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투기 버리고 기간트 탑니다-99화 (99/169)

99화 기간트 '가이아'(2)

#1

알마탄 요새 내부에 존재하는 다섯 개의 펍 중 한 곳.

펍의 내부는 사막 왕국 특유의 인테리어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었기에, 중세 유럽과 유사한 마라몬트나 루페른, 비다드 왕국의 그것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수십 개의 테이블 중 두 개를 연결해 놓은 자리를 차지한 채, 한 병에 3골드를 가뿐히 상회하는 비싼 술들만 주문해 주인장을 흡족하게 만들어준 일행의 인원은 총 일곱이었다.

의아한 것은, 다른 테이블에 자리 잡은 사람들이 하나 같이 그들의 눈치를 살피며 목소리를 낮추고 있다는 점이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의 정체가 이번 전쟁의 숨은(이라고 하기엔 너무 많은 이들이 그의 존재를 알고 있었지만) 1등 공신인 스노우와 그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적지 않은 공을 세운 용병 4인방, 그리고 몇 번의 작전을 함께한 상급 엑스퍼트 란셀 티그리스와 요한슨였기 때문이다.

이곳은 알마탄 요새의 세 군데 펍 중 술값이 가장 비싼 곳이었고, 그만큼 군의 고위 간부나 실력 있는 용병들이 주로 찾는 장소이기도 했다.

그런 만큼, 장내의 인물들이 스노우를 비롯한 서부 전선의 영웅들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 이상한 일이었다.

멀찌감치 떨어져서 바라보는 영웅들의 분위기는 화기애애 그 자체였지만, 실상 그들이 앉아 있는 테이블의 상황은 그리 좋지만은 않았다.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 자리에서 가장 영향력이 높은 스노우의 기분이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던 것.

꿀꺽

독하기로 유명한 크샨트 제국산 위스키를 단번에 털어 넣은 스노우가 인상을 찡그리며 입을 열었다.

“대금은 모두 지급된 걸로 아는데... 대체 왜 죄다 이곳에서 죽치고 있는 거냐?”

부른 적이 없음에도 저들 멋대로 자리를 차지하더니.

뻔뻔한 얼굴로, 마치 원수라도 들린 양 술을 퍼마셔 대는 인간들을 못마땅한 눈길로 훑어본 스노우가 손가락을 들어 일행 중 한 명을 가리켰다.

“말해봐, 뭣 때문에 이곳을 떠나지 않는 거지?”

그러자 갑작스럽게 지목당한 저스틴 크로비스가 어색하게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아니 뭐... 전쟁이 막 끝나기도 했고.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때로는 휴식도 필요하지 않... 젠장, 못 해 먹겠군. 솔직하게 말하지. 다른 놈들은 모르겠고, 난 대장이 새로 얻었다는 그 샌포드제 기간트가 궁금해서 남아있었을 뿐이야. 내가 카트린을 구입했을 때는 설계도조차 존재하지 않았던 녀석이거든. 그런 게 만들어졌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실제 타고 다니는 녀석은 본 적이 없기도 하고. 모두 알다시피... 가성비가 개판이라고 소문난 녀석이니까.”

저스틴 크로비스가 첫 테이프를 끊자, 나머지 일행들 역시 모두가 한마디씩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대장, 혹시 이펜타르크 제국엔 관심 없어? 내가 그쪽 길드장이랑 인연이 있거든. 마침 좋은 의뢰가 있는다 나와 함께......”

이건 이펜타르크 제국 황태자 직속 비밀기사단의 일원인 맷 스팅리였고.

“지금 이펜타르크 제국에 발을 들이면 지저분한 내전에 휩쓸릴 뿐입니다, 단장님. 차라리 저와 함께 하르세리안 왕국(엘프 왕국)으로 가시죠. 저 역시 엘프의 피가 흐르는 몸. 꽤 좋은 조건으로 엘프들의 의뢰를 맡을 수......”

이건 엘프 나라 왕자님인 카일 어네스트의 사탕발림.

“어리석군요, 카일. 제국의 내전이야말로 용병에겐 더없는 기회란 걸 모른단 말인가요? 단장님, 제 생각에도 이펜타르크 제국으로 가는 것이 가장 좋은 선택......”

그리고 마지막으로 맷 스팅리와 같은 이펜타르크 제국 출신 공작가 금지옥엽의 꼬득임이 이어졌다.

하나같이 음흉한 속내를 감추고 있는 일행들을 바라보며 내심 혀를 찬 스노우.

그가 싸늘한 표정을 유지한 채 한마디를 내뱉었다.

“난 더 이상 네 녀석들의 대장도 단장도 아니다. 그리고 누군가와 함께 움직일 생각도 없어. 쓸데없는 데 힘쓰지 말고 각자 갈 길로 가도록.”

씨알도 먹힐 것 같지 않은 스노우의 태도에, 흑심 가득한 네 사람의 입이 조개처럼 다물어졌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입을 연 사람이 있었는데.

