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투기 버리고 기간트 탑니다-104화 (104/169)

104화 목적

#1

쿠도 르발다는 엘가드 왕국에 단 셋뿐인 ‘하르간(7단계로 나뉜 작위 중 서열 1위)’ 티무르 르발다의 둘째 아들이자, 스스로의 힘으로 ‘로움(5번째 서열)’의 작위를 하사받은 129세의 드워프였다.

드워프들의 평균 수명이 300세 정도이니, 인간으로 따지자면 20대를 벗어나지 못한 혈기 왕성한 시기라 할 수 있었다.

성격이 급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드워프 중에서는 그나마 진중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고, 그에 더해 남다른 친화력까지 겸비하고 있었기에.

성인식(남성 드워프는 88세가 되는 해 성인식을 치른다)을 치른 이후 곧바로 엘가드 왕국 외무부에 합류, 현재는 왕국을 대표하는 외교관으로서 활약하고 있었다.

“망할 카이샨! 빌어먹을 마라몬트!”

“쿠, 쿠도님. 부디 진정을... 주변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물론 어디까지나 드워프치고는 진중한 편이었을 뿐, 종족 특유의 급하고 불같은 성정이 어디 가는 것은 아니었다.

“개 같은 하얀 늑... 응?”

연신 술잔을 비우며 욕설을 뱉어내던 쿠도 르발다가 어깨를 붙잡고 흔들어대는 수하의 만류에 그제서야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곳 ‘메마른 언덕’이 뛰어난 맥주 맛으로 인해 드워프들이 자주 찾는 펍인건 사실이었지만, 당연하게도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은 손님의 비율은 카이샨 왕국의 사내들이 압도적이었다.

지금도 수십 개의 테이블 중 드워프들이 앉아 있는 테이블은 고작 3개에 불과했고, 그마저 쿠도 르발다 일행이 차지한 테이블을 제외하고는 인간과 드워프가 함께 술잔을 나누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 이외의 테이블에 앉아 있던 수십의 카이샨 사내들이 쿠도 르발다 일행을 향해 좋지 않은 눈길을 쏘아 보내고 있었다.

카이샨의 다른 영지들에 비해 비교적 유하고 자유로운 분위기라고는 하지만.

하젠 영지의 사내들 역시 사막이라는 험한 환경에서 나고 자랐기에, 결코 걸어오는 시비를 마다할 이들이 아니었다.

그나마 드워프의 언사에 익숙한 하젠 영지의 남자들이었던데다.

카이샨 왕국을 담당하는 드워프 외교관 중 서열 1위인 쿠도 르발다의 얼굴을 알고 있는 이들이 대부분이었기에, 당장에 사단이 일어나지 않은 것뿐이었다.

“크흠... 내 목소리가 좀 컸나? 미안하군, 잘 풀리지 않는 일이 있어서 말이야. 주인장! 테이블마다 ‘캄푸(카이샨의 전통주)’ 한 병씩 돌려! 사과의 의미로 한잔 사도록 하지!”

쿠도 르발다는 특유의 친화력을 발휘하며 사태를 은근슬쩍 무마시켰고.

사나운 눈초리를 보내던 사막의 사내들 역시 피식 웃으며 술잔을 들어올리는 것으로 그의 사과를 받아들였다.

겉으로는 호방한 모습을 연기하고 있었지만, 사실 쿠도 르발다의 속마음은 전혀 달랐다.

그는 카이샨 왕도에서 이리저리 기름칠을 하느라 본인의 사비까지 탈탈 털어야만 했고.

그렇게까지 했음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성과를 올리지 못한 채 엘가드 왕국으로 돌아가야만 했기에 울화통이 터지기 직전이었다.

쿠도 르발다는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남몰래 투덜거렸다.

“젠장, 또 쓸데없는 돈이 빠져나가는군. 멜다(쿠도 르발다의 아내)가 알면 날 죽이려 들지도 몰라.”

이미 이번 임무를 위해 허용된 예산을 한계까지 끌어써 버렸기에, 일행의 숙식은 물론 이런 사소한 일까지 모두 본인의 돈으로 처리해야만 했고.

덕분에 자신이 좋아하는 카이샨의 명주 대신 싸구려 맥주(맛은 뛰어났다)나 홀짝거려야 했던 쿠도 르발다.

그런 그에게로.

황금빛 액체가 찰랑거리는 고급스러운 술병을 든 한 남자가.

천천히 다가서고 있었다.

#2

내가 접근하자 쿠도 르발다의 호위들이 각자의 무기 손잡이에 손을 올리며 은근한 기세를 내뿜기 시작했다.

함부로 다가오지 말라는 경고의 의미.

