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토벌대(2)
#1
콰아아아아아아앙
쿠우우우우웅
“으에에...”
붉은색 기간트의 전광석화 같은 뒤차기에 흉부를 가격당한 뒤, 무려 20여 미터를 날아가 바닥에 처박혀 버리는 엘프 공주의 기간트 아르테미스.
그 말도 안 될 정도로 유려한 동작을 목격한 칼튼 에거시의 입에서 의미를 알 수 없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칼튼, 정신차리게! 어서 공주님을 보호해!]
다행히 콕피트 내부에 울려 퍼진 걸걸한 목소리가 그의 붕 떠버린 정신을 현실 세계로 끌어내려 주었다.
하지만 다급한 목소리가 무색하게도 엘프 공주의 기간트를 날려 버린 붉은색 기간트 가이아는 미동조차 없이 제자리에 서 있을 뿐이었는데.
칼든 에거시는 그 모습이 더럽게 거만하다고 생각했다.
머쓱해진 그가 검과 방패를 앞세우며 가이아를 향해 접근하려 할 때.
또 다른 목소리가 첼시(칼튼 에거시)와 에키드나(오펠로 브롬), 아르테미스(이파니슬라 르 바라탄)을 연결 중인 내부 통신 채널을 통해 흘러나왔다.
[전 괜찮아요. 그리고 오펠로... 전 공주가 아닌 동맹국의 전사로서 이곳에 온 거예요. 그러니 이번 임무가 끝날 때까진 이파니라고 불러주세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공ㅈ... 이파니.]
사실 이 부분에 있어서만큼은 크나큰 만족감을 느끼고 있던 칼튼 에거시였다.
엘가드 왕국의 의뢰를 함께할 ‘대륙급’ 강자 중 하나라는 이유로, 그 역시 강대국인 엘프 왕국 하르세리안의 공주를 편하게 부를 수 있는 권리를 얻었기 때문이다.
아담한 사이즈의 여성을 선호하는 칼튼 에거시(미혼)에게, 자신에 비해서도 그리 작지 않은 신장을 지닌 이파니는 이상형과 제법 거리가 먼 편이었다.
‘그래도 얼굴은 진짜 끝내주게 예쁘니까.’
잠시 쓸데없는 상념에 사로잡혀 있던 그의 귓가로 오펠로 브롬의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멍청이가! 대체 뭘 하는 거냐!]
그 우렁우렁한 목소리에 퍼뜩 정신이 든 그의 눈앞에, 붉은색 기간트의 모습이 마치 잔상처럼 나타났다 사라졌다.
그리고...
콰아아아아아아아앙
“끄아아아아아아악!”
후두부를 강타한 충격에 머리가 터지는 듯한 착각을 느낀 칼튼 에거시가 폐부 깊숙한 곳에서 솟구쳐 오른 비명을 토해냈다.
[머저리 같은 놈!]
[멍청이...]
연이어 들려오는 오펠로 브롬과 이파니의 목소리.
“아니, 이건...”
물론 잠시 딴생각에 잠겨 빈틈을 드러냈던 건 사실이었지만.
그렇다 한들 이건... 천재 중의 천재라 불리던 자신의 감각이 제대로 인지하지도 못할 만큼 미친 속도로 움직인, 저 빌어먹을 붉은 기간트가 이상한 것이었다.
한동안 끙끙거리며 뒤통수를 부여잡고 있던 칼튼 에거시와 그의 기간트 첼시.
어느 정도 고통이 가시자 부끄러움과 분노가 그 빈자리를 대신하기 시작했다.
파아아아아앗
왼손에 들고 있던 지름 4미터짜리 원형 방패를 역소환 해버린 칼튼 에거시.
그는 허리춤에 달린 검집에 검을 꽂아 넣으며 이를 갈았다.
“뿌드득, 내게 이런 수모를 안기다니... 대나이만 왕국 제1검의 이름을 걸고, 반드시 한 방 먹여주고 말...”
[뭘 주저리주저리 떠들고 있나! 빨리 합류하게!]
[멍청이...]
“......”
대나이만 왕국 제1검이 어쩌다 이런 신세가... 따위의 생각을 하는 바람에 한 번 더 핀잔을 들은 그가 눈빛을 서늘하게 가라앉히며 가이아의 빈틈을 노리기 시작했다.
