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변형(1)
#1
‘전쟁이라... 확실히 다르긴 했어.’
알마탄 요새의 성문을 나서며 40일이 조금 넘는 기간 동안 벌어졌었던 마라몬트와 카이샨의 전쟁을 회상했다.
특성을 각성한 이후 무수히 많은 전투를 치러왔지만, 국가 간의 전쟁이란 걸 경험해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물론 규모만으로 따지자면, 지구에서 겪었던 S급 던전 브레이크 중에는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적을 상대해야 했던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당시 내게 주어진 역할은 지상에 우글거리는 몬스터들을 향해, 그들의 손이 닿지 않는 까마득한 하늘 위에서 일방적인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었기에.
밀고 밀리는 전황으로 인한 긴장감 같은 걸 느껴볼 기회 따위는 없었다.
반면, 비록 두 곳의 전선 모두 일방적으로 승패가 갈려버리기는 했으나.
그로 인해 최후의 기간트 대전이 벌어지기 직전까지, 오히려 양국이 팽팽하게 맞서는 상황이 연출되었고.
짧은 기간에 마무리된 전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전략과 전술들이 판치는 현장을 제대로 경험할 수 있었다.
물론 두 왕국의 수뇌부와 참모진들이 온갖 전략과 전술을 구상해내고.
그걸 실제로 전장에서 펼쳐 보였다 한들...
‘결국 승패는 기간트 전투 한 번으로 결정되어 버렸지.’
어찌 보면 허무한 결론이랄 수도 있겠지만.
기간트 간의 대전 몇 번으로 전쟁의 결과가 결정되어 버리다 보니, 이전 시대의 전쟁에 비해 사상자 규모의 단위 자체가 달라질 수밖에 없었고.
이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평범한 이들에게 있어, 분명 축복이라 할 만한 일이었다.
물론 그런 인류애적인 사항은 내 관심사와는 거리가 멀었다.
제우스와 함께 이 곳, 오르비스 대륙에 불시착한 뒤로 수개월.
그동안 많은 일을 겪었고, 기어이 국가 간의 분쟁에까지 발을 담갔다.
전쟁은 끝났고, 약속된 보상을 받았다.
그리고 왕국 전쟁이 마무리된 현재.
나는 두 가지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첫 번째는 1700rp급 기간트 가이아를 손에 넣은 이상.
적어도 기간트에 탑승하고 있는 상황에 한해서는 내 신변을 위협할 만한 존재가 그리 많지 않으리라는 것.
그리고 두 번째는...
“빌어먹을 용병왕...”
이 세계엔 기간트 오너가 아닌, 스노우라는 마검사의 안전을 위협할 수 있는 존재가 너무나도 많다는 것이었다.
천외천의 강자인 소드마스터 용병왕은 말할 것도 없었고.
마라몬트나 카이샨 군부의 실력자들과 최상위권 용병들 역시, 언제든 내 신변을 위협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춘 인물들이었다.
직접 대면한 바 있는 브라이드 변경백 가문의 알버트 자작이나 마라몬트 서부군 기간트 부대 대장인 로버트 서튼의 경우, 지금의 내가 전력을 다한다 해도 채 20합을 버티기 힘든 강자였고.
용병 에이스 4인방 역시, 최상급 엑스퍼트인 카일 어네스트가 포함된 상태라면 그중 둘을 한꺼번에 상대하는 건 무리였다.
‘무슨 수를 쓰든... 실력을 키우는 수밖에 없어.’
방심한 상태에서 용병왕 수준의 강자에게 기습을 당하기라도 한다면.
높은 확률로 그날이 스노우라는 인간의 제삿날로 기록될 될 확률이 높았다.
무한에 가까운 마력량과 마력 회복 속도로 인해, 일정 수준 이상의 충격에 자동으로 반응하는 ‘베리어(C)’ 스킬을 24시간 발동시켜 둘 수 있긴 했지만.
최상급 엑스퍼트 이상의 강자가 시도하는 기습에는 고작 알람 역할 정도나 가능할 뿐, 제대로 된 방어 효과를 기대할 수는 없었다.
각성 이후 지구에서 보낸 수년간, 나는 스스로 강해지는 것에 명확한 한계를 실감했었다.
그렇기에 ‘파일럿(S)’ 특성을 극대화할 수 있는 기체 개발에 집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온갖 이적이 난무하는 이곳 오르비스 대륙이라면?
“분명 방법이 있을 거야.”
기껏 기간트라는 존재를 만나 ‘한계’라는 족쇄를 벗어던질 수 있게 되었건만.
