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성장
#1
“확실해. 실력이 제법... 아니, 꽤 많이 늘었어.”
본신(本身)의 성장.
헌터로 각성한 한설의 유일한 염원이었고.
그 한계로 인해 그를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뜨렸던 그것.
그것이 일어났음을 확신한 스노우가...
지난 며칠 간의 여정과 조금 전 끝난 전투를 회상했다.
#2
기간트를 만나기 이전과 이후의 나는 천지가 개벽할 수준의 변화를 겪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게다가 지금은 이름이 잘 기억나지 않는 어느 용병에게서 빼앗은(훔친) 첫 번째 기간트 ‘안티가(800rp)’나 루페른 왕실의 의뢰를 수행한 대가로 싼값에 구입할 수 있었던 두 번째 기간트 ‘크로스보우(1100rp)’의 경우, 이 시대의 강자들과 자웅을 결할 수 있을 만한 수준의 기체는 아니었다고 한다면.
1500rp의 출력을 지닌데다 ‘변형(S)’ 스킬에 의해 완벽한 압축 장갑을 장착하게 된 ‘포세이돈(원명 제라스, A -> A+로 등급 업)’이나 최대 7써클급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마력포를 지닌 1700rp급 기체 ‘가이아’라면, 설령 대륙 최장자 중 하나인 용병왕의 알칸트라를 상대로 전투를 벌인다 한들 쉽게 밀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문제는 지구인 한설이자 이곳 오르비스 대륙에선 스노우라 불리는... 내 본신의 실력이었다.
‘마지막으로 수련이란 걸 해본 게 언제였지?’
C급 육체강화 특성과 B급 서리바람 스킬을 연달아 각성한 이후 2년.
그 2년 동안 정말 미친 듯이 수련과 몬스터 사냥에 열중했었다.
하지만 어릴 적부터 고련을 거듭하며 끝없이 강해질 수 있는(물론 재능으로 인한 한계는 있었지만) 이곳 오르비스 대륙의 강자들과는 달리, 지구의 헌터들이 자신의 등급을 벗어나는 강함을 손에 넣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물론 나는 그 불가능한 일을 해낸 이들 중 하나이기는 했다.
B급 마법 계열 스킬과 C급 육체 계열 스킬, 그리고 천부적이라 평가받는 전투 센스의 조합으로 무려 A급 중하위 헌터와 자웅을 결할 수 있는 수준까지 올라설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딱 거기까지가 한계였다.
무슨 수를 쓰든, 중위권 수준의 A급 헌터(오르비스 대륙으로 따지면 능숙한 최상급 엑스퍼트) 이상의 강자를 상대로 승리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후 S급 특성(비록 반쪽짜리였지만)을 각성하며 인생 역전을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제우스가 없는 나는 여전히 A급 중하위권 수준의 헌터일 뿐이었고.
설령 제우스에 탑승한 상태라고 한들, 진정한 S급 헌터 수준의 능력을 발휘할 수는 없었다.
물론 ‘양학’이라는 분야만 따지자면 그 어떤 S급 헌터도 내게 비할 바는 아니었다.
경이적인 위력의 광역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최상위권 마법 계열 S급 헌터들조차, 던전 브레이크 시 쏟아져 나오는 수천 수만의 몬스터들을 몰살시키기 위해서는 내 몇 배에 달하는 시간이 필요했으니까.
하지만 그건 그리 자랑할 만한 능력은 아니었다.
‘오히려 놀림거리였지.’
던전 내부에서, 그리고 S급 몬스터를 상대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늘 ‘반쪽짜리’라는 멸칭을 달고 살아야만 했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파일럿(S)’ 특성을 강화할 수 있는 기체 개발에만 몰두하게 되었고.
한계가 명확한 본신의 수련 따위는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았었다.
성장은 정체되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음, 뭔가 좀 이상한데...’
어렴풋이 이상함을 감지하게 된 건, 사막을 횡단하던 중 만난 몬스터들을 때려잡는 와중이었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단지 컨디션의 문제라 생각했을 뿐이었다.
목적지인 카이샨 왕국 최북단에 위치한 영지 ‘하젠’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굳이 다른 영지나 도시에 들려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고.
끊임없이 펼쳐진 모래 위를 홀로 나아가다 보니, 나를 먹잇감으로 인식한 온갖 몬스터들과 마주칠 수밖에 없었다.
지구에 있던 시절부터, B급 이하의 몬스터라면 그 수가 수십 단위를 넘어간다 한들 그리 어려운 상대는 아니었다.
다대일 전투에 엄청난 효율을 발휘하는 서리바람(B) 특성과 무한에 가까운 마력양 덕분에, 원래부터 일정 등급 이하의 몬스터에게는 극강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으니까.
