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인도자
#1
“하젠 영지에는 처음이시죠?”
“그래.”
“제 고향이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멋진 곳입니다. 엘가드 왕국이나 이펜타르크 제국의 상인들이 수시로 들락거리는 통에 왕국의 다른 영지들에 비해 꽤 자유로운 분위기인데다, 영지에서 가장 가난한 자조차 끼니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부유하죠. 게다가 좀처럼 보기 힘든 드워프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고, 무엇보다, 흐흐흐... 카이샨 북부의 여인들은 아름답기로 유명하거든요.”
카이샨 왕국, 그중에서도 왕국 북부의 여인들이 아름답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있었다.
‘그런데 사막의 여인네들이 그렇게 예쁘다며?’
‘정말?’
‘나도 들어봤어. 특히 북부로 갈수록 더 아름답다고 하더군.’
‘뭐? 그게 뭔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진짜야. 그게 왜 그렇냐면, 다양한 인종의 피가 섞일수록......’
알마탄 영지를 떠나기 전날, 술판으로 나를 끌고간 저스틴 크로비스와 그 일당들(록산느의 두 오너)이 떠들어대던 쓸데없는 소리 중 기억에 남아있는 몇 안 되는 내용이었다.
‘뭐, 딱히 이성에 관심이 많은 편은 아니지만.’
나도 어쩔 수 없는 남자인지라...
지금 내 옆에서 재잘재잘 떠들어 대고 있는 녀석은 바울이라는 이름의 카이샨 왕국민이었다.
그는 하젠 영지의 주인인 라만 백작의 수하였는데.
카이샨 왕국 중부에 위치한 보타왓 영지의 영주에게 백작의 서신을 전달하고 돌아오던 중, 재수 없게도 A급 몬스터 ‘카르덴(몸길이가 최대 10미터까지 자라는 전갈형 몬스터)’ 무리의 영역에 발을 들여 죽을 위기에 처한 걸 구해주었고.
목적지가 같은 것을 알게 되어 지난 이틀간 동행을 이어오는 중이었다.
바울은 홀몸으로 엄혹한 환경의 사막을 활보할 수 있을 만큼 뛰어난 실력(중급 엑스퍼트 중 상위권)과 눈치를 지닌 녀석이었지만.
한 가지 단점이 있다면, 이동하는 내내 한시도 입을 쉬는 법이 없는 엄청난 수다쟁이라는 사실이었다.
‘이 세계에서 처음 만났던, 브라이드 영지의 떠버리 녀석이 떠오르는군.’
내가 녀석의 수다를 간간이 맞장구까지 쳐주며 내버려 두는 것 역시.
브라이드 백작가의 기사이자 폴암의 오너였던 테리 헤링스의 수다를 참아주었던 것과 같은 이유였는데.
바울이 쉴 새 없이 떠들어대는 말 중에는, 내게 썩 유용한 정보들이 간간이 섞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구얀은 정말 아름다워요. 하지만 제가 그녀에게 접근하려는 기색만 보여도 구탄은 절 죽이려 들죠. 아, 구탄은 구얀의 큰오빠예요. 하젠 영지의 기사단장이기도 하고요. 5개월 전에 바엘로그(1600rp, 이펜타르크제)에서 트렉스(1900rp, 드워프제)로 기체 갈이를 했는데, 아직도 엄청나게 예민한 상태죠. 뭐, 그 탓에 이번 전쟁에서 빠질 수 있었던 거니까... 정말 운 하나는 기가 막히게 좋은 인간이라고 할 수 있죠. 마라몬트가 영입한 괴물 같은 용병에게 우리 왕국의 오너들이 엄청나게 죽어 나갔다고 하던데. 만약 전쟁에 차출되었다면 구탄도......”
“요즘 저희 아버지가 고민이 많으세요. 아, 저희 아버지는 광물을 취급하는 상인이에요. 그런데 최근 들어 드워프들의 수요가 눈에 띄게 주는 바람에......”
