로...’

그리고는 시선을 돌려 마라몬트의 우군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곳에 있을 한 기의 기간트를 떠올리며...

#2

소드마스터의 위용을 직접 확인한 바는 없었지만.

이곳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유추해 볼 때, 그들의 힘은 지구의 육체 계열 S급 헌터와 비슷한 수준일 확률이 높았다.

뭐, 같은 S급 헌터로 묶인다 한들 개개인의 실력은 천차만별이었으니... 소드마스터들 역시 개인 간의 실력 차는 존재할 테지만.

중요한 건 S급 헌터건 소드마스터건, 인간의 한계를 훌쩍 넘어선 괴물인 것만큼은 분명하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내 눈앞에 삐딱한 자세로 서 있는 저 ‘알칸트라’라는 기간트는, 그 괴물들 예닐곱이 파티를 이뤄 덤벼든다 한들 상대조차 되지 않을 수준의 초강자라 할 수 있었다.

그렇다는 건, 그를 상대로 대등한 전투(물론 일방적인 수세를 취하긴 했지만)를 펼친 나 역시 그 정도 수준까지 올라왔다는 뜻일 테지.

‘뭐, 어디까지나 기간트에 탑승했을 때에 한한 일이기는 하지만...’

기간트 없이도 그 괴물들과 자웅을 결할 수 있는 용병왕과는 달리.

내 경우엔 10합 정도만 버텨도 기적이라 할 수 있을 만큼, 그들과 나 사이의 간극은 멀리 떨어져 있었으니까.

하지만 기간트라는 영혼의 반쪽과 일체화를 이뤘을 때만큼은 더 이상 무서울 게 없었고.

그렇기에 나는 저 괴물 같은 소드마스터와 기간트 앞에 두고도 당당할 수 있었다.

[젠장, 이런 개같은 꼴을 당하는 건 정말 오랜만이로군. 거기 너, 듣고 있겠지?]

[잘 들리는군. 하고 싶은 말이 뭐지?]

[대체 넌 어디서 뭘 해 먹던 놈이냐? 네놈 같은 실력자라면 내가 모를 리 없을 텐데. 아니, 애초에 이 대륙에 네놈 정도의 실력을 지닌 오너는 아무리 후하게 쳐줘도 열이 안돼. 그런데 그들 중 대부분은 이런 전장에 나올 이유가 없는 놈들이란 말이지.]

그야 당연히 내가 이 대륙 사람이 아니니 알 수 있을 리 없지.

‘아니 근데... 왜 계속 놈놈 거리고 지랄이야. 듣는 놈 기분 더럽게.’

[알려주면? 네놈이 알 수는 있고?]

[뭐? 네놈? 이, 이 시건방진 새끼...]

[멍청한 놈이로군. 그럼 고작 몇 분 전까지 죽이겠다고 달려들던 놈한테 예의라도 차려 주길 바랬나?]

[하, 배짱 하나는 끝내주는 놈이로군. 좋아, 네놈의 그 태도가 허세가 아니라면 이름 정도는 밝힐 수 있겠지.]

그 정도야 어려울 게 없지.

[스노우.]

[큭, 겁쟁이는 아닌 것 같군. 사실 이건 물어볼 것도 없을 것 같지만... 모안다 영지, 거기 나타났던 크로수보우의 오너도 네놈이겠지?]

[진짜로 멍청한 건가? 다 알면서 뭐하러 묻는 거지?]

[이런 ㄱ...... 하아, 좋아. 궁금한 게 많지만, 오늘은 이대로 물러나 주지.]

[패배한 개새끼처럼 쫓겨가는 주제에, 사정이라도 봐주는 것처럼 말하는군.]

[......]

[할 말은 그게 끝인가?]

[젠장, 칼끝보다 혀끝이 더 매서운 놈이었다니... 네놈의 이름은 확실히 기억했다. 그러니 기대해도 좋을 거야. 다시 만나는 날, 그 건방진 주둥이를 내 손으로 짓뭉개 줄 테니까.]

글쎄, 고작 제라스조차 확실히 제압하지 못한 주제에 그게 가능할까?

[전형적인 악당의 대사로군. 진부해. 뭘 상상하던 그건 네놈의 자유지만... 과연 누구 주둥이가 짓뭉개질지는 두고 보자고.]

[......]

알칸트라의 몸이 잘게 떨리는 것처럼 보이는 건 내 착각인가?

더 이상 말을 섞어봐야 본인만 손해라는 걸 인지한 탓인지.

블레이크 벨은 몸을 돌려 카이샨의 진형을 향해 몸을 날렸다.

서서히 포위망을 좁히던 마라몬트 왕국의 기간트들이 저지할 엄두조차 내지 못할 살벌한 기세를 내뿜으며.

뭐, 어쨌든...

“이걸로 이 전쟁은 끝이로군.”

#3

용병왕의 알칸트라가 전장을 빠져나가는 걸 신호탄으로, 카이샨 왕국은 일제히 기간트들을 후퇴시켰다.

패배한 전쟁이라 한들, 기간트 전력을 최대한 보전해야만 후일을 도모할 수 있을 테니까.

쿵쿵쿵쿵쿵쿵쿵쿵쿵

콰아아아아엉

쿵쿵쿵쿵쿵쿵쿵......

이윽고 카이샨의 모든 기간트들이 트레거(기간트의 움직임을 제한하고자 만들어진 거대한 창. 후미를 지면에 박아 넣을 수 있고, 옆면에는 수십 개의 손잡이가 달려 있다)부대의 엄호를 받으며 퇴각을 완료했고.

그들을 추격하던 마라몬트 왕국의 기간트들이 카이샨 왕국의 본진을 덮치기 직전.

뿌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

긴 뿔고동 소리가 울려퍼짐과 동시에 카이샨군의 사령부가 있던 구릉 위에 거대한 백기가 내걸렸다.

그것을 발견한 마라몬트의 기간트들이 일제히 제자리에 멈추어 섰고.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

알타몬트 대평원에 운집해 있던 30만 마라몬트 병사들이 일제히 무기를 치켜들며 환호성을 내질렀다.

비로소 완전히 막을 내린 것이다.

그 어느 때보다 짧은 기간, 많은 전과를 올린 전쟁으로 마라몬트 왕국의 역사에 기록될.

제4차 왕국 전쟁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