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인간, 드워프, 엘프, 그리고 인간(1)
* 이전 회차 제국 검성의 성이 크로비스 -> 발렌타인으로 수정되었습니다.
#1
전신이 찬란한 황금빛 털로 뒤덮인 신장 8미터짜리 2족 보행 몬스터.
얼굴까지 수북한 털로 뒤덮여 있었기에, 보이는 것이라곤 새빨갛게 빛나는 두 개의 눈동자뿐이었고.
그것은 몬스터의 압도적인 존재감과 더해져 섬뜩하고 아찔한 공포감을 불러일으켰다.
토벌대 3조의 리더인 칼튼 에거시 포함 30인(본래는 31인이었으나 기습으로 한 기가 다운되었다)의 오너는 무기 슬롯에서 소환한 길이 7미터, 폭 4미터짜리 방패로 몸을 가리며 천천히 포위망을 좁혀갔다.
평소 검술의 특이성으로 인해 롱소드 한 자루만을 애용하는 칼튼 애거시는 물론이거니와, 대부분 거대한 전투망치를 사용하는 드워프 오너들 역시 이번 토벌전을 위해 엘가드 왕국 최고의 장인들이 제작한 특수 합금 방패를 장착할 수밖에 없었다.
그 이유는 1차 토벌 시 확인한 미확인 최상급 몬스터의 괴력 때문이었는데.
일반적인 기간트의 외부장갑만으로 녀석의 공격에 대처하다가는 피해가 극심해질 것이라는 판단이 내려졌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눈으로도 쫓기 힘들 정도의 속도로 움직이는 괴물을 상대로, 국가 간의 전쟁에라도 나서는 것마냥 추가 장갑을 덕지덕지 붙여 놓을 수도 없는 노릇.
결국 이들이 선택할 수 있는 건 방어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 거대하고 단단한 방패뿐이었다.
기간트들이 허리를 조금 숙이자 그들의 전신이 방패에 의해 가려졌다.
비슷한 덩치의 강철 거인 30기가 포위망을 형성한 상태였으나, 그 포위망의 중심에 선 몬스터의 태도는 여상스럽기 그지없었다.
‘젠장, 아주 그냥... 여유가 넘치는군.’
토벌대 3조를 이끌고 있는 칼튼 에거시는 그런 몬스터의 행태를 보며 속으로 이를 갈았다.
하지만 저 여유가 이해가 가지 않는 바는 아니었다.
‘대단하긴 했지. 속도건 힘이건...’
첫 교전... 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기습으로 인해 순식간에 기간트 한 기가 전투불능이 되어버렸다.
드워프들이 제작한 외부장갑의 견고함은 대륙에서 첫 손가락에 꼽히는 수준.
그럼에도 불구하고 1800rp급 기간트 베너젤의 외부장갑을 간단하게 뚫어버리고 팔과 다리를 몸통에서 분리시켜버리는 괴력은 다시 생각해 봐도 아찔함 그 자체.
‘이거 암만 봐도, 가디언 4마리 중에 이놈이 제일 강한 것 같은데...’
라비린토스의 경우 엄청난 덩치와 산성독이 위협적이긴 했지만, 산성독의 경우 어느 정도까지는 마력을 덧씌운 외부장갑으로 버티는 것이 가능했다.
그리고 몸집이 크다는 것은 장점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움직임이 쉽게 노출되고 타격면적이 넓다는 뜻이기도 했다.
게다가 이미 정보가 쌓일 대로 쌓인 몬스터가 아니던가.
통신 마법을 방해하는 특수한 전파를 발산한다는 점과 비행몬스터라는 점에서 꽤 까다로운 상대이긴 했지만.
급강하 후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을 이용한 공격 패턴 일변도인 보스페로스 역시, 칼튼 에거시의 발검술로 상대하기에 썩 나쁜 상대는 아니었다.
정신 지배라는 사기적인 특수능력으로 수백의 중,상급 몬스터들을 이끌고 다니는 프리가모스는 분명 까다로운 상대였지만, 가디언 본신의 능력만큼은 4마리 중 가장 약했다.
그렇기에 30기의 기간트가 밀집 대형을 펼치고 버티기에 들어간다면, 다수의 몬스터를 상대로 시간을 끄는 것 정도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이 녀석은...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마치 순간이동이라도 하는 것마냥, 잔상을 남기며 고속으로 움직인 가디언이 2000rp급 기간트 베르가의 방패를 어깨로 들이박았다.
쿠당탕탕탕탕탕
쿠우우우우우웅
베테랑인 베르가의 오너가 취한 방어 자세는 완벽했다.
하지만 가디언의 엄청난 속도와 무게가 실린 차징의 위력은 그야말로 어마어마했고.
