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토벌대(1)
#1
엘가드 왕국은 전력을 다해 ‘대륙급’ 강자들을 영입하고자 했다.
하지만 ‘대륙급’ 강자라는 것 자체가 모호하기 그지없는 기준 아니던가.
누군가는 대륙 10강을 대륙급 강자로 규정할 것이고.
또 다른 누군가는 그 범위를 20명, 50명으로 넓힐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엘가드 왕국은 영입 임무를 맡은 외교관들에게 일종의 마지노선을 제시해 주었다.
‘왕국의 근위기사 셋을 상대로 승리할 수 있는 수준의 강자.’
엄청난 인구수를 자랑하는 두 제국이나, 인간에 비해 훨씬 더 긴 수명을 지닌 엘프와 드워프 왕국의 근위기사는 여타 인간들이 세운 왕국 소속 근위기사에 비해 좀 더 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엘가드 왕국의 근위기사 셋을 동시에 상대해 승리를 거머쥘 수 있는 수준의 강자?
“그 선에 아슬아슬하게 걸치는 인물이 하얀 늑대의 주인 크로이얀 볼튼이었지. 연속으로 일을 맡을 생각이 없다며 거절하긴 했지만.”
“그자가 드워프 근위기사 셋을 상대할 수 있는 강자라고?”
왕국 전쟁에서 카이샨쪽 용병으로 활약한 하얀 늑대.
가슴에 송곳니를 드러낸 늑대가 양각된 멋들어진 외형으로 인해, 제법 인상이 깊었던 새하얀 기간트의 오너였다.
그런데...
“음...”
지난 전장에서 언제나 나와 어느 정도 떨어진 위치에서 활약했기에 그의 아우라를 느껴 볼 기회는 없었지만.
어렴풋이 기억나는 그의 전투 장면을 돌이켜 보건데, 드워프 근위기사 셋을 상대로 승리를 거둘 수 있을 만한 실력은 절대로 아니었다.
‘그놈과 비슷하거나 살짝 윗줄인 헬레나 오도넬이라면... 음, 역시 둘은 몰라도 셋은 무리야.’
지난 전쟁에서 가장 먼저 내 손에 목숨을 잃었던 멜빈 가이우스라는 이름의 용병이라면... 높은 확률로 드워프들이 정한 기준을 통과할 수 있었을 테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하얀 늑대라는 녀석이 그 정도 수준은 아니었다.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인지.
피식 웃은 쿠도 르발다가 설명을 이었다.
“너도 그 녀석을 본 적이 있겠군.”
“그래, 꽤 잘 싸우긴 했지만 네가 말한 정도는 아니었다.”
“뭐, 그렇게 생각해도 이상할 건 없지. 천성이 게으른데다, 항상 ‘돈 받은 만큼만 일한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녀석이니까.”
“그 말은...”
“말 그대로 돈 받은 만큼만 실력을 발휘한다는 거지. 그래도 받은 만큼은 해주니 여기저기서 찾아대는 걸 테고.”
“웃기는 놈이로군.”
목숨이 오가는 전장에서 그런 짓을 벌이다니, 평범한 정신 상태를 지닌 녀석은 아닌 게 분명했다.
‘뭐, 내가 할 말은 아닌가?’
나 역시 기간트들의 전투가 벌어지는 전장을 반쯤은 파티장이나 놀이터처럼 여겼던 것도 사실이니까.
“웃기기도 하고, 재수 없는 놈이기도 하지.”
하얀 늑대에게 제안을 했다가 대차게 까인 쿠도 르발다는 그에 대한 인식이 그리 좋지 않은 듯했다.
아무튼, 지금 중요한 건 이 자리에 없는 하얀 늑대가 아니었다.
“그래서... 결국엔 나를 포함 셋이 전부다?”
“쩝... 애초에 전 대륙을 다 뒤져도 그런 실력자는 100명이 안 될 거야. 그들 중 이런 위험한 일에 뛰어들 리 없는 높으신 인사들을 제외하면 50은 될까? 그리고 그들 중 위치가 파악되지 않는...”
“변명은 됐고. 어쨌든 더 이상의 인원 충원은 없다는 말이로군.”
긴 한숨을 내쉰 쿠도 르발다가 고개를 아래위로 움직였다.
“하아아... 맞아. 더이상 출발을 미룰 수 없는 지경까지 왔으니, 영입은 끝났다고 봐야지. 덕분에 난 눈도장 제대로 찍었지만.”
각지로 퍼져나간 수백의 드워프 관료 중, 국왕이 인정을 받은 강자를 영입하는 데 성공한 건 고작 셋뿐이었다.
엘가드 왕국에 발을 들인 이들은 50여 명이 넘었으나. 그들 대부분은 국왕의 면접을 통과하지 못한 채, 질 좋은 장비와 돈을 선물 받고는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왕국을 떠났다.
그렇기에 임무의 성패와 상관없이, 쿠도 르발다는 이미 혁혁한 공을 세운 것이나 다름이 없었고.