다름 아닌, 네 사람 중 그나마 가장 순수한 의도(?)를 지닌 저스틴 크로비스였다.

“좋아, 더 이상 귀찮게 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지. 대신 내일 딱 한 번만 어울려주지 않겠어? 그럼 난 미련 없이 이곳을 떠날 거야.”

스노우의 새 기간트에 대해 이상할 정도의 집착을 보이는 저스틴 크로비스를 의아한 눈길로 바라보던 란셀 크로비스가 물었다.

“저스틴, 대체 왜 그렇게 가이아를 보고 싶어 안달이 난 거죠?”

그의 질문을 받은 저스틴 크로비스가 울분에 가득 찬 어조로 말했다.

“빌어먹을, 출력이 200rp나 낮은 기체야! 그런데 고작 마력포의 위치를 조정할 수 있다는 이유 따위로 내 사랑스런 카트린보다 훨씬 더 비싼 값이 매겨지다니... 난 인정할 수 없어! 샌포드 병기창 놈들의 머리가 어떻게 되어 버린 게 틀림없다고!”

물론 이유를 듣고 납득한 이는 없었다.

하지만 스노우로서도 굳이 거절할 이유가 없는 일이었기에, 작게 고개를 끄덕인 그는 좌중을 둘러보며 낮은 어조로 입을 열었다.

“좋아, 어차피 시험 운행을 해 볼 생각이었으니 상대해 주지. 네 사람 모두 내일 오전 10시까지 훈련장으로 나오도록.”

말을 마친 스노우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더니, 일행의 대답을 듣지도 않은 채 펍을 나가버렸고.

벙찐 표정의 네 오너는 짧은 시간 그가 나간 문을 멀뚱히 바라보더니.

잠시 뒤 스노우의 뒤를 따라 펍을 나섰다.

그리고 남겨진 란셀 티그리스와 요한슨은...

“갔군.”

“네, 모두 가버렸군요.”

“그런데...”

“무슨 문제라도?”

“......지 않았어.”

“네?”

취기로 인해 란셀 티그리스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한 요한슨이 재차 물었고.

얼굴이 벌게진 란셀 티그리스가 펍 안이 떠나가라 고함을 질렀다.

“아무도 계산을 안 했다고!”

“......!”

그랬다.

용병 오너들 중, 무려 수십 골드에 해당하는 술값을 계산한 이가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결국 그날의 술값을 절반씩 부담한 란셀 티그리스와 요한슨.

그들은 치밀어 오르는 분노로 인해 밤잠을 설쳐야만 했다.

#2

오후 1시가 막 지난 시각.

우리는 알마탄 요새에서 대략 10km쯤 떨어진 암석지대에 서 있었다.

그곳에는 근방에선 보기 힘든 거대한 돌산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이곳으로 온 이유는 가이아에 장착된 마력포의 위력을 시험해보기 위함이었다.

기간트의 기동이나 대련이라면 모르겠지만, 그 위력을 예측할 수 없는 마력포의 시험 운용을 요새 내부의 훈련장에서 진행하는 건 불가능했다.

‘마, 말도 안 됩니다! 평범... 하지는 않지만, 아무튼 일반적인 마법만으로도 훈련장이 이 모양 이 꼴이 되어 버렸는데! 마력포를 쏘겠다니요? 절대로, 절대로 안 됩니다!’

죽을힘을 다해 말리던 보급 장교의 얼굴이 눈에 선했다.

오전에 이루어진 두 번째 1대 4 대결.

이전 기체인 제라스에게조차 압도적으로 패했던 에이스 4인방이었기에, 그닥 큰 기대는 하지 않았었다.

그들과 나의 실력 차가 너무 컸던 탓에, 대련을 통해 제라스와 가이아의 성능 차를 정확하게 비교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던 것이다.

게다가 한 시간여의 기동으로 알아낸 바에 따르면.

200rp의 출력 차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애초에 두 기간트에 탑승했을 시의 기동력은 그리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그만큼 이펜타르크의 기간트 제작 기술이 뛰어나다는 뜻이겠지.’

특별한 능력이 없음에도, 서대륙에서 이펜타르크 제국산 기간트가 가장 많이 팔리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래도 제라스에 비해 훨씬 더 날렵한 몸매라는 건 상당한 강점이니까.’

절대적인 속도에서는 별 차이가 없을지언정, 순간의 반응속도는 확실히 가이아쪽이 눈에 띄게 빨랐는데.

이는 확연하게 비교되는 몸통의 두께와 중량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그런 이유로 4인의 에이스 오너를 상대하는 것이 이전보다 한결 수월해질 수밖에 없었고.

채 5분도 지나지 않아 모조리 훈련장의 바닥에 나뒹군 그들은, 몇 번이고 오뚝이처럼 일어나며 재도전의 의지를 불태웠지만.

그때마다 쓰러지는 횟수를 한 번씩 늘려갈 뿐이었다.

