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투기 버리고 기간트 탑니다-98화 (98/169)

98화 기간트 '가이아'(1)

#1

전쟁이 끝났다.

어중간한 국력의 국가가 아닌, 대륙에서 손꼽히는 부국(富國)들 간의 전쟁이었기에.

승패가 갈린 이후에도 두 왕국의 관료들은 여전히 전쟁 같은 일상을 이어가는 중이었다.

이전 두 왕국 간의 전쟁에선 종전 후의 이런 번거로운 과정 같은 건 존재하지도 않았는데.

3차 왕국 전쟁까지는 매번 그 기간만 최소 1년이 넘게 지속된 데다. 한쪽이 망하기 직전의 상황까지 몰리거나 두 왕국 모두 망할 위기에 처할 때까지 처절하게 싸움을 이어갔던 터라, 전후처리 과정은 오히려 깔끔하기 그지없었다.

둘 중 하나가 완벽한 승리를 거뒀던 1,2차 왕국 전쟁 때는 전쟁이 끝난 이후 수년간 가혹할 정도의 수탈과 핍박이 이어졌었고.

두 왕국 모두 망할 위기까지 몰렸던 3차 왕국 전쟁이 끝난 후에는 마치 양국 사이앤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각자의 내정을 살피기 바빴으니까.

하지만 4차 왕국 전쟁의 경우, 개전부터 종전까지의 모든 과정이 고작 한 달이 조금 넘는 기간에 마무리되어 버린데다.

두 곳의 전선 모두 첫 번째 기간트 대전에서 일방적인 승패가 갈려 버리는 바람에 국경 요새를 내주는 것을 기점으로 몇 개의 영지들을 전광석화처럼 비워버렸고.

그로 인해 이렇다 할 재산이나 인명피해랄 것이 발생하지 않았다.

그나마 서부전선의 기간트 대전이 고작 몇 시간 만에 끝나버린 탓에, 기간트들의 후퇴를 돕던 왕국군 수만이 희생된 것이 가장 큰 인명피해였고.

재산상의 피해 역시 재기 불능이 된 기간트를 제외하면, 카이샨 동부전선의 보급기지 역할을 하던 모안다 영지의 보급창고가 홀라당 타버린 것이 전부였다.

이는 왕국민 소개를 위해 주어진 촉박한 시간과 더불어, 자신들의 승리를 의심치 않은 두 왕국이 상대에게 내주게 된 영지의 시설물들을 파괴하지 않았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만약 전쟁의 결과를 예측할 수 있었더라면, 적어도 카이샨 왕국이 알마탄 요새를 포함한 세 개의 영지를 온전한 상태로 내어주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로 인해 알마탄 요새와 사막의 대표적인 운송 수단인 바잘의 걸음 기준 알마탄과 4일 거리에 있는 전략적 지리적 요충지인 ‘바스코잔 영지’ 그리고 그곳에서 다시 3일 거리에 존재하는 ‘트리키 영지’를 모두 온전한 상태로 자국 영토에 편입하게 된 마라몬트 왕국은 그야말로 자다가 돈벼락을 맞은 상황이라 할 수 있었다.

물론 알마탄 요새와 바스코잔 영지에 비해 별다른 이점이 없는 트리키 영지는 마라몬트 왕국 입장에서도 계륵 같은 존재일 수밖에 없었는데.

이는 마라몬트 왕국이 탐을 내는 다르다넬 산맥의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선, 바스코잔 영지를 기점으로 하여 국경선을 다시 그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본인들에게 쓸모가 없다고 애써 점령한 영토를 무상으로 돌려줄 이유는 없었다.

그렇기에 양국 관료들의 ‘트리키 영지’를 주제로 한 협상이 몇 날 며칠 동안 이어지고 있었다.

“위대하신 국왕 전하께서 관대함을 보이시는 것이오. 그러니 ......정도는 받아야 하겠소. 이정도면 그대들에게도 손해는......”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대들의 속셈을 모를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사방이 뻥 뚫린 트리키 영지를 국경 요새로 삼는 게 부담스러운 것 아니오! 그 금액에는 응할 수 없소! ......정도라면 우리도 생각을......”

“뭐? 고작 그 돈으로 영지 하나를 날로 먹겠다고? 양심은 어따 팔아 잡수셨소? 흥,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더 이상 협상은 없을 것이오. 우리 입장에선 10년간 방치한 채로 내버려 두면 그만이오. 아마 10년 뒤에 그대들은 영지의 흔적만 남은 땅덩어리를......”