기습 따위로 허무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건 절대로 용납할 수 없었다.
더 높은 성능을 지닌 기간트가 존재하는 이상, 나 역시 더욱더 강해질 수 있을 터.
그 한계가 어디까지일지 너무나도 궁금했다.
그러니, 적어도 용병왕 같은 초강자의 습격에도 한 합 정도는 버틸 수 있는 실력을 갖추어야만 했다.
딱 한 번의 공격만 막아낼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했으니까.
그 한 번의 기회로 인해, 나는 기간트를 소환할 수 있을 테고.
기간트를 소환할 수만 있다면.
더 이상 그 누구도 두렵지 않았으니까.
#2
“결국 떠나버렸군요.”
알마탄 요새의 성문을 지나 사막 저편으로 유유히 사라지는 스노우를 바라보던 맷 스팅리... 아니, 이펜타르크 제국 황태자 직속 비밀기사단 ‘칼리드(영광)’ 소속 기사 네드 험비가 아쉬움이 그득한 어조로 말했다.
네드 험비의 검은 피부와 대비되어 창백하게까지 느껴지는 새하얀 얼굴의 여자가 그의 말을 받았다.
“아쉽겠어? 그라면... 크리스에게 큰 도움이 되었을 테니.”
말을 내뱉는 와중에도, 그녀의 시선은 멀어져가는 스노우의 등에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성문 밖까지 따라가 스노우를 전송한 저스틴 크로비스, 카일 어네스트와는 달리.
네드 험비와 그녀, 헬레나 발렌타인(본명)은 알마탄 요새의 높은 성벽 위에서 멀어져가는 스노우를 시선으로나마 배웅하는 중이었다.
당당한 체구, 검고 험악한 얼굴의 네드 험비가 어울리지 않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정체까지 까발려가며 원하는 조건은 뭐든 들어준다고 했는데도 당장은 생각이 없다고 하더군요.”
“제국으로 갈 생각이 없다? 그보다... 당장은?”
“네, 아예 생각이 없는 건 아닌 것 같았습니다. 제 말도 꽤 집중해서 들어주더군요. 이것저것 묻기도 하고... 결국엔 그냥 떠나버리고 말았지만.”
대화를 나누는 사이, 스노우의 모습은 상급 엑스퍼트인 두 사람의 시력으로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멀어져 버렸다.
헬레나 발렌타인은 네드 험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것저것? 그가 뭘 궁금해했지?”
“그건... 잠깐, 아무리 공녀님이라 해도 모든 정보를 다 알려드릴 순 없습니다. 아직 저희 쪽에 합류하겠다, 확답을 주신 것도 아니니까요.”
헬레나 발렌타인이 미간을 찡그렸다.
팔짱을 낀 채 잠시 생각에 잠겼던 그녀가 이내 입을 열었다.
“어쩔 수 없어. 아버지는... 크리스가 황위를 이어받는다면 끝까지 충성을 다할 분이시지만, 절대로 제국의 내전에 개입하실 분은 아니니까. 대신... 발렌타인가의 공녀가 아닌, 아헨달의 일곱 그림자 중 하나로써 꽤 쓸만한 정보를 주지. 대신 대장... 스노우경과 나눈 얘기를 모두 털어놔야 해. 어때?”
“그야 정보의 질에 따라...”
“트리안이 손잡고 있는 외부 세력을 알려주지.”
“......!”
트리안 이펜타르크라면 제국의 황위를 놓고 3파전을 벌이고 있는 3명의 후보 중 하나인 6황자였다.
타고난 체질 탓에 ‘무(武)’로는 조금도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지만, 총명한 두뇌와 뛰어난 처세술을 활용해 3인의 황제 후보 중 가장 많은 ‘수’의 귀족을 휘하에 두고 있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정통성이라는 ‘명분’에서 앞서는 데다, 제국 귀족 중 가장 강력한 세력을 지닌 티린스 공작가를 배경(외가)으로 둔 황태자 크리스토퍼 이펜타르크.
제국군의 1/3을 장악하고 있는 남부의 패자 암셀 후작(외삼촌)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으며, 본인 역시 무려 32세에 최상급 엑스퍼트에 이른 천재 검사인 3황자 메슈트 이펜타르크.
다른 후보인 두 형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황위를 이을 확률이 낮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제국의 황위 계승을 위한 내전에 외부 세력을 끌어들였다는 뜻이었다.
이는 설령 경쟁에서 승리한다 한들 정치적으로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을 테지만.