10톤이 넘어가는 무게를 지닌 베르가는 뒤를 받쳐주던 트랙스(1900rp) 한 기와 함께 다르다넬 산맥의 대지 위로 처박히고 말았다.
쓰러진 베르가가 놓친 방패는 거미줄 같은 금이 죽죽 그어진 것으로 보아 이미 그 쓸모를 다한 것으로 보였다.
쉬이이이이이이이이익
가디언이 공격을 시도한 뒤 드러난 찰나의 틈을 노린 칼튼 에거시의 발도술이 펼쳐졌다.
왼쪽 허리춤에 걸려있는 검집에서 빠져나온 검이 빛살 같은 속도로 가디언의 등을 노렸고.
파삿
엄청난 반사신경으로 몸을 날린 가디언의 대응으로 인해, 강철같이 단단한 녀석의 털 몇 가닥을 베어내는 데 그치고 말았다.
명백하게 실패한 공격.
하지만 공격에 실패한 칼튼 에거시는 씨익 한쪽 입가를 들어 올렸다.
[됐다!]
크르르르르르르르...
조금 전까지만 해도 어디를 보는 것인지 모호했던 가디언의 시선이 정확하게 칼튼 에거시의 첼시를 향하고 있었으니까.
애초에 이 녀석을 상대로 30기가 넘는 기간트를 배정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버텨라. 어느 정도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칼튼 에거시와 30인의 오너에게 주어진 임무는 스노우가 가디언들을 제외한 몬스터들을 모두 처리할 때까지, 이 미확인 몬스터가 다른 전장으로 향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
그렇기에 털 몇 가닥을 잘라냄으로써 어그로를 끌어버린 칼튼 에거시는 착실하게 임무를 수행해 내는 중이라 할 수 있었다.
물론...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으아아아아아아악!]
쿠당탕탕탕...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마, 막아! 내 앞을! 아니 뒤를! 아무튼 막아! 으아아아악!]
콰당탕탕...
분노한 최상급 (중에서도 최상급으로 추정되는) 몬스터의 타겟이 된 인간.
그는 첼시의 파란색 외부 장갑이 완전히 흙색으로 물들 때까지.
북부 다르다넬 산맥의 대지 위를 쉬지 않고 굴러다녀야만 했다.
#2
오펠로 브롬과 10인의 드워프 오너가 펼치는 작전은 단순했다.
활로 무장한 5기의 기간트가 원거리에서 라비린토스의 유일한 약점이나 다름없는 눈을 노린다.
그리고 15미터짜리 장창으로 무장한 나머지 5기의 기간트는 사방에서 하체를 공략해 라비린토스의 움직임을 제한한다.
물론 이렇게 되면 접근전을 펼치는 5인의 오너는 산성독 방어를 위해 지속적으로 추가 마력을 소모해야만 했다.
때문에 일정 시간이 지나면 원거리 공격조와 근거리 견제조의 위치를 바꿔주어야만 효율적인 전투가 가능했다.
그리고 두 조의 교체 시간을 벌어주는 역할은 최강의 드워프 오너인 오펠로 브롬이 맡았다.
화르르르르르르륵
에키드나의 검에서 엄청난 크기의 불꽃이 뿜어져 나왔다.
이는 마법이 아닌 그가 익힌 검술의 특징에서 기인한 것.
어마어마한 화기를 내뿜는 검으로 인해 산성독이 무용지물이 되어버린다는 것이 그가 라비린토스를 마크하게 된 이유 중 하나였다.
[교대하겠습니다!]
[알았다!]
장창을 거둔 근접조가 교대를 위해 빠르게 라비린토스에게서 멀어졌고.
어느새 활에서 장창으로 무기를 교체한 채 달려온 원거리 공격조와 교차했다.
그리고 그들이 자리잡을 시간을 벌기 위해, 그간 소극적인 견제만을 유지해 왔던 오펠로 브롬이 대지를 박차고 뛰어오르며 라비린토스의 머리를 향해 불꽃의 검을 내질렀다.
촤르르르르르르르르르...
신경질적으로 길쭉한 혀를 날름거린 라비린토스의 몸에서 불길한 보랏빛 광채가 터져 나왔고.
이내 광채에 휩싸인 채 이빨을 드러낸 라비린토스의 머리와 오펠로 브롬의 대검이 격돌했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크윽!]
광채가 사라진 라비린토스는 머리가 4,5미터가량 뒤로 밀렸을 뿐 별다른 타격은 없는 듯했다.
쿠우우우우웅쿵쿵쿵쿵...
반면 충돌의 여파로 인해 허공으로 튕겨져 나온 오펠로 브롬의 에키드나는 적지 않은 충격을 받은 듯 간신히 착지에 성공한 뒤에도 연신 뒷걸음질치며 중심을 잡아야만 했다.