“이, 이런 비열한! 트리키 영지는 원래부터 우리 왕국의... 젠장, 좋아! 그럼 .......는 어떻소? 이 이상을 원한다면 우리도 트리키 영지를 포기 할 수밖에......”

그렇지 않아도 천문학적인 전쟁배상금을 부담해야만 하는 카이샨 왕국 입장에선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지만.

그렇다 한들 자국의 영토를 일부나마 되찾아 올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타국의 공증하에 승패가 결정된 전쟁이었음으로, 대륙의 관례에 의해 이후 10년간 마라몬트 왕국의 영토를 침범할 수 없게 되어버린 카이샨 왕국이었고.

이 기회를 놓친다면 영토를 회복할 기회는 아무리 빨라도 10년 뒤에나 찾아올 터였기에.

카이샨 왕국은 눈물을 머금고 비싼 값에 트리키 영지를 되찾아 갈 수밖에 없었다.

이로써 새롭게 마라몬트 왕국에 편입된 바스코잔 영지와 카이샨 왕국이 되찾은 트리키 영지를 기점으로.

두 왕국 서부의 새로운 국경선이 완성되었다.

#2

전쟁은 수많은 영웅을 배출한다.

이번 왕국 전쟁의 가장 빛나는 영웅은 누가 뭐래도 서부전선과 알타몬트 대회전을 승리로 이끈 총사령관 윌리엄 다이슨 후작이었다.

물론 천성이 군인인데다 소탈한 성격의 소유자인 그는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찬사를 매우 부끄럽게 여겼다.

‘부끄럽군. 누가 뭐래도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끈 영웅은 스노우경일진데...’

‘대가를 받고 의뢰를 수행했을 뿐입니다. 전쟁 영웅이란 말과는 어울리지 않죠.’

‘그렇다고 한들 진실은 달라지지 않는 법이지. 어떤가? 만약 왕국에 남겠다고 한다면 최소한 백작의 작위를 약속...’

‘죄송하지만... 제가 귀족이 되고자 했다면 이곳까지 올 일도 없었을 겁니다.’

‘끄응... 어쩔 수 없군. 그런데 자네, 혹시 결혼은 했나? 마침 왕국의 둘째 공주이신 비앙카님의 나이가......’

부끄러워하는 와중에도 나를 마라몬트 왕국에 붙잡아두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는 걸 보면... 그는 진정한 충신이라 할 만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마라몬트 왕국에는 더 이상 볼 일이 없었기에, 그가 어떤 감언이설을 내뱉던 내 관심을 끄는 건 불가능했다.

게다가 왕국의 최고 실세로 떠오른 윌리엄 다이슨 후작은 전후 처리 과정까지 직접 주도해야만 했고.

말 그대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진 그가 나를 찾는 빈도는 줄어들 수밖에 없었기에, 나는 전쟁이 끝난 후 일주일간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휴가를 즐길 수 있었다.

그리고 알타몬트 대회전이 끝난 지 정확하게 8일째 되는 날.

윌리엄 다이슨 후작의 심복인 노만 리오넬 백작이 나를 찾아왔다.

그 역시 전쟁 초기부터 꾸준히 전공을 올렸고, 마지막 대회전에서는 적의 우군을 박살 내며 마라몬트 왕국의 승리를 결정짓는 엄청난 전공까지 올렸기에 승작까지 거론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 그가 나를 찾아온 이유는...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군. 드디어 물건이 도착했네. 기대해도 좋을 거야. 하하하하하......”

마지막 의뢰(전장에서 용병왕 삭제)에 대한 보상이 준비되었기 때문이었다.

#3

전쟁이 끝난 이후, 나는 마라몬트 왕국의 새로운 군사 요충지로 떠오른 알마탄 요새에 머물고 있었다.

점령 이후 꽤 오랜 기간 머물러 익숙하기도 했고, 국경 요새였던 만큼 기간트 소환을 방해하는 마법진이 설치되어 있지 않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물론 내 경우엔 ‘파일럿(S)’ 특성으로 인해 아무런 제한 없이 소환이 가능했으나, 그런 걸 드러내고 다닐 이유는 없었기에 언제든지 기간트를 소환할 수 있는 이곳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공성전은커녕, 이렇다 할 전투조차 벌어지지 않았던 알마탄 요새였지만.

적어도 10년간은 국경 요새의 역할을 할 일이 없어졌기에, 다르다넬 산맥의 자원을 유통하기 위한 상업 영지로의 변화를 꾀하는 중이었고.

이를 위한 각종 공사가 진행 중인 요새의 내부는 매우 부산한 상황이었다.