결국 한 시간의 대련에서 각각 7,8회씩 바닥에 나뒹군 그들은 허탈한 표정으로 기간트를 소환 해제해야만 했다.

아, 대결이 끝난 뒤 한 가지 헤프닝이 있었는데.

내 손목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헬레나 오도넬이 불현듯 눈을 크게 뜨며 물어온 것이다.

‘어... 그런데 제라스는 어디에? 그러고 보니, 지금 기간트를 바꿔 탄 지 고작 하루...’

‘어, 맞아!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대장, 원래 타던 녀석은 어쨌어?’

‘아니, 그보다... 고작 하루 전에 기간트 갈이를 끝낸 인간한테, 우리 넷이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한 거라고?’

‘혹시 단장도 엘프의 피를 이어받은 겁니까? 오너로 수백 년을 살아온 게 아니고서야...’

‘정신 차려, 카일. 기간트가 처음 만들어진 건 고작 150년 전이라고.’

‘아니,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말 좀 해봐, 대장! 대체 제라스는 어따가......’

내 손목을 감싸고 있는 네스트의 색이 파란색에서 붉은색으로 바뀐 것을 인지한 오너 4인방.

그들은 그제서야 화들짝 놀라며 쉴 새 없이 떠들어대기 시작했었다.

‘애초에 기간트를 바꿔 탄 다음 날 기동 훈련을 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고.’

‘이런 미친 짓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고 있었다니...’

‘어쩔 수 없었습니다. 단장이 워낙 괴물 같은 인간인지라.’

‘어떻게 계약 해지를 하고도 저리 멀쩡할 수가 있지? 그것도 제라스 같은 중급 기간트와의 계약을...’

그들이 뭐라고 떠들건, 나는 그들을 향해 단 한 마디만을 던진 뒤.

‘팔았다.’

이후 그에 대한 질문에는 아무런 대꾸도 해주지 않았다.

조악하기 그지없는 변명임이 분명했지만...

‘내가 그렇다는 데 지들이 어쩔 거야?’

이곳은 ‘실력’이 곧 ‘법’인 세계.

내게 끝까지 따지고 들 만큼 간 큰 인간은, 적어도 이곳 알마탄 요새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제라스는 애초부터 비공식적인 일에 사용할 생각으로 두꺼운 외부 장갑을 장착한 기체를 선택한 것이었는데.

용병왕과의 전투에서 엄청난 경험치를 획득한 덕에, 조금 더 빠르게 일을 진행할 수 있게 되었다.

‘변형 한계가 꽤 올랐으니, 장갑을 압축시키고 얼굴만 좀 바꿔주면... 제법 쓸만 해질 테지.’

안티가의 경우로 유추해 볼 때, 변형 한계를 가득 채운 제라스의 성능은 최소 30% 이상 증가할 확률이 높았다.

상념을 멈춘 나는 서서히 가이아의 마력엔진에 과부하를 걸었다.

1689, 1707, 1726, 1742...... 1762

일반적인 오버클럭의 한계를 훌쩍 뛰어넘는 수준까지 마력엔진의 출력을 끌어올렸고.

이를 통해 증폭된 마력을 양쪽 어깨 위로 올라온 두 마력포의 포신에 모조리 때려박았다.

고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

고유스킬 ‘마력지체(S)’에 의해 한 차례 더 증폭된 마력으로 인해 피처럼 붉은빛을 발산하기 시작하는 마력포.

나는 각각 썬더 캐논과 플레임 캐논 마법이 내장되어있는 양쪽 마력포에 블레스트 마법을 인첸트 한 뒤.

마지막으로 조준 스킬을 사용해 거대한 돌산의 정중앙을 겨누었다.

모든 준비가 끝났고.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천지가 개벽하는 듯한 소음이 터져 나옴과 동시에.

황금빛 전류와 붉은 광선이 양쪽 포신을 통해 뿜어져 나왔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두 광선은 돌산의 중앙에 적중하며 또 한 번 엄청난 굉음을 발생시켰고.

사방으로 비산하는 돌무더기와 하늘 높이 치솟아 오르는 엄청난 크기의 먼지구름을 생성해 냈다.

잠시 뒤 먼지구름이 가라앉은 자리에는...

“저게...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광경이라고?”

“정확하게는 기간트가 만들어 낸 거지.”

“타고 있는 인간이 괴물이라 가능한 겁니다.”

“하, 아무리 그래도... 단 한 방에 지형 자체를 바꿔버리다니.”

양쪽 어깨에 견착 된 마력포의 포신에서 연기를 뿜어내고 있는 붉은 기간트.

그 멋들어진 기체의 시선이 향하고 있는 곳에는...

한때 높이 80여 미터, 둘레 수백여 미터에 이르던 거대한 규모의 바위 군집이.

모래로 뒤덮인 지면에 그 흔적만을 남긴 채.

자취를 감추어 버린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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