어차피 황위 경쟁에서 패배한 황자에게 ‘죽음’ 이외의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그의 선택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제국과 황태자에 대한 충성만이 삶의 전부인 네드 험비에게, 그의 선택을 이해해줄 생각 따윈 눈곱만큼도 없었다.
“트리안 이 어리석은 새끼가...”
황자에 대한 예의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발언.
하지만 헬레나 발렌타인 역시 별반 다르지 않은 생각을 지니고 있었기에 이를 문제 삼을 이유는 없었다.
네드 험비가 알고 있는 헬레나 공녀는 허튼소리를 할 인물은 아니었고.
대륙 최고의 정보 길드인 아헨달의 그림자가 지닌 위상을 고려할 때, 그녀의 말은 사실일 확률이 매우 높았다.
“좋습니다. 그 씹어먹을 놈들의 정체를 알려주신다면, 스노우경과의 대화 내용을 고스란히 말해드리죠.”
“좋아, 한 번만 말해 줄 테니 잘 들어. 트리안이 끌어들인 건......”
헬레나 발렌타인의 입에서 나온 그 ‘국가’의 이름을 들은 네드 험비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놈들이라면 뭐... 아무튼 감사합니다, 공녀님. 황태자님께 큰 도움이 될 것 같군요.”
“거래일 뿐이니 고마워할 필요는 없어. 그럼 이제... 네가 말할 차례야.”
피식 미소 지은 네드 험비가 말을 이었다.
“큭, 스노우경에게 관심이 많으시군요. 혹시 그를 남자로...”
“죽고 싶어?”
헬레나 오도넬의 싸늘한 눈길에 앗 뜨거라 두 손을 휘휘 젖는 네드 험비.
그는 어색한 미소를 띠며 지난밤 스노우와 나누었던 대화를 고스란히 들려주었다.
“하하... 그와 얘기를 나눈 장소는 야심한 밤, 그의 숙소였습니다. 마치 제가 찾아올 걸 알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제국의 공녀로서도, 정보 길드 ‘아헨달의 그림자’의 간부로서도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신비한 사내 스노우.
이미 길드에 ‘특급 관찰 인물’ 지정까지 요청해 놓은 헬레나 발렌타인은 단 하나의 정보도 놓칠 수 없다는 듯 네드 험비의 말에 집중했다.
그녀가 예상하기에...
스노우란 인물의 이후 행보가.
이곳 오르비스 대륙에 엄청난 파란을 몰고 올 것이 분명했으므로.
#3
주위를 둘러봐도 보이는 것이라곤 온통 모래뿐인 사막.
츠르르르르르르르르......
멋들어진 외양의 바이크 한 대가 엄청난 속도로 사막의 모래 위를 질주하고 있었다.
바이크의 주인은 스노우.
새로이 마라몬트 왕국에 편입된 알마탄 요새를 떠나온 그는 대륙의 북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런데 마라몬트 왕국의 북쪽이라면... 불과 며칠 전까지 죽고 죽이는 전쟁을 치른바 있었던 철천지원수 카이샨 왕국이 존재하는 방향이었다.
이번 왕국 전쟁에서 카이샨 왕국의 오너들을 가장 많이 살해한 인물은 다른 누구도 아닌 스노우 본인이었고.
비록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지만, 전쟁의 판도 자체가 그로 인해 달라져 버렸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
카이샨 왕국 입장에서는 척살 목록의 첫 페이지 첫 줄에 그의 이름을 올린다 한들 하등 이상할 게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정작 카이샨 왕국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스노우의 표정은 태연함 그 자체.
지금의 그에게, 카이샨 왕국은 드워프 왕국 ‘엘가드’에 도착하기 위한 최단 경로상에 위치한 경유지일 뿐이었다.
‘겸사겸사 정보도 얻을 수 있을 테고.’
엘가드의 동맹국인 카이샨 왕국이었으니, 그곳의 상황에 대해 알고 있는 이들이 꽤 많을 터였다.
바람의 정령 실피드가 선사하는 상쾌한 바람을 가르며, 엄청난 속도로 사막을 가로지르던 그가 일순간 바이크를 멈춰 세웠고.
타앗
이내 바이크에서 내려선 그가 허공의 한 곳을 응시하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흐흐흐... 변형 한계가 꽤 많이 늘었군.”
잠시 뒤, 천리안 스킬과 탐지 스킬을 이용한 정찰로 주위에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 그의 입에서 하나의 단어가 흘러나왔다.
“제라스.”
파아아아아아아앗
격납고에 잠들어 있던 푸른색 기간트.
‘청기사’ 제라스가 옅은 빛무리와 함께 사막의 모래 위에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