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엘가드 왕국(1)
#1
모든 드워프는 오직 하나의 신만을 믿는다.
속으로는 믿지 않는 이가 존재할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그걸 겉으로 내색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들의 신을 부정하는 건, 더이상 드워프 사회에 속해 살아가지 않겠다 선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드워프들이 모시는 신의 이름은 ‘라드난’.
혹자들은 불과 투쟁의 신 라드난을 신봉하는 바람에 드워프들의 성질이 그 모양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어쩌면 이는 사실에 가까운 말일지도 몰랐다.
역사가 1000년이 훌쩍 넘어가는 드워프 왕국이 겪은 전쟁이라곤, 고작 한 손으로도 넉넉히 헤아릴 수 있을 정도로 적었는데.
가장 최근에 일어났던 전쟁조차 그 기록을 찾아보기 위해선 무려 7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만 했다.
현 오르비스 대륙에 존재하는 국가 중, 건국된 지 700년이 넘은 국가로는 북부의 엘프 왕국과 중서부의 크샨트 제국이 존재하기는 했지만.
엘프 왕국은 그 성향상 드워프와 마찬가지로 ‘침공’이라는 걸 할 리 없는 국가였고, 크샨트 제국의 경우에는 지리적 여건상 드워프 왕국과 전쟁 수행이 불가능했다.
결론적으로, 현 오르비스 대륙의 17개국 중 드워프 왕국과 전쟁을 치른 경험이 있는 국가는 단 한 곳도 없다는 뜻이었다.
오래된 기록에 의하면, 그 옛날 왕도가 함락될 정도로 처참한 패전을 당했음에도 드워프들은 끝끝내 항복하지 않았고.
종족이 멸망의 길로 들어설지언정, 결코 꺾이지 않겠다는 신념을 지니고 끝까지 투쟁을 이어갔다고 한다.
당시 드워프 왕국과 전쟁을 벌인 국가들이 노린 것은 드워프들이 지닌 마법에 가까운 채광 능력과 뛰어난 무구를 제작해내는 장인 기술.
그 이외에는 척박한 다르다넬 산맥의 북부에 면한 지역에 나라를 세운 그들로부터 얻어 낼 수 있는 건 없었다.
그런데 이건 전쟁을 끝내기 전에 드워프들이 싸그리 죽어버릴 판이니.
결국 드워프들의 더러운 성질머리와 투쟁심에 질려버린 당시 교전국들.
그들은 드워프 왕국이 보유하고 있던 무구들을 털어가는 것으로 만족하며 군을 철수시킬 수밖에 없었고.
그런 역사가 두세 번 반복되자, 더이상 드워프들의 왕국인 엘가드를 침공하려는 국가는 없었다.
......라는 것이 명망 높은 드워프 가문의 일원이자 엘가드 왕국의 외교관인 쿠도 르발다의 주장이었다.
“결국 단 한 번도 전쟁에서 이겨본 역사가 없다는 뜻인가?”
“......감정이 메마른 놈이로군. 이 감동적인 이야기를 그딴 식으로 받아들이다니.”
“어떤 부분이 감동적이라는 거지?”
“드워프들의 꺾이지 않는 고귀한 투쟁심!”
“......뭐, 내 고향도 비슷한 일을 겪은 적이 있으니 그건 인정해 주도록 하지.”
“수백 년 전 선조들이 전쟁에서 패한 건 숫자에서 밀렸기 때문이다. 당시 엘가드의 인구는 고작 20만 정도에 불과했지. 물론 성인식을 치른 이들을 모두 전투원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었지만, 그 시대의 전쟁에서 압도적인 ‘숫자’를 당해낼 방법은 없었다. 인간들이 동원한 병력은 언제나 우리 왕국의 총인구수를 훌쩍 뛰어넘었으니까.”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불과 10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지구의 전쟁 양상 역시 이곳과 별반 다르지는 않았으니.
아무튼, 대기간트 시대가 열린 이후로는 대륙 최고의 기간트들을 생산해 내는 그들과 척을 지려는 국가는 존재하지 않았다.
대륙 2강이라 할 수 있는 두 제국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그들을 제외한 최강국을 논한다면 누구나 드워프 왕국 엘가드를 세 손가락 안에 꼽는 걸 주저하지 않을 만큼, 너무나도 강력한 기간트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니까.
나는 드워프 귀족 쿠도 르발다와 ‘메마른 언덕’이란 이름의 펍에서 만나 밤새도록 술잔을 나눴다.
그는 매우 어려운 의뢰를 맡기기 위해 강자들을 영입하고 있다는 사실은 순순히 시인했지만.
의뢰의 내용에 대해서는 엘가드 왕국에 도착한 이후에 알려주겠노라고 말했다.