하지만 그들의 이런 행동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이미 내 손에 들린 물건을 발견해 버린 상관의 눈이 돌아가 버린 상태였으니까.

“그, 그건 설마? 아오레이아 카브리오레? 비다드의 아오레 영지에서 일 년에 딱 다섯 병씩만 생산된다는 대륙 3대 명주!”

‘호오, 이게 그렇게 유명한 술이었나?’

내 아공간 주머니에는 루페른, 마라몬트의 귀족들과 카보넬 상단의 후계자로부터 선물 받은 명주가 수십 병이나 있었는데.

이건 그중 카보넬 상단의 후계자가 이별의 선물로 내게 안겨준 것이었다.

‘저희 왕국의 양조 명가에서 만든 술입니다. 원래는 소금 거래에 도움을 준 제국의 하르만 후작에게 선물하기 위해 딱 두 병 준비했던 건데. 한 병은 스노우님께 드리겠습니다.’

나중에 이 술의 가격이 병당 300골드(지구 기준 대략 2억)라는 걸 알게 되었고. 금전 감각이 어지간히 무딘 나조차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선물의 준 상단의 후계자는 맛이 끝내주니 꼭 혼자만 즐기라고 했었지만.

술을 그다지 즐기지 않는 내겐 이런 쪽의 쓰임이 훨씬 더 가치가 있었다.

봐라.

경계심이고 나발이고, 마치 30년 지기 친구라도 만난 것마냥 활짝 피어나는 저 드워프의 얼굴을.

사실 이곳 카이샨에서 술병을 들고 상대방의 테이블을 찾는 건 매우 흔하게 일어나는 일이었고.

드워프 귀족인 쿠도 르발다에게는 더더욱 흔한 일이었기에, 호위들 역시 일정 수준 이상으로 경계하지는 않았다.

“설마 술 자랑을 하려고 온 건 아닐 테고. 그걸 가지고 이쪽으로 왔다는 건 내게 볼 일이 있다는 뜻이겠지?”

“잘 아는군.”

“호오, 이렇게 다짜고짜 말을 낮추는 놈은 정말 오래간만이로군. 내가 누군지 모르나?”

“글쎄, 드워프 왕국의 높으신 나리?”

“......모른단 말이로군. 그렇다면 적어도 이곳 하젠 영지 사람은 아니라는 뜻인데... 뭐, 상관없겠지. 일단 난 자네를 환영할 생각이야. 좀 더 솔직하게 말하면 자네 손에 들린 그 보물을 환영하는 것이지만. 그걸 이 테이블에 내려놓는다면, 적어도 한두 시간 동안은 우정을 나눌 수 있을 걸세.”

“뭐, 한두 시간까진 필요 없을 것 같지만. 어쨌든 시간을 내준다니 고맙게 받아들이지.”

“쿠도 르발다다.”

“스노우.”

타앗

나는 들고 있던 술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드워프, 쿠도 르발다의 맞은편에 앉으며 생각했다.

‘재밌는 녀석이군. 이곳에서 본 드워프들과는 뭔가 달라.’

게다가 ‘본신의 실력’이 성장함에 따라, 아우라가 느껴지지 않는 상대의 실력 역시 어느 정도 파악이 가능해진 감각이 말해주고 있었다.

‘호위로 붙은 10명이 전원 중급 이상의 엑스퍼트인데다... 그중 3명은 최소 상급이야. 그리고 오너가 둘.’

이 정도 전력이 호위하는 이가 평범한 신분일 리 없었다.

그러니 카이샨 사내들이 득시글거리는 술집에서 카이샨 왕국에 대한 욕을 입에 담았음에도 유야무야 넘어갈 수 있었던 것일 테고.

쿠도 르발다의 시선이 비다드 산 명주에 고정되어 있었던 것과는 달리.

그의 수하 중 몇몇은 내가 이름을 말한 직후부터 인상을 찡그리며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중 상급 엑스퍼트이자 오너로 추정되는 장대한 기골의 드워프가 불현듯 눈을 크게 뜨며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켰다.

“스, 스노우! 황인종! 분명 이름이 스노우라고!”

그러자 쿠도 르발다는 물론 그의 동료들 역시 화들짝 놀라며 그를 바라보았다.

“뭐, 뭐야?”

“왜 그래, 두람?”

“저자가 뭘 어쨌다고?”

동료들이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자 답답함에 가슴을 두드린 두람이 주변을 살피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다들 잊었어? 카이샨 왕도에 파다하던 소문! 캬이샨의 오너 수십을 죽이고 용병왕과 호각을 이뤘다는 마라몬트 왕국의 괴물 용병!”