“왕국 전쟁 대신 엘가드 왕국의 의뢰를 수행하기 위해 떠났던 드워프 용병들이 대부분 빈손으로 돌아왔어요. 의뢰를 맡지 못한 거죠. 그런데 무슨 일인지 물어봐도 아무도 입을 열지 않더라고요. 그들 중엔 꽤 실력 있는 오너들도 있었는데 의뢰를 맡는 것조차 실패한 걸 보면, 아무래도 보통 일은 아닌......”
바울의 수다를 듣는 것만으로도, 확실히 드워프 왕국에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녀석의 수다 중 80%는 들어 봐야 하등 쓸데없는 이야기였고, 나머지 20% 중 15%는 귀가 썩어버릴 것 같은 사막 사내식 음담패설이었지만.
나머지 1%의 영양가 있는 정보의 가치 만으로도 충분히 감내할 수 있었다.
‘게다가 영주 밑에서 일하는 녀석이니, 하젠 영지에서 써먹을 일이 있을지도 모르지.’
그렇게 꼬박 하루를 이동해 귀에서 피가 흐르기 직전 도착한 하젠 영지.
카이샨 왕국 북부와 실질적으로 국경선을 맞대고 있는 국가는 강력한 동맹국인 엘가드 왕국이 유일했고, 사막지대를 싫어하는 다르다넬 산맥의 몬스터들 역시 산을 내려오는 경우가 극히 드물었기에.
국경 요새나 다름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하젠 영지를 보호하는 성벽은 그리 높아 보이지 않았다.
‘알마탄 요새의 1/3 정도는 되려나?’
게다가 활짝 열린 거대한 성문의 규모에 비해, 눈에 띄는 경비 병력은 고작 스무 명 정도로 매우 조촐한 수준이었는데.
이들 중 검문을 맡은 것으로 보이는 이들 역시 그저 출입자가 내미는 신분증을 스윽 훑어보며 몇 마디를 나눌 뿐, 제대로 된 검문이란 걸 하는 경우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리고 그건 내 경우 역시 마찬가지였다.
알마탄 영지를 출발하기 전, 맷 스팅리(네드 험비, 이펜타르크 제국 황태자 직속 비밀기사단 소속)에게 부탁해 손에 넣은 이펜타르크 제국 용병 길드의 용병패(플레티넘)를 제시하자.
“오, 하젠 영지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용병패를 확인한 병사는 지나칠 정도로 밝게 웃으며 인사를 건네왔고.
나는 어리둥절할 정도의 환대를 경험하며 영지의 외성 안으로 발을 들일 수 있었다.
내가 잠시 황당한 얼굴로 서 있자, 병사들과 눈빛을 교환하는 것만으로 성문을 통과한 바울이 다가왔다.
“무슨 일이라도?”
“병사들의 기강이 썩 훌륭한 것 같지는 않군.”
“아, 이곳이 처음이시라면 조금 이상하게 느껴지실 수도 있겠군요. 그런데 여기선 저게 일상적인 광경입니다.”
“왜지?”
“일단 이곳 하젠 영지는, 왕국이 통일된 이후 단 한 번도 외부로부터 침략을 받은 적이 없죠.”
카이샨 왕국 통일 이후 한 번도?
카이샨이 지금의 통일 왕국으로 발전한 건 370년 전의 일이었다.
‘그럼 적어도 300년 이상 전투가 벌어진 적이 없다는 뜻?’
바울의 말이 이어졌다.
“게다가 아시다시피, 이곳은 엘가드 왕국과 가장 가까운 영지죠. 여기 정착하고 살아가는 드워프의 수도 적지 않은데다, 거래를 위해 드나드는 드워프들 역시 적지 않은 편이죠. 그런데 드워프라는 족속들의 성격이 워낙에 급하고 불 같은지라, ‘검문’이라는 절차를 제대로 참아내지 못하했다고 하더군요. 툭하면 성문에서 싸움이 일어났고, 조금씩 검문의 강도가 약해지다 보니, 급기야 수백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는... 보시다시피 저렇게 되어버린 거죠.”
