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엘가드 왕국(2)
#1
카이샨의 사막지대를 지나 북부 다르다넬 산맥으로 진입한 지 4일.
“곧 있으면 도착하겠군.”
“항상 이런 루트를 이용하나?”
“그럴 리가. 보통은 상단의 이동을 위해 뚫어놓은 길을 이용한다. 이 길은 왕국까지 일직선으로 이어진 루트야. 급박한 일이 있을 때만 사용하고 있지.”
“이딴 걸 ‘길’이라고 부르는군.”
“자세히 보면 드워프들이 다닌 흔적이 남아있다고. 그리고 상로를 이용할 때보다 두 배는 일찍 도착할 수 있을 테니 좀 불편해도 참아.”
과연 드워프 엑스퍼트들이 앞장서고 있는 길의 앞쪽은 풀들이 미세하게 꺾여 있거나 주변 나무 곳곳에 표식들이 남아 있기는 했다.
하지만 꺾여 있는 풀들의 숨이 완전히 죽지 않은 것으로 보아 통행량이 극히 드물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앞서가는 드워프들이 길을 내고 있으니 그리 불편할 건 없었지만, 정상적인 길이 아니라 그런지 몬스터들의 출몰 빈도가 매우 높았다.
총 12인이라는 적지 않은 인원이 빠르게 이동하고 있었던 터라 대부분은 주위를 어슬렁거리다 물러났지만.
게 중에는 숫자에 아랑곳하지 않고 덤벼오는 녀석들도 더러 있었다.
“라크람 무리입니다.”
“전투 준비!”
“좀 많아 보이는데...”
“하필 저 녀석들이라니.”
“기간트를 소환할까요?”
“그러면 너무 소란스러워져. 영역 주인의 심기를 건드리게 될지도 몰라.”
드워프들의 설명에 따르면 이 비밀 루트 주변 영역의 최상위 포식자는 몸길이만 100미터가 넘어가는 거대한 뱀 형태의 몬스터 ‘라비린토스’였는데.
120세가 넘은 쿠도 르발다가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이 영역의 주인이었다고 한다.
녀석은 지능이 매우 높은데다 성정도 그리 포악하지 않다고 알려져 있었고.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드워프들의 통행 정도는 얼마든지 묵인해 주고 있었으나, 자신의 영역이 일정 수준 이상으로 시끄러워지면 마수로서의 본성을 드러내기도 한다고 했다.
드워프 왕국의 힘이라면 기간트 수십 대를 동원해 단숨에 녀석을 처리해 버릴 수도 있을 테지만.
제대로 된 정화작업을 거쳐 정상적인 도로를 건설하지 않는 이상, 어차피 영역의 주인이란 건 계속해서 탄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드워프들이 미치지 않고서야 자신들의 왕국까지 최단 거리로 도달할 수 있는 진격로를 깔아 놓을 리 만무했고.
그렇기에 나름 대화(?)가 통하는 라비린토스는 이 영역의 주인으로 남아 있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소란스럽다’의 기준은?”
“적어도 기간트를 꺼내서 저것들을 때려잡는 건, 확실하게 그 기준을 넘어서는 일이지.”
“그런가? 귀찮게 됐군.”
라크람은 호랑이를 세 배쯤 키워놓은 외형에 온통 검은 털로 뒤덮인 4족 보행 몬스터였다.
근래 들어 발달한 기감으로 유추해 보건데 적어도 A급 하위권 수준은 될 듯했고, 그런 놈들이 무려 10마리가 넘었다.
영역의 주인인 라비린토스를 제외하면 이 구역 최상위 포식자라고 하는데, 어쩌면 그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덩치가 어마어마한데도 소리를 거의 내지 않는군.’
놈들은 적어도 2,3톤은 나갈듯한 모습과는 달리 마치 고양이처럼 가벼운 몸놀림을 선보였고.
종족 특성이라도 지닌 것인지 이상할 정도로 움직임으로 인해 발생하는 소음이 적었으며.
맹수형 몬스터라면 습관적으로 토해내곤 하는 하울링조차 없었다.
어쩌면 저런 특성들로 인해 영역의 지배자로부터 인정을 받은 것일 수도 있었다.
