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투기 버리고 기간트 탑니다-107화 (107/169)

107화 엘가드 왕국(3)

#1

“허......”

실로 오래간만에 ‘말문이 막힌다’라는 감정을 느꼈다.

“그러니까 저게... 엘가드라고? 엘가드는 너희 왕국의 이름 아니었나?”

“엥? 그걸 몰랐단 말이야? 엘가드는 우리 드워프 왕국의 왕도이자 왕국 ‘그 자체’다.”

“그렇다는 건... 왕국에 존재하는 영지가 저거 하나라는 뜻?”

“드워프에겐 영지라는 개념이 없다. 드워프들의 영토는 오직 ‘엘가드’만이 유일하지.”

“......”

나중에서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드워프 왕국에 속한 성(영지)이 정말로 하나밖에 없는 건 아니었다.

왕도이자 왕국이라 할 수 있는 ‘엘가드성’ 이외에도.

다르다넬 산맥의 끝자락과 이펜타르크 제국 국경 사이에 위치한 소규모 항구를 지키기 위해 세워진, ‘엘링스’라는 이름의 성이 존재했다.

하지만 이 엘링스성에는 항구를 지키기 위한 병력과 타국과의 거래를 담당하는 관리들만이 상주하고 있었기에.

드워프 왕국민들이 삶을 영위하고 있는 유일한 영토가 엘가드성이라는 쿠도 르발다의 발언 역시 틀린 말은 아니었던 셈이다.

엘가드성의 규모는 말 그대로 어머어마했는데.

산맥의 일부분을 통째로 깎아내고 만들기라도 한 것인지, 높이가 제각기 다른 정면의 성벽은 감히 그 너비를 추측하기 힘들 정도였다.

‘저 정도면 베른 요새의 10배는 되겠는데?’

이 세계에 떨어진 이후 내가 목격한 가장 큰 규모의 성채는 대수림의 마수들을 막아내기 위해 세워진 베른 요새와 루페른의 왕도를 둘러싸고 있던 외성이었다.

하지만 협곡의 중앙을 메우는 형식으로 세워진 정면의 성벽만은 왕도의 외성에 비해 베른 요새의 성벽이 훨씬 더 웅장한 규모를 자랑했었는데.

그 웅장한 베른 요새의 성벽조차 드워프 왕국 엘가드의 성벽 앞에서는 태양앞의 반딧불처럼 그 빛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하긴, 100만이 훌쩍 넘는 드워프들이 살아가고 있다고 하니... 저 정도 규모라 한들 이상할 건 없지.’

‘빈민’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는 데다 태어나자마자 신분증을 발급하는 드워프들의 특성으로 인해, 엘가드 왕국의 인구 통계는 매우 정확할 수밖에 없었고.

지난해 실시된 인구조사에 따르면 드워프 왕국의 인구수는 총 129만 명을 조금 넘긴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중 엘링스성 주둔군과 해외 파견 임무 중인 드워프 5만여 명을 제외한, 124만여 명이 저곳 엘가드성 내부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했다.

엘가드성의 성문 옆에는 망치와 도끼를 양손에 든 덥수룩한 수염의 근육질 드워프 전사가 세밀하게 묘사된 거대한 석상이 세워져 있었다.

쿠도 르발다의 설명에 따르면 그 조각상이 바로 드워프들의 유일신 라드난이라고 한다.

‘저건 신이라기보단... 그냥 헐벗은 드워프 전사 같은데?’

실제로 상급 엑스퍼트 두람의 상의를 탈의시킨 다음, 크기를 수백 배로 키워놓으면 딱 저것과 비슷한 모양새이지 않을까 싶었다.

그 얘기를 두람 본인에게 넌지시 흘렸더니...

“하하하하하! 역시 보는 눈이 탁월하시군요, 스노우님. 그렇지 않아도 제가 태어났을 때, 저희 마을에선 라드난님의 현신이 아니냐며 난리가......”

“젠장! 또 그 얘기냐, 두람. 어디 감히 네 그 못생긴 면상을 라드난님과 비교해! 신성모독으로 잡혀가고 싶어?”

“흐흐흐, 이제 인정하십시오, 쿠도님. 여기 스노우님도 인정하셨단 말입니다.”

“쳇, 실망이군, 스노우. 실력에 비해 심미안이 너무 낮아.”