만약 내 활약으로 라플론 광산의 ‘재앙’이 해결된다면, 그 공은 어마어마하게 덩치를 불릴 것이 분명했다.
“뭐, 어중간한 녀석들 여럿보단 제대로 된 한둘이 더 도움이 되겠지. 한 녀석은 이미 인사를 나눴고, 다른 하나는?”
“아, 칼튼 에거시에게 뜨거운 맛을 보여줬다는 얘기는 들었어. 크크크... 역시 내 눈은 정확하다니까. 사실 그 녀석 정도면 왕국의 근위기사 서넛쯤은 찜쩌 먹고도 남을...”
“다른 하나는?”
“쳇, 넌 다 좋은데 너무 차가운 게 탈이라고.”
“털복숭이 사내놈에게 나눠줄 온기 따윈 없어.”
“......”
잠시 휘둥그레 커진 눈으로 날 바라보던 쿠도 르발다가 말을 이었다.
“너도 농담이란 걸 하는군.”
“농담이라고 생각하나?”
“크흠! 아무튼 기대해도 좋을 거야. 다른 한 사람의 정체는 무려...”
그때.
어디선가 은은한 과일향이 풍겨왔고.
이내 나와 쿠도 르발다가 이야기를 나누던 왕궁 분수대의 뒤편에서 여성의 청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개, 제가 직접 해도 될까요?”
#2
분수대 뒤편에서 등장한 이는 껑충한 키와 기다란 귀가 인상적인 엄청난 미인이었다.
“엘프?”
나는 반사적으로 말문을 열며 ‘호랑이 교관(S)’ 스킬을 사용했다.
화아아아아앗
미약한 빛이 엘프의 전신을 스캔하듯 훑었고.
이내 시야 한 편에 그녀의 프로필이 떠올랐다.
[이파니슬라 르 바라탄(S) : 169세, 하르세리안 왕국의 국왕 ‘베르세우스 엘 바라탄’의 2번째 딸이자, 유니크 기간트 아르테미스의 주인.
177cm, 49kg
파일럿 재능 ? 94/98(현재/최대치)
훈련 가능 기체
제우스(C) - 숙련도 0/100
토마호크 SS7 스피릿(E+) - 숙련도 0/100
안티가(B-) - 숙련도 0/100
크로스보우(B+) - 숙련도 0/100
제라스(A-) - 숙련도 0/100
가이아(A) - 숙련도 0/100]
‘이 엘프도 S? 아니, 그보다... 얘도 엘프 왕의 자식이잖아?’
이로서 직접 대면한 엘프 왕국 국왕의 자식만 벌써 셋.
이파니슬라 르 바라탄이라는 긴 이름을 가진 이 엘프 공주는 파일럿 재능이 B+(71/78)급에 불과했던 그녀의 여동생(스타니 상단주, 114세)은 물론이고, A+(87/92)급 재능을 보유한 남동생(카일 어네스트, 106세)에 비해서도 훨씬 더 뛰어난 재능을 지닌 인재였다.
‘이틀 연속 S급 재능을 목격하다니.’
과연 영입 조건이 대륙급의 강자일만 한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거기에 드워프왕의 빡빡한 면접을 통과한 3인 중 하나이니 오죽하겠는가.
게다가 느껴지는 아우라로 보건데...
‘드워프 국왕이나 알버트 자작과 비슷한 수준이다.’
이 엘프 공주님은 본신의 힘 역시 마스터의 벽 앞에 서 있는 강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러 있었다.
내 앞으로 다가온 엘프가 투명하게 느껴질 정도로 하얀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눈높이는 181cm인 나와 거의 같은 수준이었는데.
내가 신고 있는 신발에 비해 굽이 높은 전투용 장화를 신은 탓인 것 같았다.
“반가워요. 이파니슬라 르 바라탄이에요.”
나는 그녀가 내민 손을 잡으며 짧게 답했다.
“스노우다.”
이에 화들짝 놀란 쿠도 르발다가 황급히 끼어들었다.
“예, 예의를 갖추게. 이분은...”
그가 짧은 팔을 허공에 휘저으며 이파니슬라 르 바라탄의 정체를 언급하려 했지만.
당사자인 엘프 공주의 답이 한발 빨랐다.
“괜찮아요. 그리고... 앞으로는 친근하게 이파니라고 불러줘요.”
그러자 입을 쩍 벌리며 다시 한번 눈을 크게 뜨는 쿠도 르발다.
“그, 그건 왕국에서도 국왕 폐하만...”
아무래도 드워프 왕국에서 그녀를 ‘이파니’라 부를 수 있는 존재는 국왕 파이톤 그레이엄이 유일한 듯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내게 도움이 될 만한 인간(이 경우엔 엘프이긴 하지만)과 내가 유리한 입장에서 맺는 호형호제(?)는 얼마든지 환영이다.
나는 어깨를 이용해 쿠도 르발다의 드럼통 같은 몸을 슬쩍 밀어내며 말했다.