‘운디네, 프랙탈 필드, 프리징 레인......’
콰과과과과과과과...
퍼어어어어어엉
끼에에에에에에엑
그렇게 하루에도 몇 번씩 사막의 몬스터들을 학살하며 이동하던 때였다.
크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
불길한 로어(roar)와 함께 황량한 사막의 모래 아래에서 길이 70~80여 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몬스터가 모습을 드러냈고.
이 몬스터와의 전투로 인해.
나는 본신의 ‘성장’을 확신하게 되었다.
#3
A급 몬스터 그레이트 샌드웜.
지난 왕국 전쟁 중, 카이샨 왕국의 수송 작전을 방해하기 위한 작전에서 맞닥뜨린 바 있었던, 사막 최상위권 포식자의 등장이었다.
나는 황급히 타고 있던 썰매를 아공간 주머니에 수납한 뒤, ‘가속(C)’ 스킬을 시전하며 몸을 날렸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조금 전까지 내가 있던 자리로 그레이트 샌드웜의 거대한 아가리가 틀어박혔고, 내 재빠른 움직임 탓에 모래만 잔뜩 씹게 된 녀석은 잔뜩 성을 내며 다시 한번 울부짖었다.
쿠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
이내 엄청난 속도로 내려꽂히기 시작하는 샌드웜의 머리.
하지만 이미 스스로에게 각종 버프를 건 나는 그리 어렵지 않게 녀석의 공격을 피해 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한가지 생각이 뇌리에 떠올랐다.
‘어쩌면...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물론 내가 소유한 기간트 중 가장 저등급인 안티가만 소환하더라도, 저정도 수준의 몬스터쯤은 한 트럭이 몰려와도 두렵지 않았다.
고로 잡을 만하다는 말의 주체는 기간트가 아닌 내 본신... 즉, 맨몸 사냥을 뜻하는 것이었다.
엄청난 속도로 치솟앗다 내리꽂히길 반복하는 그레이트 샌드웜의 거대한 대가리.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콰아아아아아아아앙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이전 같으면 감히 맞붙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A급 상위권 몬스터였지만.
지금의 내게는 그리 위협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무엇보다 기간트에 탑승하지 않았음에도 그레이트 샌드웜의 로어에 실린 공포 효과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고.
나와의 수준 차를 대강이나마 판별할 수 있는 불길한 아우라조차 매우 희미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나는 몸 주위에 베리어를 겹겹이 둘러 그레이트 샌드웜의 모공에서 흩뿌려지는 산성 체액과 독가스를 방비하는 한편.
‘파이어월, 파이어월, 파이어 블레스터......’
화르르르르르르르르륵......
엄청난 속도로 화염 계열 스킬들을 시전해 주변에 가득한 산성 체액과 독가스를 영향력을 줄여나갔고.
‘썬더 콜링, 메가 라이트닝, 메가 라이트닝......’
쉴 새 없이 움직이며 그레이트 샌드웜과 상극으로 알려진 뇌전 계열 스킬들을 녀석의 거대한 몸통에 작렬시켰다.
콰르르르르르르르르릉
파츠츠츠츠츠츠츠츠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쿠오오오오오오오오오......
운이 따르는지, 마른 하늘에서 떨어진 뇌전 한줄기가 그레이트 샌드웜의 머리에 직격 했고(하도 이리저리 흔들어대 조준스킬로도 맞추기 어려웠다).
꽤 심한 타격을 받은 것인지, 긴 울음을 토해낸 그레이트 샌드웜이 그 길다란 몸통을 마구 뒤틀며 내게서 거리를 벌리려 했다.
‘놓치면 안 돼!’
사막지대 몬스터의 특징은 뛰어난 방어력과 생명력, 맹독이었다.
그리고 그중 최상위권 몬스터인 그레이트 샌드웜의 방어력과 생명력은 그야말로 어머어마한 수준이었기에, 기회를 놓친다면 이 대결은 꽤 장기전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을 터였다.
‘게다가 저것들... 무리 생활을 하는 놈들이라고 했었지.’
지난번 알마탄 요새의 북쪽 사막지대에서 만난 그레이트 샌드웜 역시 여러 마리가 한꺼번에 등장했었다.
본신의 힘으로 결판을 내기 위해서는 절대로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운디네!’
사막에서 서리바람 특성의 고유스킬드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물의 정령 운디네의 도움이 필요했다.
기간트에 탑승한 채 소환했을 때에 비해, 한 번에 발휘할 수 있는 힘의 크기는 고작 20~30% 수준에 불과했지만. 내 마력이 바닥나지 않는 한 끊임없이 일정 수준의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이, 스킬에 의해 소환된 정령의 장점이었다.