이와는 반대로 4일 거리에 위치한 바스코잔 영지의 경우, 새로운 국경 요새의 역할에 걸맞게 성벽과 건물들을 증축 또는 개축하느라 정신이 없다는 말을 들었다.

“지내기에 불편한 점은 없었나?”

“뭐, 나쁘지 않았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군. 사령관님이 어찌나 신경을 쓰시는지, 괜찮은 물건을 들여오느라 시간이 지체되고 말았어.”

“상관없다. 제대로 된 물건을 준비했다니, 오히려 이쪽이 고마워해야 할 일이지.”

“큭, 역시 자넨 특이해. 다른 데는 지독하게 말을 아끼면서, 기간트에 관해서 만은 유독 말이 길어지는군.”

“부정하지는 않겠다.”

난 원래부터 그다지 말이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지금처럼 짧고 무뚝뚝한 말투로 일관하는 타입도 아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낯선 세계에 떨어져, 무지(無智)를 감추기 위해 말을 아끼던 습관이 몇 달에 걸쳐 입에 붙어 버린 것일 뿐.

‘뭐, 솔직히... 하다 보니 엄청 편하기도 하고.’

숙소를 나와 분주히 돌아다니는 인파를 헤치며 도착한 곳은 요새 내부의 기간트 훈련장이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신장이 8미터에 조금 못 미치는 기간트 한 대가 위풍당당한 자태를 자랑하고 있었다.

“오......”

나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탄성.

수백 기의 기간트가 뒤엉켰던 알타몬트 대회전에서는 물론, 이번 왕국 전쟁이 벌어졌던 기간 내내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기간트였다.

전체의 80% 정도가 붉은색인 바디는 ‘청기사’라는 이명으로 불리는 제라스와 극명한 대비를 이루었는데.

발과 무릎, 손목, 상체 장갑의 전면만이 검은색으로 도색되어 있어 화려하지만 번잡하지는 느낌은 들지 않는 외형이었다.

개인적으로 푸른색보다는 붉은색을 좋아했기에 기체의 외형은 더없이 마음에 들었다.

곤충의 머리를 닮은 헤드에는 60cm가량의 짧은 뿔이 달려 있었고, 양쪽 어깨 위로도 두 개의 뿔이 우뚝 솟아 있었으며, 멋들어진 문양이 새겨진 어깨 갑주는 끝이 두 갈래로 갈라져 화려한 물결무늬를 이루고 있었다.

아란델 같은 엘프제 기간트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누가 봐도 벨런스형 기체임을 알 수 있을 정도로 날렵한 몸매였는데.

크로스보우나 제라스에 비하면 몸통의 두께가 2/3 정도에 불과했다.

게다가 신장은 그보다 최소 50cm 이상은 큰 듯했으니 이전 두 기체와는 더더욱 비교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된 거지? 약속대로라면 분명...”

“아, 무슨 말인지 알겠군. 이리로 와보게.”

노만 리오넬 백작은 기간트의 뒤편으로 나를 잡아끌었고.

“오오......”

기간트의 뒷모습을 본 나는 또다시 저도 모르게 탄성을 터뜨리고 말았다.

기간트의 후면 외부장갑 양쪽에는 두 대의 거대한 마력포가 달려 있었는데, 정면에서 본 양어깨의 뿔이 실은 마력포의 포신이었던 셈이다.

내 탄성에 만족한 표정을 지은 노만 리오넬 백작이 설명을 이어갔다.

“이름은 가이아, 출력은 1700rp지만 1800rp인 카트린보다 8만 골드나 더 비싼 녀석이지. 변형 마력포를 제작하는 데 들어가는 자원이 엄청난 탓이라더군. 샌포드에서 저 변형 마력포가 장착된 기체는 비교적 신형 모델인 가이아와 트라이얼, 바르칸뿐이야. 뭐, 너무 비싼 탓에 잘 팔리지 않아 죄다 단종시켜 버리긴 했지만 말이야. 어쨌든 저건, 자네의 그 말도 안 되는 고속 기동에 고정식 마력포는 거추장스러울 거라는 후작님의 배려일세.”

이건 좀 감동인데...

용병왕을 전장에서 삭제시켜 주는 대가로 내가 요구한 것은 최소 1500rp급의 샌포드제 기간트였다.

그런데 무려 200rp나 높은 1700rp급인데다.

그렇지 않아도 조금 불편할 듯 하던 고정식 마력포까지 해결된 기체라니.

나는 정말 오래간만에 진심을 듬뿍 담아 입을 열었다.

“정말 멋지군... 후작님께 감사의 인사라도 드려야겠어.”

그런 생각이 절로 들 만큼.

기간트 ‘가이아’는 멋진 녀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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