‘아니면, 그 지배자라는 놈에게 적응하느라 저렇게 변해버린 것일 수도 있지.’
라비린토스가 이 일대의 지배자로 자리 잡은 게 벌써 백수십 년 전의 일이라고 하니 충분히 가능성 있는 가설이었다.
사실 내심으론 영역의 지배자라는 라비린토스와 한판 붙어보고 싶었지만.
굳이 최대 호갱... 고객인 드워프들의 심기를 거스를 필요는 없었다.
‘드워프제 기간트를 얻고 난 이후라면 몰라도.’
여러 가지 제약사항을 고려할 때. 나 혼자였다면 하위권이라고 한들 A급 몬스터 수십 마리는 매우 버거운 상대였을 테지만.
지금 이곳에는 탁월한 전투력을 가진 조력자가 열 명이나 존재했다.
드워프 일행은 상급 유저인 쿠도 르발다를 제외하면 전원 중급 엑스퍼트 이상의 실력자였고, 그중 셋은 무려 상급 엑스퍼트였으니까.
‘게다가 두람이라는 녀석은 아마 곧...’
실오라기처럼 미약하게나마 강자의 아우라가 비치는 걸 보면,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최상급의 벽을 뚫어낼 확률이 높았다.
아무튼 쓸만한 칼들이 제법 많았으므로, 나는 대충 서포터의 역할 정도만 해주면 충분했다.
다르다넬 산맥의 북부는 대륙의 중부까지 지류가 뻗어있는 ‘로다임강’의 원류이기도 했기에 ‘수기(水氣)’가 엄청나게 강한 곳이었다.
“운디네.”
화아아아아아앗
처음 이곳에서 소환되었을 때에 비해 적어도 1.5배는 몸집이 커진 투명한 소녀 형상의 정령이 내 주위를 정신없이 날아다녔다.
바다나 강만큼은 아니지만, 수기가 충만한 이곳 다르다넬 산맥이 무척이나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한동안 소환되었던 곳이 물의 정령이라면 질색할 수밖에 없는 사막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런데... 공용스킬로 소환한 정령이 성장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비단 정령뿐만이 아니라, 모든 공용 스킬은 성장이란 걸 할 수 없었다.
적어도 지구에서는 그것이 상식이었는데.
기간트라는 존재를 만난 이후로 모든 것이 변했다.
‘확실해, 기간트와 일체화를 이룬 후 사용한 스킬은 성장한다.’
정령이나 마법 계열 스킬 만이 아니라, 한동안 정체되어 있던 육체 능력이나 감각 역시 눈에 띄게 상승한 것이 그 증거라 할 수 있었다.
아무튼, 성장한 외형만큼이나 지능과 능력 역시 일취월장한 운디네.
그로 인해 원래는 단순히 물을 생성하거나 수계 마법 스킬을 강화하는 역할로 만족해야 했으나... 이제는 이런 것들이 가능하게 되었다.
“저것들을 속박해, 운디네.”
꺄르르 소리 없는 웃음을 토해낸 운디네가 한차례 부르르 몸을 떨자.
촤르르르르르르륵
촤르르르르르르륵
촤르르르르르르르륵
.
.
.
촤르르르르르르륵
정령의 투명한 몸에서 수십 줄기의 물줄기가 뿜어져 나와 허공으로 치솟았다.
허공으로 치솟았던 물줄기들은 이내 일행을 향해 서서히 포위망을 좁혀오고 있던 라크람 무리를 향해 떨어져 내렸고.
눈 깜짝할 새 그들의 목이나 다리, 몸통을 휘감았다.
크르르르릉......
이와 화들짝 놀란 라크람들이 처음으로 낮은 울음을 토해내며 몸을 비틀어댔고.
퍼어어어엉
퍼어어엉
퍼어어어어어
그때마다 그들의 몸을 속박하고 있던 물의 고리들은 속절없이 깨져나갔지만.
무한에 가까운 내 마력 지원을 받은 운디네는 깨져나가는 속도보다 더욱 빠르게 라크람들의 몸을 속박하는 물의 고리를 늘려나갔다.
나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바인딩 스킬까지 시전했고.