타다다다다다다다다다......
나는 가능한 모든 ‘속도’ 계열 버프를 두른 채, 베리어를 최대치인 다섯 겹으로 늘린 상태로 그레이트 샌드웜의 몸을 거슬러 오르기 시작했다.
츠르르르르르르르르르......
그리고 그런 나를 중심으로 황갈색 몬스터의 몸통 위에 새하얀 얼음의 대지가 생성되기 시작했다.
냉기 지대에서의 행동력 보정으로 인해 내 움직임은 조금 더 빨라졌고.
‘프리징 레인!’
정령이 지닌 힘의 한계로 인해, 단단한 얼음 결정이 아닌 매우 부드러운 눈송이가 사막의 하늘 위로 흩날리기 시작했다.
‘뭐, 쓰지 않는 것보단 낫겠지.’
손바닥만 한 정령이 죽을힘을 다해 만들어낸 사막의 이적.
이상을 알아챈 그레이트 샌드웜이 나를 떨쳐내기 위해 더더욱 몸부림치기 시작했고.
기회를 놓칠 수 없었던 난 곧바로 최후의 스킬을 시전했다.
‘버서커.!’
곧바로 차오르기 시작하는 엄청난 힘과 고양감.
나는 산성 체액과 독가스에 의해 부식되고 깨져버려 단 하나밖에 남지 않은 베리어에 의지해 그레이트 샌드웜의 거친 몸통을 타고 올랐다.
그리고 천신만고 끝에 녀석의 대가리까지 접근하는 데 성공한 뒤.
곱다로 내가 지닌 최강의 마법 계열 스킬을 시전했다.
‘아이스 비드!’
곧 주변의 수분이 모조리 내 주위로 몰려들며 투명한 구슬 30여 개가 생성되었고.
‘인첸트 라이트닝. 인첸트 라이트닝, 인첸트 라이트닝......’
뇌전의 기운을 머금은 구슬들 주위로 황금빛 전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시간이 부족해 인첸트에 성공한 구슬은 고작 일곱 개에 불과했다.
나느 지체없이 다음 스텝을 이어갔다.
‘인첸트 샤프니스, 인첸트 메가 라이트닝!’
콰드드드득
최강의 뇌전 계열 스킬을 인첸트 시킴과 더불어, 한계에 가까운 마력까지 퍼부은 검을 그대로 그레이트 샌드웜의 턱밑에 꽂아 넣자.
쿠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
녀석은 극심한 고통으로 인해 거대한 입을 쩍 벌리며 울음을 토해냈고.
‘가라!’
수십 개의 구슬이 쩍 벌어진 그레이트 샌드웜의 입을 통해 그 내부로 투하되었다.
잠시 뒤...
콰아아아아아아앙
콰아아아아아아아앙
콰아아아아아아앙
.
.
.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녀석의 내부에서 포탄이 터지는듯한 소리가 수십 차례 들려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쿠우우우우우우우우우웅
그레이트 샌드웜의 거대한 몸통이 사막의 모래 위로 무너져 내렸다.
타아앗
‘크으으윽...’
털썩
모래 위로 간신히 착지한 난 사지를 활짝 편 채 그대로 뻗어버리고 말았다.
기간트에 탑승한 채 시전했을 때와 비교해.
몇 배나 강해진 ‘버서커(C)’ 스킬의 반동으로 인한 고통 때문이었다.
#4
회상을 끝내고 현실로 돌아온 스노우의 입가가 씰룩거렸다.
“큭, 크하하하하하......”
온몸을 불로 지지는 듯한 고통에도 불구하고, 그는 사막의 모래 위에 대(大)자로 뻗은 채 미친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각성 이후 오직 ‘강함’ 하나만을 갈구하며 살아온 그에게, 어차피 잠시 뒤면 사라질 고통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깟 통증보다는 여지껏 단 한 번도 도달해보지 못했던 영역에 발을 들였다는 성취감이 훨씬 더 컸다.
그로 인해 떨리는 몸과 터져 나오는 웃음을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하하하... 저 녀석 정도면, 분명 A급 중에서도 중상위권 이상은 되는 몬스터야. 최소 A급 중위권 헌터는 되어야 단독 사냥이 가능한.”
스노우는 사막의 모래 위에 몸을 눕힌 채 꼼짝도 하지 않는 거대한 몬스터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그래, 저런 놈을... 기간트도 없이 잡아낸 거라고.”
이는 S급 특성 파일럿을 각성한 이후.
수년째 정체되어 있던 본신의 실력이 성장했다는...
너무나도 확실한 증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