지난번 대련에서도 충분히 느꼈던 바였지만,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한 스노우라는 동대륙인 오너의 실력은 너무나 대단했다.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자신의 이름 앞에 놓이던 ‘천재’라는 수식어가 심히 부끄러워질 만큼.
별다른 고급 검술을 익힌 티가 나지 않았음에도, 압도적인 힘과 속도가 담긴 그의 검격은 하나하나가 검술 명가의 비전에 뒤지지 않는 위력을 지니고 있었고.
도무지 기간트의 움직임이라곤 믿기지 않는 비현실적인 기동은, 마치 최상급 엑스퍼트에 이른 강자의 몸집을 수십 배로 키워놓은 것만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대체 저건... 어떻게 기간트를 타고 저런 마법들을 사용할 수 있는 거지?’
나이만 왕국의 선배 오너 중에도 2서클 마법을 익힌 괴짜가 있었다.
고작 2서클이라 한들 마법은 마법이었고.
고작 2서클이라 한들 마검사는 마검사였다.
하지만 기간트에 오른 그가 구사하는 마법은...
‘이거 보이냐, 칼튼?’
‘뭘 말입니까?’
‘레프리온(1500rp, 크샨트제)의 검에 마법을 걸었지.’
‘뭐가... 변한 겁니까?’
‘여길 잘 봐, 검의 광택이 살짝 약해졌잖아. 리듀스(3써클) 마법에 성공했다고!’
‘...기간트를 타고 암살이라도 하려고요?’
대부분 저런 수준의 하등 쓸모없는 것들 뿐이었다.
3써클 마법을 우습게 보는 것은 아니다.
본신으로 검을 겨룰 시, 그 선배의 3서클 마법은 까다로운 수준을 넘어 ‘게임체인저’라 불리기에 부족하지 않을 정도의 위력을 발휘하곤 했으니까.
문제는 기간트와의 동화를 거쳐 마법을 발휘할 경우, 그 어려움이 수배로 증폭된다는 점에 있었다.
기간트의 마력엔진이 오너의 오러와 마력을 증폭시키기에 마법의 크기와 위력이 그만큼 증가하는 효과가 있기는 했지만.
그 효과를 누리기엔 기간트를 통한 마법 시전의 난이도는 그보다 몇 배는 더 뛰어올라 버렸으니까.
예를 들자면 본신의 상태로 시전 할 시 70~80cm가량의 검신을 완전히 투명하게 만들 수 있는 리듀스 마법이.
기간트에 탑승한 채 시전할 경우엔, 3~4미터에 이르는 검신의 광택을 조금 죽이는 정도의 마법으로 격하된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저 스노우라는 작자는...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언뜻 보기에도 7미터는 훌쩍 넘어갈 듯한 얼음의 창 20여 개가 에키드나와 아르테미스의 전신을 노리고 벼락처럼 내려꽂힌다.
훌쩍 뛰어 뒤로 피하려는 에키드나의 등 뒤로 두께 3미터 높이 10여미터의 이르는 석벽이 솟아나 그의 퇴로를 막아섰고.
콰아아아아아앙
비록 뒤로 휘두른 에키드나의 방패에 순식간에 파괴되어 버리고 말았지만.
드르르르르륵
드르르르르륵
드르르르르륵....
파괴되는 동시에 또다른 석벽이 곧바로 솟아나며 육중한 드워프제 기간트를 귀찮게 만들었다.
이변은 한 곳에서만 벌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드워프제 기간트가 석벽의 방해를 받으며 자신을 추적하듯 날아든 얼음창을 일일이 쳐내는 사이.
은빛 엘프제 기간트 아르테미스는 끊임없이 자신의 몸을 옥죄려드는 거대한 넝쿨들을 떼어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물론 초고등급 기간트 아르테미스가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힘없이 뜯겨 나갈 만큼, 제대로 된 저지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넝쿨들이었지만.
그녀가 상대해야 하는 건 넝쿨들만이 아니었다.
스아아아아아아
스아아아아아아
스아아아아아아아...