정령 스킬만큼이나 성장한 바인딩 스킬로 소환된 넝쿨들 역시 순식간에 덩치를 키우며 라크람들의 몸을 옥죄였다.
물론 그래봐야 고작 C급에 불과한 스킬들로 A급으로 추정되는 몬스터들을 오랜 시간 속박할 수 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이쪽에는 짧은 시간만 주어져도 녀석들의 머리를 으깨어 놓을 힘을 가진 철혈의 전사들이 존재했다.
“곰 토템, 곰 토템, 곰 토템...... 곰 토템. 뭘 구경하고 섰나? 처리해.”
그러자 정령을 소환할 때부터 입을 쩍 벌린 채 눈앞에 펼쳐지는 장관을 구경하고 있던 드워프들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히, 힘이 넘친다!”
“이건 대체...”
“버프 마법? 아니, 사제도 아닌데 이런 일이 가능하다고?”
“놀라고 있을 시간이 없다! 스노우님이 놈들을 붙잡고 있는 동안 모두 처리해야 해. 가자!”
우두머리인 두람의 신호에 10인의 드워프 전사들이 일제히 무기를 빼들며 달려들었고.
비록 C급 스킬에 불과했지만, 끊임없이 이어지는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치던 라크람들은 드워프 전사들의 칼과 망치에 속절없이 목숨을 내어놓아야만 했다.
이 모든 광경을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쿠도 르발다가 조용히 작달막한 엄지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정령까지 다루는 줄은 미쳐 몰랐군. 대체 못 하는 게 뭔가?”
나는 그저 어깨를 으쓱일 뿐 별다른 말을 하지는 않았다.
이럴 땐 말을 아끼는 편이...
좀 더 신비스러워 보이는 법이었으니까.
#2
대륙 북동부의 엘프 왕국 ‘하르세리안’과 판 족의 국가 ‘에르힘’ 사이에 샌드위치처럼 끼어있는 왕국 ‘나이만’.
대륙 17개국 중 가장 작은 영토와 인구를 지닌 나이만 왕국은 독특한 문화와 국방력을 지닌 두 이종족 국가 사이에서 인간 본연의 색을 잃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 중인 약소국이었다.
다행히도 무려 기간트 생산능력을 보유한 두 이종족 왕국 모두 평화(드워프 왕국까지 더해 오르비스 대륙에 전쟁을 좋아하는 이종족 국가는 없다)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었기에 전쟁에 대한 걱정은 오히려 덜한 편이었지만.
그런 이유로 대부분의 왕국민이 양국의 문화를 호의적으로 받아들였고, 자국에 비해 훨씬 더 발전한 두 이종족의 문화에 빠르게 물들어갔다.
나이만 왕국 최강의 검 디페른 공작의 제자이자, 오너로서는 스승을 압도하는 재능을 지닌 왕국 최강의 기간트 오너 칼튼 에거시.
그는 이종족들의 문화에 심취하는 왕국민들의 행태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이였고, 이 모든 것은 나라의 힘이 약하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칼튼 에거시는 나이만 왕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두 이종족 왕국을 자국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막대한 손실만 입히고 있는 ‘악(惡)’으로 규정하고 있었는데.
매우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는 자국의 기간트를 외부로 유출하지 않는 엘프 왕국 하르세리안이나, 기체의 특성상 판 족 이외의 오너가 조종하는 것이 불가능한 판족의 왕국 에르힘은 나이만 강국의 국력 강화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았을뿐더러.
이종족들의 ‘값비싼’ 문화를 향유하느라 소비하는 왕국민들의 막대한 제화가 고스란히 외국으로 흘러나가고 있었고.
일부에서는 이종족들의 문화가 더 우수하다고 믿는 ‘사대(事大)’사상마저 고개를 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칼튼 에거시가 생각하기에 나이만 왕국에게는 새로운 동맹국이 필요했고, 형편없는 기간트 전력을 보강하기 위해서라도 그 동맹국은 반드시 기간트 생산국이어야만 했다.
일단 앞서 언급한 이유로 별 도움은 되지 않지만, 이미 동맹 관계를 유지 중인(약소국 나이만 왕국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 두 이종족 왕국은 제외.