아무래도 신을 각별하게 생각하는 것에 비해, 신을 대하는 드워프들의 태도는 경건함과는 거리가 먼 것 같았다.

‘뭐, 이것도 나름 쓸만한 정보로군.’

죽 늘어선 대기자들을 밀어내며 성문으로 다가가자, 쿠도 르발다의 얼굴을 알아본 경비병들이 고개를 꾸벅 숙였고.

그 간단한 인사치레를 끝으로 우리 일행은 성문을 통과할 수 있었다.

흘깃 주변을 둘러보니, 우리를 제외한 출입인들은 듣던 대로 굉장히 까다로운 검문 절차를 거치는 것 같았는데.

내 예상대로 쿠도 르발다는 상당한 권력을 지닌 드워프 귀족임이 틀림없었다.

...라고 생각했었지만.

이것 역시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었는데. 신분이 높은 드워프 귀족일수록 검문 절차가 간소한 건 맞지만, 그렇다 한들 이 정도 수준의 프리패스는 평상시라면 어림도 없는 일이라고 했다.

다만 국가 비상 상황인 현재(일부 수뇌부들만 인지하고 있긴 했지만), 각국의 외교를 담당하는 최고책임자들에게는 드워프 왕의 이름으로 모든 절차를 무시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진 상태였고.

그 증표는 쿠도 르발다의 옷깃에 달린 도끼와 망치가 교차된 문양의 금빛 브로치였다.

그리고 무려 그 권리 덕분에.

우리는 엘가드성에 발을 들인지 고작 30분 만에.

드워프들의 왕을 알현하게 되었다.

#2

드워프들의 왕 파이톤 그레이엄.

그의 첫인상은 단 두 마디로 표현이 가능했다.

크다.

그리고 강하다.

하젠 영지에서 만나 함께 엘가드 왕국으로 온 일행 중 가장 키가 큰 두람의 신장이 170cm. 그 외 나머지 드워프들은 대략 160 중후반대였고 가장 작은 쿠도 르발다는 163cm였다.

그리고 엘가드 왕국에 도착해 확인한 바로는, 쿠도 르발다마저도 드워프 중에서는 제법 신장이 큰 축에 속한다는 사실이었다.

성인 드워프 남성의 신장은 대체로 160cm 전후였고, 드워프 여성들은 그보다 3,4cm 정도는 작은 것 같았다.

의외였던 점은, 세간의 인식과는 다르게 드워프 여성들은 수염을 달고 있지도 않았고 남성들처럼 떡 벌어진 체구도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엘가드 왕국을 직접 방문하지 않는 이상 여성 드워프를 보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는데.

아마도 그러한 이유로 인해 발생한 편견인 듯했다.

아무튼, 쿠도 르발다의 말에 의하면, 170cm의 두람은 인간으로 따지자면 2미터가 훌쩍 넘어가는 거인 드워프였다.

그런데 드워프들의 왕은 그 거인 드워프보다도 머리 하나는 더 큰 괴물이었다.

‘나보다도 훨씬 더 큰 것 같은데?’

내 키가 181cm였으니, 적어도 185cm는 넘을 듯했다.

그런데 드워프 왕을 괴물이라 평하게 만든 요인은 드워프답지 않은 그의 신장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니... 어떻게 세로와 가로의 길이가 똑같을 수가 있지?’

드워프의 왕이 화려한 용상에서 일어나 다가올 때.

나는 흡사 거대한 산이 통째로 움직이는 듯한 착각을 경험했다.

이는 그가 지닌 거대한 존재감으로 인한 탓도 있었을 테지만, 신장과 맞먹을 듯한 어깨너비와 그 비현실적인 비율의 신체를 가득 채운 우락부락한 근육들로 인한 영향 역시 무시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는, 그 강렬한 외모만큼이나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이 정도면, 적어도 알버트 자작의 아래는 아니야.’

본신으로 마주친 적이 없는 마스터이자 용병왕 블레이크 벨을 제외하면, 이 세계에서 만난 인물 중 가장 강한 존재는 단연 브라이드 영지의 알버트 자작이었는데.

드워프의 왕에게서 느껴지는 강자의 아우라는 최상급 엑스퍼트의 극에 이르러 있었던 그에게 뒤처지지 않는 수준이었다.

왕을 알현하는 자리였지만, 무릎을 꿇거나 엎드리는 드워프는 없었다.

때문에 나 역시 멀뚱멀뚱 선 채 다가오는 드워프들의 왕을 바라보았다.