처음부터 그들이 처한 문제 따위는 내 관심사가 아니었기에, 일단 왕국까지 동행하자는 그의 제안을 흔쾌히 허락했고.
당연한 일이지만, 의뢰의 대가 역시 엘가드 왕국에 도착한 이후 협상하기로 했다.
염치라는 걸 아는 쿠도 르발다는 왕국까지 동행하는 것에 대한 대가로 드워프제 롱소드 한 자루를 선물로 주었는데.
카아아아아아앙
원래 가지고 있던 검에 똑같은 양의 마력을 주입해 서로 부딪히자.
뎅강
마라몬트 왕국제 장검은 그대로 반토막 나버린 반면, 드워프제 장검은 흠집조차 나지 않아 나도 모르게 탄성을 발할 수밖에 없었다.
‘이름은 ‘펠린(고대 드워프어로 새벽을 의미)’. 우리 왕국에서도 손꼽히는 장인이 만든 검이지.’
그렇게 마음에 쏙 드는 검을 허리에 찬 나는.
이튿 날, 쿠도 르발다 일행과 함께 하젠 영지의 외성문을 나섰다.
#2
스노우의 정체에 대해 알게 된 순간.
쿠도 르발다는 두려움과 희열이라는 양가적 감정을 느꼈다.
오너 수십을 학살하고 용병왕과 호각을 이뤘다는 용병 오너에 대한 소문은, 이미 카이샨 왕국 전체에 걷잡을 수 없이 퍼져있는 상태였고.
소문의 절반 정도만 사실이라 할지라도, 엘가드 왕국이 처한 문제 해결을 위해 반드시 모셔가야 할 인재임이 분명했다.
때문에 머리 끝까지 치솟아 오른 희열이 두려움을 이겨내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그는 드워프 귀족인 자신으로서도 구경하기 힘든 엄청난 명주를 들고 나타난 이가 아니던가.
‘사실 우리 왕국을 상대로 전쟁을 한 것도 아니고, 드워프를 죽인 것도 아니잖아. 그를 마다할 이유 따윈 없지.’
동맹국 패전의 원흉이라는 점만 제외하면, 용병왕과 호각(직접 보지는 못했지만)을 이뤘다는 스노우는 그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대륙급’ 초강자였다.
물론 그의 말만 믿고 덜컥 왕국으로 데려갈 수는 없었다.
쿠도 르발다의 호위이자 측근인 상급 엑스퍼트 셋과 5서클 마법사가 하나같이 스노우의 경지를 짐작할 수 없다고 했기에 신뢰도가 대폭 올라가기는 했지만.
‘만에 하나, 실력이 뛰어난 사기꾼일 수도 있으니까.’
그럴 가능성은 매우 희박했지만, 이번 일은 만에 하나의 가능성마저 경계한다 한들 부족하지 않을 정도로 중요한 사항이었다.
그리하여 하젠 영지를 벗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카이샨 왕국의 경계인 사막의 끝자락에서 2대1의 기간트 대결이 벌어지게 되었다.
“이해해 줘서 고맙다.”
“괜찮다. 검증하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지.”
“사내다워서 좋군. 그런데 정말 두 사람을 한 번에 상대할 셈인가? 저들의 실력은 우리 왕국에서...”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군. 네가 검증하고 싶은 건 ‘용병왕을 상대로 호각의 승부를 펼친 괴물 오너’가 아니었나?”
“...그렇군. 기대하지.”
그리하여 벌어진 2대1 대련 혹은 시험.
파아아아아앗
파아아아아앗
최상급 엑스퍼트의 벽을 두드리고 있는 전사이자 일행 중 최강자인 두람의 청색 기간트 ‘베르가(2000rp)’와 상급 엑스퍼트에 오른 지 20년이 지난 베테랑 오너 판투의 은색 기간트 ‘트랙스(1900rp)’가 사막의 모래 위에 그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냈다.
그리고...
파아아아아앗
옅은 빛무리와 함께 드워프제 기간트 못지않게 화려한 붉은색 기간트가 소환되자 쿠도 르발다의 두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응? 가이아? 이게 어떻게 된 거야? 헤수스, 용병왕을 상대한 기간트는 제라스라고 하지 않았나?”
쿠도 르발다의 뒤편에 서 있던 새하얀 수염을 허리 아래까지 기른 5서클 마법사 헤수스가 답했다.
“분명 저도 그렇게... 흐음, 사실 그에 대한 소문부터가 조금 이상하긴 했습니다.”
“이상해?”
“네. 카이샨 군부에서 얻어낸 정보에 따르면, 그가 처음 전장에 등장했을 당시에 타고 있던 기간트는 분명 크로스보우였다고 합니다. 첫 번째 기간트 대전과 알마탄 요새로 향하던 수송부대를 괴멸시킨 전투, 그리고 동부 전선의 모안다 영지를 습격했을 때까지도... 그가 제라스를 타고 전장에 나선 건 알타몬트 대회전이 유일합니다.”