이 두 곳을 제외하면 가장 가까운 곳은 엘프 왕국 너머에 존재하는 대륙 최강국 ‘이펜타르크 제국’과, 세로로 길쭉한 영토를 지닌 나이만 왕국과 아주 협소한 남부 국경을 맞대고 있는 포인츠 왕국 너머에 위치한 ‘크샨트 제국’이 있었지만.
이 두 제국은 과거 대륙 전체를 휩쓴 1,2차 대륙 전쟁(1차 대륙 전쟁은 이펜타르크 제국 건국 이전 발발)에서 나이만 왕국을 침공했었던 역사가 있었기에 이들도 제외(소규모 기간트 거래는 하고 있지만) 할 수밖에 없었다.
다음 순위는 크샨트 왕국 서부에 존재하는 ‘샌포드 왕국’과 이펜타르크 제국 서부에 위치한 드워프들의 ‘엘가드 왕국’이었다.
두 왕국 모두 비싸기로 유명한 기체들을 수출하는 곳이었지만.
어쨌든 기간트를 대량으로 들여올 수 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그리고 마침 대륙 전역에 이름을 알려가고 있는 칼튼 에거시에게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 날아들었다.
그의 사정을 철저하게 조사라도 한 것인지.
자신들이 맡긴 의뢰의 성공에 공헌할 경우, 1800rp급 이하 기간트의 무제한 판매(심지어 1200rp 이하는 80% 가격)는 물론 양국의 동맹을 승인하겠다는 꿀 같은 제안이었다.
이 제안을 한 것이 인간의 국가였다면 왕실이나 칼튼 에거시의 스승인 공작, 그리고 칼튼 에거시 본인 역시 심각한 고민을 거듭해야 했을 테지만.
‘드워프라면 믿을 만하다.’
그것이 모두가 내린 결론이었다.
드워프는 설령 목에 칼이 들어온다 해도 자신들의 신념을 관철해 내고야 마는 종족.
그들이 꿍꿍이속을 가지고 접근했을리 만무했다.
다만...
“엘가드 왕국이 이 정도 조건을 내걸었다는 것은, 그만큼 그들이 맡길 의뢰가 위험하다는 뜻일 터인데...”
스승인 나이만의 검공은 떠나는 칼튼 에거시를 걱정했지만.
자신의 실력에 대한 자신감으로 똘똘 뭉친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스승을 안심시켰다.
“제 실력 아시잖아요. 첼시와 함께하는 이상, 제 상대가 될 만한 인물은 대륙에 스무 명도 안 될 겁니다.”
칼튼 에거시의 스승인 도리안 디페른 공작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자신의 제자는 2년 전 그 유명한 엘프 왕국의 근위 기사 둘을 상대로 한 친선 대련에서 승리를 거머쥔 천재 중의 천재였다.
당시 너무 기뻐 숨이 넘어가기 직전까지 웃어젖힌 나이만의 국왕은 칼튼 에거시의 기체를 ‘칼거쉬(1800rp, 임페르노제)’에서 무려 90만 골드(로비 자금 포함)를 들여 구입한 ‘첼시(2300rp, 이펜타르크제)’로 교체해 주었을 정도.
그리고 첼시로 기체를 교체하고 적응 기간을 가진지 1년.
칼튼 에거시는 무려 엘프 근위기사 넷을 상대로 승리하는 기염을 토했고.
감탄한 엘프 국왕에게 ‘요정의 술(마시면 마력이 소폭 증가, 맛이 끝내주게 좋은 명주)’까지 하사받으며 다시 한번 나이만 왕국의 국왕을 기쁘게 만들었다.
아직 용병왕을 비롯한 대륙 10강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그 나이(37세)를 고려했을 때 수년 내에 그들이 서 있는 위치까지 올라서리라 예상해 봄직한...
나이만 왕국의 무력 ‘그 자체’인 사내가 바로 칼튼 에거시였다.
그렇게 국왕과 스승 앞에서 자신만만한 출사표를 던지고 드워프 왕국 엘가드에 도착한 칼튼 에거시 앞에.
“어, 어떻게 이럴 수가... 말도 안 돼... 이건 꿈이야아아아아아아!”
난데없이 ‘스노우’라는 이름의 거대한 벽이 등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