[상체 외부 장갑 파손율 : 11.7%]
[하체 외부 장갑 파손율 : 9.3%]
단 한 번의 격돌로 적지 않는 피해를 입기는 했지만.
그가 만들어낸 틈을 이용해 자리 이동을 마친 10기의 기간트가 어느새 라비린토스를 향한 견제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충격을 떨쳐내고 중심을 잡은 오펠로 브롬이 천천히 대검을 들어 올렸다.
‘나쁘지 않군. 이 정도면... 두세 번 정도는 더 가능하겠어.’
자신이 이 전장의 주인공이 아니란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늙은 드워프.
그는 묵묵히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이어나갈 뿐이었다.
#3
끼에에에에에에엑
지면을 향해 내리꽂히던 가디언 보스페로스가 쏟아지는 화살 세례를 견디지 못하고 경로를 변경했다.
하늘 위로 솟구쳐올라 화살이 닿지 않는 고도에서 성난 표정으로 지상을 내려다보는 최상급 몬스터.
놈의 시선에 담긴 것은 육중한 장갑을 지닌 10기의 기간트와 그 절반 정도의 두께에 지나지 않는 날렵한 몸매의 여성형 기간트였다.
11기의 기간트는 하나같이 거대한 활을 든 채 하늘 위를 겨냥하고 있었고.
활의 시위는 언제든지 그 힘을 발산할 수 있도록 팽팽하게 당겨진 상태였다.
라비린토스나 2족 보행 가디언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보스페로스 역시 마력으로 보호받는 단단한 털과 외피를 지니고 있었다.
게다가 마력을 이용해 일반적인 비행형 몬스터들은 불가능한 기동을 펼치는 것이 가능했기에, 어지간한 기간트의 화살 공격은 놈에겐 그리 큰 위협이라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상에서 돌아다니고 있는 수십의 강철 덩어리 중 유독 튀는 외형을 한 녀석이 쏘아대는 화살만큼은, 최상급 몬스터인 보스페로스로서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 기간트의 오너인 이파니는 상성상 천적(이쪽이)에 가까운 상대를 만난 덕분에, 다른 두 대륙급 강자들에 비해 훨씬 더 편안한 전투를 치르는 중이었다.
[지상으로 내려오지 못하도록 해야 해요. 이쪽으로 오는 건 몰라도, 다른 쪽으로 가는 건 무조건 막아야 합니다.]
바람의 정령을 다루는 데다, 본래부터 무기 슬롯 1번에 각인시켜 두었을 정도로 활을 즐겨 사용하는 이파니였다.
아르테미스에 장착된 정령력 증폭 마법진의 영향으로 크기와 힘이 두 배 이상 증가한 실라엔(바람의 상급 정령)이 기간트의 주위를 멤돌며 그녀의 전투를 보조하고 있었고.
거기에 최고의 드워프 장인이 제작하고 최고의 정령사이자 그의 스승인 대정령사가 직접 정령력 증폭술을 각인한 신궁 ‘에스페로(고대 엘프어 빛)’의 위력이 더해지자 최상급 몬스터인 보스페로스조차 지상으로 내려올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츠칵
슈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에스페로의 시위를 떠난 마력 화살이 빛살 같은 속도로 보스페로스를 향해 쏘아졌다.
실라엔의 힘과 활대에 각인된 정령력 증폭술이 시너지를 일으켰고.
이전까지와는 전혀 다른 위력의 공격이 완성되었다.
키에에에에엑
사정거리 밖이라는 생각에 안심하고 있던 보스페로스가 화들짝 놀라며 급격히 날개를 움직였지만.
마치 잠자리와 같은 말도 안 되는 후진 비행을 선보였음에도 불구하고.
퍼어억
순식간에 궤도를 수정하며 따라붙은 마력 화살이 왼쪽 뒷다리에 틀어박히고 말았다.
끼에에에에에에에에엑
길쭉하게 튀어나온 보스페로스의 입에서 고통에 찬 비명이 터져 나왔다.
다행히 날개를 꿰뚫리는 참사는 면한 덕에 추락하는 신세가 되지는 않았지만.
생전 느껴본 바 없는 고통에 겁을 먹은 보스페로스는 더더욱 고도를 높일 수밖에 없었다.
그 광경을 바라보던 이파니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위쪽을 겨냥하고 있던 활을 내렸다.
‘아무리 가디언이라고 한들... 날짐승이라면 에스페로의 먹잇감일 뿐이지.’
가디언 보스페로스를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높은 하늘까지 쫓아 버린 엘프 오너.
그녀는 자신의 활 에스페로의 새로운 먹잇감을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