십 수 개의 얼음창에 이어, 시야에 제대로 잡히지도 않는 거대한 바람의 칼날 십여 개가 아르테미스의 전신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무슨 수를 쓴 것인지, 바람의 칼날들은 아르테미스의 근처에 도달하기 직전 모두 소멸하고 말았지만.
그 뒤로는 또 다시 직경 10여미터에 이르는 화염구들의 공격이 이어졌다.
그 경천동지할 광경을 바라보던 칼튼 에거시의 입이 스르르 벌어졌고.
잔뜩 힘을 준 채 움켜쥐고 있던 검의 손잡이마저 놓아버리고 말았다.
그리고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6써클 마법사도 저런 짓은...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능해... 뭐야 그럼... 설마... 7써클이라도 된다는...”
그리고 기간트의 통신 채널을 통해 전파된 그의 멍한 음성에.
가이아의 마법 폭격과 그 사이사이로 파고드는 날카로운 공격에 진땀을 흘리고 있던 드워프와 엘프가 폭발하고야 말았다.
[칼튼 에거시, 이 빌어먹을 자식아!]
[바보! 멍청이! 머저리! 식충이......]
#2
1700rp급 기간트 가이아를 손에 넣은 현재.
내가 용병왕을 상대로 승리를 거머쥘 수 있는 가능성은 대략 30% 정도라고 생각한다.
물론 어디까지나 내 판단에 의한 계산일 뿐이었기에, 실제 전장에서는 확률 그대로의 결과가 도출되지는 않을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기간트 전투에 관한 한, 내 예상이 틀릴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을 터였다.
그리고 그 말인즉, 나는 여전히 용병왕에 비해 약하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알타몬트 대회전 당시(제라스)의 내 승률이 5% 미만이었던 걸 감안하면, 이마저 괄목상대(刮目相對)라 할 만한 변화였다.
여기에는 기체의 등급이 오른 것도 무시할 수 없었지만, 용병왕과의 전투를 통해 내 본신의 능력이 진화한 것 역시 무시할 수 없는 이유였다.
‘뭐, 어떻게 변명하든... 결국 여전히 용병왕과 대등한 승부를 벌일 수준은 아니라는 뜻이지. 하지만...’
전투 유지력이라면 어떨까?
이것이라면 용병왕이고 뭐고 간에 결코 내 상대가 될 수 없었다.
‘파일럿(S)’ 특성을 각성한 뒤.
던전 브레이크를 막아내며 벌어들인 막대한 수익 중 일부를 투자.
‘마력강화(C)’ 스킬을 한계까지 강화해 무한에 가까운 마력을 손에 넣은 이후로...
내 최고의 강점이 ‘전투 유지력’이라는 사실은 단 한 번도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이 세계로 넘어와 기간트 오너가 된 지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대륙급’ 강자라는 세 오너, 그중에서도 초고등급 기간트의 오너인 엘프와 드워프는 1대1로 맞붙더라도 쉽사리 제압하기 힘든 수준의 엄청난 강자들이었다.
특히 엘프 오너인 이파니 공주의 실력이 무척이나 인상 깊었는데.
최상급 엑스퍼트이자 바람의 정령(상급)을 다루는 정령사인 그녀와 엘프제 기간트 특유의 ‘정령력 증폭 마법진’을 장착한 아르테미스의 시너지는 그야말로 엄청난 것이었다.
고유스킬을 제외한 공격 스킬 중 가장 강력한 축에 속하는 바람의 칼날 십여 개가 그녀의 근처에 도달하지도 못한 채 소멸되어 버렸는데.
이는 그녀가 소환한 바람의 상급 정령으로 인해 일어난 일이었다.
이파니가 바람의 정령의 힘을 빌리기 시작하면서부터 시종일관 내게 유리하게 흘러가던 1대3 대련의 양상이 변하기 시작했다.
물론 20분이 넘게 지속된 전투로 인해 스킬(마법)을 이용한 공격에 세 오너가 익숙해진 탓도 무시할 수는 없을 테지만.
가진 재능과 능력에 비해 미숙한 티가 역력하던 나이만 왕국의 오너 칼튼 에거시 역시.
어리버리하던 전투 초반과는 달리, 대련 시간이 30분을 넘긴 시점부터는 다른 두 오너와 손발을 맞춰 제법 날카로운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사실 이 셋의 합공이라면 대륙 10강의 일원인 용병왕조차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수준이었기에.