“이해가 가지 않는군. 그럼 고작 한 달, 아니 2주도 되지 않는 시간에 기간트를 바꿔타고 전장에 나왔단 말이잖아. 그게 가능하다고?”
“갈아타는 거야 사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문제는 고작 적응을 시작한 지 2주도 되지 않았을 기간트를 타고... 그 용병왕과 호각을 이뤘다는 사실입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지. 말도 안 되는 일이야. 그런데 저건...”
그의 손가락이 지금 막 탑승을 끝낸 붉은색 기간트를 가리켰다.
“그새 또 기간트를 바꿨다고?”
“...믿을 수가 없군요. 아무리 생각해도 사기꾼일 확률이...”
그때, 오너들이 탑승을 마친 3기의 기간트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붉은색 기간트가 선보인 단 한 수로 인해.
쿠도 르발다와 헤수스를 스멀스멀 잠식해가던 불안감은 단숨에 날아가 버렸다.
스르르르륵
스르르르륵
스르르르륵
.
.
.
스르르르륵
붉은색 기간트의 머리 위 허공에 떠오른 10여 개의 화염구.
“마법!”
“지, 진짜가 확실합니다, 쿠도님! 기간트로 저런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이가 달리 있을 리 없어요!”
“대체 어떻게 저런 마법을...”
하나하나가 직경 5미터가 넘어가는 크기의 거대한 화염구가 베르가와 트랙스를 향해 빠르게 날아갔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앙
콰아아아아아아앙
콰아아아아아아아앙
두 드워프 오너의 실력 역시 만만치 않았다.
드워프 오너로서는 드물게 검과 방패를 양손에 든 베르가의 오너 두람은 빠르게 발을 놀려 4개의 화염구를 피해 낸 뒤, 도저히 피할 수 없었던 마지막 하나를 마력을 덧씌운 방패로 쳐내 버렸고.
거대한 전투 망치를 든 트랙스의 오너 판투 역시 재빠른 기동으로 3개의 화염구를 피해낸 다음, 나머지 두 개는 전투 망치를 이용해 방어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는 이내 자세를 바로잡으며 가이아를 향한 공세로 전환하려 했지만.
“응?”
“뭐야? 대체 어디...”
화염구를 쳐내는 그 짧은 순간을 이용해 말도 안 되는 속도로 움직인 가이아.
그것은 적지 않은 경험을 쌓은 두 베테랑 오너조차 단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초월적인 기동이었다.
스르륵
마치 유령처럼 나타나 일순간 뒤를 잡은 붉은색 기간트가 깍지 낀 두 손으로 트랙스의 등을 후려쳐 버렸고.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크허어어억!”
엄청난 충격을 받은 트랙스는 공중에 붕 뜬 채로 10여 미터를 날아 모래 위로 처박히고 말았다.
기겁한 두람이 황급히 베르가를 움직여 가이아를 향해 달려들었지만.
쑤욱
쑤욱
쑤욱
모래를 뚫고 올라온 거대한 바위 송곳의 방해를 받아 속도를 늦출 수밖에 없었고.
엄청난 기세를 풍기며 쇄도해 들어오는 가이아의 공격을 막기 위해 방패로 전면을 가리고 검을 치켜들며 수세로 전환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를 비웃기라도 하듯 모래를 박찬 가이아가 베르가의 머리 위를 뛰어넘으며 몸을 뒤집었고.
오너인 두람이 그 움직임을 쫓아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그대로 머리를 걷어차이며 트랙스와 마찬가지로 모래 위에 처박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짧은 순간 엘가드 왕국의 상위권 오너 둘이 모래에 처박혀 버리는 광경을 목격한 쿠도 르발다의 입이 쩍하고 벌어졌다.
‘어, 어떻게 기간트로 저런 움직임이 가능한 거지?’
속도도 속도였지만, 마치 엑스퍼트의 움직임을 그대로 재현해 놓은 듯한 유연함은 두 눈으로 보고도 믿기 힘들 정도였다.
그의 뒤편에서 자신의 상관과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던 마법사 헤수스가 입을 열었다.
“반드시, 반드시 잡아야 합니다. 저자는 진짜예요. 방금 보셨습니까? 기간트로 두 가지 속성 마법을 모두 능숙하게 사용하는 걸? 게다가 마법 연계의 딜레이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
드워프 마법사가 떠들어대는 소리는 드워프 외교관의 귀에 닿지 않았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외교관의 마음 역시 마법사와 다를 바 없었으니까.
‘어쩌면... 저자로 인해 정말로 큰 공을 세우게 될지도 모르겠군.’
더 이상의 시험은 필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