“크흠...”

시선을 옆으로 돌리니 날 향해 눈짓하는 쿠도 르발다의 모습이 보였다.

주변을 흘깃 둘러보자 함께 온 일행들의 시선이 모두 바닥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무릎은 꿇지 않아도 되지만, 빤히 바라보는 건 안 되는 모양이군.’

고객(?)들의 격식을 존중해 재빨리 고개를 숙이려는 찰나.

“그대는 굳이 드워프들의 예법을 따를 필요가 없다.”

코앞에서 우렁우렁한 드워프 왕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나는 반사적으로 숙이려던 고개를 들어 다시 한번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진짜 더럽게 크군.’

솔직히 드워프보다는 오우거에 가까운 덩치였다.

키는 훨씬 더 작았지만, 적어도 어깨너비와 근육만큼은 두 눈으로 확인한 오우거들에 비해 절대 뒤지지 않았다.

드워프 왕의 말이 이어졌다.

“놀랍군. 오러나 마력을 전혀 느낄 수 없어. 그리고... 영혼의 격 역시 기이할 정도로 높군.”

“영혼의 격?”

나도 모르게 반문하고 말았다.

왕좌를 기준으로 도열하고 있던 수십의 드워프 귀족들과 쿠도 르발다 일행이 흠칫하는 게 느껴졌지만.

정작 드워프 왕 본인은 전혀 개의치 않는 듯했기에 그냥 뻔뻔하게 나가기로 했다.

“영혼의 격이란 말은 처음 들어봅니다만.”

“아, 그리 대단한 건 아니라네. 요정의 피를 이어받은 일족 중 일부는 상대가 지닌 영혼의 깊이나 단단함을 느낄 수 있지. 현세에는 나와 엘프들의 왕을 포함해 다섯 정도만이 가능하다네. 그리고 자넨... 내가 259년을 살아오면서 경험한 존재 중 세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로 높은 영혼의 격을 지니고 있군.”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차라리 세 손가락 안에 꼽힐 만큼 강력한 힘을 지닌 존재라 평가했다면 납득할 수 있었을 테지만... 영혼의 격이라니.

‘그런 건... 나 같이 세속적인 놈하고는 어울리지 않는 말 아닌가?’

답을 낼 수 없는 일에 시간을 쏟는 취미는 없었기에, 이것에 관한 대화는 길게 끌지 않기로 했다.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드워프들의 왕이시여.”

“파이톤이라 부르게.”

다시 한번 흠칫 몸을 떨며 헛기침을 해대는 장내의 드워프들.

하지만 나는 호형호제(?)를 거부하는 타입의 인간이 아니었다.

물론 형이나 동생이 내게 도움이 되는 존재일 경우에 한해서만.

“그렇게 하죠. 스노우라 불러주십시오.”

“좋아, 스노우. 그대가 그간 행한 놀라운 활약들은 이미 들어 알고 있다. 다른 건 차치해두더라도, 그 용병왕과 호각의 승부를 벌였다는 사실에는 감탄을 금할 수가 없더군.”

“용병왕을 직접 본 적이 있으십니까?”

“5년 전쯤, 그가 우리 왕국을 방문한 적이 있었지. 400년 묵은 노괴인 엘프들의 왕을 제외하면, 그토록 강한 존재는 처음이었어. 그가 사정을 봐주었는데도 도무지 상대가 되지 않더군.”

이어진 말에 따르면, 당시 크샨트 제국의 의뢰를 수행하던 용병왕이 희귀 금속을 구하기 위해 드워프 왕국에 도움을 요청했고.

그 대가 중 하나가 드워프 국왕과의 대련이었다.

인간들의 왕국에서 이와 같은 일이 벌어졌다면 신하들이 단체로 들고 일어나고도 남을 일이었지만, 철혈의 피가 흐르는 드워프 신하들은 오히려 왕의 수련에 도움이 될 거라 기뻐했다고 한다.

결과는 본신의 대련과 기간트 대련 모두 완패.

드워프 왕의 신신당부로 최선을 다해(그래 봐야 전력은 아니었겠지만) 대련에 임한 용병왕의 실력은 대륙 10강이란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것이었고.

비록 완패로 끝나긴 했지만, 강자와의 대련을 통해 깨달음을 얻은 드워프들의 왕은 용병왕에게 아끼는 술과 선물을 잔뜩 들려 보냈다고 한다.