“그, 그러고 보니 그자의 이름이...”

“스... 노우?”

“......!”

쿠도 르발다를 비롯한 드워프 일행의 시선이 일제히 나를 향했다.

나는 한쪽 입꼬리를 슬며시 들어 올리며 답했다.

“괴물은 아니지만, 오너 수십을 죽이고 용병왕과 싸운 오너라면... 내가 맞는 것 같군.”

#3

예상과는 다르게 드워프들의 반응은 그리 극적이지 않았다.

속으로는 어떤 생각들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으나,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그랬다.

그중에서도 쿠도 르발다라는 이름의 드워프 귀족이 보인 반응이 압권이었는데.

혹시라도 소란 중에 술병이 깨질 것을 염려했는지, 그걸 슬며시 끌어당겨 안전하게 품에 안는 게 아닌가.

부하들이 한심하게 바라보는 것으로 보아, 드워프 중에서도 특이한 놈임이 분명한 것 같았다.

비다드산 명주를 소중하게 안아든 쿠도 르발다의 입이 열렸다.

“좋아, 네 말이 사실이라고 치지. 그렇다면 적국이나 다름없는 이곳에서 순순히 정체를 드러낸 이유가 뭐지? 이런 말하긴 좀 그렇지만... 지금 카이샨엔 널 찢어죽이고 싶어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고. 네가 이곳에 있다는 걸 알게 된다면, 카이샨의 근위기사단이 죄다 몰려온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거야.”

틀린 말은 아니었다.

카이샨 왕국에 있어서 나는 그들의 패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원수일 테니.

하지만 그게 뭐 어쨌다고?

설령 근위기사단이 싸그리 몰려온다 한들 이제는 자신이 있었다.

멀쩡하게 도망칠 자신이...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아까 네 부하가 말하지 않았나? 용병왕과 호각을 이뤘다고. 고작 카이샨의 근위기사 따위를 두려워할 이유는 없지.”

“큭, 자신감이 대단하군. 뭐, 그것 또한 그렇다 치고. 그럼 내게 접근한 이유는?”

드워프라는 족속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하지만, 거추장스러운 미사여구 없이 단번에 핵심에 접근하는 대화 방식은 꽤 마음에 들었다.

‘뭐, 이 녀석만의 개성일 수도 있지만.’

심각한 내용의 대화를 이어가는 와중에도 연신 품안의 술병을 흘깃거리는 걸 보면, 내 사고방식으로 정의할 수 없는 녀석인 건 확실했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입을 열었다.

“일단 한 가지 밝혀 두자면, 내 손에 죽은 오너 중 드워프는 없었다.”

“응?”

쿠도 르발다가 의아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고, 조금 전 가장 먼저 내 정체를 알아차렸던 두람이라는 이름의 드워프가 허리를 숙이며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사실입니다. 그에게 죽은 오너는 모두 카이샨 군부 소속이거나 인간 용병이라고 하더군요.”

“용병으로 참전한 드워프가 적지 않았을 텐데?”

“40여명이 카이샨 왕국에 합세했습니다.”

“그런데 단 한 명도 저자의 손에 죽지 않았다? 내가 듣기론 거의 30명은 죽였다고 하던데?”

“그중 드워프가 없는 건 확실합니다. 애초에 이번 전쟁에서 죽은 드워프는 한 명밖에 없어요. 그리고 그를 죽인 건 그 유명한 로버트 서튼이죠.”

두람의 말을 들은 쿠도 르발다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시선을 내게로 향했다.

“일부러 죽이지 않았다는 건가? 드워프를?”

“믿던 믿지 않던 그쪽의 마음이지만, 사실이다.”

“왜지?”

“그야 당연히... 엘가드 왕국과 척을 지고 싶지 않았으니까.”

사실 척을 지던 말던 상관 없었지만, 적어도 드워프제 기간트를 얻기 전까지는 그런 걸로 해둬서 나쁠 건 없었다.

“좋아. 그것 역시, 일단은 넘어가도록 하지. 그럼 이제 정말 본론으로 넘어가 보자고. 내게 접근한 진짜 목적이 뭐지?”

쿠도 르발다는 태연한 표정을 한 채 다시 한번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해봐야... 이미 게임셋이다.’

그의 시선은 더 이상 품 안의 술병으로 향하지 않고 있었고.

덥수룩한 털로 인해 코와 눈 주위만 확인할 수 있는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으며.

의자를 꽉 채운 펑퍼짐한 엉덩이는 쉴 새 없이 들썩거리고 있었다.

나는 의자 깊숙이 몸을 기대며 느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진짜 목적이라... 왠지 그건, 네가 더 잘 알고 있을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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