“이상하군. 그들... 그러니까 드워프들도 자신들의 영토에 아무나 발을 들여놓게 놔두지는 않을 텐데?”
“네, 엘가드 왕국의 검문은 매우 철저하기로 유명하죠.”
“......”
“아주 뻔뻔한 종족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바울의 얼굴 역시 매우 뻔뻔해 보였지만, 일단은 넘어가 주기로 하고 영지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바울이 했던 말 중 하나는 맞고 하나는 틀린 것 같았다.
녀석의 말대로 영지 내를 돌아다니는 드워프들을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긴 했지만...
‘아름다운 북부 여인? 대체 어디에?’
아름다운 여인은커녕.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인간 중, 여자라곤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2
다르다넬 산맥에서 채굴된 자원의 절반 이상은 이곳 하젠 영지를 통해 엘가드 왕국과 이펜타르크 제국으로 팔려나간다.
카이샨 왕국의 가장 큰 거래처인 두 국가였지만, 사실상 카이샨 왕국이 벌어들이는 막대한 금액의 대부분은 드워프들의 왕국인 엘가드와의 무역을 통해 획득하는 것이었고.
이펜타르크 제국과의 거래에서는 적자나 겨우 면하는 수준을 유지할 뿐, 별다른 이득을 얻지 못하고 있었다.
이는 두 나라 사이에 존재하는 광활한 사막지대 ‘로스람’으로 인해 벌어진 일이었는데.
사막의 운송 수단인 바잘 기준, 무려 30일 정도를 꼬박 이동해야만 서로 간의 국경에 닿을 수 있을 정도로 거리가 멀었고.
그보다 더 큰 문제는 로스람이 다른 사막지대에 비해 훨씬 더 큰 일교차를 자랑하는 데다, 설상가상 수원(水源)이라는 게 거의 존재하지 않아 물을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런 이유로 양국 간 무역의 운송비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기에, 대부분의 무역품이 초고가의 희귀 자원임에도 별다른 이득을 남기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국 간의 거래가 이어지고 있는 이유는 사실 매우 간단했는데.
그건 바로 이펜타르크 제국이 희귀 자원에 대한 거래 대금을 그들이 생산하는 기간트로 치러주었기 때문이다.
기간트라면 드워프 왕국 엘가드로부터 제한 없이 구매가 가능한 카이샨 왕국이었지만.
깐깐한 드워프들은 동맹국이라 한들 기간트의 값을 깎아주는 법이 없었기에.
대륙에 존재하는 기체 중 가장 비싼 편인데다, 비교적 조종 난이도가 높은 드워프제 기간트를 왕국의 모든 오너에게 지급하는 건 극히 비효율적인 일이었다(물론 대부분의 오너는 드워프제 기간트를 타길 원한다).
카이샨 왕국 기간트 전력의 절반이, 가성비 좋은 이펜타르크 제국제 기체들로 채워진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하젠 영지에 도착한 뒤로 벌써 5일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 5일간, 정보 수집을 위해 영지 내부를 돌아다니거나 드워프들이 자주 이용한다는 펍에 죽치고 앉아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힘든 임무 뒤에 휴가를 받은 바울 역시, 내가 저녁과 밤 시간을 주로 보내는 이곳 ‘메마른 언덕(대체 왜 이런 이름인지는 모르겠지만)’이라는 이름의 펍에 출근 도장을 찍고 있었다.
타아앗
시원한 맥주를 한 호흡에 들이킨 바울이 테이블 위로 빈 잔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크으으으... 뭐, 제국과의 거래에서는 조금 손해를 보는 게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로스람 사막을 왕국의 불행으로 여기는 사람은 없죠. 오히려 축복이라면 몰라도.”
“축복?”