나 역시 전투 지속 시간이 길어질수록 점점 더 수세에 몰리는 형국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수세(守勢)’란 말 그대로 적을 맞아 지키는 형세를 뜻한다.
그리고 이 또한 전투를 치르는 방식 중 하나.
30분.
40분.
50분.
1시간.
쿠우우웅
[젠장, 이제 그만해요! 이대로는 끝이 없겠어!]
칼튼 에거시의 첼시가 훈련장 바닥에 주저앉는 것을 끝으로 대련은 막을 내렸다.
무려 1시간 동안 이어진 1대3의 대련.
‘대륙급’ 강자라 한들 오러와 마력은 한정적일 수밖에 없었고.
내색하진 않았지만 다른 두 오너 역시 여력이 간당간당한 상태일 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에 비해 난...
[마력 14262/27399]
엄청난 마력양과 그에 뒤지지 않는 수준의 마력 회복 속도로 인해 절반 이상의 여력이 남은 상황.
물론 이게 실전이었다면, 힘이 바닥을 드러내기 전 승부를 내기 위한 온갖 비장의 수들이 터져 나왔을 테니.
지금처럼 손쉽게 1시간을 버텨내는 퍼포먼스를 선보일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대련이나마 대륙급 강자 3인과 대등한 전투를 벌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대륙 10강 정도는 되어야 가능한 일이겠지.’
훈련장을 둘러싸고 대련을 지켜보던 드워프왕을 포함한 100여 명의 드워프 오너와 수백의 드워프 관리들의 경악한 표정이, 내가 해낸 일의 대단함을 일깨워주는 지표나 다름없었다.
파아아아아앗
파아아아아앗
파아아아아앗
파아아아아앗
차례로 기간트를 소환 해제한 우리 네 사람을 향해 엘가드의 국왕 파이톤 그레이엄이 다가왔다.
붉게 상기된 그의 미간은 잔뜩 찌푸려진 상태였는데.
나는 그의 기분이 좋지 않은 이유를 매우 잘 알고 있었다.
“정말 대단하군. 정말 대단해. 나도 자네들과 함께...”
“아니되옵니다!”
“폐하!”
“불가!”
“정신이 나갔군!”
“왕이 미쳤다!”
왕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의 주위에 있던 드워프 중 일부가 기함하며 그를 말렸다.
그들 중에는 인간의 왕국이라면 상상치도 못할 언사를 내뱉는 이들도 존재했는데, 모두가 300살에 가까운 드워프 원로들로 왕실의 어른이나 왕의 스승쯤 되는 인물들이었다.
본신의 실력만이라면 오펠로 브롬과 함께 드워프 왕국 최강을 다툴만한 인물이 바로 국왕인 파이톤 그레이엄이었지만.
애석하게도 그의 파일러 재능은 고작 C등급.
물론 이 정도만 해도 평범한 오너 수준은 되었지만.
아무리 드워프들의 기간트 제작 기술이 총망라된 3000rp급 미친 기체를 소유하고 있다고 한들.
드워프 오너 중 50% 안에도 들지 못하는 실력으로, 50인의 토벌대에 끼어드는 건 무리(물론 본신의 실력과 기간트의 성능으로 인해 실질적인 전력은 10% 이내)였다.
나를 포함한 4명의 메인을 제외하고도.
토벌대에 선발된 50인의 오너는 20인의 근위기사 중 무려 10인을 포함해, 전원 엘가드 왕국에서 30% 이내의 실력을 지닌 정예 중의 정예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니까.
“저희를 믿어주소서.”
결국 토벌대의 대표인 오펠로 브롬이 나서 그를 진정시켰고.
친히 전장에 나서고 싶어 안달이 났던 왕은 의지를 꺾을 수밖에 없었다.
‘다행이로군.’
VIP와 함께 전장에 나서는 건 여러모로 무척이나 피곤한 일이었을 테니까.
그리하여 이튿날 오전.
나와 대륙급 강자 3인을 포함한 54인의 토벌대가 엘가드성을 벗어나 북부 다르다넬 산맥의 라플론 광산을 향해 출발했다.
목표는 그곳에 웅크리고 있는...
재앙급 몬스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