“이파니... 아름다운 이름이군. 당분간 잘 부탁한다.”
그녀의 신분도 신분이지만.
무려 유니크 기간트라는 ‘아르테미스’의 존재가.
미칠 듯이 궁금했다.
#3
드워프 왕국이 공을 들여 영입한 ‘대륙급’ 강자는 모두 셋.
나와 VIP(엘프왕)의 가족인 엘프 공주 이파니, 그리고 저 대륙 북동부 어딘가의 가난한 왕국 출신이라는 칼튼 에거시였다.
“우, 우리 왕국은 가난하지 않다!”
“누가 뭐라 그랬나?”
“바, 방금 우리 왕국을 욕하는 듯한 말이 들린 것...”
“잠이 부족한가 보군.”
“......”
아무튼. 내게 별 힘도 써보지 못한 채 패배한 이 어리숙해 보이는 녀석 역시, 버프 스킬을 모조리 동원해야만 마법 없이 승리할 수 있는 수준의 강자이긴 했다.
‘어깨 차징을 할 때 중첩한 실드를 벽처럼 활용했으니... 아예 마법을 배제한 것도 아닌가?’
최소한 내 손에 죽은 멜빈 가이우스나 천재 오너로 명성이 자자한 헬레나 오도넬보다는 한 단계 이상 윗줄의 강자.
그리고 ‘아르테미스’라는 아름다운 이름의 은빛 기간트에 탑승한 엘프 공주 이파니의 경우는...
‘강하다. 용병왕에겐 못 미치지만, 100합 정도는 충분히 버틸 수 있을 것 같은데?’
이파니는 내가 이 세계에 떨어진 이후 목격한 오너 중, 용병왕을 제외하면 단연 첫손가락에 꼽힐 만한 강자였고.
무려 2700rp란 어마어마한 출력을 자랑하는 그녀의 기간트 아르테미스 역시, 치솟는 탐심(貪心)을 숨기기 힘들 만큼 너무나도 멋진 기간트였다.
첼시라는 비교적 소박한(?) 기간트의 주인인 칼튼 에거시 역시 그녀의 기간트를 바라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와씨, 저건 언제봐도 죽여준단 말이지!”
“그래도 보는 눈은 있군.”
“당연하지, 저건 하르세리안에도 단 한기밖에 없는 기간트라고. 거기 왕궁에 세 번이나 초대 됐었는데... 아르테미스를 실제로 본 건 오늘이 처음이야.”
“하르세리안의 왕궁에 세 번이나? 네가 왜?”
“지금 날 무시하는 거냐? 난 대나이만 왕국 제일의...”
“됐고, 거기 왜 갔는지나 말해봐.”
“...동맹인 엘프들과는 2년에 한 번씩 친선 대련을 벌인다. 난 10년간 그 친선 대련에 빠지지 않고 출전했지.”
“너 말곤 엘프들을 이길 수 있는 오너가 없었나 보군.”
“......”
나는 시무룩한 표정을 짓는 칼튼 에거시를 무시한 채.
마지막으로 합류한 ‘대륙급’ 강자가 탑승한 기간트를 바라보았다.
8미터가 가볍게 넘어가는 육중한 덩치의 중갑형 기간트.
검은색이 베이스인 외부장갑에는 화려한 황금빛 문양들이 마치 문신처럼 새겨져 있었는데.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쿵쿵쿵쿵쿵쿵쿵쿵쿵
터어어어어어어어어엉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엄청난 속도로 기동하는 검은색 기간트는, 놀랍게도 이파니의 아르테미스와 대등한 승부를 펼치고 있었다.
“와, 괴물들... 저러고도 대륙 10강이 아니라고? 그럼 난 대체 언제...”
사실 두 기간트에 타고 있는 건 칼튼 에거시가 살아온 인생의 몇 배에 해당하는 세월을 기간트 오너로 활동해온 존재들이었기에.
어떻게 보면 고작(?) 20년도 되지 않는 기간에 그들과 근접한 수준으로 성장한 그가 더 대단한 것일 수도 있었지만.
딱히 위로 같은 걸 해주고 싶지는 않았다.
이윽고, 두 기간트의 대련이 마무리되었다.
파아아아아앗
검은색 기간트가 희미한 빛무리에 휩싸이며 사라졌고.
기간트가 사라진 위치에 모습을 드러낸 존재는 이 나라의 국왕보다 조금 작은 덩치를 지닌 장년의 드워프였다.
“크하하하하하! 그새 실력이 더 느셨군요, 공주님!”
호탕하게 웃으며 이파니 공주를 향해 다가가는 그의 정체는...
1차 토벌에서 입은 극심한 부상을 극복하고 2차 토벌대에 합류하기 위해 복귀한, 엘가드 왕국 최강의 오너 오펠로 브롬이었다.
그리고 그가 합류함으로써.
4인의 대륙급 강자들과 드워프 왕국의 상위권 오너 50인으로 구성된.
2차 토벌대의 출정 준비가 모두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