“네, 덕분에 제국의 침공을 단 한 번도 받지 않은 대륙 북부의 유일한 국가로 남을 수 있었으니까요.”
“음...”
서식하는 몬스터들의 수준이 조금만 높았다면 오르비스 대륙 ‘5대 마경’이 ‘6대 마경’으로 바뀌었을 거란 평가를 받는 로스람 사막.
570년 전 이펜타르크 제국이 건국된 이후, 이 저주받은 사막을 아랑곳하지 않고 카이샨 왕국을 향해 진군한 제국의 황제는 단 한 명뿐이었는데.
이펜타르크 제국의 영토를 2배로 넓힌 그 위대한 정복군주조차... 로스람의 저주받은 환경에 가로막혀 카이샨 왕국의 영토에는 발을 들여놓아 보지도 못한 채. 무려 20만 병력을 모래 아래에 묻고는, 눈물을 흘리며 철군을 명해야만 했다고 한다.
한마디로 제국이라는 포식자의 침입을 막아주는 거대한 자연 방벽의 역할을 하는 셈.
‘그러니까 여기 병사들이 방만해지는데... 그 로스람이라는 사막도 한몫했다는 뜻이로군.’
비록 여성들의 인권이 매우 낮아(전사들을 우대하는 카이샨 왕국은 계급 간의 차별은 그리 크지 않다), 오후 5시가 넘으면 밖을 돌아다니는 여성을 보는 게 불가능할 정도였지만.
여타 카이샨 왕국의 영지들에 비해 훨씬 더 자유로운 분위기라는 이곳 카이샨 영지.
최근 근심 걱정 없이 삶을 영유하던 이곳의 귀족과 영지민들에게 엄청난 고민거리가 생겼다고 하는데.
평소와 같은 수준을 유지하는 이펜타르크 제국과의 무역량과는 달리.
실질적인 수입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엘가드 왕국과의 거래량이 1/5 수준으로 대폭 줄어버린 것이다.
이는 비단 하젠 영지만이 아닌, 카이샨 왕국 전체의 문제이기도 했기에 왕도에서 파견 나온 관리들이 엘가드 왕국을 뻔질나게 드나들며 이유를 알아내려 했지만.
고집쟁이 드워프들은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며...
“아직도 용병왕에 대해 묻고 있다고?”
“네, 오늘 아침 영주성으로 들어온 바탄(외교관)이 그러더군요. 용병왕이 아니라면 크로이얀 볼튼... 그러니까 하얀 늑대라도 연결해 달라는 말만 수백 번 들었다고 하는데. 다른 대화는 일절 하지 않으려 해서 열불이......”
거물급 용병들의 거취만 수소문 중이라고 한다.
‘이거, 언급하는 이름들로 봐선... 분명 엄청나게 큰 건이다.’
더 확실한 정보가 필요했다.
하지만 지난 4일간 하젠 영지에서 목격한 드워프들은 대부분 이곳에 정착한 장인이거나 뜨내기 상인들 뿐이었다.
술을 마시는 척하며 그들의 대화를 엿들어 보았지만, 그들 역시 엘가드 왕국의 행사를 이상하게 느끼고 있을 뿐 정확한 사정을 아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하지만 기다리는 자에게 복이 있다고 했던가?
끼이이이이익
“빌어먹을! 아무리 패한 전쟁이라고 한들, 어떻게 쓸만한 놈이 한 놈도 남아있지 않을 수가 있지? 게다가 고작 40일 만에 끝난 전쟁에서, 근위기사가 일곱 명이나 뒈졌다는 게 말이 돼? 카이샨 왕국엔 병신들밖에 없는......”
문을 열고 들어서며, 장소를 감안하면 목숨이 두 개라도 부족해 보이는 망언을 남발해대는 화려한 복장의 드워프 사내.
그를 보는 순간 직감할 수 있었다.
‘저놈이다.’
그가 나를 드워프 왕국으로 이끌어줄...
인도자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