‘용병왕을 그리도 찾아댔다더니, 다 이유가 있었군.’

드워프 왕이 의미심장한 눈빛을 반짝이며 말했다.

“그런데 자네는 용병왕보다 훨씬 높은 영혼의 격을 지닌데다, 그와 마찬가지로 도무지 경지를 읽어낼 수가 없군. 정말 대단해.”

뭐, 뭔가 좀 많이 착각한 것 같긴 하지만...

날 좋게 본 것 같으니 아무러면 어떤가.

나는 사람 좋은 미소를 장착한 채 입을 열었다.

“실력에는 자신이 있는 편입니다. 그럼 이제 제대로 된 협상을 시작했으면 하는데...”

또다시 장내의 드워프들이 헛기침을 터뜨렸고.

이에 아랑곳 하지 않은 드워프들의 그들의 왕은.

호탕하게 웃으며 나를 국왕의 개인 집무실로 이끌었다.

#3

“그쪽이 이번 의뢰를 함께할 용병?”

국왕과의 협상을 끝내고 나온 내 앞을 가로막는 인영이 있었다.

드워프들과 확연하게 구분되는 길쭉한 키에 호리호리한 체형을 지닌 존재...

“인간?”

“엘프처럼 잘생겨서 헷갈리긴 하겠지만, 인간이 맞다.”

뭐지?

이 실없는 인간은...

하지만 실없는 모습과는 별개로 그에게서 풍겨나오는 강자의 아우라는 결코 우스운 수준이 아니었는데.

‘파이톤이나 알버트 자작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브라이드 백작이나 로버트 서튼 정도라면 견줄 만할 것 같군.’

그 말인즉, 갑작스레 내 앞을 가로막은 저 허여멀건한 인간의 수준이 최소 능숙한 최상급 엑스퍼트 정도는 된다는 뜻이었다.

‘지금이라면 어렵게나마 상대해 볼만 한 수준이지.’

오르비스 대륙에 떨어진 직후였다면 어림도 없는 일이었을 테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성장한 지금의 나라면 자웅을 결해볼 만한 상대.

‘물론 그건 본신으로 싸울 때 이야기고...’

나는 ‘파일럿(S)’ 특성의 고유스킬 ‘호랑이 교관(S)’을 시전해 녀석의 프로필을 활성화 시켰다.

화아아아아앗

녀석의 몸을 스캔하듯 한차례 훑은 옅은 빛이 사그라들고.

스르르륵

시야 한 편에 하나의 프로필이 떠올랐다.

[칼튼 에거시(S) : 37세, 오르비스 대륙 북동부에 위치한 나이만 왕국 최강의 기간트 오너

184cm, 78kg

파일럿 재능 ? 93/97(현재/최대치)

훈련 가능 기체

제우스(C) - 숙련도 0/100

토마호크 SS7 스피릿(E+) - 숙련도 0/100

안티가(B-) - 숙련도 0/100

크로스보우(B+) - 숙련도 0/100

제라스(A-) - 숙련도 0/100

가이아(A) - 숙련도 0/100]

“미친...”

정체성이 ‘왕국 최강의 오너’ 단 하나로 규정되어 있다는 사실도 놀라웠지만.

그 사실이 전혀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을 수준의 천재적인 재능에 다시 한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S급이라니? 저 정도 재능은 처음 보는데...’

지구와 오르비스 대륙을 통틀어 처음 보는 S급 재능.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맹이 수준에 불과했던 녀석에 대한 흥미가 급격하게 치솟음을 느꼈다.

그런데 이런 내 기분과는 별개로.

나에 대한 상대의 첫인상은 그리 좋은 편은 아닌 듯했다.

“뭐? 미친? 보자마자 시비를 걸다니... 배짱 하나는 대단하군. 칼튼 에거시다. 내 이름 정도는 당연히 들어봤겠지? 이번 임무에 낄 정도면 네놈 역시 실력에 자신이 있을 테니... 아무래도 서열 정리가 필요할 것 같군. 훈련장으로 따라와라.”

양쪽 어깨에 매단 새하얀 망토를 멋들어지게 휘날리며 앞서가기 시작하는 칼튼 에거시.

뭔가 오해를 한 것 같긴 했지만, 굳이 이를 정정해주는 수고를 들이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서열 정리? 마침 잘 됐군.”

그거라면 나 역시 꽤 좋아하는 편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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